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 Carlo (이탈리아어 표기)
1. 개요
주세페 베르디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운문 사극을 바탕으로 작곡한 오페라. 베르디가 자신의 커리어 중기 막바지에 들어설 때에 작곡된 것이다.베르디가 만든 오페라 중에선 다소 특이하게 여러가지 판본이 나와있는데[1], 5막짜리 프랑스어판이 가장 먼저 나온 오리지날 판본이며, 이탈리아어로 가사 전체를 고쳐서 4막으로 줄인 버전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5막짜리 프랑스어판을 이탈리아어로 완전히 바꾼 버전 이렇게 세 가지가 존재한다. 세 가지 판본 모두 인지도 있지만 4막 버전이 가장 널리 연주된다.
이러한 배경으로 제목 또한 돈 카를로(Don Carlo)와 돈 카를로스(Don Carlos)가 혼용되고 있다.
2. 작곡 계기
베르디는 1861년 11월 22일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와 베를린을 거쳐 12월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다.새 오페라인 운명의 힘의 연습은 순조로웠지만 프리마돈나가 러시아의 겨울 온도탓에 병에 걸리면서 공연이 틀어지게 되며 공연을 대신할 배우가 없자 공연은 내년 가을로 미뤄지며 베르디는 연습만 하고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다.하지만 본인의 고향인 부세토로 돌아가자마자 1862년에 열리는 런던 만국 박람회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바로 떠난다.박람회를 위해 시사적인 오페라를 써야했던 베르디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국가를 대표한다는 의미에 3국 찬가에 시인 보이토의 시를 붙여 찬가를 만들었다.하지만 런던에 도착해보니 나폴리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미켈레코스타의 술수로 연주가 불가능하자 박람회장이 아닌 왕립 극장에서 이를 연주해야만 했다.
다시 러시아로 간 베르디는 운명의 힘 연습을 별탈없이 할수있었고 공연도 대성공에 막을 내린다.[2]거기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공연 연출비 20만 프랑을 지급하는등 엄청난 보상까지 이어졌다.베르디는 러시아를 떠난뒤 파리로 가는데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운명의 힘을 올리자고 제안하나 베르디가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를 올리자고 하여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지휘자가 연주 속도가 느리다고 지적하자 이에 화가 난 베르디는 다시 이탈리아로 떠난다
몇 달후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새 감독인 페렝이 4만 프랑의 작곡료를 제시하여 베르디에게 새 오페라를 제안하게 된다.베르디는 처음에는 거절 했지만 요청을 받아들여 오페라의 새 대본을 구해달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오페라의 시작이라고 볼수있겠다'
1866년에 베르디는 새 오페라 대본작업에 들어갔고 이시기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베네치아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하게된다.정치적 일에만 관심이 많던 베르디의 이런 성향탓에 작곡은 늦게 끝났고 연습도 늦게 시작되었다.
3. 초연
1867년 3월 11일 마침내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 3세와 그의 황후, 그리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공연된다.관객들은 열광적인 환호대신 존경을 표하는 박수를 쳐주었는데 이는 황후가 하필이면 왕과 종교 재판관의 대립장면에서 굉장히 불쾌한 내색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필 황후 때문에 눈치만 보기 급급해서 그랬던것.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바그너 음악에 대해 가장 배타적이었던 프랑스 음악계[3]는 돈 카를로 초연 직후 베르디에게 바그너에 물들어서 이탈리아 음악의 전통을 해쳤다는 비난을 했다. 프랑스 작곡가 비제는 "베르디는 더 이상 이탈리아인이 아니다. 그는 이제 바그너의 추종자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바그너에게 매우 민감했던 베르디는 또 다시 바그너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평가를 받자 굉장히 분노했다. 파리에서 여러 일로 괴로웠던 그는 파리를 다시 떠났다.
그뒤 6월 런던에서 상연되는데 이때는 파리에서와는 달리 엄청난 환호를 받게된다.
