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아담스'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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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아담스 Bryan Adams OC[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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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본명 |
브라이언 가이 애덤스 Bryan Guy Adams |
출생 | 1959년 11월 5일 ([age(1959-11-05)]세) |
캐나다 온타리오주 킹스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캐나다 자치령| ]][[틀:국기| ]][[틀:국기| ]])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2cm |
학력 | Argyle Secondary School (중퇴) |
직업 | 음악가, 방송인, 사진작가, 사회운동가, 프로듀서 |
포지션 | 보컬, 기타, 베이스 기타, 피아노, 하모니카 |
데뷔 | 1980년 정규 1집 앨범 'Bryan Adams' |
활동 | 1976년 ~ 현재 |
가족 |
아버지, 어머니 남동생 브루스 아담스 배우자 알리시아 그리말디(2009년 결혼~현재) 장녀 미라벨라 버니 아담스(2011년 4월생) 차녀 룰라 로시리아 아담스(2013년 2월생) |
링크 |
1. 개요2. 커리어
2.1. 어린시절, 데뷔 (~1980)2.2. 초창기(1980~1983)2.3. "Reckless"의 대성공(1984~1986)2.4. 5집 Into the Fire의 실패, 월드투어 (1986~1990)2.5. 제2의 전성기 (로빈후드 OST, 6집 Waking Up the Neighbours, 삼총사 OST)2.6. 최초의 내한공연, 또다른 OST 2.7. 7집 "18 till I die" 그리고 마무리된 미국에서의 전성기 2.8. MTV Unplugged, 계약문제 그리고 맞이한 2000년대2.9. 2001~2007 - 미니멀해졌으나 어쨌든 유지한 록스타의 명성2.10. 2008년 11집, 계속되는 투어, 부업들(2008~2014)2.11. 13집 "Get Up", 14집 "Shine a Light"을 통한 생존신고(2015~2019)2.12. 2020년대 활동 (Black lives Matter 운동, 15집 "So Happy It Hurts" )
3. 음악성4. 디스코그래피5. 여담[clearfix]
1. 개요
캐나다의 가수, 사진작가, 사회운동가이다.가수로서 안정적인 고음역대와 댄디하고 수려한 외모, 허스키한 목소리가 강점인 락커로서, 기본적으로 파워발라드, AOR(Adult Oriented Rock)이 주장르이다. 1980-90년대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고 빌보드 핫 100 1위 4곡[2]을 비롯하여 20개 이상의 빌보드 TOP 40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으며, 2023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앨범 누적 판매량 1억장(싱글 포함)을 기록한 스타이다. 캐나다 음악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바 있으며 지금도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캐나다를 대표하는 명실공히 '국가대표급' 남자 가수 중 한 명이다.
영화음악에도 많은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2022년까지 그래미 어워즈를 비롯하여 아카데미 영화음악(주제가) 부분, 골든글러브 영화음악 부분 등에 총 15번이나 후보에 오른 바 있다. 특히 록앤롤 가수로서는 드물게 1990년대에 발표한 OST 타이틀곡은 모두 아카데미 주제가 후보에 오르는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음악 활동 이외에도 사진작가[3], 사회운동가[4]로도 활동 중이다. 이미 1980년대부터 수많은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거나 스스로 개최하기도 했으며 본인의 사진 작품이나 음악 등을 통해 여러 사회적인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2. 커리어
2.1. 어린시절, 데뷔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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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브라이언 아담스 |
캐나다 온타리오주 킹스턴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어릴 적에는 그의 부모님을 따라서 세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1973년 가족과 다시 캐나다 밴쿠버에 정착하여 살았다. 어렸을 때 레드 제플린, 롤링 스톤즈같은 록앤롤에 빠지면서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바로 나이트클럽에서 연주를 시작하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을 시작한 관계로 강아지 사료 판매나 접시닦이 등을 병행하며 아마추어 밴드의 보컬로 활동했다. 당시 활동한 밴드명은 "Shock", "Sweeny Todd"였으며 1977년 "Roxy Roller"라는 곡을 빌보드 핫 100에 99위로 올리면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 활동명은 본명인 "Bryan Guy Adams"를 사용했고 Sweeny Todd 밴드 소속으로 1장의 앨범을 더 내고 18세부터는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5]
그러다가 향후 전성기를 함께하게 되는 친구이자 인생의 파트너인 Jim Vallance를 만나게 된다.악기점에서 우연히 의기투합하게 된 둘은 이후 아담스가 1978년 A&M 레코드사에 발탁되어 데뷔하면서 같이 음악을 만드는 파트너십을 발휘한다. 나중에 둘은 1980년대 들어 보니 타일러, 키스, 티나 터너 등의 광범위한 아티스트의 작곡에 참여하며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아담스는 계약금은 거의 없는 1달러라는 말도 안되는 노예계약으로 A&M 레이블에 묶이게 되고, 무명인 아담스는 앨범의 홍보를 해줄 수 있는 것에 만족하여 1집을 준비하게 된다. 불공정한 계약이든 어쨌든 A&M 레코드는 아담스의 댄스곡인 "Let Me Take you Dancing"의 리믹스 버전을 발매하면서 가수활동을 지원해주기 시작했고 셀프 타이틀 앨범인 "Bryan Adams"를 1980년에 발매한다.
