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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9:01:38

오스카 쉰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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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6위 7위 8위 9위 10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1위~100위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돌프 콜핑 루트비히 판 베토벤 헬무트 콜 로베르트 보쉬 다니엘 퀴블뵈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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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99><colcolor=#fff> 오스카 쉰들러
Oskar Schindler
파일:오스카쉰들러프로필.jpg
출생 1908년 4월 28일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비타비
(現 체코 파르두비체주 스비타비구 스비타비)
사망 1974년 10월 9일 (향년 66세)
서독 니더작센 힐데스하임
묘소 이스라엘 예루살렘 시온 산 가톨릭 프란체스코 공동묘지
직업 기업인
정당 주데텐 독일인당 (1935~39)

(1939~45)
무소속(1945~)
부모 아버지 한스 쉰들러
어머니 프란치스카 루저
배우자 에밀리 쉰들러 (1928년 결혼)
자녀 2명
종교 가톨릭
명예칭호 열방의 의인

1. 개요2. 생애3. 그에 대한 왜곡4. 기타5.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Der Unvergessliche Lebensretter 1200 Verfolgter Juden
박해받았던 1200명 유대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
예루살렘에 위치한 오스카 쉰들러의 묘비명.
이스라엘, 그것도 예루살렘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이다.

독일계 체코인 사업가. 영화 〈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한 표기는 '오스카어 신들러'.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던 나치 독일 휘하에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모든 재산을 바쳐서 유대인 1,200명의 목숨을 구원한 업적으로 유명하며 이러한 그의 일화는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로 나왔다. 수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해준 의인이기는 하지만 생전에 파티, 여자를 좋아하는 방탕하고 쾌락을 중시하는 속물의 전형으로, 아내 외에도 애인이 여럿 있었던 오점 역시 존재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더 의의가 있는 것이, 광기가 몰아치던 나치 독일에서 목숨을 걸고 유대인 1200명을 구한 인물이 흔히 생각하는 '영웅적인 사람'이나 '특별한 선인'이 아닌, '부패하고 속물적인 한 기업인'이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1908년 4월 28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비타비(Svitavy) 지방[1]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 뒤 스비타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쉰들러 일가는 16세기에 빈에서 모라비아로 이주한 독일/오스트리아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1935년에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인 ' 주데텐 독일인당(Sudetendeutsche Partei)'에 가입, 활동하면서 독일 국방부 첩보부와 접촉하여 간첩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도 정보를 독일 측에 누설했다. 이 혐의로 체코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때마침 뮌헨 협정이 체결되고 체코가 독일에 합병당하면서 형벌은 중지되었다.[2]

이후 1939년 2월에 나치당에 자원 입당하였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같은 해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뒤 점령하자 한밑천 챙겨보려는 목적으로 폴란드로 갔으며, 10월에는 나치 독일로부터 법랑 용기를 만들고 있던 유대인 소유의 공장을 불하받았다. 이 공장은 점점 확대되어 45,000m² 부지에 8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거대한 군수 공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쉰들러는 나치당 친위대 슈츠슈타펠로부터 유대인 노동자를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강제 노동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들을 차출해 공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쉰들러는 이 특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어린이나 여성, 대학생들을 숙련된 금속공이라 속이고 자신의 공장에 데려와 은밀히 보호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암시장을 이용해서 모자라는 물자를 조달하거나 유대인을 우대해 뉘른베르크 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받았으나 돈, 보석, 예술 작품 등을 뇌물로 바쳐서 무마시켰다. 그는 뇌물로 바친 물품들을 장부에 꼼꼼히 정리해 두었는데, 악명 높은 게슈타포를 매수해야 하는 만큼 아프베어 장교라는 권위나 인맥빨로 어르고 달래는 것 외에도 정말 어마어마한 액수의 물품을 뇌물로 바쳐 구워삶았다.

1944년에 소련군의 진군으로 동쪽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많은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쉰들러는 약 1,100여 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목록을 작성하고, 자신의 고향인 스비타비 지방에 군수 공장을 세운 다음 이들을 이곳으로 모두 빼돌리는 식으로 약 1,200명을 구해내고, 목록으로 차출했던 여성 유대인 근로자들이 행정 착오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자 이들을 다시 데려오면서 아우슈비츠 쪽에서 약 150명 정도의 장정을 추가로 구출했다. 그러고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소모해 가며 약 7개월간 이들을 보호했다.

