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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성

박희성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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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colbgcolor=#eeeeee> 이름 박희성
朴喜成|Park Hee-seong
출생 1990년 4월 7일 ([age(1990-04-07)]세)
전라남도 여수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8cm, 80kg
포지션 스트라이커
주발 오른발
학력 여수미평초등학교
여수구봉중학교 (2003~2005)
이리고등학교 (2006~2008)
고려대학교 (2009~2012)
등번호 FC 서울 - 14번, 29번, 17번
상주 상무 FC - 35번, 10번
김해시청 축구단 - 12번
전남 드래곤즈 - 12번
소속 구단 FC 서울 (2013~2019)
상주 상무 FC (2016~2017 / 군 복무)
김해시청 축구단 (2020)
전남 드래곤즈 (2021~2022)
국가대표 5경기 1골 ( 대한민국 U-23 / 2009~2011)

1. 개요2. 클럽 경력
2.1. 유소년 시절2.2. FC 서울
2.2.1. 2013년2.2.2. 2014년2.2.3. 2015년2.2.4. 상주 상무 FC (군 복무)
2.2.4.1. 2016년2.2.4.2. 2017년
2.2.5. 2017년2.2.6. 2018년2.2.7. 2019년
2.3. 김해시청 축구단
2.3.1. 2020년
2.4. 전남 드래곤즈
3. 국가대표 경력4. 기록
4.1. 출전 기록
4.1.1. 클럽
5. 플레이 스타일
5.1. 수상 이력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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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 선수. 고려대 시절 ' 고대(Ancient) 앙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최고의 유망주로 각광 받았지만 프로에서는 기대에 못 미쳤다.

2. 클럽 경력

2.1. 유소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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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앙리로 불리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던 고려대 시절
'''

여수 미평초등학교, 여수 구봉중학교, 전북 이리고등학교, 서울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2005년 금석배 축구대회에서 여수 구봉중학교가 우승했는데, 박희성이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이리고등학교 때부터 기대주로 손꼽히며 고교 졸업 직후부터 프로 입단 제의가 있을 정도였다. 특히 송수영과는 고등학교까지 선, 후배 파트너로 함께 활약했다.[1]2009년 고려대학교 축구부에 입단하였으며, 같은 해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에 승선하여 FIFA U-20 월드컵 본선 대표로 발탁되었고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로 발탁되며 아마추어 선수로는 유일하게 발탁되어 참가할 만큼 축구계에서 향후 한국축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전도유망한 선수로 평가받았다.

2.2. FC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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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2013년

박희성은 고려대학교 시절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으며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모습을 비추던 선수이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는 아마추어 신분으로는 유일하게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2] 이후 잠시 슬럼프를 겪기도 했지만, 다시 폼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박희성은 2013년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FC 서울의 1순위 지명을 받고 팀에 입단했지만 사실 이 시즌엔 18명이 신생팀 몫으로 1라운드 앞에서 지명됐고, 자유계약과 드래프트가 공존하던 시절이라서 자유계약으로 또 15명이 앞에서 지명됐다. 우선지명을 빼면 전체 36번이었으니, 청대 경력에 비해선 오히려 낮은 순번에 지명됐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건 꽤 기대감을 받고 입단했고, 시즌 첫 득점도 상당히 일찍 나왔다. 그의 데뷔 골은 2라운드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멋진 헤더로 동점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박희성은 나, 박희성을 주목하라며 등번호를 가리키는 간지 세레머니를 선보인다. 덕분에 FC 서울 팬들의 기대감도 더 커졌지만 이후 시즌 대부분을 데얀, 세르히오 에스쿠데로 등의 백업 정도로 보내게 된다. 간혹 교체로 나오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이 거의 없어서 초기의 기대감은 사라지고 말았다. 데얀이 부상당한 뒤에 있었던 성남 일화 천마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몰리나에게 어시스트를 기록하여 간만에 활약을 펼쳤다. 팀은 3-0 승리. 하이라이트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박희성의 2013년 기록은 15경기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기대감에는 한참 못미친 부진이었고, 1순위 지명을 받은 대형 신인이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모습이었다.