2.2. 초창기(1980~1983)
천신만고 끝에 1980년 발매한 1집 셀프타이틀 앨범은 지금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반응이 없이 지나갔고[6], 포기하지 않고 근성을 발휘하며 2집 "You Want it You Got it"( 빌보드 200 118위)을 1981년에 발표한다. 다행히도 1집에 비해 반응이 오기 시작하여 이 앨범에서 "Lonely Night"가 US Album Rock Chart에서 3위에 오르고 "Fits Ya Good"이 동 차트 15위에 오르면서 소소하게 인지도를 쌓아갔다.[7] 이후 아담스는 포리너, 킹크스 같은 밴드의 오프닝 무대를 서면서 캐나다를 비롯한 북미에서 본격적인 활동 및 라이브 공연을 시작한다. 이 당시 아담스는 Side-B 곡들을 써준 대가로 유명 밴드의 오프닝 무대를 통해 홍보의 기회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여러 공연과 세션보컬로 참가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며 1983년 3집 "Cuts Like a Knife"를 발표하는데, 이 앨범이 빌보드 200 최고 8위까지 오르며 Break Out 앨범(출세작)이 되어 아담스는 무명에서 벗어나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록발라드로 리드싱글인 "Straight From the Heart(US 10위)와 앨범의 주제를 정확히 보여주는 타이틀곡"Cuts like a Knife(US 15위), This Time (US 24위)이 3곡을 빌보드 핫 100 TOP40에 올리며 앨범은 플래티넘 (100만장)을 획득했다. Allmusic 에서는 이 앨범에 별 4.5개를 주며 호평했으며 아담스의 앨범 중 가장 평가가 좋은 앨범이다. 고향인 캐나다에서는 이 앨범의 성공으로 캐나다의 그래미인 주노어워드 3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가장 큰 히트곡인 "Straight from the Heart"는 아담스의 향후 발라드의 색채를 어느 정도 잡아준 초기작으로 보니 타일러가 같은해에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기가수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어 기세를 몰아 4집 "Reckless"를 발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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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첫 히트곡 Straight From the Heart |
2.3. "Reckless"의 대성공(1984~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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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첫싱글 "Run to You"}}} |
아담스는 1984년 11월에 1년의 공백 끝에 4집 앨범 "Reckless"를 발표한다. 노래 전반에 깔리는 기타리프가 인상적인 리드싱글 "Run to You(최종 US 5위)"가 NBC 시트콤 "Double Trouble"에서 홍보되면서 차트에서 계속해서 상승하면서 본인의 HOT100 차트 최고기록을 경신하였다. 이어서 발매한 두 번째 싱글 "Somebody"도 싱글차트 12위에 오르면서 승승장구하였고 1985년 1월에 앨범차트 6위를 끝으로 더 이상 상승하진 못하며 활동이 종료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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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스의 메가 히트곡 Heaven | ▲ 또다른 대표곡 Summer of 69 |
훗날 브라이언 아담스하면 대표되는 록발라드(혹은 파워발라드) " Heaven(US 2주 1위)"을 1985년 4월에 후속 싱글로 발매하였는데 뜬금없이 6월에 빌보드 핫 100 2주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당시 1980년대에 먹힐 만한 멜로디와 훅을 지녔고 라디오 플레이에서 압도적인 반응을 보이며 인기를 얻었다.[8] 이 곡의 컨셉은 선배 밴드인 저니가 1981년에 발표한 록발라드 "Faithfully"를 듣고 영감을 얻었다는 게 정설이다.[9] 우리나라에서는 CF나 여러 매체에서 정말 많이 사용된 노래다. 뮤직비디오는 스토리가 이어지는 영화형식의 드라마타이즈 MV로 만들어졌는데, 1985년 MTV 뮤직비디오 어워드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이곡은 2008년에 DJ Sammy가 유로댄스 버젼으로 리메이크하여 빌보드 싱글차트 8위에 오르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거기에 업템포곡인 "Summer of 69(US 5위)"이 이어서 발매되면서 앨범의 판매고가 다시 증가하게 된다."Summer of 69"은 처음 밴드를 시작하게 될때 보통 쓰는 6줄 기타 사운드가 주를 이루는 곡으로 심플한 구성이 돋보이고 가사가 정말 1969년 여름을 자서전처럼 회상하는 아름다운 내용이라 생각했으나 2008년 아담스가 TV쇼(Early Show)에서 밝히길 이곡을 처음 만들었을때는 제목의 69이 그 섹스 체위를 일종의 언어유희로 연상시키면서 여름에 그걸 했다는 야한 내용이었고 보컬파트도 더 끈적끈적 했다는 후일담을 밝혔다.[10] 이곡은 여러 기타 키드들이 쉽게 따라할 수 있어 일종의 록음악의 교본이 되는 곡이기도 하다. 아담스는 본인의 대표곡에서 이 곡은 절대 빼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여러 베스트앨범이나 EP에서는 "Heaven"이나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보다 더 많이 플레이 되고 있다.
앨범은 85년 8월에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다시 오르는 역주행을 하게 된다.[11] 이후 앨범의 첫 트랙"One night love Affair(US 13위)", 티나 터너와 듀엣으로 부른 "It's only Love(US 15위)를 85년 10월에 발매하여 히트시키면서 길었던 Reckless 앨범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결국 이 앨범은 브라이언 아담스 최대 히트 앨범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6개의 빌보드 싱글차트 Top20 곡을 배출했고, 미국에서 500만장, 전 세계적으로 1,200만장을 판매하면서, 브라이언 아담스는 당시 최고의 인기 아티스트인 마이클 잭슨과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필적하는 히트를 일궈내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1986년에는 It's only love가 그래미 어워즈 Best Rock Vocal Performance by a Duo or Group 후보에 오르고 투어 중에 틈틈이 로저 달트리, 캐나다 가수인 글래스 타이거 등의 아티스트의 앨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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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터너와의 듀엣 "It's only love" |
Reckless 앨범의 전체적인 스타일은 "소프트록", "멜로딕 하드락" 혹은 AOR(Adult-oriented rock)를 대표하며 아담스 음악의 스타일을 완벽히 구축하게 된다. 지금도 브라이언 아담스하면 떠올리는 대표앨범이며 1980년대 팝/록의 흐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걸작으로, 음악잡지 "Kerrang!"에서는 "역대 최고 헤비메탈 앨범"에서 49위에 올리기도 했다. (1위는 레드 제플린의 " Physical Graffiti") 다만 이 앨범이 너무 흥행하며 아담스는 살인적인 투어일정과 라이브에이드를 비롯한 많은 자선콘서트 일정을 소화하게 되고 후속 5집 준비 과정에서 본인도 지친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파트너이자 프로듀서인 Jim Vallance도 번아웃에 빠지게 된다. 결국 무려 전작 이후 3년이라는 갭을 두고 5집을 발매하기 이른다.
2.4. 5집 Into the Fire의 실패, 월드투어 (1986~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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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5집 대표곡 "Heat of the Night"}}} |
엄청난 Reckless의 성공 이후 1987년 3월에 5집 "Into the Fire"를 발매한다. Reckless의 성공 방식을 답습하여 또다른 Reckless를 만들고 싶지 않아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레코딩을 하고 실험도 해봤다고 아담스 본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었으나, 당시 투어가 길어지고 여러 기부 콘서트의 참여로 인해 전작 앨범 이후 3년이나 걸려 나온 앨범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타이트한 제작기간동안 만들게 되어 결국 앨범의 완성도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완성도는 차치하더라도 앨범의 흥행도 전작 Reckless와 비교되지 않을정도로 부진해서 3곡의 빌보드 TOP40 싱글인 "Heat of the Night(US 6위)", "Hearts on Fire(US 26위)" "Victim of Love(US 32위)"를 올리는데 이건 거의 전작의 인기에 편승해서 올린 성적이었고, 가까스로 빌보드 앨범차트 7위, 100만장 판매로 플레티넘을 획득하는데 그친다. 특히 평론가들의 혹평이 심한 앨범으로 Allmusic의 Robert Christgau 같은 경우 "Dumbness Density"- 멍청한 곡들의 집합정도로 번역됨 - 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 앨범에서 사회적인 메시지를 내려던 "Native Sun"이나 "Rememberance Day"는 사춘기 고딩이 쓴 가사 같이 어설프다는 최악의 평도 있었다. 이래서인지 아담스의 라이브 Set-List에는 이 앨범의 곡은 거의 연주되질 않는다.
이런 앨범의 평가들을 뒤로하고 아담스는 자선기금 모금을 위한 콘서트, 환경콘서트에 매진하였고 이때부터 사회운동가로써의 이미지도 서서히 구축하기 시작했다.
다시 절치부심하려던 때에 정작 Reckless 앨범으로 절정의 파트너쉽을 이뤘던 Jim Vallance와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1989년에 둘의 공동작업은 Jim Vallance가 해고 아닌 해고를 당하며 끝나게 된다. [12] 나중에 Vallance가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은 아담스가 본인이 가져온 곡의 아이디어를 너무 많이 퇴짜를 놓았다는 것이고, 아담스 입장에서는 Vallance가 가지고 있던 재능이나 열정이 가족이 생기면서부터 보이지 않았다는, 서로 전형적으로 안맞는 파트너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 Vallance는 6집에서 간간히 공동작곡으로 이름을 올리긴 했으나 사실상 아담스의 앨범에서 배재되고 그 자리는 AC/DC, 데프 레파드, The Cars 같은 유명밴드를 프로듀싱한 베테랑 Robert John "Mutt" Lange[13]와 협업으로 대체하게 된다.
