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몬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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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10대 |
유벤투스 FC 역대 주장 | ||||
비르지니오 로세타 (1929~1935) |
→ |
루이스 몬티 (1935~1938) |
→ |
마리오 바를리엔 (1938~1942) |
루이스 몬티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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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아르헨티나 /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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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몬티 Luis Mon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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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본명 |
루이시토 펠리페 몬티 Luisito Felipe Mon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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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1년 5월 15일 |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
사망 | 1983년 9월 9일 (향년 82세) | |
아르헨티나 에스코바르 파르티도 | ||
국적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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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69cm / 체중 73kg | |
직업 |
축구선수 (
하프백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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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191919><colcolor=#000,#e5e5e5> 선수 |
CA 우라칸 (1921) CA 보카 주니어스 (1922) CA 산 로렌소 (1922~1930) 유벤투스 FC (1931~1938) |
감독 |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1939~1940) 유벤투스 FC (1942) AS 바레세 (1942~1943) AS 바레세 (1944) 아탈란타 BC (1945~1947) 비가바노 칼초 (1947) CA 우라칸 (1947~1948) AC 피사 (1949~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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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6경기 5골 (
아르헨티나 / 1924~1931) 18경기 1골 ( 이탈리아 / 1932~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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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의 前 축구인.루이스 몬티는 축구 역사에서 상당히 진귀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다. 바로 2개의 국적으로 한 번씩 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아본[1] 유일한 선수. 그가 바로 몬티이다.[2]
2. 생애
2.1. 출생
루이스 몬티는 1901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로마냐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은 축구와 내력이 깊었는데 그의 동생 엔리케 몬티를 포함하여 삼촌 후안과 그의 아들 안토니오와 마리오, 또 다른 사촌인 루이스 페드로, 에우세비오 등이 모두 프로축구 선수였다.2.2. 아르헨티나, 첫 월드컵
그는 20세였던 1921년, 삼촌 후안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의 CA 우라칸과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 이듬해인 1922년, 그는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했지만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곧 동생 엔리케와 함께 CA 산 로렌소로 팀을 다시 옮기게 된다. 이곳은 몬티의 일족과 인연이 깊은 클럽이었고[3] 여기에서 몬티는 안정을 찾게 된다. 또한 몬티는 1924년 8월 10일,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에서 처음으로 국제 경기에 데뷔한다. 이윽고 그는 대표팀의 살림꾼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1927년 페루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에서 몬티가 속한 아르헨티나는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는 4개의 팀만이 참가해서 풀리그로 우승을 다투는 방식이었는데 아르헨티나는 3전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듬해인 1928년 몬티는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한다. 아르헨티나는 손쉽게 결승에 올랐고 숙명의 라이벌인 우루과이와 결승에서 맞대결을 펼친다. 역시 라이벌전답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결승전에서 1대1로 비기고 3일 뒤 재경기를 치렀다. 몬티는 재경기에서 한 골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1대2로 패배하고 우루과이의 올림픽 2연패를 막지 못했다.
올림픽 2연패와 독립 100주년이라는 배경에 힘입어 우루과이는 첫 월드컵 개최국이란 영예를 얻는다. 초대 월드컵에 출장한 몬티. 라이벌의 심장에서 우승하겠다는 열망에 가득찬 몬티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성난 황소였다.
초대 월드컵의 최초 득점자 뤼시앵 로랑이 몬티를 회상하자면...
몬티가 거친 선수라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몬티는 우리가 자신을 화나게 해서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르죠.
뤼시앵 로랑[4]
뤼시앵 로랑[4]
첫 경기에서 프랑스는 아르헨티나에게 1대0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경기는 몬티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는 그 경기에서 프랑스 선수 2명을 부상 입혔고 막판에는 양 팀 선수들끼리 주먹다짐까지 오고가는 흉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여기에서도 아르헨티나는 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하게 된다. 아르헨티나를 향한 스포트라이트는 초대 월드컵 득점왕인 기예르모 스타빌레에게 집중되었지만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프리킥 결승골을 넣는 등[5] 몬티의 활약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또 다시 우루과이였다. 적의 심장인 몬테비데오에서 열리는 가장 큰 경기. 몬티는 그곳에서 라이벌을 꺾는 복수를 상상하며 출전했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4대2로 다시 최고의 승부에서 아르헨티나를 꺾으며 자신들이 세계 최강이라는 사실을 다시 각인시켰다. 이에 화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루이스 몬티를 비난했다고 한다. #
2.3. 이탈리아 그리고 월드컵 우승
1931년 몬티는 유벤투스 FC와의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당시는 남미의 열악해진 경제 사정으로 인해 남미 선수들의 유럽 진출이 잦았다. 같은 날에 A매치에 데뷔한 아르헨티나 출신 공격수인 라이문도 오르시는 이미 유벤투스에 소속되어 이탈리아 국적까지 따놓은 상태였다. 몬티도 뒤이어 이탈리아에 귀화 선언을 한다. 이 이적의 대가로 몬티는 매달 5천 달러를 받았고, 구단이 토리노 근처에 집도 마련해주었다.