2.2.2. 2014년

2014년에는 데얀 장쑤 쑤닝으로 이적하면서 FC 서울은 새로운 외국인 선수 하파엘 코스타를, 드래프트에서는 대어로 손꼽혔던 윤주태를 영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울 공격진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2014년의 서울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하대성 데얀, 그리고 몰리나마저 빠진 서울은 11경기 5득점이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고, 이 때 치명적인 부진을 보인 공격수 3인방을 성 트리오라고 칭했다. 여기서 성이 박희성. 이 3명의 선수 모두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고, 서울의 최전방 공격수는 결국 윙어였던 에스쿠데로가 땜빵 식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윤일록과 에스쿠데로 둘이서 거의 모든 경기의 공격 전개를 전담해갔다. 결국 이 시즌 FC 서울은 38경기에서 42득점 밖에 하지 못하는 극도의 빈공을 보였다. 최다 득점자가 7골을 넣은 윤일록이었을 정도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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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전에 나온 박희성의 인생골

박희성은 2014년에 리그에서는 2골을 기록하게 되는데, 성남 FC와의 경기에서 시저스 킥으로 골을 기록했고, 이 골로 FC 서울은 매우 귀중한 승점 3점을 가져온다. 팀은 1-0 승리.

그리고 10월에는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 헤딩 동점골을 기록했다.

스트라이커가 리그 한 시즌 두 골을 기록했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기록이고,[4]FC 서울 공격진의 부진의 한 축이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2013년의 실망감에 2014년의 부진이 겹치면서 아쉬움은 더욱 커졌다. 2014년 기록은 19경기 2골.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즌이 서울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출장한 해였다.

2.2.3. 2015년

박희성 본인에게 최악의 해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간혹 출전 기회를 받은 2013년, 2014년과 달리 아예 2경기 출전에 그치며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제로도 주전 공격수 자리는 박주영, 아드리아노에게, 교체 자원으로서는 윤주태에게 밀리고 말았다. 박주영의 존재감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 없고, 윤주태는 슈퍼매치에서 무려 4골을 터트리는 등 이 시즌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냈다.

반전이 필요했던 박희성은 결국 2016 시즌을 앞두고 이웅희와 함께 상주 상무로 입대했다.

2.2.4. 상주 상무 FC (군 복무)

2.2.4.1. 2016년
새 기회를 찾아 온 상주였지만, 박기동의 엄청난 활약이 이어지면서 후순위로 밀려났다. 다만 상주 입장에서 전역이 다가오는 박기동의 자리를 메우려는 시도가 필요했고, 서서히 출전 기회를 받았다. 그리고 박기동 전남 드래곤즈로 돌아간 뒤에는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

8월 13일, 성남 FC와의 경기에서 헤딩으로 동점골을 기록했다. 시즌 중반이 되어서야 시즌 첫 골이 나왔는데, 나름대로 본인에게는 전환점으로 작용한 골. 그리고 8월 17일,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2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다. 상대 골키퍼의 미스가 있었던 골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득점에 성공했으니 본인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후 다시 조용하게 있다가 10월 30일 울산 현대와의 경기에서 헤딩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골을 마지막으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2016년 기록은 19경기 3골. 여전히 공격수로는 상당히 아쉬운 수준으로 배천석과 묶여 만년 유망주 수준에 그쳤다는 평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본인 리그 최다골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커리어를 세웠고 이전보다 개선된 부분도 있어서 다음 해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향후 커리어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가슴 아픈 굴욕 짤도 하나 생겼다. 상주와 서울과의 경기에서 같은 서울 출신인 이웅희 신진호에겐 팬들이 선물을 주는데, 박희성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5]
2.2.4.2. 2017년
등번호가 바뀌었는데, 저번 시즌의 활약상에서 가능성을 보았는지 에이스의 상징인 10번을 부여받으면서 팬들로부터 더 큰 기대를 받았다. 그리고 개막전에서부터 선발로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 사이 새로 입대한 주민규는 상주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고, 결국 주민규가 챌린지 시절의 득점력을 되찾아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자 다시 완전히 밀리고 말았다. 전역을 할 때까지 5경기 출장에 그쳤으며, 공격포인트는 전무. 결국 박희성은 또 한 번의 실패를 맛봐야 했다.

