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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2:51:42

모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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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374px-Mona_Lisa,_by_Leonardo_da_Vinci,_from_C2RMF_retouched.jpg

[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펼쳐서 보기 · 접기 ]
파일:모나리자 전시 모습.jpg
모나리자
Gioconda, Monna Lisa
작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가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제작 연도 1503년- 1506년경으로 추정
기법 유채(油彩) 패널화
크기 53 x 77 cm
소장
[[프랑스|]][[틀:국기|]][[틀:국기|]]
루브르 박물관 (1797 - )

1. 개요2. 가치3. 위상
3.1. 유명한 눈썹이 없는 그림3.2. 모델3.3. 그림이 완성된 이후
4. 또 다른 모나리자5. 주의할 점6. 해외 전시7. 사건사고
7.1. 도난 사고7.2. 훼손 시도
8. 대중매체에서9. 여담

[clearfix]

1. 개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 중 하나로, 현재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가로 53cm, 세로 77cm짜리 유채(油彩) 패널화이며[1], 완성 시기는 1503~1506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은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특징인데, 을 보면 웃고 있는데 만 보면 알 수 없다.[2]

2. 가치

모나리자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3]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미술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유럽 문화의 황금기인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다보니 작품의 값어치가 높은것이 당연하다.

프랑스 정부 루브르 박물관의 소유이므로 프랑스 정부가 매각을 결정하기 전까진 경매의 대상은 아니지만, 가격에 대한 궁금증은 계속 있어왔다. 프랑스 정부는 대략적인 경제적 가치를 결정했는데, 최소 한화 약 2,300,000,000,000원(2조 3,000억원)에서 최대 약 40,000,000,000,000원(40조원) 내외라고 발표했다. 최대 40조라는 이런 엄청난 가격이 붙은 이유는 2018년 기준 연간 루브르 박물관의 방문객 수는 약 1,000만 명에 육박하는데,[4] 이 중 대부분이 이 모나리자를 보러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적 가치가 아닌 작품의 순 가치로만 보면 2022년 기준 모나리자의 가격은 약 8억 7,000만 달러, 한화 약 1,114,905,000,000원(1조 1149억 500만원)에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밝혔다. 가장 큰 이유로는 모나리자가 그동안의 많은 사건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나리자가 알려졌고, 이에 의한 패러디와 여러가지 인식들이 크게 각인되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3. 위상

기술적으로 대단하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최후의 만찬 등 다른 역작들을 제치고 레오나르도의 대표 작품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까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그림이기 때문이다.

도난당한 적도 있는데, 복제품이 너무 많아 진품을 찾지 못하다가 다 빈치의 지문이 묻은 것을 찾아 다시 전시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도시전설일 뿐이다. 실상은 아래에서도 설명하지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화상의 신고로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지문 대조를 이용한 예술품의 진위 감별 기법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당장 지문을 이용한 수사가 정식으로 인정된 것이 1900년이다.

현존하는 다양한 모나리자 그림들 중 이 그림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안에 들어 평생 모델이 되었던 여성의 원숙미가 절정에 달했을 때가 바로 저 그림 속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의 젊은 시절을 그린 것은 하술된 아일워스 모나리자이다. 그 같은 경우 서양화에 문외한일지라도 미인임을 쉽게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전부를 통틀어 발견되는 특징은 자애로운 여성이 아닌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의 여성이자 그 눈빛이라는 점이, 바로 왜 그를 다 빈치가 아름답다고 여겼는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

모나리자의 진가는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루브르에 직접 가서 봐야 드러난다. 모나리자를 보려면 같이 전시되고 있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작품들을 보고 난 다음 모나리자를 보면 확연히 실력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을때 혼자서 CG를 다루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것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다양한 혁신적 기술들을 도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면이나 측면을 딱딱한 구도로 보고 있지 않은 자연스러운 구도의 초상화, 원근법을 적용하고 흐릿하게 그린 배경[5] 등,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반면에 모나리자가 미술 외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미술 비평가들도 상당수다. 오히려 미술계에서는 다 빈치의 다른 작품들[6]을 기술적•미술사적으로 고평가한다. 대중이 보기에도 모나리자가 왜 대단한지 이런저런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의문을 띄는 경우가 많다. 모나리자는 처음 루브르에 전시될 때만 하더라도 인기 없는 작품이었으며,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언론에서 일련의 도난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였다.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Famous for being famous)이 되어버린 것. 물론 도난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월터 패터 같은 근대 작가들의 극찬하는 에세이가 대표적이며 당시에도 모나리자의 웃음에 대한 논쟁이 미스테리 기록으로 남아있다.

3.1. 유명한 눈썹이 없는 그림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눈썹이 없는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당시에는 이마가 넓은 여자가 미인으로 여겨져 눈썹을 밀거나 가늘게 하는 일이 유행이었다는 설이 있다.[7] 혹은 다빈치가 원래 눈썹을 그렸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림이 변색되어 전체적으로 색상이 바뀌고, 눈썹 부분도 희미하게 사라졌다는 가설도 있다.[8]

조승연 작가가 루브르 박물관 부속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 교수에게 들은 바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림 작업후 코팅 작업인 '바니시'를 (통상적인 방식인 그림 완성후 한번에 바니싱을 하는 것이 아닌) 그림의 일부를 그리고 한 번 바니시 칠하는 과정으로 반복하였다고 한다.[9] 통상적인 서양화 복원 과정상 먼지가 묻은 바니시를 벗기고 새로 칠하는 과정이 있는데, 모나리자의 바니시를 벗겼더니 맨 마지막에 칠한 눈썹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3.2. 모델

