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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01:09:21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 개요2. 창단부터 2차대전까지
2.1. 배경과 창단2.2. 한스 폰 뷜로 재임기2.3. 아르투르 니키슈 재임기2.4.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재임기2.5. 제국 관현악단 시절
3. 2차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1. 개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다룬 문서.

2. 창단부터 2차대전까지

2.1. 배경과 창단

지금이야 세계구급으로 먹어주는 악단이지만, 시작은 매우 초라했다. 1878년에 베냐민 빌제(Benjamin Bilse,1816~1902)라는 작곡가 겸 지휘자가 자신의 성을 따 '빌제 관현악단(Bilse-Kapelle)' 이라는 콘서트 전문 사설 관현악단을 만들었는데, 대부분의 관현악단이 오페라극장 혹은 궁정 등지에 종속되어 있던 공설+극음악 반주 전문 계통이었던 당대 상황에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빌제가 차츰 인기를 얻으면서 점점 돈벌레가 되기 시작했는데, 돈 되는 공연이면 단원들 스케줄이니 뭐니 그딴 거 없이 마구 부려먹으면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단원들은 3등칸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독일 각지를 돌아다녔고, 제공되는 숙소나 음식, 봉급도 개차반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시기 적절하게 마닝엔에서 온 궁정 악단이 자신들보다 빼어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을 보고 예술적으로도 질투심까지 느꼇다고 한다.

결국 빡돈 일부 단원들이 퇴단해 1882년 5월 1일 새로운 관현악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베를린 필이었다. 첫 콘서트는 그 해 5월 5일에 열렸다. 아직 ‘전 빌제 관현악단’이라고 불리던 때 였고, 지휘자는 에른스트 루돌프였다. 다음 날인 5월 6일부터 일주일간 첫 콘서트 투어를 가졌다. 단원들은 투표를 통해 지휘자를 선출했는데, 루드비히 폰 브레너(Ludwig von Brenner)가 지휘자가 되어 악단을 이끌게 되었다. 폰 브레네는 1882년 악단 창단 직후부터 1887년까지 5년간 악단을 이끌며 지휘했다. 때문에 폰 브레네를 베를린 필의 첫 상임지휘자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독일어 위키피디아에는 폰 브레네가 베를린 필의 첫번째 음악 감독으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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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10월 17일 열린 ‘필하모닉’으로의 첫 콘서트

첫 정기 콘서트는 그 해 10월 17일에 있었는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름으로 처음 열린 공연이었다. 다만 이 악단도 재정 자립도가 엄청 낮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단원들의 노동 강도도 빌제 악단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심지어 대형 맥줏집 등지에서 대중들을 위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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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당시의 베를린 필하모닉

1883년 2월에는 클라라 슈만이 베를린 필과 함께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고, 1884년 1월에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교향곡 3번을 지휘했다.

2.2. 한스 폰 뷜로 재임기

이런 와중에 베를린의 유능한 공연 기획자였던 헤르만 볼프라는 인물이 이 악단에 재정 지원을 약속했는데, 볼프는 자금 외에도 마이닝겐 궁정 악단 지휘자로 베를린에 와서 충격을 안겨준 당대 본좌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폰 뷜로를 악단의 첫 상임지휘자로 초빙해줬다. 1884년 3월 4일 뷜로는 베를린 필에서의 데뷔 공연을 가졌는데, 자신의 곡과 브람스의 곡을 연주했다. 아직 상임지휘자로 오르기 전이었다. 뷜로의 첫 공연과 상임지휘자 취임 사이에 안토닌 드보르자크, 카미유 생상스, 막스 브루흐 등이 지휘자나 솔로로 베를린 필과 함께했다. 1887년 10월 21일, 뷜로가 상임지휘자로서의 첫 콘서트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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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폰 뷜로
뷜로는 최초의 직업 지휘자로 인정받는 사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로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초연했으며, 이후 브람스파로 선회했다.

뷜로는 취임하면서부터 단원들에게 당시 기준으로 안정된 악단이 아니었던 베를린 필을 맡는 조건으로 단원들이 자신의 혹독한 리허설을 따라올 것을 요구하며 엄포를 놓았다. 그는 당시 기준보다 많은 시간의 리허설 시간을 요구했고, 단원들에게 자신의 세세한 지시를 일일이 기입하도록 하는 등 엄격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덕분에 악단의 연주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무엇보다도 뷜로의 지휘가 베를린 청중들에게 격찬을 받으며 베를린 필의 연주회는 매번 매진을 이루었다. 뷜로가 상임지휘자를 맡은 첫 해가 끝날 무렵 악단은 재정난에서 벗어나며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취임 1주년을 맞아 단원들이 감사의 선물을 보내자, 뷜로는 단원들에게 "이제 궁정 악단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여러분과 같은 자유로운 (민간) 오케스트라가 미래다."라고 말했다.

뷜로는 엄격한 지도력으로 악단의 연주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고전 혹은 초기 낭만 시대의 관현악 연주곡들을 고정 곡목으로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다만 뷜로는 바그너파의 작품을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바그너파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던 일부 베를린 청중들에게는 실망감을 안겨 주기도 했다.

1892년 뷜로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물러났다. 후배 작곡가 겸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권유로 카이로에서 요양 중이던 뷜로는 1894년 2월 12일에 카이로에서 사망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로는, 1889년 1월 21일 에드바르 그리그가 필하모닉과 함께 자신의 ‘페르귄트 모음곡’을 지휘했다. 또한 오케스트라는 네덜란드 스헤베닝언에서 해마다 여름 음악회를 개최했다.

2.3. 아르투르 니키슈 재임기

뷜로 이후 상임지휘자를 찾는데 다소의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시기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등이 베를린 필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했으며 유력한 차기 지휘자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불발되었다. 당시 베를린 언론에 실린 비평을 보면 전임자 뷜로가 보여주었던 빛나는 해석과 카리스마에 비해 슈트라우스나 말러의 지휘는 평범하고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해석을 보였다는 반응이 실려 있다.