- 결국 루이스 몬티 등이 빠져서 뛸 선수도 모자라고[6] 팀 분위기도 엉망이 된 아르헨티나는 결국 예선 첫 경기에서 당시 기준이라 해도 한 수 아래[7]의 스웨덴에게 패하고 탈락했다. 사실 아르헨티나가 탈락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지금까지도 거의 정보가 없는 2진급의 선수들만 내보냈기 때문이다.
1931-32 시즌 유벤투스 선수단 |
- 1934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의 22명 멤버 중 유벤투스 소속 선수는 9명이었다. 22명의 선수 중 5개의 전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5명이었는데 이 중 콤비, 몬티, 오르시 3명이 유벤투스 소속이었다. 게다가 모두 최고 중요한 포지션의 알짜배기 선수들이니 당시 유벤투스가 이탈리아의 대표팀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유벤투스 선수들이 대거 소속되어 있던 이탈리아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데 까지 성공했으니 유벤투스 팬들의 기쁨은 매우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유벤투스는 아직도 2위권 팀인 양 밀란보다 무려 10회 정도 더 많은 세리에 최다우승 기록을 갖고 있다.
몬티가 1934년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인 경기는 단연 오스트리아와의 준결승전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이탈리아의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위력적인 공격수였던 마티아스 신델라가 뛰고 있었고, 몬티에게 신델라를 맨마킹하라는 비토리오 포초감독의 특명이 떨어진다. 이 경기에서 몬티는 특유의 근성과 파울을 겸비하여 신델라를 경기장에서 지워버리는데 성공했고, 경기는 같은 아르헨티나에서 귀화한 엔리코 과이타의 결승골로 승리를 거두고 만다.[8]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는 연장 혈투 끝에 체코슬로바키아를 2대1로 제압하고 줄리메컵을 들어 올리게 된다.
2.4. 하이버리의 전투 그리고 이후
하지만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우승했어도 축구의 종주국인 잉글랜드는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월드컵 챔피언인 이탈리아와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와의 A매치는 대단한 빅게임에 틀림없었다. 이 경기는 1934년 11월 14일 런던의 하이버리[9]에서 열렸는데 잉글랜드가 이탈리아를 3대2로 꺾었다. 몬티는 경기 시작 2분 만에 잉글랜드의 공격수 테드 드레이크와 충돌하여 오른발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많아진 나이로 인하여 회복이 더뎌졌고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에는 2번 밖에 출전하지 못한다.1950년 이후에는 감독 생활도 그만 두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옮겨서 생활했다. 그리고 1978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 대표팀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몬티는 1983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몬티의 포지션은 원래 수비수였다. 하지만 그는 경기 내내 경기장 곳곳을 지치지 않고 뛰어다녔고 규칙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강력한 태클을 포함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상대팀 공격수를 막아야 직성이 풀리는 선수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엄청난 체력을 자랑하는 선수라는 뜻으로 붙여진 도블레 안초[10]였다. 또한 1920년대 중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 팀은 2-3-5라는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극단적인 공격형 전술을 사용했고, 몬티는 중간 3명의 가운데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로 이 센터 하프자리에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지막지한 승부욕과 터프함 그리고 스테미너를 선보이며 상대편 공격수나 감독들에게 기피대상 1호로 손꼽혔다. 게다가 공격 시에는 정확한 패스로 공격의 물꼬를 트는 역할도 같이하였기 때문에 몬티를 데리고 있는 감독은 아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을 것이다.비록 30년대 축구에서는 앞의 3명까지 묶어 총 5명을 수비수로 간주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몬티는 현대 축구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몬티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감안한다면 몬티는 도살자라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비형 미드필더 계보[11]를 열어젖힌 선수라 할 수 있다.
건장한 체격, 천성적으로 태클을 한다. 단단한 수비로 무장한 선수.
찰스. F. 처치
찰스. F. 처치
아웃사이드 플레이어를 어떻게 보좌하는지, 다이렉트 패스는 어떻게 하는지 등 열린 시야를 가지고 있다.
비토리오 포초
비토리오 포초
게임의 엔진. 몬티는 무섭도록 단단한 수비와 롱패스로 공격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선수이다. 메아차와 페라리의 공격 라인업이 되는 것 보다는 그를 보좌한다.