4. 다양한 버전
위에서 소개글에 써져있듯이 돈 카를로스는 5막으로 이뤄진 파리 초연판, 4막[4]으로 구성된 밀라노판, 5막으로 구성된 모데나 판본이 있다. 허나 이렇게 세 가지 라는게 아니고 파리판에서도 발레부분이 들어가고 로드리고의 죽음 장면 후 구슬프게 흘러가는 라크리모사가 들어간 버전[5]이 있고, 발레만 들어간 버전이 있으며 4막짜리 악보에서는 발레랑 라크리모사가 아예 잘린 버전과 발레가 들어간 버전이 존재하고[6] 5막 모데나 버전에서는 발레를 생략하고 라크리모사를 넣은 버전과 혹은 발레와 라크리모사를 모두 수록한 버전, 또는 파리 초연때의 멜로디를 그대로 사용한 버전[7]도 있고, 아예 로드리고의 죽음에서 끝나는 3막버전도 존재한다.[8]일반적으로 4막 밀라노 판본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원전을 중시하는 광풍이 불었던 1980년 이전에는 대부분이 4막판으로 공연되었다. 아무래도 첫 퐁텐블로 숲 장면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이질감이 있고 음악적으로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베르디가 굳이 5막으로 만든 것은 그랜드 오페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5막 구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프랑스의 자체적인 룰이 있어 이에 맞추기 위해 어거지로 1막을 더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반드시 발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파리 오페라 공연만의 국룰이었다. 베르디는 파리 초연 이후 이탈리아 공연을 위해서 1막 전체를 들어내고 4막으로 줄였다. 베르디 성향 자체가 오페라에 불필요하게 장황한 걸 늘어놓는 것을 싫어해서 예전부터도 작품에서 불필요하다 싶은 부분은 가차없이 쳐내기를 좋아했다. 그는 가능한 한 연주 시간이 두 시간을 크게 초과하지 않도록 작곡해 왔다. 아이다의 경우 베르디는 원래 9~10분짜리 서곡을 작곡했었는데, 곡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베르디는 끝내 이 서곡이 길이도 길고 가식적이며 우스꽝스럽다는 냉철한 자아비판을 가하며 서곡을 커팅했고, 실제 아이다 공연에서 이 서곡은 결코 연주되지 않는다. 이 버려진 아이다 서곡은 토스카니니가 방송용 녹음을 남겨 감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오텔로의 경우 셰익스피어 원작은 5막인데 1막이 스토리 전개상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적인 측면에서 지루한 흐름으로 가기 때문에 과감히 삭제해 버리고 거두절미하고 원작의 2막부터 작품을 시작했다. 그래서 오텔로는 시작부터 극적인 폭풍우 장면으로 시작하며 명작으로 탄생했다. 물론 원작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나 베르디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돈 카를로는 베르디의 작품 중 가장 연주 시간이 긴 작품이었다. 때문에 베르디는 이 작품의 시간을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번 개정을 했다.
파리 초연 이후 베르디는 이 작품을 4막으로 줄였고 4막 버전으로 나폴리, 밀라노 등 이탈리아 각지에서 상연되었고, 런던 등 프랑스를 제외한 해외에서도 이 4막 버전이 이탈리아어로 연주되었다. 다만 베르디가 만년에 발레가 제외된 5막 보데나 버전을 승인하긴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하는 4막 버전이 거의 표준이 되어 연주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에 돈 카를로의 공연은 드물었다.
4막판과 5막판의 주요한 차이는 가장 앞 부분이기 때문에, 두 버전은 시작 분위기가 무척 다르다. 큰 임팩트 없는 5막판보다 다크한 분위기가 압도하며 시작하는 4막판은 시작부터 그 종막까지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를 이어가며 긴장감이 유지된다. 또 연주시간이 다소 단축되는 효과도 있다. 카라얀이나 리카르도 무티 같은 유명 지휘자들이 4막판을 이용했다.[9]
발레도 생략하고 라크리모사도 생략된 5막 모데나 판본이 그 다음으로 많이 연주되는데, 카라얀과 더불어 돈 카를로스의 명연주로 꼽히는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경우 5막 모데나판을 선택했다.
