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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1:04:10

피에트로 라바

피에트로 라바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유벤투스 FC 역대 주장
마리오 바를리엔
(1938~1942)
피에트로 라바[1]
(1942~1950)
카를로 파롤라
(1950~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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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라바의 수상 이력
{{{#!folding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파일:유벤투스 FC 로고(화이트).svg
유벤투스 FC 명예의 거리 헌정 50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름 국적 포지션 소속기간 출장경기 득점
피에트로 아나스타시(Pietro Anastasi) 이탈리아 FW 1968–1976 303 131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이탈리아 FW 1990–1995 200 115
로메오 베네티(Romeo Benetti) 이탈리아 MF 1968–1969
1976–1979
159 23
로베르토 베테가(Roberto Bettega) 이탈리아 FW 1969–1983 481 178
카를로 비가토(Carlo Bigatto) † 이탈리아 MF 1913–1931 233 1
잠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 이탈리아 FW 1946–1961 462 182
펠리체 보렐(Felice Borel) † 이탈리아 FW 1932–1941
1942–1946
307 161
세르조 브리오(Sergio Brio) 이탈리아 DF 1974–1990 378 24
잔루이지 부폰(Gianluigi Buffon) 이탈리아 GK 2001–2018
2019–2021
689 0
안토니오 카브리니(Antonio Cabrini) 이탈리아 DF 1976–1989 440 53
움베르토 칼리가리스(Umberto Caligaris) † 이탈리아 DF 1928–1935 198 0
마우로 카모라네시(Mauro Camoranesi) 아르헨티나/이탈리아 MF 2002–2010 288 32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이탈리아 MF 1969–1976 239 41
프랑코 카우시오(Franco Causio) 이탈리아 MF 1967–1968
1970–1981
447 72
존 찰스(John Charles) † 웨일즈 FW 1957–1962 178 105
잔피에로 콤비(Gianpiero Combi) † 이탈리아 GK 1921–1934 367 0
안토니오 콘테(Antonio Conte) 이탈리아 MF 1992–2004 419 44
안토넬로 쿠쿠레두(Antonello Cuccureddu) 이탈리아 DF 1969–1981 433 39
에드가 다비즈(Edgar Davids) 네덜란드/수리남 MF 1997–2004 235 10
알레산드로 델피에로(Alessandro Del Piero) 이탈리아 FW 1993–2012 705 290
루이스 델 솔(Luis del Sol) 스페인 MF 1962–1970 294 29
디디에 데샹(Didier Deschamps)[1] 프랑스 MF 1994–1999 178 4
안젤로 디 리비오(Angelo Di Livio) 이탈리아 MF 1993–1999 269 6
치로 페라라(Ciro Ferrara) 이탈리아 DF 1994–2005 358 20
주세페 푸리노(Giuseppe Furino) 이탈리아 MF 1969–1984 528 19
클라우디오 젠틸레(Claudio Gentile) 이탈리아/리비아 DF 1973–1984 414 10
욘 한센(John Hansen) † 덴마크 FW 1948–1954 187 124
파올로 몬테로(Paolo Montero) 우루과이 DF 1996–2005 278 6
파벨 네드베드(Pavel Nedvěd) 체코 MF 2001–2009 327 65
라이문도 오르시(Raimundo Orsi) † 아르헨티나/이탈리아 FW 1929–1935 194 87
카를로 파롤라(Carlo Parola) † 이탈리아 DF 1939–1954 340 11
안젤로 페루치(Angelo Peruzzi) 이탈리아 GK 1991–1999 301 0
잔루카 페소토(Gianluca Pessotto) 이탈리아 DF 1995–2006 366 3
미셸 플라티니(Michel Platini) 프랑스 MF 1982–1987 224 104
피에트로 라바(Pietro Rava) † 이탈리아 DF 1935–1946
1947–1950
330 15
파브리치오 라바넬리(Fabrizio Ravanelli) 이탈리아 FW 1992–1996 160 68
비르지니오 로세타(Virginio Rosetta) † 이탈리아 DF 1923–1936 315 16
파올로 로시(Paolo Rossi) † 이탈리아 FW 1973–1975
1981–1985
138 34
산드로 살바도레(Sandro Salvadore) † 이탈리아 DF 1962–1974 450 17
가에타노 시레아(Gaetano Scirea) † 이탈리아 DF 1974–1988 552 32
루시디오 센티멘티(Lucidio Sentimenti) 이탈리아 GK 1942–1949 188 5
오마르 시보리(Omar Sívori) † 아르헨티나/이탈리아 FW 1957–1965 253 167
알레시오 타키나르디(Alessio Tacchinardi) 이탈리아 MF 1994–2005 404 14
스테파노 타코니(Stefano Tacconi) 이탈리아 GK 1983–1992 337 0
마르코 타르델리(Marco Tardelli) 이탈리아 MF 1975–1985 375 51
모레노 토리첼리(Moreno Torricelli) 이탈리아 DF 1992–1998 230 3
다비드 트레제게(David Trezeguet) 프랑스/아르헨티나 FW 2000–2010 320 171
잔루카 비알리(Gianluca Vialli) 이탈리아 FW 1992–1996 145 53
지네딘 지단(Zinédine Zidane) 프랑스 MF 1996–2001 214 31
디노 조프(Dino Zoff) 이탈리아 GK 1972–1983 476 0