결국 1895년 헝가리 오스트리아 아르투르 니키슈종신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다. 그는 이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베를린 필에 재임했다. 1895년 10월 14일 니키슈의 상임지휘자 취임 콘서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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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니키슈와 베를린 필하모닉
니키슈는 뷜로 시절부터 해오던 기존 레퍼토리에 뷜로가 개인적인 문제[1]로 다루지 않았던 바그너 리스트, 브루크너 등을 레퍼토리에 추가했다. 특히 브루크너 교향곡 제7번의 초연자이기도 했던 니키쉬는 당시 막 독일 청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던 브루크너를 1896년 브루크너 서거를 계기로 주기적으로 레퍼토리에 올리며 브루크너를 베를린 필의 주요 레퍼토리에 편입시켰다. 또 차이콥스키, 드보르자크 등 당대 러시아/동유럽 작곡가들의 곡목도 자주 연주했다. 오늘날 그의 레퍼토리는 보수적인 편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는 당시의 최신 현대 음악도 제법 다루었다.

니키쉬 취임 이후 베를린 필은 해외 순회 공연을 가지기 시작했다. 1896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가졌고, 이듬해 프랑스 순회 공연을 떠났다. 아직 보불전쟁의 여파로 프랑스에서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던 시기라 조심스러워 했으나,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연주회 며칠 전 일어난 파리의 화재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단원들이 기립하여 베토벤 영웅 교향곡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하여 파리 시민들을 감동케 했다. 이후 유럽 각지에서 초청되어 주기적으로 해외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 여파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상당수의 오케스트라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베를린 필은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도 많은 공연을 이어갔다. 오히려 전시 위문 공연 등으로 콘서트 횟수가 늘어났다고 한다. 물론 단원들과 지휘자들은 전시기간 동안 봉급 삭감에 동의했고, 콘서트의 상당수는 자선공연이었다. 베를린 필은 독일의 다른 일반적인 오케스트라들과 달리 징집에서 특혜를 받아 콘서트마스터와 수석급들은 징집되지 않았으며, 징집된 단원들도 일반인의 절반 기간만 복무하는 특혜를 누렸다. 니키슈는 그동안 활발히 객원 활동을 하던 미국과 영국에서의 공연이 모두 중단되면서 오히려 모든 음악적 역량을 베를린과 라이프치히에 집중하게 되었다. 베를린 필 입장에서도 해외 객원 지휘자나 협연자를 초빙하기 어려워졌기에 대부분의 공연을 니키쉬와 전임임휘자(resident conductor) 카밀로 힐데브란트(Camillo Hildebrandt)[2] 두 사람이 나누어 지휘하였고, 협연은 베를린 필의 콘서트마스터들과 수석 연주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은 프랑스, 러시아 등 상대국들의 곡 연주가 크게 줄어들고 대부분 독일-오스트리아 표준 레퍼토리 곡들로 구성되었는데, 오히려 콘서트는 성황을 이루었고, 독일인들은 베를린 필의 연주에서 애국심과 위로, (추모콘서트에서) 애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베를린 필은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방문하여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공연하며 동맹국간의 단합과 우호를 증진하는데 기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천문학적인 배상금이 부과된 독일은 경제가 파탄나고 각종 봉기와 혁명으로 정치적으로 엄청난 혼란과 갈등에 휩싸였다. 이 시기 베를린 필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아르투르 니키슈는 1922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니키슈의 재임 기간에도 계속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가 자신들의 작품을 지휘했다. 1900년 12월 1일에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필하모닉과 생상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다. 1908년 1월 23일에는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후에 상임지휘자로 선출된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1917년 12월 14일 첫 콘서트를 가졌다.

2.4.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재임기

1922년에 니키슈가 라이프치히에서 사망하자, 그 해 10월 9일 3대 상임지휘자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임명되었다. 당시 30대에 불과한 젊은 지휘자였기 때문에 노장 단원들이나 애호가들의 우려도 많았지만, 이내 전임자들의 카리스마에 지지 않는 지도력으로 잠재웠다. 푸르트벵글러 역시 전임자들의 레퍼토리를 거의 모두 이어받았고, 동시에 당대 작곡가들이었던 파울 힌데미트 버르토크 벨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모리스 라벨 등의 따끈따끈한 신작들을 독일 초연 혹은 세계 초연하는 등 한층 더 확장시켰다. 또한 필하모닉 사상 처음으로 공연 실황을 라디오 방송으로 내보냈다. 연주한 곡은 말러 교향곡 2번[3]. 이처럼 1920년대의 젊은 푸르트벵글러는 정통적인 레퍼토리 뿐만 아니라 당대의 현대 음악을 연주하는데도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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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푸르트벵글러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을 당시 베를린 필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인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독일 경제는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초인플레이션을 겪으며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필은 순수 민간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당시 지방의 국립 오페라 극장보다 훨씬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푸르트벵글러가 취임했던 1922년말 독일 경제 상황과 함께 베를린 필의 재정적 위기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당시 베를린 필과 협연했던 협연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협연료를 악단에 재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의 재정 적자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고, 단원들의 급료가 몇 개월치나 밀렸다. 이에 정부가 베를린 필을 위한 긴급 지원금을 승인했지만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순식간에 휴짓조각이 되고 말았다. 1923년 화폐 개혁과 1924년 도스 안의 통과로 독일 경제는 안정세에 접어들게 되었다. 베를린 필 단원들의 처우도 개선되었지만 오페라 하우스에 소속되어 있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등에 비해서는 처우가 좋지 않았다. 이에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은 니키쉬 시절부터 시작된 순회 연주회를 시작했고, 이를 통해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베를린 필은 스위스, 이탈리아, 체코, 헝가리, 덴마크에 연주여행을 다녀왔다.

푸르트벵글러는 1924년 영국 런던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하여 큰 반향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지 9년 후인 1927년 영국에 처음으로 초청되어 런던과 맨체스터 등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베를린 필과 푸르트벵글러는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거의 매년 영국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해마다 영국 투어 규모는 커졌는데, 이를테면 1931년 베를린 필은 영국 7개 도시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의 영국 순회공연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193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1937년 런던 퀸즈홀에서 퀸즈홀 합창단과 공연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은 EMI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어 음악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28년 베를린 필과 푸르트벵글러는 제1차 세계대전 이래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로 초청받아 연주여행을 떠났다. 파리를 비롯해 리옹, 마르세유, 스트라스부르, 니스 등에 열린 베를린 필 공연은 큰 성황을 이루었고, 이에 푸르트벵글러는 프랑스-독일 관계를 개선한 공로로 푸르 르 메리트 평화 훈장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 베를린은 예술계의 중심도시로 떠올랐다. 당시 베를린 국립(주립)가극장에 에리히 클라이버, 베를린 시립가극장에 브루노 발터, 베를린 크롤가극장에 오토 클렘페러가 음악감독이 되면서 베를린은 세계적인 음악도시가 되었다. 이 정점에 있었던 것은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이었다. 이들은 베를린의 다른 악단을 객원 지휘하며 경쟁했고 베를린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이를테면 어떤 베를린 시민은 푸르트벵글러보다 브루노 발터의 베를린 필 공연을 더 높이 치기도 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프리츠 부쉬 등 독일 유수의 지휘자들이 객원 지휘를 하기 위해 베를린을 찾았다.