2.2.5. 2017년

9월 13일에 전역한 후 일단 팀으로 복귀했다. 2년만에 돌아온 서울의 감독은 황선홍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박희성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전역 이후에도 데얀 다미아노비치 박주영의 로테이션 속에서 출전 기회 자체를 잡지 못하다가 박주영의 무릎 부상으로 10월 21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전 막판에 교체 투입됐다. 그러나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붕 떠버린 헤딩슛 하나만을 남겼다. 팬들의 비판은 이번에도 피해갈 수 없었다.

2.2.6.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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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전 골 이후 이을용 대행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박희성

주축선수 이적으로 공격진 뎁스가 약해진 상황에서 또 다시 생존. 에반드로와 박주영이 가벼운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자 3월 18일 전북전에서 투톱으로 선발을 하게 된다. 출전을 하자마자 국내축구 커뮤니티들이 "희라노의 귀환이다!"를 외치며 그에게 주목했고, 여지 없이 사람들이 예상했던 불안한 트래핑을 보여주며 역시나 그 기량 어디 가지 않는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슈팅도 때린 슈팅 자체가 없다시피. 다만 연계 능력은 나름 괜찮았다는 평가다.

4월 1일 인천 유나이티드 전에서 선발 출전했지만 활약 없이 전반 끝나고 교체되었다. 이후에는 다시 조커 내지는 후보 정도로 뛰고 있는데, 평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9월 26일 홈에서 펼쳐진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이상호와 함께 투톱으로 선발 출전했는데, 결정적인 1대1 찬스를 놓치는 등 전반적으로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후반 마티치와 교체 아웃됐다. 전반전에는 줄곧 욕을 먹었지만, 후반에 마티치도 최악의 기량을 보여주니 비판 여론이 조금은 줄었다. 여담으로 이날 수호신의 한 소모임은 경기가 끝난 후 선수들이 인사를 오는 자리에서 박희성에게 야유를 퍼붓다가 누군가의 박지성! 박지성! 콜을 듣고는 단체로 점핑과 함께 위송빠레를 불렀다.

그런데, 9월 30일 이을용이 대행으로 감독직을 수행한 마지막 경기였던 상주 상무와의 홈 경기에서는 신진호의 코너킥을 머리로 때려서 아예 방향을 바꿔버리는, 한마디로 기가 막힌 헤딩골을 넣어버렸다! FC 서울 소속으로는 4년 만에 넣은 골이었다.

컬트적인 인기와 밈으로 인지도를 모으고 있었던 그의 골에 그야말로 모든 국축 커뮤니티는 폭발 그 자체. 또한 교체 아웃될 때까지 공중볼 경합과 연계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며 마티치보다 나은 활약이었다.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골이 터지자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꿈은 아니지?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충격에 빠졌다. 한편 상주에서는 박용지가 멀티 골을 기록하면서 역시나 수많은 팬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이 활약 때문에 다음 날 파울루 벤투가 뽑은 국가대표 명단이 발표되자 "고대 앙리 어디 갔나요?" "벤투도 학연이네 고려대 출신 박희성을 안 뽑고 연세대 출신 황의조를 뽑다니..." 등의 드립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최용수 복귀 후 벌어진 첫 홈 경기였던 강원전에서 절호의 찬스에서 볼 컨트롤을 너무나도 길게 한 나머지 골라인으로 아웃되어 버리며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고 이후 후보로 내려가며 11경기 1골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2.2.7. 2019년

박주영, 페시치, 조영욱, 윤주태, 심지어는 이번 시즌 공격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박동진에게도 완전히 밀려 1군에서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간간이 R리그에 출전했다. 그렇다고 R리그에서마저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페시치 조영욱이 부상으로 빠진 와중에도 한 차례도 교체 명단에조차 들지 못했으며, 가끔 교체 명단에 포함되었던 신인 공격수 이인규에게마저 벤치 자리를 뺏겼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서울과 작별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즌 후 FA 명단에 올랐으며, 서울과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하여 결국 서울을 떠났다.