분명 그는 원래 물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성향이 더 강한 사람이었고, 나치 독일에 동조한 부패한 기업가였다. 애초에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직접 노동자로 끌어들인 것도 그저 돈을 수월하게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데려오고 난 이후 이들을 점점 더 인간적으로 대우해 주더니, 결국은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어 가며 나치로부터 보호하기까지 한다. 서서히 그의 행동이 단지 돈벌이가 목적이라고 설명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수백만 마르크에 달하던 자신의 재산을 모두 소모해 가며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힘썼다. 어찌보면 속물주의적인 탐욕에서 시작된 행위가 쉰들러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은 계기가 된 셈이라 볼 수 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종전 후 동유럽이 공산화되고 탈나치화되면서 그가 소유하던 공장들은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폴란드에 몰수당했다.[3] 기업가에서 백수가 된 그는 전후 서독으로 이동해 몇 가지 사업을 시작했지만 모두 파산한 데다 기존에 유대인들을 구출하면서 막대한 재산을 소모했고 전쟁 말기엔 공장도 적자였던 탓에 소련군이 수용소까지 접근했을 때에는 재산이 거의 남지 않았다. 다행히도 쉰들러에 의해 목숨을 건진 유대인들이 여러 도움을 줘서 근근이 살 수준은 되었다고 한다. 전후 쉰들러 부부는 서독으로 이동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 했으나 쉰들러의 나치당 활동 경력 때문에 거절당했고, 1949년에 대신 아르헨티나에 가서 살았다. 이후 1958년에 오스카만 독일(서독)로 돌아갔고, 1964년에 심장마비로 입원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유대인 보호 위원회'에서 병원비로 15,000달러를 기부하였다.

1962년에 쉰들러의 이름을 딴 나무가 야드바셈의 거리에 자리잡았고, 1965년 11월 5일에는 독일 정부로부터 '제 1등 공로훈장'을 받았다. 1993년에는 이스라엘 야드바셈에서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4]에게 열방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후 1974년 10월 9일 서독 힐데스하임에서 생활고로 인해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예루살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는 유대인들의 성지인 시온 산에 있는데, 쉰들러는 그곳에 묻힌 유일한 나치 당원이다. 아내 에밀리 쉰들러는 계속 아르헨티나에서 살다가 2001년 7월에 독일로 돌아왔지만 3개월 뒤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었다. 2008년 4월 10일에 쉰들러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독일에서 우표가 발행되었다.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사람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쉰들러를 추모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독일인 등 유대인이 아닌 인물들도 그를 위인으로 여긴다. 상술했듯 과거 매국노 행적으로 인해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좀 안 좋게 보는 곳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3. 그에 대한 왜곡

사실 쉰들러는 본인의 의지로 유대인을 구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을 부려먹기 위해 빼돌린 것뿐인데, 이게 졸지에 유대인들을 살린 게 되어 영웅 취급을 받았다는 주장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 그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쉰들러는 공장에 온 유대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것으로 술을 사 먹었다.
* 쉰들러는 호색한인 데다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 쉰들러의 행동은 자신의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 쉰들러가 유대인을 탄압한 것을 본 증인들이 있다.
*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대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하고 자신은 도망쳤다.

하지만 바로 아래의 반박에 나와 있듯이, 이 주장들은 전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위의 주장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온 것인데, 애초에 이 프로그램은 흥미 위주 프로그램이다 보니 내용에 신빙성이 거의 없다. 참고로 쉰들러가 구해준 당사자 유대인들은 전쟁 이후에도 쉰들러에게 고마워하며 쉰들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진1 사진2

4. 기타

5. 같이 보기


[1] 현재 체코 파르두비체주에 속한 스비타비구 스비타비시이다. [2] 체코슬로바키아 뮌헨 협정 체코 합병 이후 많은 이들이 탈출했고,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망명정부를 세워 연합군에 가담한 승전국이었으니 이들 입장에서 오스카 쉰들러는 매국노로 보일 수도 있으며, 그를 나쁘게 생각하는 여론도 존재한다. 따라서 체코 슬로바키아 두 나라에서 오스카 쉰들러를 함부로 언급하면 봉변을 겪을 수도 있다. 다만, 이 두 나라에서도 후술할 영웅적인 행적때문에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건 아니고, 되려 자국의 위인으로 숭앙하는 여론도 종종 있다. [3] 그러나 나치의 잔재라며 철거되지는 않아서 현재도 그가 운영하던 크라쿠프의 에나멜 공장은 쉰들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폴란드 크라쿠프 Lipowa 4에 위치해 있고 입구에는 그가 구한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4] (Emilie Schindler, 1907~2001). 오스카 쉰들러의 아내로 1928년에 오스카와 결혼했고, 그가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동조했으며,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직접 출연했다. [5] 쉰들러가 돈과 귀중품을 빼앗고 그걸 나치에게 뇌물로 주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럴 바에야 자기네들이 뺏어가는 게 더 이득이다. 어차피 쉰들러는 단지 공장주 정도밖에 안 되니 나치들이 뺏어가도 뭐라 할 수 없다. [6] 쉰들러 리스트 영화에서도 좁은 열차 화물칸에 갇혀 더위와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유대인들 보고는 넌지시 돈을 쥐어주며 나치 병사들에게 저놈들에게 물을 쏴보는건 어때? 하면서 구슬리고 병사들은 장난처럼 낄낄대며 소방호스로 화물칸에 물을 끼얹는 장면이 나온다. [7] 만약 소규모 사업가에 불가한 쉰들러조차 이런 식으로 유대인을 구워삶아 소련군과 싸우게끔 할 수 있었다면 독일에선 진작에 유대인으로만 구성된 부대를 만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