그러나 이때 크리티컬 히트였던 세계 대공황이 터지며 자주 운영 악단으로 출발한 베를린 필도 심각한 운영난에 직면했고, 해체 위기까지 갔었다. 결국 악단이 택한 길은 베를린 시와 독일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요청하고, 그 대신 시와 국가에서 요구하는 특별 연주회들에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시영/국영화 조치였는데, 그 시점이 하필이면 나치가 정권을 잡기 직전이라 문제였다.

2.5. 제국 관현악단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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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제국 시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푸르트벵글러
결국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정식으로 '제국 관현악단(Reichsorchester)' 이라는 칭호를 받아 국영화 되었고, 동시에 단원 전원의 병역 면제 혜택도 주어졌다.[4]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한 것은 결코 아니었고, 특히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유대인 혹은 유대계 단원들을 짜르고 멘델스존 등 유대인 작곡가 작품의 연주를 금하라는 정부 방침에 항의하며 저항하다가, 1934년에 사임하게 된다.

악단 입장에서는 푸르트벵글러가 있고 없고에 따라 수익이 크게 달라지는 현실도 있었고,[5] 뉴욕 필하모닉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옮기려던 계획도 정부의 교묘한 방해와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취소되자 괴벨스와 명예 회복과 임금 인상 요구 등의 합의를 본 뒤 1935년에 무대에 복귀했다. 하지만 공식 상임지휘자직에는 복귀하지 않았다. 비록 정치적인 이유에서 상임지휘자직에 복귀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정기 연주회는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했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단원 선발을 포함해서 악단 운영 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히려 푸르트벵글러는 그 명성과 베를린 시민들의 지지, 단원들의 존경 등으로 이전보다 더 큰 음악적 권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는 기간 동안 작곡을 구실로 수개월간 칩거하는 등 여전히 나치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전쟁이 터지자 베를린 필과의 공연 횟수도 예전 만큼 빈번하지는 않게 되었다. 때문에 한스 크나퍼츠부쉬, 칼 슈리히트, 헤르만 아벤도르프, 클레멘스 크라우스, 요제프 카일베르트, 칼 뵘, 오이겐 요훔 등 다른 객원 지휘자들이 많은 스케줄을 소화했다. 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등이 이 시기에 베를린 필에 데뷔했다. 해외에서 빌렘 멩겔베르크, 빅토르 데 사바타, 토머스 비첨 등을 초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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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월 8일,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첫 콘서트를 가졌다.
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33번,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모음곡 2번, 브람스의 교향곡 4번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도 공연은 예정대로 계속 진행되었고, 국립화 계약 조건에 따라 정기 연주회 외에 나치 관제 노동 단체인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주최의 특별 공연이나 점령지의 독일군, 히틀러 청소년단 등을 위한 위문 공연 등을 수행했다. 이런 관제 연주회는 푸르트벵글러가 맡지 않았기 때문에 오이겐 요훔을 비롯한 소장파 지휘자들에게 많은 기회가 돌아갔다. 1942년 초반 부터는 제국 방송국이 새로 도입한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인 마그네토폰(Magnetophon)으로 정기 연주회의 실황이 녹음되기 시작했다.

한편 푸르트벵글러는 1942년 스웨덴에 지휘를 하러갔다가 전장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는데, 전장에서 젊은이들이 고국을 위해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체험한 후 심경 변화를 일으켰다. 이때 일종의 뜨거운 애국심을 느꼈다고 술회한 푸르트벵글러는 이전과 달리 베를린 필과 적극적인 공연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공습 위험에도 불구하고 단원들, 그리고 청중들과 함께 생명을 담보로 음악회를 열었다. 실제로 공습으로 연주회가 중단된 적도 몇 차례 있었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선전 목적이 있는 음악회 출연 요구를 기피했으나 1942년 이후에는 몇몇 공연에 선별적으로 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드문 케이스였고, 나치 선전 음악회는 여전히 대부분 다른 객원 지휘자들이 이끌었는데, 오이겐 요훔, 클레멘스 크라우스, 한스 크나퍼츠부쉬, 헤르만 아벤도르프 등이 돌아가며 순회공연을 이끌었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이 공연한 연주회의 일부는 당시 새로 개발된 마그네토폰의 우수한 음질로 녹음되었다. 종전 후 소련이 베를린 방송국에 보관되어 있는 이 테이프들을 모조리 압수해 갔다. 이후 냉전기에 소련국영음반사인 멜로디아를 통해 이 음원들이 제한적으로 발매되었는데, 서방에서 소위 푸르트벵글러의 전시녹음이라 불리며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었다. 나중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냉전이 끝나던 1989년 소련 정부가 서독 정부에 이 전시녹음의 디지털 사본을 반환했고, DG를 통해 전세계에 공개되며 푸르트벵글러 붐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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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의 공습으로 파괴된 옛 필하모니

한편 전쟁 후반기인 1944년 1월 30일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주요 공연장인 필하모니가 잿더미가 되었고[6], 특히 필하모니의 파괴로 악기와 악보가 상당 수 유실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종종 비시즌기 동안 피난지에서 공연이나 방송 녹음을 한 것 외에는 계속 베를린을 본거지로 삼았고, 1945년 2월 푸르트벵글러가 스위스로 피신한 뒤에도 베를린 전투 종료 직전까지 다른 지휘자들의 객원 출연으로 계속 공연을 진행했다.