어쨌든 1988년부터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하게 되면서 "Live! Live! Live!"같은 실황앨범을 내기도 했다. 전세계 Rock Festival이나 자선콘서트에 단골로 출연했고, 당시 특이한 이력으로는 별로 성향이 맞지 않을 해비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의 곡에 코러스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으며[14] 아르메니아 대지진 피해자를 위한 앨범에서 딥 퍼플의 명곡 " Smoke on the Water"를 커버하기도 했다.
2.5. 제2의 전성기 (로빈후드 OST, 6집 Waking Up the Neighbours, 삼총사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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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제2의 전성기를 여는 곡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 }}} |
1990년 3월부터 레코딩된 6집 앨범은 원래 아담스가 당해로 발매 계획했으나 계속 미뤄지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5집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앨범 전체 컨셉을 여러번 갈아엎은(...) 아담스의 집착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정식 앨범 발매는 해를 넘어가서 1991년 9월에서야 나오게 된다.
정식 앨범 발매 전 1991년 6월에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 로빈 후드: 도둑들의 왕자" OST에 실리게 되는 발라드곡 "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를 싱글로 발매하게 되었다. 아담스와 파트너인 Robert, Michael Kaman[15]이 작곡가로 이 노래에 참여했다.
비록 영화는 재미와 별개로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고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는 그해에 골든 라즈베리(...)를 타는 수모를 겪은 영화였지만 " 늑대와 춤을"로 케빈 코스트너는 뭘해도 되는 인기가 절정인 시기였다보니 영화는 작품성과 별개로 초대박 흥행 하였고(1991년 연간 박스오피스 1위가 무려 전설적인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 2위가 로빈후드였느니 말다했다.) 이 곡은 로맨스 씬의 발라드 BGM으로 사용되며 대박이 나게 된다.
결국 7주간 빌보드 핫 100 1위, 영국차트에서는 지금 2022년 기준으로도 깨지지 않고 있는 16주 연속 싱글차트 1위[16], 그외 유럽을 비롯한 20개국에서 차트 1위에 오른 이 곡은 영화의 글로벌한 흥행과 궤를 같이 하게되며 1991년 연간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또한 이 곡은 92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OST 부문(Best Song Written Specifically for a Motion Picture)을 수상하였고 아카데미 주제가상에도 노미네이트 되며 아담스의 대표곡으로 자리잡게 된다.(당시 아카데미 주제가 수상은 미녀와 야수 주제곡으로 그 전설적인 주제가 " Beauty and the Beast")
이 흥행에 탄력받아 91년 9월에 6집 "Waking up the Neighbours"를 발매하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4집 Reckless의 흥행과 맞먹는 대성공을 이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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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t Stop This Thing We Started |
아담스는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 히트의 여세를 몰아 미드템포의 팝록 스타일이고 컨트리 느낌도 가지고 있는 첫번째 싱글 "Can't Stop This Thing We Started (상기 뮤직비디오, US 2위)"을 발매하여 메가히트하였고 이곡은 92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Best Rock Song and Best Rock Performance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후속싱글로 흥겨운 락엔롤 곡인 "There Will Never Be Another Tonight(US 31위)", 록발라드 풍의 "Thought I'd Died and Gone to Heaven(US 13위)"로 계속된 히트를 이어갔고 브라이언 아담스풍 록발라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6분이 넘는 러닝타임의 "Do I have to say a word(US 11위)"까지 활동을 이어간다.(아래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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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I have to say a word[17] |
롤링스톤즈는 이 앨범에 4개의 별점(5개만점)을 부여하면서 넘치는 에너지와 유머러스함이 있고 연주자의 조합이 아주 뛰어난 앨범이라 호평했으며 80년대의 아레나 록과 90년대부터 태동하는 그런지 록의 시대를 이어주는 앨범으로 보고 있다. 앨범의 구성이나 스타일은 데프 레파드의 그것과 많이 유사다는 평도 있었다. 당시 헤비하거나 심각한 록음악을 싫어하는 가벼운 록앤롤 팬에게는 최적의 앨범이기도 했다. (
최종적으로 빌보드 앨범차트에는 6위까지 올랐고 미국에서 400만장(4x Platinum)과 전세계적으로 1600만장 이상이 팔렸다. 4집 Reckless와 맞먹는 판매량을 보였고 이때 인기는 북미에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적인 것이기도 해서 아담스 투어일정이 화제가 되고 그냥 뭘해도 되는 국민가수 수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앨범이 글로벌한 히트를 기록하며 콘서트 스폰서로는 무려 코카콜라(!)가 붙었고 유럽투어를 비롯한 전 세계투어를 돌게 되었다. 지금은 자료가 없지만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풀려났던 시기에 이를 축하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Cape Town's Green Point stadium에서 열린 자선 공연은 지금도 회자되는, 엄청난 순간을 연출해냈다고 한다.
그리고 1993년 아시아 투어 기간인 11월에 영화 삼총사 OST에 로드 스튜어트, 스팅과 부른 "All for Love(아래 뮤직비디오)"를 Matt Lange, 마이클 케이먼과 작곡하여 싱글로 발매했는데 이 곡이 3주간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며 인기에 방점을 찍는다. 싱글 판매량도 상당해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워낙 로드 스튜어트, 스팅이 걸출한 뮤지션인데다가 아담스의 인기가 절정일때 만들어진 곡으로 허스키한 보이스 3인방의 프로페셔널함이 돋보인 곡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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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아담스, 스팅, 로드 스튜어트 - All For Lo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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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for Love의 히트 이전에 아담스는 본인의 10년 커리어를 중간결산하는 베스트앨범 "So Far, So Good"을 1993년 11월에 발매하기로 한다. 싱글 차트-In한 곡을 전부 수록하지 않고 본인이 애착하는 곡 13개 트랙으로 구성되었다. 1993년 10월에 앨범의 유일한 신곡인 록발라드 "Please Forgive Me(US 7위)"를 선공개하여 히트시켰다. 결국 All for Love와 Please Forgive Me가 동시에 히트하는 저력을 보여준 것. 아담스는 베스트 앨범 "So Far, So Good"도 최종적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6위까지 오르고 베스트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최종 500만장 (5x Platinum)의 판매고를 올리며 승승장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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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Forgive Me |
2.6. 최초의 내한공연, 또다른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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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내한공연모습 |
1994년 2월에는 아시아 투어의 일환으로 한국 공연을 하기도 했다. 당시 스폰서는 베네통이었고 김종서가 오프닝을 한 바 있다.