2.3. 김해시청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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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2020년

2020년 1월 21일, 김해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며 새로 개편된 K3리그로 무대를 옮겼다.

2020년 5월 16일, 김포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0 K3리그 1라운드 김포시민축구단과의 원정 경기에 선발 출전했다. 2-2로 맞선 후반 추가시간 천금 같은 결승골로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5월 23일 펼쳐진 전주시민축구단과의 2라운드에서는 무려 멀티골을 작렬하면서 팀의 2-1승리와 동시에 개막 2연승을 만들어냈다.

2020년 9월 18일 기록에 따르면, 15경기 출전 8골로 리그 득점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이런 활약으로 팀은 승점 35점으로 1위에 위치했고 K3리그 상위 스플릿에 진출했다.

2020시즌에 최종적으로 리그 21경기 9득점 7어시를 기록했고, 해당 시즌 K3-K4리그 시상식에서 2020시즌 K3리그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2020시즌 FA컵에서는 2경기 1어시를 했다. 예선 본선 각 1라운드씩이다.

이런 활약 덕분에 강원 FC, 전남 드래곤즈가 노리고 있다는 루머가 여럿 뜨고 있다.

2.4. 전남 드래곤즈

2020시즌 대활약에 힘입어 2021 시즌 고향 구단[6]인 전남 드래곤즈로 이적했다. 해당 링크

2.4.1. 2021년

2월 27일의 2021 K리그2 1라운드 충남 아산 FC전에서 후반 80분경 교체로 출전하며 프로무대 복귀를 신고하였다. 이후 3월 27일자 FA컵 2라운드 대구 청솔 FC 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11-0 대승에 기여했다. 4월 14일의 FA컵 3라운드 수원 FC 전에서도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한 선제골을 뽑아냈고, 팀은 승부차기 까지 가는 접전끝에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팬들은 대부분 기복이 어느정도 있지만 전술적으로는 상당히 좋은 선수임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사이드에서 침투하는 2선 자원을 향해 떨궈주는, 풋볼 매니저에서 볼 수 있을법한 와이드 타겟맨이라는 흔치 않은 포지션을 소화하고 있어서, 공격 포인트가 부족한것과는 별개로 평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21년 8월 4일, 23라운드까지 온 시점에서 공격 포인트가 부족한것과 별개로 팀 전술면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다. 이후 FA컵 8강 포항전, 결승 대구전에서도 선발로 나와 활약해 전남의 2부리그 최초 FA컵 우승에 기여했고 박희성 본인도 4골로 FA컵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21시즌 출전 기록은 리그와 FA컵을 합쳐 23경기 4골 3도움.

득점왕 상금인 300만 원은 광양시 재단에 기부했다고 한다.

2.4.2. 2022년

4월 18일 AFC 챔피언스 리그 2차전 BG 빠툼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는 그야말로 환장할 경기력을 보여 주었다.

카차라바가 센스 있게 뒤로 내주어 만들어진 찬스는 아깝게 날렸지만 그 이후의 1대1 결정적인 찬스를 공을 받고선 갑자기 혼자서 0.5배속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허무하게 날려 버렸고 크로스를 시도할때도 소극적으로 시도하였다. 거기에 추가로 후반 막판 드로잉 상황에선 파울까지 범하며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전남은 빠툼에 2 대 0으로 패배해 16강 진출 가능성이 땅으로 처박히고야 말았다. 차라리 그가 아니라 박인혁이 계속 경기장에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퍼포먼스였다.