3. 2차대전 후부터 지금까지

3.1. 종전 직후 레오 보르하르트 임시 재임기

일단 베를린 필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동베를린이 아닌 서베를린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베를린 필의 본거지인 필하모닉 홀이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거의 경계지역에 있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서베를린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서베를린은 동독에 둘러쌓인 섬과 같은 곳이었으며, 냉전 당시 소련과 동독의 군사적 위협을 직접적으로 받고있던 곳이었다. 베를린 봉쇄, 베를린 장벽 설치 등의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때문에 냉전 시절 일부 유명 음악가들이 전쟁의 위험 때문에 베를린 필을 기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생존한 단원들이 다시 모여 활동 재개를 시도했는데, 상임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나치 부역 혐의로 국외 여행이 제한되고 있어서 다른 지휘자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나치 당적을 갖고 있었거나, 친나치 성향이 강했던 단원들도 강제로 퇴단 조치를 받았다. 전쟁으로 도시가 폐허가 된 데다가 연합군 군정과 소련 군정이 서로 으르렁대면서 아직 준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었던 베를린의 상황 때문에 베를린 필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필하모니 홀이 파괴되어 연주할 장소도 없었으며, 지휘자도 없었다. 푸르트벵글러 뿐만 아니라 카라얀, 뵘, 크나퍼츠부쉬 등 독일 국내에 있던 지휘자들은 모두 나치 부역 혐의로 지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외에 있는 지휘자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데, 도움을 요청받았던 발터, 셀 등 해외에 있던 지휘자들은 형편없는 개런티 때문인지 줄줄이 베를린 필의 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나치 시기에 '달갑지 않은 인물' 로 찍혀 은둔하던 러시아 출신의 지휘자 레오 보르하르트에게 임시로 상임지휘자를 맡기로 했다. 러시아 태생의 보르하르트는 소련군정 측과 러시아어로 원할하게 의사소통했으며, 이에 소련군정은 보르하르트가 지휘를 맡는 조건으로 베를린 필의 공연 재개를 흔쾌히 허가해 주었다.

이렇게 보르하르트 덕분에 소련군정의 허가를 얻어 종전 후 불과 6주 뒤 영화관이었던 티타니아 팔라스트에서 전후 첫 공연을 개최했다. 보르하르트는 나치 시기 동안 연주가 금지되었던 유대인/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부활 공연하는 데 주력했지만, 몇 차례의 공연 뒤 한 연합군 병사의 오인 사격으로 1945년 8월 23일 사망하면서 지휘자 자리가 또 공석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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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중인 레오 보르하르트

3.2. 세르주 첼리비다케 임시 재임기

후임은 당시 베를린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루마니아 출신의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맡았는데, 첼리비다케 역시 임시직이었고 보르하르트와 마찬가지 역할을 맡았다. 당시 베를린 필은 어려웠던 악단 사정 때문에 격무에 가까울 정도로 수없이 많은 연주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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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 중인 세르주 첼리비다케

3.3.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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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연합국의 제재가 풀리면서 5월 25일 마침내 푸르트벵글러가 2년만에 베를린 필에 복귀했다. 베를린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 열린 복귀연주회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5번과 6번으로 구성되어 나흘간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연주되었다.

한편 1947년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대다수의 독일 지휘자들의 연주 금지령이 해제되면서 오이겐 요훔, 한스 크나퍼츠부슈, 칼 뵘 등 여러 객원지휘자들이 속속 베를린 필과 연주 활동을 재개했다. 또 나치 시기에 미국으로 떠나 관계가 단절되었던 조지 셀, 브루노 발터 등도 미국에서 날아와 베를린 필을 객원지휘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또 베를린 봉쇄라는 위기를 겪으며 전운이 감돌자 베를린 필은 또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 봉쇄 상황에 있었기에 지휘자나 협연자들이 베를린으로 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푸르트벵글러도 자주 베를린 필을 지휘하러 오기 힘들었고, 첼리비다케도 이 시기 즈음부터 베를린 필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요훔 등 객원 지휘자들이 연주회를 취소하기도 했다. 덕분에 대타로 신예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와 페렌크 프리차이 등이 베를린 필에 데뷔하기도 했다.

첼리비다케는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하더라도 자신이 베를린 필에서 2인자의 지위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여러 쟁쟁한 지휘자들이 속속 베를린 필로 복귀하면서 자신의 입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취약했음을 절감했다. 첼리비다케는 해외 오케스트라와의 연주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50년 이후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1953년 이후에는 거의 베를린 필에 뜸해지게 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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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4월, 이집트로 콘서트 투어를 떠났다.
복귀 후 푸르트벵글러는 건강과 작곡을 이유로 베를린 필을 그렇게 자주 지휘하지는 않았다. 상임지휘자 복귀 요청도 몇 차례 고사하다가 베를린 필 창립 70주년인 1952년에야 공식적으로 상임지휘자 직책을 회복했다.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가 더 많은 연주회를 이끌기를 원했고, 푸르트벵글러에게 좀더 자주 공연을 지휘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한편 푸르트벵글러는 전후에 음반사 EMI와 계약했는데, 당시 EMI가 동독군의 소련제 탱크로 포위되어 있던 서베를린에서의 녹음을 기피하고 빈 필과 주로 녹음을 진행했기 때문에 전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은 정규 녹음을 별로 남기지 못했다. 1953년 베를린에 본사가 있던 DG와 푸르트벵글러가 단기 계약을 맺으면서 베를린 필과 함께 슈만 교향곡 4번, 슈베르트 교향곡 9번, 하이든 교향곡 88번 등을 녹음했는데, 이 음반들은 오늘날에도 명연주로 손꼽히고 있다.

상임지휘자로 복귀한 후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 전용홀 건립을 위한 자선음악회를 기획하는 등 베를린 필과의 활동에 보다 의욕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으나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1953년 빈 필과의 연주회 때는 지휘 도중에 졸도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푸르트벵글러는 청력이 크게 악화되었는데 이 때문에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54년 9월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과의 리허설 도중 더이상 정상적인 지휘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자리에서 단원들에게 작별의 말을 남긴 채 지휘대를 떠나 사실상 은퇴 상황에 들어갔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후임 지휘자를 선정하지 않은 채 앞으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그의 회복을 기다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때 베를린 필의 주요 객원지휘자였던 첼리비다케는 단원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지휘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등 단원들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54년 11월 30일 리허설에서 단원들과 격렬한 언쟁을 벌인 후 베를린 필과 완전히 결별하고 말았다. 같은 날(11월 30일) 푸르트벵글러가 폐렴으로 사망했다.