그리고 1994년 9월에는 " 파바로티와 친구들"로 명칭되는 자선콘서트에 참여해서 파바로티와 "오솔레미오"를 불렀고 잠시 공백기를 가지다가 그 동안의 본인 스타일과 다소 이질적인 팝발라드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을 발표한다. 이 곡은 1995년 조니 뎁 주연의 "돈주앙" OST에 수록된 곡으로 Paco De Lucia라는 스패니쉬 기타리스트가 연주를 맡았고 케스터네츠같은 소소한 악기도 사용하여 마치 왈츠와 같은 느낌을 냈다. 이 곡이 상당한 인기를 얻으며 무려 5주간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한다. 이 곡 역시 전작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와 같이 1995년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수상은 포카혼타스 주제가인 "Color of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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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e you ever really loved woman |
2.7. 7집 "18 till I die" 그리고 마무리된 미국에서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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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명이 모인 1996년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 - 18 'Till I Die |
자메이카, 프랑스 등지에서 7집을 녹음하기 시작한 아담스는 1995년 "Have you ever really loved woman"의 성공에 고무되었고 역시 앨범 발매 준비에 박차를 가했으나 지연되면서 결국 거의 1년이 지난 96년 6월에나 발매하게 된다.[18] 빌보드 앨범차트에서는 31위에 올랐고 3주 정도 같은 순위를 유지하다 차트 아웃되었다. 그리고 정식 발매 후 첫번째 싱글 "The only thing that looks good on me is You(US 52위)"을 커트했고 두번째로 "Let's Make a Night to Remember(US 24위)"를 순위에 올렸다. 미국에서는 차트 성적이 부진하였으나[19] 영국, 캐나다 등지에서 앨범차트 1위에 올랐고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서 발매한 모든 싱글이 차트 상위권에 올랐다. "Star", "18 till I die", "I'll always be there"등이 차례대로 싱글로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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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집 최고 히트곡 "Let's make a night to remember" |
같은해 7집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11월에는 영화 "그랙 엔 그레고리(The mirror has two faces)"의 러브 테마곡인 "I finally found someone(US 8위)"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듀엣으로 불러 싱글로 발표하였다. 이 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Top10에 오르면서[20] 나름 미국에서 반응이 있었고 곡도 호평일색이어서 95년에 이어서 2년만에 1997년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에 다시 오르며 아담스는 록발라드 OST 제조기(?)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7집은 미국에서 80~100만장(Platinum), 전세계적으로 5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괜찮은 성적을 올렸다. 또한 작곡에도 참여하면서 당대 영화 타이타닉 주제가 "My Heart will Go On"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셀린 디옹 앨범인 "Let's talk about Love"에서 동명 타이틀 곡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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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엣곡 "I finally found someone" |
7집의 히트 이후, 아담스의 메인 활동은 미국이 아닌 출생지인 캐나다, 혹은 영국이나 유럽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고, 미국에서의 활동은 싱글, 앨범발매 등에 초점이 아닌 라이브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90년대 중반부터는 미국 주류음악의 흐름이 완벽하게 록음악에서 R&B와 힙합으로 바뀌었고 기존 7-80년대 밴드, 가수가 설 자리도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으나 아담스 본인도 90년대 후반부터는 더이상 미국에서 통할만한 곡들이 나오지 않게된 것도 사실이었다. 동시대에 살았던 베이비 부머들을 위한 퍼포머로 범위가 좁혀져 버리고 있던 것.
대부분 7-80년대 미국의 인기가수들이 그랬듯이[21] 아담스도 미국에서의 인기는 이 시점부터 완전히 없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심지어 나중에는 미국 레이블과 계약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가장 큰 인기 기반인 미국시장을 잃었고, 이로써 1983년부터 시작된 10년이 넘었던 미국에서의 최전성기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2.8. MTV Unplugged, 계약문제 그리고 맞이한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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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You |
1998년 10월에 아담스는 8집 "On a Day like Today(UK 앨범차트 11위)"를 발매한다. 기존 프로듀서를 모두 교체하여 엔싱크,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당시 스타덤에 올리고 지금도 히트곡 제조기로 롱런 중인 맥스 마틴과 썩어도 준치였던 본 조비, 메탈리카 등 대표적인 80년대 해비메탈 프로듀서 밥 록이 이 앨범의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동명 타이틀곡인 On a Day like Today(UK 싱글차트 13위)를 시작으로 당시 대세인 스파이스 걸스의 멜라니 C와 부른 "When you're gone"이 영국차트 3위에 오르면서 나름 식지 않은 인기를 과시했다.[23] 30대가 넘어가면서 다소 올드해버린 이미지를 이 곡을 통해 어느 정도 없앴고 영국에서 이곡이 15주간 차트에 머물며 새로운 음악적 기반을 마련하고 명성을 이어갔다. 지금 들어도 곡 자체가 굉장히 세련되었고 평론가에게도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본래 미국 소속 레이블인 A&M이 유니버설 뮤직 산하의 Geffen Record와 합병되면서 아담스의 계약 및 활동에 대한 관리를 같은 회사 내에 있는 힙합 레이블인 " Interscope Records"에 양도하는 가운데 계약도 붕떠버린 상황에서 미국에서의 홍보가 전혀되지 않아 미국에서는 그 어느 차트 조차 오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24] 덕분에 1983년 이후 처음으로 아담스는 미국에서 어떤 Sales Record도 기록하지 못한 앨범이 되었다.
어쨌든 이후 "Cloud Number Nine(UK 7위)"등을 싱글로 발매하면서 나름 알차게 활동을 마무리했다. 총 판매고는 전세계적으로 200만장 수준을 기록하였고, 바로 2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Me"를 1999년(미국은 2001년)에 발매하며 2000년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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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집 대표곡 When you're gone[25] |
2.9. 2001~2007 - 미니멀해졌으나 어쨌든 유지한 록스타의 명성
2000년 10월에 아담스는 엘튼 존의 뉴욕 스퀘어 가든 공연에 게스트로 참여하고 전설적인 록밴드 더 후의 추모공연에도 참석하며 활동을 이어간다.
그리고 2002년 5월에 드림웍스 에니메이션인 " 스피릿"의 OST를 영화음악의 대가인 한스 짐머와 작업하게 되며 자연스럽게 이 OST는 아담스의 정규 9집으로 제작되었고 "Spirit: Stallion of the Cimarron" 앨범제목으로 발매되었다. 유일하게 커트된 싱글 "Here I am"은 영화의 엔딩타이틀로써 영국차트 5위, US Adult Contemporary 차트 5위에 각각 오르며 히트했다. 이곡은 아담스가 당시 시대의 흐름을 어느 정도 따라가며 80년대를 풍미한 상업적인 록스타가 아닌 아티스트적인 면모도 보인 작품이다.이 곡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Best Song from a Motion Picture"에 올랐다. (아래 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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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 I am |
이후 2004년 9월에 6년만의 스튜디오 앨범으로써 10집 "Room Service"를 발표한다. 앨범 제목 그대로 작은 스튜디오에서 작업되다 보니 음악을 만들면서 룸서비스로 받은 음식을 먹으며 영감을 떠올렸다고 아담스는 밝혔다. 40대에 접어들면서 파워풀한 곡이나 리프가 강조된 곡도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어쿠스틱한 면모가 많이 보이는 차분한 앨범으로 영국이나(UK 차트 4위) 유럽쪽에서는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빌보드 유럽차트 1위) 전세계적으로 100만장을 판매하였으나 미국에서 반응은 냉담하여 빌보드 앨범차트에서는 134위라는 미미한 성과를 보였고 메인 시장에서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지만 싱글은 "Open Road(UK 21위) 외 4개를 더 커트하였음에도 차트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평론에서는 클리셰로 범벅되어 있다는 평이 대부분이라 록스타로써 아담스의 세일즈나 평단 모두 커리어가 갈수록 꼬여갔다. 그러나 여전히 2004년부터 2년간 진행된 앨범에 대한 투어는 연일 매진 사례로 아담스가 여전히 라이브에 강하다는 인식이 남아있고 시대를 같이했던 관객들이 많아져 스타로써의 면모는 과시했다. 북미 투어에서는 마이너리그 야구장을 돌면서 데프 레파드와 합동 공연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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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집의 리드 싱글인 Open Road |
2005년 10월에는 3번째 베스트 엘범 "Anthology"를 발매했고 36개의 트랙으로 2CD로 구성된 이 앨범에서 98년 발표된 "When you're gone"을 Melanie C 대신 파멜라 앤더슨[26]과 듀엣하여 재발매했고"So far So Good"이라는 신곡도 발매했다. 같은해에 존 말코비치 주연의 "Color Me Kubrick"이라는 영화의 OST를 EP로 발매하는 소소한 활동을 이어갔다.