4. 뒷이야기
- 몬티가 이탈리아에 온 후에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처음부터 유벤투스 멤버들과 잘 맞지는 않았다. 몬티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에는 몸무게가 15파운드가 늘어서 왔었던 것. 첫 경기에서 골을 넣어 그럭저럭 데뷔를 했지만 그 이후에는 폼을 잃어 한동안 고생을 좀 했다. 그래서 다시 다이어트를 하고 나서 제 폼을 찾았다. 몬티는 다이어트를 위해 매일 스투피니기 거리를 뛰었는데 하루에 세 벌의 울 스웨터를 준비할 정도로 몸관리에 신경을 썼다. 살을 뺀 이후에도 그는 일찍 일어나 매일 아침 트랙을 여섯 바퀴를 뛰었다고 전해진다.
- 스키아비오와의 악연이 유명하다. 몬티의 세리에 이적 이전인 1929년 8월 15일, 아르헨티나로 투어를 간 볼로냐 FC 1909는 CA 산 로렌소와 경기를 했고 해당 경기에서 스키아비오와 몬티는 몇 번 말싸움을 벌였다. 이후 몬티의 세리에 A 이적으로 이들은 1932년 5월 1일 다시 맞붙었고, 전반 44분 몬티가 스키아비오를 때려 스키아비오는 기절했다 30분 후 깨어났다. 이후 이들은 대표팀 감독 포초의 노력으로 화해한다.
- 몬티는 신델라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월드컵 이후 다시는 그와 플레이하기를 원치 않았다고.
- 1953년 7월. 몬티는 범죄에 잠시 연루되기도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로사리오라는 사기꾼이 소규모 사업체에 사기를 치고 체포되면서 자신이 루이스 몬티라고 주장했던 것. 그는 상처를 보여주면서 하이버리의 전투에서 입은 상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짜 몬티가 등장했고 감옥으로 갔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 CA 우라칸 (1921)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21
- CA 산 로렌소 (1922~1930)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23, 1924, 1927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1]
국가대표팀 동료
아틸리오 데마리아도 몬티와 같이 2회 연속 월드컵 결승전을 치른 선수이다. 하지만 두 번 다 후보 선수여서 피치를 밟지는 못했다.
[2]
현재는 특정한 성인 국가대표팀으로 피파가 주관하는 경기에 한 번이라도 나가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다시는 국적을 바꿀 수 없다.
[3]
위에서 소개한 친척들은 거의 산 로렌소에서 뛴 경험이 있다.
[4]
출처는 다큐멘터리 피파 월드컵의 전설.
[5]
이것이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첫 득점이었다.
[6]
루이스 몬티뿐만 아니라 왼쪽 윙포워드로 뛰면서
1934년 월드컵 결승전의 동점골을 성공시킨
라이문도 오르시, 역시 같은 월드컵 4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엔리코 과이타 등도 몬티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떠나 이탈리아로 귀화했다. 그나마 번개발로 악명높은
기예르모 스타빌레마저 이 월드컵은 불참했다.
[7]
아르헨티나는 193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했고 실제로도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아주 절대적인 세계최강 우루과이의 유일하게 라이벌에 근접한 실력을 갖췄었다. 물론 지금의 우루과이는 그때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당시의 우루과이는
끝판왕 그 자체였다. 실제로 2010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준결승에 진출하자
디에고 포를란에게 기자들이 벌떼같이 몰려와서 한 질문이 이것! 첫 월드컵 당시의 우루과이와 지금의 우루과이 중에 어느 팀이 더 강력합니까?
[8]
사실 이탈리아가 이 시합에서 승리한것은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지는데 불과 5개월 전의 시합에서 이탈리아는 홈에서 오스트리아에게 4대2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5개월 전의 경기에서 오스트리아에는 신델라도 없었다. 이 경기로 인해 유벤투스와 이탈리아의 레전드 칼리가리스는 국대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9]
아스날의 옛날 홈구장
[10]
Doble ancho. 뜻은 두개의 날개
[11]
네스터 로시,
안토니오 라틴, 마티아스 알메이다,
페르난도 레돈도,
에스테반 캄비아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등
분류
-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 인물
- 1901년 출생
- 1921년 데뷔
- 1938년 은퇴
- 1983년 사망
- 심장마비로 죽은 인물
-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인
- 아르헨티나의 남자 축구 선수
- 이탈리아의 남자 축구 선수
- 아르헨티나의 남자 축구 감독
- 이탈리아의 남자 축구 감독
- CA 우라칸/은퇴, 이적
- CA 보카 주니어스/은퇴, 이적
- CA 산 로렌소/은퇴, 이적
- 유벤투스 FC/은퇴, 이적
-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역대 감독
- 유벤투스 FC/역대 감독
- 바레세 칼초/역대 감독
- 아탈란타 BC/역대 감독
- CA 우라칸/역대 감독
- 피사 SC/역대 감독
- 아르헨티나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참가 선수
- 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
- 아르헨티나의 코파 아메리카 참가 선수
- 1927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페루 참가 선수
- 아르헨티나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복수의 대표팀에서 뛴 축구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