카라얀은 이 작품이 이탈리아 외부에서 널리 공연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지휘자이며, 녹음도 여러가지가 남아있다. 카라얀은 장엄하고 엄숙하게 시작하는 4막 밀라노판을 채택하여 시종일관 비극적인 분위기를 이어가며 이 작품의 대하사극적 특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베르디의 작품을 연주할 때 웬만하면 오페라에 능숙한 빈 필을 기용하던 카라얀이 돈 카를로스 만큼은 베를린 필을 기용해서 녹음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장엄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잘 드러나며 실제로도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고 있다. 카라얀은 프레니, 카레라스 등 지금도 돈 카를로스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성악가들을 대거 발굴하여 기용했다. 갸우로프는 기존에도 펠리페 2세 역으로 유명했지만, 프레니와 카레라스는 카라얀의 음반을 통해 해당 배역에서 최고의 입지를 다졌다 할 수 있다. 특히 카라얀은 줄리니, 아바도, 레바인 등 주요 음반과 공연에서 타이틀롤을 독식하며 당대 최고의 돈 카를로스로 군림하던 플라시도 도밍고 대신 이 역할에서 덜 알려졌던 호세 카레라스를 기용했는데, 돈 카를로스역 특유의 비극적 정서를 잘 살려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카레라스를 최고의 돈 카를로스로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5막 모데나판을 채택한 줄리니 음반 역시 플라시도 도밍고, 몽셰라 카바예, 셰릴 밀른즈, 루게로 라이몬디, 베렛 등 당대 최고의 성악진을 기용했고, 줄리니의 탁월한 해석은 화룡점정이 되고 있다.
1977-78년 라 스칼라 시즌으로 공연했던 돈 카를로스 실황.
아바도의 뒤를 이어 안토니노 파파노가 이 초연판 악보를 말끔하게 정리한 버전을 연주한 적이 있는데 1996년 샤틀레 공연이 이에 해당된다. 비록 발레가 빠진 버전이지만 오페라 실황으로써는 프랑스어로 연주된 점이라서 의미가 있는 공연이고 당시 신인으로서 상승세를 타고 있던 로베르토 알라냐, 카리타 마틸라, 토마스 햄슨, 발트라우트 마이어와 베테랑이자 원로인 호세 반 담[12]이 출연했다. 당대 최고의 초호화 캐스팅.
이후 역시 파파노가 지휘한 2013년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에서도 흔히 사용하는 모데나판이 아닌 라크리모사가 들어간 판본을 사용했다. 이 실황에서는 요나스 카우프만, 토마스 햄슨, 안냐 하르테로스, 마티 살미넨, 예카테리나 세멘체크가 출연했으니 역시 초 호화진이다. 1996년 샤틀레 실황과 2013년 짤츠 실황 모두 DVD와 블루레이로 출시되었으며 여태 나온 돈 카를로스 실황들 중 보는 몰입과 가수진들의 연기, 음악성 모두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다.[13]
아예 초연 파리버전을 무삭제 완전판으로 공연한 적도 있다. 현재까지는 초연판 악보 그대로 무삭제 공연한것이 2004년 빈 슈타츠오퍼의 페터 콘비취니 포로덕션 공연이 유일하다. 이 공연의 의의는 무려 137년이나 걸려왔던 초연판 그대로 노컷트 공연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통상 자주 삭제되는 3막 1장의 발레음악이나 로드리고 죽음 이후의 라크리모사나 피날레 장면조차 초연판 악보에 있던 것을 그대로 살려있다. 청취적 감상에선 재미없다는 평도 있고, 연출과 무대가 돈 카를로스와는 뭔가 언밸런스하다 라는 평도 많은 공연이지만[14] 137년만에 걸친 오리지날 무삭제 공연이라는 점에서 참고가 될 만한 실황이다.