2006년에는 애쉬튼 커쳐,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 " 가디언"의 OST에 "Never Let Go"를 엔딩크레딧 음악으로 발표하였고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감독한 옴니버스 무비인 "Bobby"에 전설의 뮤지션 아레사 프랭클린이 부른 가스펠 곡인 "Never Gonna Break My Faith" 작곡에 참여하여 2007년 그래미 시상식 가스펠 부문을 수상하였고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BEST ORIGINAL SONG - MOTION PICTURE" 부문 후보에 올랐다. 또한 본인의 고향인 캐나다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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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주노어워드에서 명예의 전당 헌액 영상 |
2.10. 2008년 11집, 계속되는 투어, 부업들(2008~2014)
2008년 3월에 아담스는 본인의 오랜 친구인 Jim Vallance와 오랜만에 같이 작업을 한 앨범 "11"을 발표한다. 말그대로 11번째 스튜디오 앨범이어서 제목을 11로 지었고, 투어 중에 Vallance와 쉬는날에 최대한 편안한 상태에서 레코딩을 진행했다고 한다.앨범의 테마는 "Searching for Someting(탐험 정도로 번역됨)"이라고 밝히며 첫 싱글은 "I Thought I'd Seen Everything"을 커트하였다. 앨범 세일즈도 세계적으로 양호하여 고향인 캐나다에서는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했고 UK 앨범 차트 6위, 독일 차트 2위 등의 성과를 올렸다. 특이한 것은 인도에서 이 앨범이 차트 1위를 차지하면서 추후에 콘서트를 인도, 파키스탄에서 최초로 열기도 했다.[27] 미국의 경우 같은 해 5월에 대형마트인 월마트, Sam's Club에서 앨범을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홍보하였고 전작 "Room Service"와 대비하여 어느 정도 나은 성과를 거뒀다. (US 앨범차트 8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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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집 첫번째 싱글 "I Thought I'd Seen Everything" |
앨범은 전체적으로 레트로를 표방하고 전설의 록밴드 더 후의 스타일을 많이 가져왔다. 그러나 어쨌든 전자 사운드보다는 어쿠스틱함이 많이 보이는 앨범이다. 이후 11개의 국가에서 투어를 열면서 로드 스튜어트나 밴드 포리너를 게스트로 세우면서 매진을 이어갔다.
투어 중에는 2010년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위한 기념앨범에서 Nelly Furtado와 "Bang the Drum"이라는 곡에 참여하였고 11집 활동을 마무리하고 같은해에 "Bare Bones"라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다. 어쿠스틱으로 편곡해서 부른 라이브곡들을 수록한 앨범이며, 이 라이브 앨범 발매 후 무려 4년간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진행했다. 앨범은 좋은 평가를 받으며 캐나다에서 골드(5만장)를 획득했고 투어 장소로 무려 네팔 카트만두를 선택하여 최초로 이 곳에서 투어를 진행한 외국 뮤지션이 됐다. 이 외 라이브 앨범을 추가로 더 발표하고 같은 캐나다 아티스트이자 전성기를 구가하던 마이클 부블레에게 "After All"이라는 곡을 선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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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부블레와 듀엣한 "After All" |
이때부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아담스의 사진 관련 작업이 여러가지 어워드의 수상을 통해 주목 받게 된다. 영국의 로열 사진 협회(Royal Photographic Society)가 수여하는 "Honorary Fellowship"을 수상하였는데, 그 동안 세계의 유명 잡지인 Vogue, GQ, Esquire에 꾸준히 여러가지 주제의 사진을 공급했고 휴고 보스나 몽블랑, 재규어 등의 명품 업체의 광고 사진을 직접 제작한 것에 대한 일종의 공로상 수여였던 것. 독일에서도 "Lead Award"에서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사진작가로써의 아담스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상업적인 사진뿐만 아니라 글로벌 이슈를 비롯한 주제도 다양해서 스스로 전시회를 1999년부터 열어왔고 사진집도 7개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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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작품 중 대표적인 "믹재거" |
2014년에는 본인의 명작 "Reckless" 30주년 에디션을 발표했고, "Tracks of My years"라는 본인 커리어의 첫 리메이크 앨범을 발표한다.[28] 명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가 프로듀싱했고, 비치 보이스, 밥 딜런, 척 베리 등의 아티스트 곡들을 어쿠스틱 버젼으로 리메이크 했다. 캐나다 앨범차트 1위, UK 차트 12위에 올랐고 빌보드 앨범차트에서 89위를 차지했다. (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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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s of My years |
2.11. 13집 "Get Up", 14집 "Shine a Light"을 통한 생존신고(2015~2019)
2015년 10월에 아담스는 정규 13집 앨범 "Get Up"을 발매한다. 첫싱글로 흥겨운 록넘버 "Brand New Day"를 발매하며 활동을 시작했는데 싱글로 나온 모든 곳을 직접 뮤직비디오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Brand New Day"에서는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악녀 벨라트릭스 레스트레인지로 유명한 헬레나 본햄 카터가 출연하였다. 영국을 비롯해 호주, 스위스 등 국가에서 상업적으로 건재를 과시하며 영국 앨범 차트 2위(빌보드 앨범차트 99위)까지 오르며, 앨범의 비평에서도 나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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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집 첫번째 싱글 "Brand New Day" |
후속싱글로 복고풍 록앤롤인 "You belong to me"등을 발표하였고 2015년엔 호주 럭비 결승전(2015 AFL Final)의 메인이벤트격으로 공연을 펼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후 2017년 또다른 베스트 앨범인 "Ultimate"를 2곡의 신곡("Please Stay, Ultimate Love)과 함께 발매하였다.