[1] 세리에 B로 떨어지고 선수들이 이적하고 감독인 카펠로도 레알로 가버린 상황에 취임하여 2006-07 시즌 세리에 B에서 우승을 하고 바로 팀을 승격시켰다. 그러나 선수 영입 권한으로 갈등을 빚고 사임하였다. 그 후로 몇 년을 삐걱거린 것을 보면 정말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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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前 축구감독
파일:pietro_rava.jpg
이름 피에트로 라바
Pietro Rava
출생 1916년 1월 21일
이탈리아 왕국 알레산드리아
사망 2006년 11월 5일 (향년 90세)
이탈리아 토리노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75cm | 체중 73kg
직업 축구선수 ( 레프트 풀백 / 은퇴)
축구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유벤투스 FC (1935~1946)
알레산드리아 칼초 (1946~1947)
유벤투스 FC (1947~1950)
노바라 칼초 (1950~1952)
감독 노바라 칼초 (1951~1952)
칼초 파도바 (1952)
카라레세 칼초 1908 (1953)
칼초 파도바 (1953~1954)
AC 쿠네오 1905 (1954~1955)
시멘탈몬차 (1955~1956)
UC 삼프도리아 (1956~1957)
팔레르모 FC (1957)
시멘탈몬차 (1958~1959)
알레산드리아 칼초 (1961~1963)
비엘레세 1902 (1963~1964)
국가대표 30경기 0골( 이탈리아 / 1935~1946)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선수 생활2.3. 감독2.4. 이후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3.2. 감독
4. 어록5. 여담6. 수상
6.1. 선수
6.1.1. 클럽6.1.2. 국가대표6.1.3. 개인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선수 출신의 축구 감독.

2. 생애[2]

2.1. 어린 시절

원래 그의 가족들은 알레산드리아 출신이 아니었지만 철도 공무원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잠시 알레산드리아에 있을 때 태어났다.

이후 토리노에서 성장한 라바는 측량을 배웠고 축구에 재능을 보여 유벤투스 FC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유소년 시절에도 라바의 재능은 파릇파릇해서 그의 상대팀은 선수 한 명을 더 둬야된다는 말도 나왔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라바가 처음 유벤투스 FC에 입단하던 1935년 무렵, 그의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었다.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하프백 등을 돌던 라바의 포지션을 정해준 사람이 바로 당시 유벤투스의 선수 겸 감독이자 대선배 풀백이었던 비르지니오 로세타였다. 로세타는 라바가 갖고 있던 레프트 풀백으로서의 잠재력을 간파해 라바를 레프트 풀백으로 정착시켰고 라바는 11월 3일,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라바가 데뷔할 때의 유벤투스는 더 이상 세리에의 맹주가 아니었다. 회장 에도아르도 아녤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유벤투스는 긴축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고 잔피에로 콤비,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 루이스 몬티, 라이문도 오르시 등 쟁쟁했던 선배들의 노쇠화와 은퇴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그래도 라바가 알프레도 포니와 함께 구축했던 풀백진은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1938~39 시즌에 유벤투스의 보드진이 급여 인상을 거부하자 라바는 은근히 태업성 플레이를 펼치기도 했다. [3] 이 여파로 유벤투스는 8위라는 어울리지 않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쳤다.
전 어렸을 때부터 내 유일한 사랑인 유벤투스를 위해 뛰었지만 그들(보드진)은 왜 저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을까요? 그래서 저는 모데나에서부터 파업을 결심하고 팔짱을 꼈습니다. 저는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때는 어려운 시기였고 우리 축구 선수들에게는 부가 아닌 영광이 있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피에트로 라바. 태업 당시를 회상하며.