2004년 빈 슈타츠오퍼 극장 실황에서 돈 카를로스를 맡은 라몬 바르가스와 엘리자베트 역의 라노 타마르
바르가스와 로드리고 역의 보 스코부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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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 정주행하기엔 길이가 만만치 않고, 클래식FM 방송이나 리사이틀 프로그램에 척하면 딱 나오는 아리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이너 요소를 고루 갖추었건만 여성 오타쿠들을 호리는 모에 포인트가 있으니 바로 딴데서 찾아보기 힘든 찐한 브로맨스. 예전에는 오페라 공연의 중추가 가창력 뿐이었지만 지금은 가창력 못지않게 가수의 비주얼도 중요한 요소이고 무대와 의상에서도 다양한 연출이 시도되는데, 브로맨스의 적당한 섹시함을 추구하기에 돈 카를로스야말로 적절한 작품이다. 꼭 연출이 아니더라도 원작이나 대본이나 하여간 적절하다.
바리톤 배역인 포사 후작 로드리고와 돈 카를로가 만날 때마다 브로맨스가 휘몰아치는 명장면들이 나온다. 주거니받거니하는 대사 한마디한마디가 범상치 않고[15], 죽음의 장면에서 두 곡으로 이어지는 애틋한 아리아 "나의 마지막 날(per me giunto)"를 들어보면 확실히 베프 이상의 썸씽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어 행복하다'거나 '나를 잊지 말아요' 등 애절한 대사는 보통 히로인이 치겠거니 하지만 로드리고 대사다.(..) 그러니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토마스 햄슨, 페터 마테이 등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가수들이 이 역으로 무대에 선 모습을 보면 여러 면으로 즐겁다 하겠다. [16]
- 베이스-바리톤 에릭 할프바르손은 안토니노 파파노가 지휘한 세 가지 돈 카를로 실황물에 모두 출연한 적이 있는데 전부 종교재판장 역할이다. 덕분에 오페라 팬들은 할프바르손이 아무리 분장을 다르게 하고 나온다해도 모두 알아본다고 한다. 에릭 할프바르손은 보리스 고두노프 타이틀롤과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도 맡았었지만 정작 대중들에게 알려진 역할은 종교재판장이다.
- 베이스 역할이 세 명이라서 그런지 어떤 극장 공연에서는 종교재판장을 맡았던 가수가 펠리페 2세를 맡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또는 펠리페 2세를 맡는 가수가 종교재판장이 되기도 하고, 수도승을 맡는 경우도 있다. 현역으로 펠리페 2세로 유명한 페루초 푸를라네토의 경우 1983년 메트로폴리탄 실황에선 종교재판장으로 나온 경우가 있었고[17] 1986년 카라얀이 지휘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을 계기로 펠리페 2세를 맡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갸우로프의 경우 스튜디오 음반상에서는 펠리페 목소리를 두 번이나 맡았고[18], 딱 한번 종교재판장의 목소리를 낸 기록이 있다.[19] 1986년 짤츠 실황에서 종교재판장을 맡았던 마티 살미넨은 파파노가 지휘한 2013년 짤츠 실황에서 펠리페 2세로 나왔고, 베이스-바리톤 루제로 라이몬디의 경우 펠리페 2세와 종교재판장, 수도승 역을 모두 맡은 기록이 있다. 베이스 가수 로버트 로이드의 경우 현재는 수도승으로 더 유명하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펠리페 2세로 유명했었다. 호세 반담의 경우 카라얀의 발탁으로 음반과 실연에서 수도승을 자주 맡았었지만 이후엔 펠리페 2세를 자주 맡았었다. 이처럼 베이스 가수들이 번갈아가면서 펠리페와 종교재판장, 수도승을 맡는 것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 실러 원작 팬들은 엘리자베타가 오페라에서 너무 연약하기만 한 청순가련 히로인으로 그려진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원작의 엘리자베타는 정치9단 같은 느낌으로, 침착하면서도 한성깔 하는 인물이다. 왕이 지랄한다고 충격받고 기절이나 하는 멘탈 개복치도 아니다! 요즘은 원작과 비슷한 외유내강형으로 해석하는 쪽이 대세. 오히려 원작에서는 에볼리의 존재감이 약한 편이다.
- 무엇보다도 브로맨스가 아름답게 표현되는 작품이지만 원작자 실러의 해설에 따르면 로드리고 편에서는 자기 이상만 중요하지 카를로 자체에 대한 우정은 1도 없다. 하는 행동을 보면 친구도 아니라고.