2018년에는 "The Ultimate tour"를 시작하며 호주,영국,미국을 비롯해서 그해 10월까지 진행했는데, 인도에서 투어의 반응이 대단했다. 인도 현지 언론(Rolling Stones India)에서 밝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유명인사는 아담스가 되어 있었으며, 그의 대표곡 중 하나인 "Summer of 69"은 거의 인도 국민가요 수준으로 전통 인도 혼례식에서 거의 유일하게 연주되는 외국곡이기도 하다"
이후 2018년 말에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투어인 "Reputation Tour"에 게스트로 참여해서 "Summer of 69"을 같이 불렀다. 캐나다 투어 당일에 급히 아담스와 연락이 되어서 참가했다고 스위프트가 인스타 계정에서 밝혔다. 캐나다 대표 가수인만큼 현장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이때 무대를 계기로 본인의 음악을 다시 레코딩하는 것에 매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2022년에 "Classics"를 발매하면서 본인의 히트곡을 다시 녹음한 버젼을 내놓기도 한다. 앨범 발표 후 인터뷰에서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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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 스위프트와 같이 부른 "Summer of 69" |
여러 소소한 공연 활동을 마치고 아담스는 2019년 3월에 정규 14집 "Shine a Light"를 발매한다. 앨범작업에는 그야말로 전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에드 시런이 동명 타이틀곡을 아담스와 공동작곡하였고, 제니퍼 로페즈는 "That's How Strong Our Love Is"에 피쳐링으로 참여했다. (아래는 에드시런이 살짝 스킷 형식으로 "Shine a Light"를 불러보는 영상과 공식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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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hine a Light |
앨범은 미국에 차트인은 하지 못했지만 UK 앨범차트 2위, 캐나다 앨범차트 1위에 오르는 성과를 올렸고 그해 캐나다 주노 어워드에서 Best Adult Contemporary 앨범을 수상했다.
2.12. 2020년대 활동 (Black lives Matter 운동, 15집 "So Happy It Hurts" )
2020년 6월에 아담스는 2008년에 본인이 작곡에 참여하여 발표했던 "Never Gonna Break My Faith"를 아레사 프랭클린이 솔로로 부른 버젼을 공개했다[29]. 뮤직비디오에는 당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과 이에 촉발된 대규모 사회운동인 "Black Lives Matter"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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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Gonna Break My Faith 재발매 버젼 |
2020년 11월에는 밴드 오아시스의 명곡인 "Stop Crying Your Heart Out"을 여러 아티스트들과 영국 BBC라디오에서 불렀고 불우아동들을 위한 자선 앨범으로 공개했다. 이 곡은 영국 싱글차트 7위에 올랐고 UK Singles Download 차트에서는 1위까지 랭크되었다. 같은 해 2020년 12월로 예정돼 있었던 "Shine a Light" 투어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모두 취소되었고 본조비와 US Arena에서의 합동공연도 역시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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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Crying Your Heart Out |
2021년에는 특별한 활동 없이 Bertelsmann Music Group과 계약을 맺었고 2021년 10월 11일에 싱글 "So Happy it Hurts[30](Canada Digital Song Sales 28위)"를 선공개하고 22년 3월에 동명 앨범을 공개했다. 앨범은 여러 유럽 국가를 비롯하여 영국 앨범 차트에서 상위권(3위)에 올랐고 미국 인디앨범 차트에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보였다.[31] 그리고 2023년 그래미 시상식에 동명 타이틀곡이 Best Rock Performance 후보에 올랐는데, 이 부문에 오른 것은 1992년 5집 "Can't Stop the things we started" 이후로 31년만이다. 아담스로써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 이 앨범에서 후속 싱글로 "On the Road", "Kick Ass", "Never gonna Rain"을 발표하고 아담스는 본격적으로 투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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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후보에 오른 "So Happy it Hurts" |
2023년 3월 2일에 1994년 공연 이후 2번째 내한공연이 확정되었다. 코로나 이후 대대적인 투어를 돌고 있는데 "So Happy It Hurts" 투어의 일환으로 서울을 시작으로 아시아 주요도시를 돌게 된다. 관련 기사 공연 후기 관련 기사
3. 음악성
3.1. 음악 특징
브라이언 아담스의 초기 커리어는 여러모로 80년대 음악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멜로디컬하지만 록음악으로써의 기본적인 임팩트나 구조는 갖고 있는, 10대보다는 성인 취향의 깔끔한 록큰롤을 구사했다. 전성기 3집 "Reckless"앨범 활동 시 라이브 클립이나 뮤직비디오를 보게 되면 굉장히 수수하고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백인 청년의 느낌을 풍기며, 당시 80년대 록씬에서 유행한 화려한 분장이나 퍼포먼스와는 거리가 멀고[32] 흰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무대를 뛰어다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체구는 크지 않지만 외모는 백인의 전형적인, 흔히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비쥬얼이었으며, 흥겨운 사운드로 관객을 즐겁게 하는 점은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비슷하였지만 노래의 가사는 사회문제와는 거리가 먼 대부분 사랑 노래였고, 마초적인 느낌이 아니라서 여성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록커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한마디로 "듣기 편한 록음악을 연주하는 동네 청년같은 스타" 정도였다.[33] 기타나 다른 악기도 연주 가능한 멀티 플레이어로써 음악 스타일 때문에 과소평가된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다.
보컬의 경우, 허스키하다 못해 쇳소리에 가까운 보컬이다.[34]싫어하는 사람들은 신경쇠약 걸린 목소리, 할아버지 목소리, 가래끓는 목소리 등 취향에 따라 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으나 8-90년대에는 어쨌든 이 부분이 인기의 한 요소였고 그 목소리에 가장 최적합한 곡을 많이 양산했다.[35] 90년대에 들어서 이 부분은 아담스의 대표곡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과 5집 앨범 "Waking Up the Neighbours"에서 절정을 이룬다.
다만 이 시기에 허스키 보이스와 AOR로 일컬어지는 멜로딕한 록음악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이 아티스트로써의 스펙트럼을 상당부분 제한한 바 있고 본인도 굉장히 그 부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90년대에는 에너제틱한 곡보다는 성인 취향의 발라드도 많이 PUSH 했고[36] 나름 이런곡들은 전성기 끝자락까지 아담스를 북미에서 꾸준히 스타로써 지탱해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MTV를 등에 업었던 헤비메탈 밴드나, 80년대에 유행한 여러 뉴웨이브 사운드는 사라지고, 어쩌다보니 순전히 80년대 스타일의 록음악을 하는 솔로 아티스트들은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지고 현역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남게 되었다. 당시 시대의 주류가 너바나, 펄 잼으로 시작된 그런지 록이나[37] 흑인음악, 일렉트로닉 뮤직으로 완전히 바뀌다 보니 너무 갑작스럽게 미국 대중에서 멀어져 버린 감이 있다. 그나마 미국을 제외한 영국, 유럽 등 해외시장에서는 아직도 인기가 있는편이고 많은 리스펙트를 받고 있고 투어도 활발히 해가며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 애초에 캐나다 국적의 아티스트라는 한계가 분명하다보니 미국에서의 인기는 다소 빨리 식은 것일 수도 있다. [38]
2000년대를 넘어가면서 여러 음악적인 시도를 해보고 영화음악에서는 여전히 호평을 많이 받았지만, 개인의 이름을 걸고 나온 앨범으로 미국에서 상업적인 성과가 나온 것은 없었고[39] 2022년 기준으로 음악적으로 베테랑인 노련한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애초에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록스타"의 이미지가 강하여 아티스트로써의 음악적 성취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실험적이기보다는 편안하고 80년대를 추억하는 레트로 사운드가 여전히 중심이 되고 있다. 여러 수상이력도 많고 오랫동안 롱런하고 있는 가수이지만 활동 기간에 비해 팝 역사에 남는 어떤 업적을 남기지는 못한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 좋게 말하면 꾸준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얇고 길게 명맥만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연으로써는 역대급의 내공을 가졌고 가수뿐만 아니라 사진작가, 작곡가까지 겸하면서 모든 활동에 정말 성실하게 임하는 가수이며, 최고의 라이브 가수 중 하나로 명성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 가수들이 신곡이나 앨범은 전혀 안내고 그나마 활동하더라도 거의 라이브가 불가능할 정도로 관리가 안되어 있어서 마이크 넘기기에 바쁜 반면[40] 아담스는 꾸준하게 정규앨범을 발매하고 있고 상당히 관리가 되어 있는 보컬로써 최근 라이브 영상을 보더라도 본인의 곡 중 키가 높은 부분을 여전히 잘 소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데뷔한지 무려 42년이 되어가는 2022년도에도 정규앨범을 발매하는 것을 보면 성과와는 관계 없이 그야말로 성실성에서는 따라갈 아티스트가 없다.