3.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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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푸르트벵글러가 서거한지 약 2주가 지난 1954년 12월 13일 베를린 필 단원들은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새로운 상임지휘자로 결정했다. 카라얀은 1955년 초 베를린 필의 역사적인 첫 미국 공연을 이끌면서 상임지휘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했다.[8] 한편 이 미국 공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을 맞아 베를린 봉쇄 위기 때 미국이 서베를린을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등 여러 뜻 깊은 의미가 담긴 공연이었으며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직접 나서 베를린 필의 미국 공연 준비를 챙길 정도였다.[9]

카라얀은 계약 기간을 종신으로 할 것을 관철하여 '종신 예술 감독' 이라는 지위까지 겸했고, 1989년까지 약 35년간 상임지휘자 자리에 있었다. 카라얀은 도이체 그라모폰 EMI 등의 음반사에 수백 장의 음반을 취입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고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콘이 되었다. '미디어의 남자'라는 별명답게 카라얀은 영상물 제작에도 앞장 섰고, 녹음 엔지니어링에도 참여했다. 역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들 중 어떤 인물도 이만큼 광범위한 활동을 펼친 이는 없었다. 카라얀이 클래식의 대중화를 선도하면서 베를린 필 역시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알게 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고 베를린 필 그 자체가 브랜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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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작업 중인 카라얀
제2차 세계대전 때 구 베를린 필하모니(홀)이 파괴된 후 베를린 필은 한동안 상주공연장 없이 티타니아 팔라스트 등 비전문 공연장에서 정기연주회를 열어야만 했다. 새로운 상주홀 건립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고, 이에 푸르트벵글러가 새로운 상주홀 건립 추진 계획을 세웠으나 그의 서거로 이 일은 후임자인 카라얀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새 필하모니 홀을 위한 설계안이 공모되어 카라얀과 전문가들에 의해 한스 샤룬의 설계가 선정되었다. 1960년 10월에 새 필하모니의 초석이 놓였고, 3년 뒤인 1963년 10월 15일 새 필하모니가 개장했다. 아침에 개장식이 열렸고, 저녁에는 카라얀의 지휘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공연되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는 상임지휘자인 카라얀 이외에 오이겐 요훔, 카를 뵘, 라파엘 쿠벨릭, 존 바비롤리, 오토 클렘페러,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칼 슈리히트, 한스 크나퍼츠부쉬, 요제프 카일베르트, 루돌프 켐페, 조지 셀, 에두아르드 판 베이눔, 로린 마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등이 주요 객원지휘자로 초빙되어 여러 공연을 지휘했다. 특히 카를 뵘 오이겐 요훔은 베를린 필과 많은 녹음을 남겼을 뿐만아니라 미국 순회공연 등에 카라얀과 동행하여 카라얀이 서지 않는 소도시 공연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얀은 일본 순회공연 만큼은 빡빡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모든 공연을 다 지휘했다.

훗날 베를린 필의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는 주빈 메타,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오자와 세이지,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등 신예 지휘자들이 1960년대에 베를린 필에 데뷔했다.

베를린 필은 1950년대 초반, 베를린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DG)과 전속 계약을 맺고 활발한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하지만 1950년대에는 상임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이 모두 EMI 소속이어서 음반을 녹음하는 데 한계가 많았고 대신 DG의 전속 지휘자였던 칼 뵘, 오이겐 요훔, 페렌츠 프리차이를 중심으로 녹음을 했다.[10] 1950년대 말에는 EMI에서 베를린 필의 첫 베토벤 교향곡 전곡이 녹음되었는데 지휘자는 상임지휘자인 카라얀이 아니라 앙드레 클뤼탕스였다.[11] 1958년 DG와 카라얀의 계약이 성사되면서 이후 클래식 음악의 하나의 상징이 된 카라얀-베를린 필-DG의 음반 녹음이 본격화되었다.

1962년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음반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DG에서 녹음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과 호흡이 완벽해지고 난 후에는 거의 리허설도 안하고 베토벤을 공연했지만 이때 첫 전곡 녹음을 앞두고 카라얀과 베를린 필, 그리고 DG는 베토벤 전곡 녹음을 위해 특별히 독일 전국 투어까지 기획했고 투어에서 여러 차례 공연한 후에야 녹음을 할 만큼 진지하게 임했었다. 이후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DG에서 수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카라얀 이외에도 칼 뵘, 오이겐 요훔, 라파엘 쿠벨릭 등 DG 소속 지휘자들이 베를린 필에서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

콘서트 말고도 오페라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카라얀은 콘서트 전문 오케스트라였던 베를린 필에서 꾸준히 오페라 연주를 시도했다. 1957년 카라얀 자신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에 베를린 필을 데뷔시켰다. 하지만 오페라 연주 경험이 없었던 베를린 필은 처음에는 주로 콘서트를 담당했고 오페라는 호스트 오케스트라이자 카라얀 본인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던 빈 필이 주로 담당했다. 카라얀이 1964년에 빈 국립가극장 음악감독을 사임한 후,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를린 필의 첫 오페라 데뷔가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1964년에는 DG에서 베를린 필의 첫 오페라 음반인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칼 뵘의 지휘로 녹음되었다.[12] 하지만 이 음반에서 베를린 필은 모차르트를 너무 무겁고 근엄진지하게 연주했다는 좋지 않은 평을 들었고, 이 녹음 이후 DG는 한동안 오페라 녹음에 베를린 필을 기용하지 않기도 했다.

카라얀은 1964년 빈 국립가극장을 그만두고 1967년 자신의 기획과 주도로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을 창설하였다. 모차르트 오페라가 큰 비중을 차지했던 기존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에 비해 새로 창설된 부활절 페스티벌은 바그너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오페라 공연을 의도로 만들어졌고 이때부터 카라얀은 본격적으로 베를린 필을 오페라 오케스트라로 기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 4년간 카라얀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매년 한 작품씩 올렸고 공연과 녹음을 병행했다. 음악계에 많은 화제를 뿌렸고, 베를린 필 역사에도 하나의 이정표가 된 중요한 공연 및 녹음이었다. 1970년대에는 이탈리아 오페라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1972년 푸치니 라 보엠 녹음은 베를린 필이 처음 시도했던 이탈리아 오페라 연주였는데, 파바로티 등이 참여한 이 음반은 라 보엠 최고의 명연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칼 라이스터 등의 단원들은 베를린 필 역사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 중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이후에도 바그너 및 모차르트 오페라와 더불어 오텔로, 일 트로바토레, 돈 카를로스, 토스카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녹음, 공연되었다. 이처럼 오페라 공연이 꾸준히 시도되면서 베를린 필의 음악적 영역도 크게 확장되었다.