- 원작과 오페라에선 돈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타 드 발루아가 서로에게 연심을 품은 관계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다만 두 사람이 매우 친하고 서로를 편안하게 대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이 것이 루머로 변질되고 예술 작품들에서 이를 차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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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흔히 프리마돈나인 소프라노와 그 상대역 테너에게 파트가 치중되고 화려한 고음을 뽐낼 수 있는 아리아가 주어져 작품의 하이라이트가 되는데, 이 작품은 이러한 전형을 이채로울 만큼 완전히 까고 있다. 베르디의 주요 작품들은 대체로 주역들이 아리아와 중창들을 고루 가져갈 수 있도록 균형있는 파트 안배가 되어 있는 편이지만 <돈 카를로>만큼은 소프라노와 테너가 상당히 홀대받는다. 테너 역의 돈 카를로는 타이틀 롤인데도 불구하고 변변한 아리아 하나 없고, 으레 나와주는 소위 '사랑의 이중창'은 존재감이 없다.
대신 우정의 이중창이 있지그나마 엘리자베타의 아리아로 tu che le vanita 한 곡이 있지만 관객이 지쳐가는 막판에나 나오고, 그보다 메조소프라노(에볼리)의 격렬한 아리아 "O don fatale"가 훨씬 유명하다. 멋진 파트라는 파트는 물론 대표적인 아리아마저 진주인공인 바리톤(로드리고)에게 몰빵되어 테너는 힘은 힘대로 들면서 확 주목받을 포인트가 없다.
6. 등장인물 소개
- 필리포 2세( 펠리페 2세) : 에스파냐의 국왕. (베이스)
- 돈 카를로( 돈 카를로스) : 펠리페 2세의 아들. 로드리고 포사 후작의 친구. (테너)[20][21]
- 엘리자베타 드 발루아(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왕비.
- 로드리고(로드리그) : 포사 후작. 카를로 왕자의 친구. (바리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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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볼리(에볼리) : 스페인의 공녀. 펠리페 2세의 정부.
페이크 빌런(메조 소프라노) - 테발도(티볼트) : 엘리자베타 왕비의 시종. (소프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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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장 : 나이많은
가톨릭 교회의 재판장.
펠리페 2세의 말상대.
메인 빌런(베이스) - 수도승 : 선왕 카를 5세의 비슷한 용모와 목소리를 가진 정체불명의 수도승. (베이스)
- 천상의 소리 : 목소리만 나오는 배역. (소프라노)
7. 화보
필리포 2세( 펠리페 2세)역에서 뛰어난 가창을 들려준 니콜라이 갸우로프.[22]
엘리자베타로 분한 미렐라 프레니
필리포 2세로 분한 니콜라이 갸우로프와 엘리자베타로 분한 미렐라 프레니
로드리고 포사 후작으로 분한 피에로 카푸칠리.[23]
로드리고의 죽음. 돈 카를로역의 호세 카레라스와 로드리고역의 피에로 카푸칠리[24]
로드리고로 분장한 셰릴 밀른즈[25]
로드리고로 분한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에볼리 공녀로 분한 그레이스 범브리[26]
최고의 에볼리 공녀라는 찬사를 받은 아그네스 발차[27]
돈 카를로( 돈 카를로스) 왕자로 분장한 호세 카레라스. 역대 최고의 돈 카를로스 왕자라는 호평이 있다.[28]
2013년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 돈 카를로스역의 요나스 카우프만과 엘리자베타 역의 안야 하르테로스. 비주얼 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호평이 많았고 여태 공연되었던 돈 카를로스 공연중 가장 원작에 의도를 잘 반영하려는 부분도 많았다는 찬사를 받은 공연이다.
2013년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의 요나스 카우프만과 로드리고 역의 토마스 햄슨.
현역 중에서 종교재판장으로 자주 맡는 에릭 할프바르손.[29]
[1]
물론, 이전에 나온
일 트로바토레와
시칠리아의 섬의 만종도 다른 판본이 있지만, 이쪽은 대체적으로 오리지날 버전이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2]
다만 이시기에 독일 음악빠 추종자들이 방해를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다.