이 상황은 이탈리아 축구 연맹에서 클럽의 경제적 어려움과 라바의 클럽에 대한 헌신을 확인하며 연맹의 중재로 해결되었다. 결국 라바는 1939년 12월 31일의 베네치아 FC전에서 복귀했고 1941~42년의 커리어 두 번째 코파 이탈리아 우승에 힘을 보탰다.

1946년, 유벤투스는 라바의 자리를 오스카 비치치(Oscar Vicich)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라바와 유벤투스의 관계는 심하게 악화되었다. 라바가 유벤투스를 떠나게 되자 많은 클럽들이 영입전에 뛰어들었고 승자는 알레산드리아 칼초였다. 하지만 비치치는 유벤투스에서 단 한 시즌만 뛰고 UC 삼프도리아로 이적했고 라바도 다시 유벤투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유벤투스에서 라바는 1949년부터 새로운 감독 제시 카버와 마찰이 일어나면서 전력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벤투스가 16년 만에 다시 스쿠데토를 차지한 순간, 그리고 라바의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스쿠데토를 차지한 시즌에 그는 정작 조연에 머물렀다.

1950년, 스쿠데토를 뒤로 하고 라바는 다시 유벤투스를 떠났다. AC 밀란의 영입 제안이 있었지만 비안코네리의 직접적인 경쟁자의 전력을 강화시킬 순 없어서 라바는 대신 노바라 칼초로 이적했고 이곳에서 파란만장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2.2. 국가대표

라바는 세리에 A에 데뷔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올림픽에 참가할 당시 라바는 20살로 파시스트 대학 그룹에 속한 학생이었지만 어떤 시험도 치르지 않은 채 올림픽에 출전했다.

하지만 라바의 대표팀 데뷔전은 영 좋지 않게 끝났는데 퇴장을 당했기 때문이었다.[4] 그래도 라바의 퇴장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미국에 1대0으로 승리를 거둬 계속 경기를 할 수 있었다. 라바는 올림픽의 모든 경기에서 유벤투스 FC 팀동료이자 풀백 파트너 알프레도 포니와 호흡을 맞추며 이탈리아의 우승에 공헌했다. 그렇게 라바와 포니는 1934년 월드컵에서 호흡을 맞췄던 알레만디 에랄도 몬첼리오의 풀백 조합을 대체해갔다.

1938년 월드컵에서도 노르웨이와의 첫경기를 제외하면 라바와 포니의 풀백진은 그대로 가동되었고[5] 이탈리아는 월드컵 2연패를 달성했다. 라바는 이 대회의 추억을 잊을 수 없지만 특히 브라질과의 4강전 헝가리와의 결승전을 꼽았다. 그는 브라질과의 4강전을 실질적인 결승전이자 가장 중요한 경기라 생각하고 임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결승전 당시 영국의 기자들은 이탈리아의 수비는 영국의 요새만큼 단단하다는 평을 남겼고 그 중심에는 라바가 있었다.

월드컵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 국가들의 모든 A매치는 중단되었고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라바의 마지막 A매치는 1946년 12월의 오스트리아전이었고 이탈리아가 3대2로 승리했다.

라바가 대표팀에서 출전한 30경기 중 이탈리아가 패배한 경기는 단 한경기에 불과하다.

2.3. 감독

선수 은퇴 이후 라바는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전 동료이자 후임 주장 카를로 파롤라와 스포츠 용품점을 경영했다.

노바라 칼초에서 선수 겸 감독직을 끝내고 라바는 칼초 파도바에서 1952년에 전업 감독으로 데뷔했다. 짧은 파도바에서의 생활 후에 라바가 카라레세 칼초 1908를 성공적으로 지도하자 파도바가 다시 라바를 데려왔다. 하지만 파도바가 강등 위기에 처하자 라바의 자리는 네레오 로코로 대체되었다.