1969년부터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가 열렸다. 마리스 얀손스,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의 유망한 신예 지휘자들이 입상하여 베를린 필과 공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72년 6월에는 '카라얀 아카데미'를 만들어 젊은 음악가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카라얀 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음악가들은 베를린 필 단원으로 입단하거나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베를린 필 주요 단원들은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게 되면서 수입이 증대했고, 뛰어난 수석 단원들의 유출을 막는 유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칠 것 없던 카라얀도 1970년대 후반부터 여러 차례 척추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13] 1983년에는 여성 클라리넷 주자인 자비네 마이어 입단을 둘러싸고 단원들과 크게 갈등을 빚게 되었다.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 표면적으로 막 수습되던 1984년 10월 2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 공연을 가졌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수습되었으나, 카라얀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활동을 늘려갔다. 베를린 필 또한 프리미엄 개런티를 포기하면서까지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전속 계약을 파기하고 카라얀이 아닌 다른 객원지휘자들과 음반 녹음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카라얀이 건강상의 이유로 연주회를 취소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일부에서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힘겨루기로 해석하기도 했으나 카라얀이 진심으로 좋아했던 일본 순회공연이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까지 취소했기 때문에 정말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카라얀은 건강상의 이유로 1986년 일부 정기연주회와 일본 순회공연과 미국 순회공연 지휘를 취소했다. 이로 인해 베를린 필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상임지휘자가 동행하지 않은 채 연주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오자와 세이지와 제임스 레바인이 카라얀을 대신해서 순회공연을 지휘했다. 독일 국내 순회공연에서는 주빈 메타 등이 일부 공연을 카라얀을 대신해서 지휘했다.

1980년대에는 클라우스 텐슈테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로린 마젤, 오자와 세이지, 다니엘 바렌보임, 리카르도 무티, 주빈 메타, 제임스 레바인 등이 주요 객원지휘자로 자주 무대에 올랐고, 이중 비교적 연배가 젊은 로린 마젤, 오자와 세이지, 다니엘 바렌보임, 리카르도 무티가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군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밖에도 1985년 베를린 필에 데뷔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세묜 비쉬코프도 차기 지휘자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실내악 홀이 완공되었다. 개관 연주회에서 비발디 사계를 연주했다.

1989년 4월 카라얀이 건강상의 이유로 34년만에 상임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퇴한 지 석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89년 7월 잘츠부르크에서 타계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베를린 필하모닉,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클래식 음악을 대표하는 3화음이다. 이번 연주는 1967년 필하모니에서 열린 제야 음악회로 군둘라 야노비츠, 크리스타 루트비히, 제스 토머스, 발터 베리가 독창자로 함께했다. 이 자료는 카라얀이 연주한 교향곡 9번의 첫 비디오 영상으로, 그의 영화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의 영상 소개

3.5. 클라우디오 아바도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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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중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1989년 4월 카라얀이 상임지휘자를 사임한 후에도 베를린 필은 공식적으로 후임 지휘자를 인선하려는 움직임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7월 카라얀이 서거하자 후임 인선에 대한 토론이 본격화되었다. 10월, 창단 이래 최초로 단원들의 투표를 거쳐 이탈리아 출신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상임지휘자로 발탁되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맞아 다니엘 바렌보임과 베를린 필은 베를린 장벽 붕괴 발표 3일만인 11월 12일 낮에 '동독인들을 위한 특별 콘서트'를 열었다. 입장료는 전석 무료였다. 바렌보임 자신의 협연과 지휘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베토벤 교향곡 7번 등을 연주했다.

1989년 12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상임지휘자로서 첫 공식 연주회를 지휘했다. 말러 교향곡 1번 등이 연주되었으며, 이 연주는 음반과 DVD로 발매되어 호평을 받았다.

1989년 송년음악회(질베스터 콘서트)는 상임지휘자 교체기였기에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후보 중 한 사람이었던 세이지 오자와가 지휘했다.

1990년 4월 베를린 필의 역사적인 이스라엘 공연이 이루어졌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 및 협연을 맡았다. 4월 18일에는 주빈 메타의 지휘로 이스라엘 필과 베를린 필의 합동 공연이 열려 베토벤 교향곡 5번을 함께 연주했다. 이스라엘에서 베를린 필 단원들은 텔아비브의 아이슈비츠 박물관에 들려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가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가학의 유물을 참관하기도 했다.

1991년 초부터 1992년 4월까지 상주홀인 베를린 필하모니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지면서 홀이 폐관되었고, 이 기간 동안 베를린 필은 샤우스필하우스에서 공연을 진행했다.

1991년 5월 1일 체코 프라하에서 오이로파 음악회(Europa Konzert)를 처음 열었다.[14] 이후 매년 5월 1일 유럽의 각 도시의 명소에서 돌아가면서 콘서트를 여는 것이 정례화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다니엘 바렌보임,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주빈 메타 등 베를린 필의 주요 지휘자들이 매년 돌아가면서 지휘를 맡았다.

1990년대에는 상임지휘자인 아바도 외에 다니엘 바렌보임,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오자와 세이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게오르그 솔티,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등이 자주 베를린 필 무대에 올랐다. 1990년대 후반에는 귄터 반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도 주요 객원지휘자가 되었다.

아바도는 기존 레퍼토리 외에 슈톡하우젠이나 노노, 헨체 등의 현대 작품으로 영역을 확장하거나 문학/미술과 연계한 독특한 컨셉의 공연 등으로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현대 음악 외에는 주세페 베르디의 음악을 베를린 필의 주요 레퍼토리를 만들었다.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아닌 연주회 전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은 이전까지 베르디를 연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재임 기간 동안 베르디는 베를린 필이 가장 자주 연주하는 작곡가 중 한명이 되었다. 전형적인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는 교향곡이나 협주곡 등을 남기지 않아 연주회에서 베르디를 연주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아바도는 베르디의 작품을 발췌하여 정기연주회, 송년음악회, 오이로파 콘서트, 발트뷰넨 콘서트에서 수시로 연주했다.

그러나 아바도 재임기에 베를린 필은 새로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평단과 언론 및 청중들으로부터 독일 레퍼토리에 정통한 카리스마있던 전임자들과의 비교에 시달렸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명한 정통 레퍼토리를 회피하고 사실상 연주되지 않는 현대 음악을 자주 연주하여 이쪽으로 평가받으려는 것은 비겁하다는 보수적인 평가가 독일 내외에서 일기도 했다. 자주 연주되는 전통적인 레퍼토리와 승부해서 인정받아야 하는데 아바도가 그것을 피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 이와 더불어 문학과 접목하여 레퍼토리를 구성하려는 소위 "문화운동" 역시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단지 같은 소재를 취했을 뿐 음악적으로 완전히 동떨어진 작품을 함께 선곡하여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예를 들어 차이코프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동시에 레퍼토리로 올리는 식이었는데, 두 곡의 소재는 같지만 음악적 지향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를 한 연주회에서 연주하는 것은 그다지 공감을 얻지 못했다. 아바도의 이런 문화운동에 대해 '디 차이트'지는 "세련된 밀라노의 교양인인 아바도가 야만적인 베를린 청중들을 얼마나 개화시켰나?"하고 반문하기도 했다.