[3]
당시 바그너가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했던 곳이 파리였다. 바그너는 파리에서 성공하기 위해 2년 가까이 탄호이저를 개작하기도 했다.
[4]
왕자와 엘리자베타가 만나는 퐁텐플로 숲 장면이 잘렸다.
[5]
이 라크리모사는 베르디의 레퀴엠에서도 나오는 음악이지만 원래는 파리판 초연때 로드리고 장면 이후 넣으려고 했던 음악이었으나 리허셜때 베르디가 라크리모사를 잘라버렸다고 한다. 허나, 이 라크리모사를 멜로디 작곡한게 아까웠는지 베르디는 레퀴엠에 그 음을 재탕해서 라크리모사로 사용했다.
[6]
카라얀이 지휘한 1958년 짤츠부르크 실황음반에서는 4막짜리 인데도 발레음악이 추가되어 있다.
[7]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1978년 라 스칼라 돈 카를로 공연이 이 판본을 사용했다.
[8]
이 버전은 내용상의 개연성을 고려해서인지 잘 연주되지 않는다.
[9]
2013년 국립 오페라단이 연주한 돈 카를로스 공연도 밀라노 판본이다.
[10]
무려 발레랑 라크리모사 들어가있고, 피날레음이 요즘 연주되는 것이랑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는 버전이다.
[11]
아바도가 리즈시절에 스칼라좌에서 지휘했던
시몬 보카네그라나
맥베스도 중량급 넘친 성악진들 데려왔음에도 영상물에선 좋은 평은 받지 못한다. 화질과 음질의 열악함은 둘째치고 카메라 워크가 산만함을 보여주고 성악가들이 대부분 목석연기와 짱짱한 노래만을 들려주기 때문이다. 아바도가 지휘한 것 뿐만 아니라 당시 이탈리아 공연 실황들은 연기 지도는 고사하고 카메라 워크가 굉장히 산만하고 노래의 짱짱함을 중시한것으로 유명했는데 카라얀이 지휘한 1977년
일 트로바토레 실황에서 가수들의 연기를 중요시하고 카메라 워크를 자연스럽고 다양하게 잡는 것과는 완전 대조가 되는 부분이라 볼 수 있다. 어찌보면 시대의 한발 앞서 영상물의 시각적 면을 중요시했던 카라얀옹 되시겠다.
[12]
호세 반 담은 카라얀이 지휘한
EMI 스튜디오 녹음에서 수도승의 목소리를 담당했으며 실제 공연에서도 카라얀의 지시로 수도승이나 종교재판장 역으로 나온 경력이 있다.
[13]
파파노가 지휘한 2008년 런던 실황도 좋은 평은 받지만 이 실황은 비야손의 불안한 노래와 킨리사이드의 노래에서 호불호가 갈리며 벨칸토 전문 가수인 소냐 가나시를 기용한것에 찬반양론이 많다. 그 외엔 대체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평이 대부분이지만 DVD로만 출시되었기 때문에 영상물로썬 음향에서 손실을 많이 입었다는 아쉬운 평도 있다. 고집쟁이
EMI
[14]
비쥬얼 얘기지만 라몬 바르가스의 돈 카를로스가 1992년 라 스칼라 공연의 파바로티처럼 너무 후덕하다. 대신, 뻣뻣하게 목석연기만을 보여준 파바로티와는 달리 바르가스의 카를로스는 연출자의 의도대로 순수한 돈 카를로스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는 호평도 있다. 목소리 상태에서도 후에 나오는 2013년 토리노 극장 실황보다 더 괜찮은 노래를 들려준다는 평도 많다.
[15]
얼핏 씩씩한듯 들린다고 해서 '싸나이 기상 으쌰' 이딴 거 아니다. 대충 듣지 말고 반드시 리브레토를 읽으며 듣도록 하자.
