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9DCCA><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공주 Prinzessin Charlotte von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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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독일어 |
프리데리케 샤를로테 마리 (Friederike Charlotte Marie) |
러시아어 |
옐레나 파블로브나 (Елена Павловн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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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07년
1월 9일 독일 연방 뷔르템베르크 왕국 슈투트가르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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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73년
2월 2일 (향년 66세)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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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러시아의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1824년 결혼 / 1849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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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마리야, 옐리자베타, 예카테리나, 알렉산드라, 안나 | |
아버지 | 뷔르템베르크의 파울 왕자 | |
어머니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샤를로테 | |
형제 | 프리드리히[3], 파울, 파울리네[4], 아우구스트 | |
종교 | 루터교회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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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공주. 뷔르템베르크 왕국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막내 아들 뷔르템베르크의 파울의 장녀이다.또한 바이에른 왕국의 테레제 왕비와 나사우 공작부인 루이제의 조카이며, 스웨덴의 왕비 나사우의 조피아의 이모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07년 1월 9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뷔르템베르크의 파울 왕자의 장녀로 태어났다. 애칭은 로테(Lotte). 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샤를로테의 부모님은 사이가 나빴다. 어머니는 일찍이 아들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고, 아버지는 정부와 귀천상혼한 뒤 딸들을 데리고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샤를로테와 여동생은 왕족치고는 소박한 환경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잠깐이지만 하숙집에서 머물기도 했다.샤를로테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지식인들이 모이는 파리의 살롱을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서 앙드레마리 앙페르, 알렉산더 폰 훔볼트, 조르주 퀴비에, 외젠 들라크루아 등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좋은 교육을 받았다. 샤를로테는 똑똑하고 교양있는 아름다운 소녀로 자랐다.
2.2.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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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 1824년 |
1822년 15세의 나이에 러시아 제국 파벨 1세의 막내아들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과 약혼했다. 이 혼사는 미하일 대공의 어머니이자 샤를로테의 고모할머니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5]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 미하일은 오촌 조카인 샤를로테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어머니에게 순종적인 아들이었기에 결혼을 받아들였다. 결혼 전 샤를로테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옐레나 파블로브나라고 바꿨다. 1824년 2월 8일, 부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미하일은 상냥하고 밝은 성격이었지만 군대에만 몰두했으며, 아내는 의무적으로 대했다. 또한 두 사람은 성격이나 취향이 완전 반대였다. 옐레나는 지적인 학구파였으나 미하일은 군에 관련된 것이 아닌 이상 절대로 책을 펴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학문과는 거리가 먼 무골이었다. 미하일은 아들을 원했으나 옐레나는 딸만 5명을 낳았고, 부부 사이는 더욱 데면데면해졌다.
그러나 옐레나는 러시아 황실에서 인기가 있었다. 옐레나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동시에 러시아어를 빨리 배웠기에 황족과 귀족들의 호감을 샀다. 특히 시조카인 알렉산드르 2세와 친하게 지냈는데, 두 사람은 농노 해방이나 개혁 등 정치적인 견해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1849년에 미하일 대공이 숨을 거두면서 42살의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이후 무도회 같은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자선사업과 사회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시작했다.
2.3. 자선사업 및 사회 활동
여성 황족들이 주로 그렇듯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옐레나는 학교와 고아원을 후원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의료 시설을 세우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수녀회를 조직해 기부금을 모으고 자선 활동을 독려했다.지적인 옐레나는 자신의 집을 일종의 살롱처럼 활용해 여러 귀족, 학자,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사비를 들여 기금을 모으고 예술학교와 음악가들을 후원했다. 또한 러시아 음악 협회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설립했다.
1871년 의사의 권유로 피렌체로 요양을 갔다.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을 느낀 옐레나는 러시아로 돌아가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Princess Charlotte of Württemberg) |
<colbgcolor=#fff3e4,#331c00> 뷔르템베르크의 파울 왕자 (Prince Paul of Württemberg) |
<colbgcolor=#ffffe4,#323300>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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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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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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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아우구스테 여공작 (Duchess Augusta of Brunswick-Wolfenbütt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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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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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거스타 공주 (Princess Princess of Augusta od Grate Brita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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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Saxe-Hildburghau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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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Frederick, Duke of Saxe-Alten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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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3세 (Ernest Frederick III, Duke of Saxe-Hildburghaus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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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에르네스티네 공녀 (Princess Ernestine of Saxe-Weimar-Eisen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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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샤를로테 게오르기네 여공작 (Duchess Charlotte Georgine of Mecklenburg-Strel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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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슈베린 공작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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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Hesse-Darmstadt) |
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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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예카테리나, 옐리자베타, 마리야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마리야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Mikhailovna) |
1825년 3월 9일 | 1846년 11월 19일 | |
2녀 |
나사우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Elizabeth, Duchess of Nassau) |
1826년 5월 26일 | 1845년 1월 28일 | 나사우 공작 아돌프 |
3녀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부인 카타리나 (Catherine, Duchess of Mecklenburg-Strelitz) |
1827년 8월 28일 | 1894년 5월 12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슬하 4남 2녀 |
4녀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Mikhailovna) |
1831년 1월 28일 | 1832년 3월 27일 | |
5녀 |
안나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na Mikhailovna) |
1834년 10월 27일 | 1836년 3월 22일 |
다섯 딸 중 두명은 아동기 때 죽었고 또 두 명은 성인이 되자마자 죽었다. 유일하게 중노년기까지 살아남은 셋째딸만이 후손을 남겼는데 그 외손자녀 4남 2녀 중 차남인 게오르크 알렉산더(1859 ~ 1909)만 결혼해서 자식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