3.2. 밴드 멤버
아담스의 밴드는 보통 우리나라의 윤도현 밴드처럼 "Bryan Adams Band"로 명칭되는데 본인들끼리는 "The Dudes of Leisure"라고도 부른다. 아담스가 보컬과 리듬기타 부분을 고정으로 맡으며 대표 멤버로는 Keith Scott(사진, 리드기타)[41], Mickey Curry(드럼), Dave Taylor(베이스)가 있었다.
1980-90년대까지 앨범 제작부터 공연까지 함께하며 전성기를 함께 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Keith Scott을 제외하면 세션 위주로 밴드를 꾸리고 있으며 고정된 멤버 없이 연주자들을 초청하고 있다.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 앨범 목록
발매일 | 음반명 |
1980년 | Bryan Adams |
1981년 | You Want It You Got It |
1983년 | Cuts Like a Knife |
1984년 | Reckless |
1987년 | Into The Fire |
1991년 | Waking Up The Neighbours |
1996년 | 18 Til I Die |
1998년 | On A Day Like Today |
2002년 | Spirit : Stallion of Cimmaron |
2004년 | Room Servie |
2008년 | 11 |
2014년 | Tracks of My Years |
2015년 | Get Up |
2019년 | Shine a Light |
2022년 | So Happy It Hurts |
4.2. 싱글/EP 음반
발매일 | 음반명 |
2004년 | Open Road |
2011년 | Merry Christmas |
2019년 | Christmas |
2021년 | Kick Ass |
4.3. 베스트 음반
발매일 | 음반명 |
1993년 | So Far So Good |
1999년 | The Best of Me |
2005년 | Anthology |
2017년 | Ultimate |
2022년 | Classic |
4.4. 라이브 음반
발매일 | 음반명 |
1988년 | Live! Live! Live!(CD & DVD) |
1997년 | MTV Unplugged |
2001년 | Live At Slane Castle(DVD) |
2008년 | Live At Budokan(DVD) |
2010년 | Bare Bones |
2013년 | Live At Sydney Opera House |
5. 여담
- 라이트 노벨 스즈미야 하루히의 한숨에서 하루히와 츠루야가 브라이언 아담스의 1996년 발표곡인 '18 Til I Die' 후렴 부분을 같이 부르는 내용이 짤막하게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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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파크 극장판에서는 캐나다가 미국에게 끼친 해악 중 하나로 언급된다. 등장 인물들이 아이들의 탈선을 막기 위해 캐나다를 본격적으로 까고 캐나다와 전쟁을 불사하면서 미국 학부모 대표와 웃기게 생긴 캐나다 수상이 서로 방송 토론을 하는 장면인데[42] 캐나다와 회담을 하면서 캐나다 수상이 브라이언 아담스 건에 대해서는 미국에 이미 여러차례 사과했다고 언급했다.
- 결혼을 50대 중반에서야 했다. 부인은 본인의 자선단체 소속의 개인비서인 알리시아 그리말디이며 슬하에 2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90년대에는 007 네버 다이에 본드걸로 출연했던 덴마크 모델 Cecilie Thomsen과 사귀었으나 결별한 바 있다.
- 사생활적으로 굉장히 깨끗하고 잡음이 없기로 유명한 모범생이지만 2020년 5월경 인스타그램에 코로나19 사태 관련 인종차별적 글을 제시해 논란이 됐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인스타그램에 사과글을 올렸다. 관련 기사 문제가 된 내용은 모든 중국인을 저격한 듯한 워딩으로 보이며, 동물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입장에서 박쥐를 먹는 등의 보도가 나오자 질색하여 올린 것이지, 인종차별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 코로나 19에 걸렸으나 무증상이라고 인스타그램으로 밝혔다. 확진으로 2021년 7월부터 잡힌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한 바 있다.
- 2018년에 영화 귀여운 여인의 뮤지컬 내 스코어를 Jim Vallance와 작업했다.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미국전역과 바르셀로나 등에서 2년 동안 공연하였으며 뮤지컬은 혹평을 받았으나 아담스가 만든곡은 반응이 좋다.[43]
- 2024년 국내에서 아시아 최초로 그의 사진전이 열렸다. 그가 찍은 연예인, 상이용사들의 사진이 주제라고 한다.[44]
[1]
Officer of the Order of Canada. 캐나다의 국익을 신장한 인물에게 주어지는 훈장.
[2]
3집 "Heaven", 5집 "
(Everything I Do) I Do It for You,
삼총사 OST "All for Love", 6집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
[3]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잡지에 많은 사진을 수록했고, 본인의 전시회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4]
PETA를 후원하기도 했으며 1994년 내한공연 당시에도 대통령에게 돌고래 보호를 위해 국제 돌고래 협회 지지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5]
이 당시 음악은
데이빗 보위나
퀸의 초기작품 스타일의 글램락 그룹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6]
그래도 나중에 1986년에 캐나다에서 미미하게나마 골드레코드 인증을 받는다.
[7]
이 당시 곡들은 지금 기준으로 거의 라이브나 베스트앨범에서는 완전히 배제되는 편이고 곡들이 다소 거칠다는 평이었다.
[8]
1983년에 영화 "A Night in Heaven"에 OST로 먼저 발표되었고 그때도 소소한 인기가 있던 곡이었으나 가수의 상승하는 인기에 편승하여 다시 발굴된 케이스였다. 원래 Reckless 앨범에는 수록될 예정에 없었으나 앨범 발매 직전에 아담스가 마음을 바꿔서 수록하게 되었다.
[9]
두 곡이 어느 정도 유사한 면이 있다. Heaven이 신디사이저와 기타소리가 좀 더 강조된 느낌이다.
[10]
물론 공동작곡가인 Jim Vallance는 극구 부인했고 잭슨 브라운이 출연한 영화 제목을 인용한 것이라고 반박한 바 있었다.
[11]
2000년대 이후엔 매우 드문일이지만 이 당시만 해도 굉장히 흔한 일이었다.
[12]
다시 결합하는 것은 훗날 2008년 11집이며 그 이후에도 틈틈이 아담스 앨범에 참여하게 된다.
