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포에니 전쟁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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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인 기원전 251년 시칠리아의 주요 거점인 파노르무스(현재 팔레르모)를 탈환하려는 카르타고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로마군이 맞붙은 전투.2. 상세
기원전 255년, 로마 공화국은 바그라다스 전투로 인해 15,000명의 군단병과 집정관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를 상실했고 카마리나의 해상사고로 전선 384척과 수송선 300척, 10만에 달하는 인력을 상실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쟁을 기필코 이기기로 작정하고, 신속하게 함대를 재건해 220척의 선박을 새로 건조한 뒤 기원전 254년에 시칠리아에 잔존한 카르타고 세력을 향한 공세를 단행했다.기원전 254년 집정관 스키피오 아시나는 해상에서 파노르무스를 봉쇄했고, 아울루스 아틸리우스 카이아티누스는 육상에서 공세를 퍼부었다. 수개월에 걸친 공세 끝에 시라쿠사로부터 제공받은 공성 무기를 앞세운 로마군이 외성을 뚫고 들어오고 오랜 포위로 식량이 바닥나자 전의를 상실한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로마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14,000명의 주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고, 그러지 못한 13,000명은 노예로 팔렸다. 이에타스, 솔루스, 페트라, 틴다리스 등 여러 도시는 로마에게 복종하여 평화 협약을 맺었다. 로마군은 연이어 공세를 개시해 기원전 252년 테르마에와 리파리를 점령했다.
이제 카르타고에 남은 도시는 릴리바이움, 셀리누스, 헤라클레아, 미노아 등 4개 도시 뿐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253년 로마 정부가 재건한 함대가 또다시 폭풍에 휘말려 300척 중 150척이 침몰하는 파이누르 해상 사고가 벌어지고 말았고[1], 전쟁을 금방이라도 끝낼 듯했던 로마군은 연이은 참사로 인해 기가 꺾여 더 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했다. 그 사이 누미디아와의 전쟁을 끝낸 카르타고 정부는 기원전 252년 하스드루발 장군의 지휘 아래 새로운 군대를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하스드루발은 30,000명의 군인과 14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보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 섣불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고, 로마군 역시 바그라다스 전투의 악몽 때문에 회전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양측은 1년간 서로를 마주보기만 할 뿐 별다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기원전 251년 늦여름, 하스드루발은 집정관 가이우스 푸리우스 파킬루스가 절반 병력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금이야말로 전투를 벌일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는 파노르무스를 향해 진군하며 로마와 동맹을 맺은 여러 도시로 군대를 보내 농장을 황폐화시켰다.
카르타고군이 접근하자, 당시 시칠리아에 남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흩어졌던 병사들을 서둘러 집결시킨 뒤 파노르무스 성채로 후퇴했다. 적이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자, 하스드루발은 적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겠다고 확신하고 오레르토 계곡을 통과하며 여러 시골을 황폐화한 뒤 파노르무스 시 인근 해안가에 당도했다. 이후 병사들을 쉬게 해주는 대신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당시 로마군 장병들은 140마리나 되는 코끼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했다. 이에 메텔루스는 병사들을 성내에 대기시킨 뒤 투창병과 경보병 만을 성벽 앞 해자에 매복시켰다. 이윽고 적 코끼리 부대가 나타나자, 메텔루스는 코끼리들을 향해 투창을 퍼부으라고 명령했다. 투창 세례를 얻어맞은 코끼리들은 통제를 잃고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카르타고 보병대를 뚫고 도주했다. 이로 인해 카르타고군이 혼란에 빠지자, 메텔루스는 즉시 군단병을 이끌고 적을 향해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살육했다. 카르타고군의 사상자는 전해지지 않으나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코끼리는 전투 첫날 10마리가 노획되었고 나머지도 나중에 노획되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사상자 역시 전하지 않으나 미미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스드루발은 파노르무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본국으로 소환되어 처형되었다. 반면 메텔루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기원전 250년 9월 7일 개선식을 치르면서 노획한 코끼리들을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서 도살했다. 이후 코끼리는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상징으로 채택되었고, 이 가문의 구성원들은 공화국이 제정으로 바뀔 때까지 동전에 코끼리를 새겼다.
그 후 하스드루발의 뒤를 이어 시칠리아 주둔 카르타고 사령관을 맡은 아드헤르발은 셸리누스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릴리바이움으로 철수시켰고, 로마군은 릴리바이움으로 쳐들어가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드헤르발이 지금까지 만난 카르타고 장수들 중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수라는 것을 드레파나 해전에서 톡톡히 깨달았다.
[1]
폴리비오스는 이 함대가 침몰한 장소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루키니아 지방의 서쪽 해안에 있는 파이누르 곶 앞바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