쿠네오에서 팀의 성적은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라바는 긍정적인 경험을 쌓았고 이 경험은 시멘탈몬차에서 효과적인 역습 전술로 빛을 보았다. 1956년, 이 전술로 라바는 세리에 A UC 삼프도리아의 감독이 되었고 이것이 그의 감독 커리어 중 최고의 경력이었다. 하지만 팀의 회장과 갈등 끝에 시즌 종료 직전에 경질당했다.

그 이후에 라바는 주로 하부 리그 팀들의 감독을 맡았다.

2.4. 이후

감독에서 은퇴한 후 라바는 리볼리에서 운전학원을 운영했다.

1998년 심장마비로 쓰러진 이후 라바는 죽을 때까지 알츠하이머 병으로 고생했다. 2006년, 라바는 토리노의 마티니 병원에서 낙상 후 대퇴골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한 채 영면에 들었다.

라바의 무덤은 토리노의 파르코(Parco) 공동 묘지에 있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카를로 펠리체 키에사의 평에 의하면 라바는 피지컬적으로 뛰어나고 헤딩에 능하며 두 발을 모두 잘 쓰고 예상 가능한 수비수였다고 한다. 그는 깔끔한 몸짓과 활기찬 움직임으로 상대 공격수들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풀백이었다. 또한 투쟁심도 있어서 가끔 난투극이 벌어지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난투극들 중 특히 유명한 경기는 1947년의 데르비 디탈리아였는데 라바는 이 경기에서 인테르의 공격수 베니토 로렌치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가격의 이유는 로렌치가 보니페르티에게 침을 뱉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작 로렌치는 보니페르티에게 침을 뱉지 않았었다.

라바가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낸 유벤투스 FC에서도 라바를 유벤투스 명예의 거리 50인에 헌정하는 등 라바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풀백
비토리오 포초
라바는 공격수들에 매우 아름답고 격렬한 열정으로 맞대응한다. 칼리가리스를 연상시킨다. 또한 빠른 시간 안에 최대의 슈팅 파워를 낼 수 있고 종종 하프백들을 생략한 채 공격진에 침투하기도 한다. 포니보다 라바가 더 침착하고 통제된 스타일이다. 둘은 기술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였다.
에토레 베라(Etorre Berra, 이탈리아의 기자. 칼리가리스와 포니, 라바를 비교하면서)
라바는 공을 매우 잘 찼고 가차없이 풀백이 해야 할 몸싸움에 참여했다. 그는 점프도 잘 뛰었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평정심을 놓고 보면 그의 대표팀 선배들인 칼리가리스와 알레만디를 능가한다.
알베르토 파자노(Alverto Fasano, 이탈리아의 기자)
공중의 큰 한 스푼(Grandi Cucchiaiate Nell'aria)
줄리오 나심베니(Giulio Nascimbeni)
유벤투스의 상징이자 역사를 만든 사람 중 한 명
조반니 아녤리

3.2. 감독

라스탐파의 1958년 기사에 의하면 감독으로서의 라바는 다소 거칠었던 선수 시절과는 다르게 극도로 세심했다고 한다. 성급한 혁신과는 거리가 멀었고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55~56시즌에 시멘탈몬차를 이끌 때 라바는 선수비 후역습 전술을 썼기 때문에 실용성과 스피드를 중점에 뒀다.

4. 어록

나는 강력한 왼손잡이 선수였고 피치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피에트로 라바. 자신의 현역 시절 플레이를 회상하면서

5. 여담

6. 수상

6.1. 선수

6.1.1. 클럽

6.1.2. 국가대표

6.1.3. 개인



[1] 1946~47 시즌에 라바는 알레산드리아로 이적했지만 유벤투스는 공식적으로 주장 임명을 하지 않았다.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태업의 표면적인 이유는 약혼이었다. [4] 라바는 이탈리아 대표팀 역사상 처음으로 심판에 의해 퇴장당한 선수가 되었다. [5] 첫경기 노르웨이전만은 라바와 몬첼리오가 호흡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