시즌 초반 전경준 감독 체제에서는 많은 기회는 아니지만 간간이 경기에 출전하면서 기회를 받았으나 6월 초 이장관 감독이 새롭게 부임하자 단 두 경기 만을 소화한채 7월 3일 서울 이랜드 FC전을 마지막으로 아예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1월 2일, 전남 드래곤즈에서 계약 만료를 발표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와의 인터뷰에서 은퇴하였음을 밝혔다. # K3리그로의 이적도 생각해 봤지만,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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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에서 활약을 바탕으로 2009년 홍명보 감독이 이끌던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이집트에서 열린 2009년 FIFA U-20 월드컵 명단에 발탁됐다. 본선에서는 조별리그, 16강, 8강 모두 출장하였으며, 8강에서 한국의 추격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표팀은 패배했다. 2010년 역시 홍명보가 이끌던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어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2010년 아시안 게임 축구에 참가해 3위로 동메달을 차지하였다.그러나 이후 성인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는지 단 한번도 성인 대표팀 무대를 밟지 못했다.

4. 기록

4.1. 출전 기록

4.1.1. 클럽

시즌 구단 리그 리그 FA컵 ACL 합계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2013 FC 서울 K리그 1 15 1 1 1 0 0 2 0 0 18 1 1
2014 19 2 0 1 1 0 6 0 0 26 3 0
2015 2 0 0 2 0 0 1 0 0 5 0 0
2016 상주 상무 FC 15 3 0 0 0 0 - 15 3 0
2017 5 0 0 1 0 0 6 0 0
2017 FC 서울 1 0 0 0 0 0 1 0 0
2018 11 1 0 0 0 0 11 1 0
2019 0 0 0 0 0 0 0 0 0
2020 김해시청 축구단 K3리그 19 9 0 0 0 0 19 9 0
2021 전남 드래곤즈 K리그 2 17 0 2 6 4 0 23 4 2
2022 10 0 0 0 0 0 0 0 0 10 0 0

아홉 시즌 동안 124경기 12골 12도움을 기록했다.

5. 플레이 스타일

188cm의 단단한 체격을 살린 제공권이 우수하며 연계능력도 준수해 2010년대 들어서 씨가 마르다시피 한 포스트 플레이가 가능한 토종 공격수다.

문제는 처참한 득점력. 프로 커리어 한 시즌 시즌 최다골이 3골이다. 2부 리그 구단인 전남에서도 한결같은 걸 보면 프로 레벨에선 생산력을 기대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다. 공 없을 때 움직임은 없지만 공을 잡고나서 필요한 트래핑과 슈팅 스킬이 심각하게 나빠서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수를 이겨내고 공을 잡아도 득점 기회로 만들지 못한다. 쉽게 말하면 너무 둔탁해서 볼을 못다룬다.[7]

수원, 상무 시절 조재진과 유사점이 꽤 있는데 체력과 활동량이 우수해 전방 압박으로 1차 저지선 역할을 하며, 제공권과 공 없을 때 움직임이 좋아 2선에서 침투하는 선수들에게 이른바 '등딱'으로 지속적으로 기회를 창출해 주기 때문에 확실한 기점이 되어줄 플레이 메이커가 없는 2부 리그, 세미프로 팀에서는 유효한 전술 옵션이지만 패스 좋은 자원들이 많아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줄 킬러가 필요한 1부 리그 팀에선 계륵 내지는 잉여자원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 동일하다.

이런 특성상 그가 서울의 지명을 받은 건 서울과 박희성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서울은 성적에 도움 안되어 손해, 박희성은 출전 기회 잃어 손해.

5.1. 수상 이력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6. 여담



[1] 대학교 때는 송수영은 연세대, 박희성은 고려대로 진학했다. 서로 라이벌 대학으로 진학한 셈이다. [2] 당시 K리그 득점왕인 유병수를 밀어내고 뽑혀 다소 논란이 있기도 했다. [3] 그럼에도 최용수가 빚어낸 압도적인 백스리 수비벽에 힘입어 28실점으로 리그 3위, 그리고 아챔 4강이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세운다. [4] FA컵까지 포함하면 3골 [5] 특히 신진호는 서울에서 불과 3개월 밖에 뛰지 않았던 선수였다. [6] 여수 출신으로 인터뷰에서 어려서부터 전남의 축구를 봤다고 밝혔다. [7] 그러나 2014년 5월 성남FC를 상대로 인생골이라 표현해도 무방할 바이시클킥으로 골을 기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