음반 평가에서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는데, 취임 공연인 말러 교향곡 제1번이 큰 히트를 쳤지만 이후에 발매된 음반들은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93년 베를린 필과의 두번째 말러 녹음인 제5번 교향곡이 큰 기대 속에 발매되었다. DG사가 새로 개발한 4D 방식의 녹음이라는 점을 앞세우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이 음반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녹음한 당해에 편집을 끝내고 발매되었다. 이 음반은 유래없이 논쟁적인 리뷰들을 양산했다.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은 연주였지만, 문제는 말러 교향곡 제1번의 큰 성공으로 음악 애호가들이 기대가 너무 높아졌던 데 있다. 결국 아바도의 새 말러 5번은 번스타인과 빈 필의 음반과 비교당하며 난도질 당하고 말았다. 이후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녹음들은 리뷰어들에게 이전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DG도 아바도 음반의 마케팅을 크게 줄여서 드보르작 교향곡 제9번과 같은 대작이 소리소문 없이 발매되기도 했다. 이는 음반 판매고의 급감으로 직결되어 아바도와 베를린 필과도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카라얀 시절에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음반, 영상물 취입 및 카라얀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출연하면서 본봉의 다섯배 가량의 부수입을 올렸다. 카라얀 시절 1년에 평균 25개 정도 발매되던 음반은 아바도 시절 연 3회 정도로 급감했다. 수입이 급감하자 여러 단원들이 베를린 필을 퇴단하여 교수나 솔로이스트로 전향했다.

설상가상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아바도와 단원들 사이에 불화가 있다는 루머가 터지기 시작했다. 권위적인 마에스트로들에 익숙했던 베를린필 단원에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악단을 이끌었던 아바도의 등장은 초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으나 시간이 지나자 단원들은 이러한 방식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바도는 종종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고 리허설에서 여러 템포로 시도해 본 후 단원들에게 어떤게 좋을지 물어보곤 했는데, 이런 방식은 오히려 단원들의 불만을 유발했다. 지휘자 본인이 스스로 템포를 결정하지 못하는 태도는 단원들의 신뢰감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리허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1997년에 이르러서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1997년 12월 20일자 '프랑크푸트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지 기사는 베를린 필과 아바도의 리허설 장면을 폭로하여 파장을 일으켰다. 연습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냐고 아바도에게 따지는 단원, 아바도의 리허설 와중에 잡담과 토론하는 단원, 리허설 시간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편지를 쓰는 단원 등의 모습을 공개한 기사가 나오자 아바도의 리더십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베를린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얼마 후, 설상가상으로 베를린 필 측이 아바도의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이후에 더이상 재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이전까지 베를린 필의 모든 상임지휘자는 거의 임기가 종신이었기 때문에 베를린 필이 아바도와 더 이상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이 보도는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 보도가 나간지 불과 며칠 후인 1998년 2월 13일, 아바도는 두번째 임기가 끝나는 2002년 자진해서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2000년에는 희대의 크로스오버 사례로 꼽히는 스콜피온즈와의 협연이 열렸다.[15]. 다만 보수적인 단원들이나 청중, 후원자들은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6]

재계약 포기를 선언한 후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관계는 다소 회복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2000년에 아바도가 위암 수술을 받게 되어 수개월간 스케줄을 비우게 되었다. 수술 후 복귀하면서 바로 베토벤 교향곡 전곡 음반과 영상물을 녹화했는데[17], 영상물에서 공개된 수술 후 완전히 수척해진 모습은 전세계 음악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아바도에 대한 여론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음반과 영상물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아바도의 임기가 끝난 후 베를린 필은 사실상 처음으로 생존해 있는 전직 상임지휘자가 존재하게 되었는데, 퇴임 이후 아바도는 매년 한번씩 베를린 필에 초청되었다. 하지만 일년에도 수차례씩 베를린 필 포디움에 오르는 다른 객원지휘자들에 비하면 다소 형식적인 수준이었다. 나중에 가서는 아바도의 건강 문제 때문인지 이것도 흐지부지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1989년 12월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서의 첫 출발을 말러 교향곡 1번으로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적절한 것이었다. 당시 아바도는 이미 탁월한 말러 지휘자로 여겨졌고, 이 교향곡에는 억제할 수 없는 활력과 출발의 표현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작의 특별한 마법은 지금까지도 이 비디오 자료에서 느껴진다.
―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의 영상 소개

3.6. 사이먼 래틀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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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베토벤을 지휘하는 사이먼 래틀
아바도의 후임은 역시 단원 투표로 영국 출신의 사이먼 래틀이 임명되었다. 래틀 부임과 함께 1930년대 이래 유지되었던 시와 국가의 보조금 제도도 폐지되었고, 창단 초기와 비슷하게 단원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재단법인체로 독립했다. 동시에 독일어 공식 명칭도 '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 에서 'Berliner Philharmoniker' 로 바꾸었다.[18] 워너뮤직과의 레코딩 계약이 종료되면서 본격적으로 베를린 필 자체 레이블이 출범했다.[19]

래틀은 2018년까지 상임지휘자 계약을 연장한 상태이며, 모국인 영국 음악과 아바도 때부터 적극 포함시킨 현대 작품, 고전 작품 등의 곡목을 균등하게 분배해 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다만 2012년 후반 들어 래틀이 2018년 이후 더 이상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사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에, 래틀 이후 누가 수장으로 뽑힐지 관심이 쏠렸다. 2015년 5월에 첫 차기 상임지휘자 선출 투표를 했는데, 외부에서는 크리스티안 틸레만, 안드리스 넬손스, 구스타보 두다멜 등이 유력한 후보가 아니겠냐는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하고 1년 내에 다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이먼 래틀은 안톤 브루크너가 두 달만 더 살았더라면 교향곡 9번의 피날레를 완성할 수 있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2011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래틀은 브루크너의 광범위한 스케치에 기반해 “더욱 통일적이고 위협적인 존재감”('그라모폰')을 드러내는 복원작을 선보였다. 2018년 5월 래틀은 다시 한 번 이 교향곡 완성본을 연주했다.
―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의 영상 소개

3.7. 키릴 페트렌코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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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필하모니에서
한 달 정도 지난 6월 22일 13시(한국 시간 6월 22일 20시)에 다시 투표에 돌입했고, 차기 상임지휘자 겸 예술 감독으로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인 키릴 페트렌코를 선출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왔다. 페트렌코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제의를 수락했다. 기자회견 영상

2019년 6월 7일, 베를린 필은 다니엘 바렌보임을 악단 역사상 최초의 명예 지휘자(Honorary conductor)로 추대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1989년과 1999년 상임지휘자 선거 때 모두 아깝게 떨어져 상임지휘자에 오르지 못했던 과거가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 동안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베를린 필과 함께 했고, 이미 그 공로는 1992년 명예 단원으로 선정되면서 인정받았다.