[16]
토마스 햄슨은 두 차례에 걸쳐 실황 정규 DVD를 남겼다. 업계의 미남으로 유명한 로베르토 알라냐, 요나스 카우프만과 함께 각각 프랑스어 판, 이탈리아어 판으로 각각 장발, 단발로 둘 다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영상물. 햄슨은 흐보로스토프스키만큼 강력한 얼빠몰이를 하는 가수는 아니나, 우월한 기럭지+휴 그랜트 닮은 미모+부드럽고 촉촉한 미성+섬세한 연기력을 고루 갖춘 로드리고이니 돈 카를로를 파볼 사람은 반드시 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17]
이 공연에서 펠리페 2세를 맡은 가수는
니콜라이 갸우로프였다.
[18]
하나는 솔티가 지휘한 1965년 Decca 음반, 하나는 카라얀이 지휘한 1976년
EMI 스튜디오 음반
[19]
이 음반이 스튜디오 음반 역사상 최초로 연주된 프랑스어판 돈 카를로스 전곡반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
[20]
드라마티코 테너가 맡아야 하는 역할이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그 만큼 무겁기 때문에...
[21]
유명 오페라 속 테너 캐릭터들 중 가장 존재감이 적은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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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고의 펠리페 2세로 평가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성악적인 면에서는 갸우로프가 가장 안정적이고 최고라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지나치게 권위적인 면만 부각하고 표현에서 정석적이라는 비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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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푸칠리의 포사는 그의 강점인 안정적이고 모범적인 가창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것이지 연기까지 보면 여느 이탈리아 성악가들처럼 목석연기라는 평가도 만만찮게 보인다. 거기다 그의 테너 느낌이 나는 바리톤 목소리도 테너와의 이중창을 부를때 구분이 안 된다는 평도 꽤 나오고, 듣다보면 식상하다는 평도 꽤 있다. 성악가들한테서는 교과서적인 발성을 들려주는 카푸칠리이지만 연극적인 면을 선호하는 대중들은 되려 밀른스나 햄슨이나 드미트리, 킨리사이드 같은 성악가들을 더 선호한다. 정석적인 발성만을 보여주는 성악가랑 스타성을 가진 오페라 가수의 극과 극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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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80년대 연기 스타일을 볼 수 있다. 총을 맞고 죽지도 않고 3분여에 달하는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인데, 2000년대 이후의 무대에서는 일단 총소리와 함께 로드리고는 무조건 바닥에 있어야 한다. 3분동안 천천히 무너지든 누워 구르든 어쨌든 고통스럽고 죽어간다는 표현을 한다. 그런데 카푸칠리의 연기를 보면 빈혈 온 듯 점잖게 앉아서 노래하다 심지어 중간에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며(!!) 클라이막스를 외친다. 아름다운 가창과 별도로 뻣뻣한듯 화려한듯 고색창연한 무대를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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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른즈는 메트에서 여러번 로드리고 역을 맡았고, EMI에서도 도밍고, 카바예, 라미몬디, 버렛과 함께 돈 카를로 전곡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명반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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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프로덕션에선 에볼리 공녀를 애꾸눈으로 표현했는데, 이게
고증에 충실한 것이다. 실제로 에볼리 공녀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미인 이었지만, 병에 자주 걸려서 한 쪽 눈을 잃고, 그 결과 안대를 착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에볼리 공녀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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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에볼리 라는 평을 받는 발차이지만 카라얀이 푸쉬를 상당히 주었기에 지나치게 과찬을 받았다는 평도 있고, 발차보다 더 훌륭한 메조들도 많다는 얘기도 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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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기에서는 당시에 같이 활동했던
플라시도 도밍고에게 밀리고, 다른 몇몇 가수들에 비해 성격적 표현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꽤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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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프바르손은 현역으로 활동한 종교재판장 전문 가수들 중에서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종교재판장으로 불린다. 재미있게도 에릭 할프바르손은 파파노가 지휘한 세 가지 돈 카를로스 영상물 1996년 샤틀레 실황, 2008년 런던 실황,2013년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에서 모두 종교재판장으로 출연한 바 있다. 2011년 메트 HD 라이브에서도 종교재판장으로 나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