[13]
캐나다 출신인 스타
샤니아 트웨인의 남편으로 알려져 있다. 2008년에 샤니아의 친구와 바람이 나버린 관계로 이혼했다. 샤니아 트웨인은 그 바람난 여자의 남편과 결혼하는 막장 드라마를 찍었다.
[14]
머틀리 크루의 명반인
Dr.Feelgood 중 "Sticky Sweet"의 코러스에 참여했다. 이곡은 아담스의 집이었던 밴쿠버에서 녹음되었고, 아담스 외 전설적인 보컬인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도 참여했다.
[15]
마이클 케이먼은 영화음악 작곡가로 다이하드, 리셀웨폰 등의 블록버스터 OST 제작에 참여하였고 브라이언 아담스와는 영화 삼총사, 돈쥬앙을 같이 작업하여 성공을 이끌었다. 1999년
메탈리카의 심포니 협연 콘서트인 S&M에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다.
[16]
1953년 Frankie Laine의 "I believe"가 영국 싱글차트에서 18주동안 1위를 차지한 바 있으나 이 곡의 연속 1위 기록은 6주차에 한번 2위로 내려갔기 때문에 16주 연속 1위인 아담스의 기록이 최장기록이다. 이 기록은 2022년 기준으로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7]
뮤직비디오는 이스탄불에서 촬영되었고 감독은
조지 클루니 주연의 "American"등을 감독한 Anton Corbijn이 맡았다.
[18]
이미 투어 중인 95년에 12곡의 녹음이 끝났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추가작업으로 인해 지연된 것이다.
[19]
메인차트보다는 Adult Contemporary등의 차트에서 선전했다.
[20]
아담스의 마지막 빌보드 싱글차트 TOP40 곡이다.
[21]
물론 2010년대까지 변화무쌍한 트랜드에 계속 적응하며 빌보드차트 상위권에 계속올랐던
마돈나 같은 이례적인 케이스도 있었지만 7-80년대를 풍미한 가수들은 사실상 북미 메인차트에서 90년대 후반부터는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22]
머라이어 캐리는 이 공연을 통해 의심받던 라이브 실력을 입증했고
너바나는 마지막
커트 코베인의 불꽃을 태운 전설적인
MTV Unplugged in New York을 펼쳤고, 알코올과 마약 중독으로 고생한
에릭 클랩튼은 이 쇼로 완전히 재기 한 바 있다.
[23]
원래는 그래미 수상자였던
셰릴 크로우에게 듀엣을 제안한 곡이었으나 까이면서 멜라니에게 제안이 갔다.
[24]
음반산업이 mp3 등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사양산업으로 낙인되었고 모든 음반사가 M&A를 시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홍보가 아예 안되더라도 될 앨범은 되지만 이 앨범은 아예 반응이 없었다고 보는게 맞다.
[25]
아직은 젋었던 브라이언 아담스와 스파이스걸스 멤버로써 멜라니의 리즈시절을 볼수 있다.
[26]
베이워치로 유명한 플레이보이 모델 그분 맞다. 아담스와 같은 캐나다인었지만 처음에 이 곡 듀엣을 요청받았을때 파멜라 본인은 몰래카메라 같은거나 놀리는줄 알았다고 한다.
[27]
이후 2020년대까지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아담스의 인기는 거의 국민가수 혹은 레전드급이다.
[28]
아담스 본인은 리메이크 앨범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으나 당시 소속 레이블인 Polydor에서 원했고 프로듀서가 데이비드 포스터인점에 설득되어 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29]
이미 15년전에 녹음본을 아담스가 보관하고 있다가 시위가 확산되면서 이 노래가 필요한 시점이라 판단하여 공개했다고 한다. 아레사 프랭클린의 미공개 싱글 정도로 보면 된다.
[30]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같이 코로나 격리할때 느꼈던 내용을 바탕으로 작곡하였으며 워크홀릭 성향의 아담스가 펜데믹에서 느끼는 아이러니 정도를 표현한 곡이다.
[31]
어찌보면 8-90년대에는 가장 메인스러웠던 아티스트가 지금은 마이너한 빌보드 인디차트에 오른 것도 괴이한 일이다.
[32]
1980년대에 나타난 MTV로 인해 헤비메탈 밴드들이 화려한 비쥬얼을 강요받게 되는 시대였다.
본조비,
신데렐라 등이 대표적이다.
[33]
당시
백투더퓨처 시리즈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마이클 J 폭스와 비슷한 느낌이다.
[34]
보통 비견되는 보컬은
로드 스튜어트,
리차드 막스,
데프레파드의 조 엘리엇,
이글스의 돈 헨리 등을 들 수 있다.
[35]
물론 지금 2000년대부터 그의 특이한 보컬 스타일은 미국시장에서는 불호에 방점이 찍혀버린 것으로 보인다.
[36]
가장 대표적으로 돈주앙 OST의 "Have you ever really loved a woman"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랑 부른 "I finally found someone", "정규 6집의 Let's make a night to remember"등이며 록커로써의 이미지보다는 팝발라드 가수의 면모가 강조됐다.
[37]
그런지록은 짦고 굵게 2000년대까지 광풍이 불다가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어찌보면 80년대 록스타들과 비슷한 신세였다.
[38]
아담스는 96년에 발표한 "18 till I die" 앨범부터 얼터너티브적인 요소를 어느 정도 차용하거나 2000년대 들어서 당시 유행하는 트랜드를 따라가는 시도들이 보였으나 각광 받지는 못하였다. 이건 아담스 뿐만 아니라 캐나다 국적의 가수들은 2010-20년대 기준으로 미국 메인스트림에서는 대부분 고전하고 있다. 90년-2000년대 미국에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
셀린 디옹이나
샤니아 트웨인,
앨라니스 모리셋 등등 모두 캐나다 아티스트이며 2010년대 즈음에 메인스트림에서는 사실상 사라졌다.
[39]
북미 빌보드 차트가 아티스트의 인기에 대한 척도는 아니지만 가장 큰 시장이고 월드와이드로 영향력이 제일 강한건 사실이다. 아담스의 인기를 빌보드로만 본다면 2000년대에는 사라진 가수에 가까운 편이다.
[40]
아담스의 전성기를 같이한 동시대의 대표밴드 격인
본조비가 2015년 내한공연에서 "Always"를 거의 2키를 낮춰서 부를때 혹자는 록 보컬로써 이미 사망선고 받은 존 본조비를 봤다고 회고한다. 실제 여러 커뮤니티에서도 그렇게 결론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담스는 코로나 팬데믹 시작 전에 본조비와 합동공연을 계획하기도 했다. 아마 동시대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을 위한 특별콘서트 같은것으로 보면된다.
[41]
셰어,
데이빗 보위 등 쟁쟁한 뮤지션의 세션기타를 맡았으며, 아담스의 투어에는 현재까지도 종종 연주자로 참여하고 있다.
[42]
이후 나오는 뮤지컬 스코어 이름이 "Blame Canada"였으니 말 다했다. 일부 미국인들이 캐나다인을 다소 우습게 보거나 일종의 위협을 느끼는 부분을 풍자한 것이다.
[43]
아담스는 독일잡지 "Metro"에서 뮤지컬곡을 만드는 것이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
[44]
전시 기간 : 2024년 1월 12일 ~ 4월 13일, 장소 : 서울 전쟁기념관 1층,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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