바렌보임은 인수인계 시즌이었던 2018년 제야음악회 때 지휘를 맡았고, 지휘를 하며 직접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2019년 8월 23일, 필하모니에서 페트렌코의 취임 음악회가 열렸으며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페트렌코는 다음 날인 24일에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같은 곡을 지휘했고 이 때부터 공식적인 상임지휘자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의 마지막 날에 열린 페트렌코의 첫 제야음악회는 미국 뮤지컬 음악을 주제로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와 협연을 가졌다.[20]

2020년 1월 11일 키릴 페트렌코는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협연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바렌보임과 연주한 작품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요제프 수크의 교향곡 2번도 연주되었다. 1월 25일에는 페트렌코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 첫 말러 교향곡을 선보였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말러 교향곡 6번으로만 이루어졌다.

상임지휘자 취임 이전부터 페트렌코는 익숙하고 유명한 대작과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짜는 경향을 보여주었다.[21]

2020년 3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을 막기 위해 4월 19일까지의 모든 공연 일정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디지털 콘서트홀 서비스를 당분간 무료로 제공한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왔음을 예견하는 음악회였다. 키릴 페트렌코가 상임지휘자 취임을 1년 앞두고 2018/2019 시즌 개막 음악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을 지휘했다. “단순한 시작의 마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이 결정적인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포용은 미래에 커다란 결실을 안겨줄 것이다.” (디 차이트)
― 베를린 필하모닉 디지털 콘서트홀의 영상 소개


[1] 뷜로는 원래 열렬한 바그네리안이었지만, 첫 아내인 코지마를 바그너에게 빼앗기자 대번에 반바그네리안으로 돌아섰다. 바그너 외에도 그 쪽 편으로 취급된 리스트나 브루크너, 말러도 대놓고 싫어했다고 한다. [2] 상주지휘자로 해석할 수 있으나 국내에서 주로 전임지휘자로 번역표기함. 베를린 필 공식 홈페이지 참조. [3] 1924년 10월 2월에 하인츠 웅거(Heinz Unger, 1895~1965)라는 지휘자가 지휘한 연주회였는데, 안타깝게도 이 연주회의 녹음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족으로 푸르트벵글러는 작곡가 말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4] 이는 대단히 중요한 특권이었다. 2차대전의 전황 악화로 요제프 괴벨스가 '국민 총동원령' 을 선포하자 수많은 음악인들이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전사의 위험은 면한 셈. [5]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을 사임한다는 발표가 나자마자 공연 입장권 환불 소동이 벌어졌고, 잡혀 있던 해외 공연 일정도 취소되거나 축소되었다. [6]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2월 3일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7] 첼리비다케는 이탈리아 객연에서 호평받은 후 1950년대초부터 언어적으로 유사한 이탈리아를 본거지로 활동했다. 자택도 베를린에서 이탈리아로 이사했다. [8] 다만 이때 계약상의 세부사항을 조율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상임지휘자 계약이 체결되지는 않았지만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지명되었다고 언론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9] 아데나워 총리는 1954년말 건강이 악화되어 칩거 상태에 들어간 푸르트벵글러에게 미국 투어에 동행해 달라고 직접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0] 푸르트벵글러와 EMI의 계약이 끝난 틈을 타 1953년 하반기에 푸르트벵글러와 단발성 계약을 맺고 베를린 필과 여러장의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으나 연말에 푸르트벵글러가 EMI와 다시 재계약하고 말았다. [11] 카라얀은 이미 1950년대 중반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12] 베를린 필의 첫 오페라 녹음으로 1937년 토마스 비첨이 지휘한 EMI의 마술피리 음반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베를린 국립가극장이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카라얀의 허리가 좋지 않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베를린 필 포디엄에서 2차례나 뇌졸중으로 의심되는 졸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카라얀 본인이 이 사실이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14] 정식 명칭은 독일어로 Europa Konzert. 영어로는 Europa Concert라 표기하여 2010년대 중후반까지 사용해 왔으며, 각종 DVD나 포스터에도 이 같은 영문 표기가 사용되어 왔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는 오이로파 콘서트 혹은 유로파 콘서트라고 주로 불렀다. 그러다가 최근에 베를린 필 홈페이지에서 European concert라 표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매체를 통해 Europa Concert라는 표기가 굳어진 상태. [15] 마침 2000 하노버 엑스포가 열렸는데, 하노버 출신인 스콜피온즈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 앨범 Moment of Glory를 제작한다. [16] 반대로 대중음악계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크로스오버 음반으로 손꼽힌다. [17] 베렌라이터 신판을 사용했다. [18] 사실 그 이전에도 많은 음반들에는 대부분 후자의 표기가 쓰였지만, 음반이나 방송 출연 때만 사용하는 비공식 명칭이었다. [19] 이미 여러 오케스트라가 자체 레이블을 통해 녹음을 내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약간 늦은 감이 있다. [20] 이번 제야 음악회는 미국 음악으로만 구성되었다. 디아나 담라우는 ‘ 마이 페어 레이디’, ‘ 오즈의 마법사’, ‘회전목마’ 등의 뮤지컬 넘버를 소화했다. 또한 오케스트라는 조지 거슈윈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레너드 번스타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교향적 춤곡)’ 등 인기 있는 현대음악을 선보였다. [21] 알반 베르크의 '룰루' 모음곡과 그 유명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함께 연주한 '취임 음악회', 요제프 수크의 교향곡 2번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동시에 선보인 ' 다니엘 바렌보임 협연 음악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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