그림의 모델로는 피렌체의 유력자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인 리자를 지목하지만, 이 주장을 1550년에 최초로 내세운 조르조 바사리는 원본을 본 일도 없고, 조콘도 부인이나 다 빈치와 면담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20세기 들어서 다른 인물이 실제 모델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줄리오 데 메디치의 정부이자 나폴리 공비인 콘스탄차 다발로스, 밀라노 공비인 이사벨라 다라고나, 그리고 만토바 후작부인인 이사벨라 데스테가 거론되었고, 특히 다 빈치가 남긴 자료들 중 하나인 이사벨라 데스테의 측면 스케치는 모나리자의 여성과 매우 비슷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2008년에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도서관에서 1500년대 초 피렌체 관리가 "다 빈치가 조콘도 부인의 초상화를 제작중"이라는 발언을 남긴 문서를 발견하였고, 대부분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단순한 초상화라 하기에도 이상한 면이 많다. 일단 별 관계도 없는 의뢰자의 아내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녔을 이유가 없다. 막말로 돈을 안 내서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자신의 화실에 고정까지 해서 걸어놓을 이유가 없다. 또, 당대에 여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많이 늘어났어도, 보는 사람의 눈을 마주 보는 이런 자세는 금기였다.[10] 남에게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면 이렇게 그렸을 리가 없고, 보여줬다면 당대에 크게 논란이 되었을 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당시대에 정면을 봐도 되는 여성은 이브 아니면 성모 마리아뿐. 만약 이것이 그런 최초의 초상화라면, 19세기에 에두아르 마네가 파격적인 초상화를 선보여 크게 난리를 일으키기 400년 전에 이미 다빈치가 시대를 한참 앞선 것이다.티치아노 초상화 부인들은 정면을 잘도 보던데?

파일:external/2.bp.blogspot.com/412px-Isabella_di_Aragona_as_Mona_Lisa.jpg
그리고 루브르의 모나리자의 모델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일워스의 모나리자가 진짜 모나리자이고, 루브르의 작품은 조콘다가 아니라 또 다른 모델, '아라곤의 이사벨라'를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사벨라는 나폴리왕의 손녀이자 밀라노 공작 지안갈레아노 스포르차와 결혼했다가 이 시기 남편과 사별한 인물로, 15세기 말경 다빈치와 함께 15세기 말을 밀라노 궁전에서 지냈다. 이사벨라는 아름다운 축도 아니었고 20대도 아니었다. 또한 스위스에 남아있는 이사벨라의 초상은 루브르의 그것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나리자의 초록색 옷은 스포르차 공작가문을 상징하는 색이라는 것도 이의 증거로 제시된다.

또한 이 그림에 얽힌 충공깽한 가설이 있는데, 바로 이 그림이 다 빈치가 여장한 자신을 모델로 그렸다는 가설이다. TV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왔으며 다 빈치의 초상화와 모나리자를 과학적으로 비교해보면 생김새가 같다는 등의 근거를 제기했다. 다 빈치가 워낙 괴짜로 알려진지라 사실이라고 해도 별로 놀랄 것 같지는 않다[11]

3.3. 그림이 완성된 이후

레오나르도는 죽을 때까지의 여생을 프랑스에서 보냈는데, 그를 프랑스로 초대한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앙리 2세는 레오나르도가 죽은 뒤 모나리자를 욕실 벽면에 걸어 놨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유품을 계속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문제는 욕실에 유화를 걸어놓으니 그림에 습기가 들 수밖에 없고, 결국은 그림 표면이 쩍쩍 갈라지게 되는 원인이 됐다. 목욕탕 그림류 갑 참고로 이 갈라진 표면은 루브르에 직접 가서도 보기 힘들다. 위에 서술된 대로 사람이 너무많고, 일정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나무로 된 울타리가 쳐져있기 때문이다.

굳이 갈라진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페이지의 맨 윗 그림을 확대해 보자.

4. 또 다른 모나리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3px-The_Isleworth_Mona_Lis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9px-The_Joconde_by_a_student_of_Leonardo_da_Vinci.png
아일워스 모나리자 프라도 카피본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모나리자 이외에도 다빈치가 그린 또 다른 모나리자가 영국에 있다. 일명 아일워스 모나리자라고 부르는 것. 루브르에 있는 것과는 약간 더 젊고 눈썹도 그려져 있어서 달라 보이지만 이것은 다 빈치의 진품. 그리고 모나리자의 하늘은 하늘색이었으나 복원 작업으로 인해 색깔이 바뀌었다고 한다.

2012년 1월에는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모나리자 모작 한 점을 분석한 결과 다빈치가 직접 그린 밑그림 위에 제자가 색을 칠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라도 카피본이라고 불리우는 이 그림에는 눈썹이 분명히 그려져 있어서, 루브르의 모나리자에도 원래 눈썹이 있다가 지워진 것이라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루브르본, 아일워스본, 프라도본 외에도 여러 사적 콜렉션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주의할 점

파일:attachment/모나박물관.jpg

그 조그만한 그림을 보기 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그 앞에 밀집되어 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작품이 전시된 루브르 박물관이지만 이곳만큼은 비집고 들어가야 겨우 볼까 말까한 수준으로 관광객이 많다. 설상가상으로 도난이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펜스를 둘러쳐 놓아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도 작품과 상당히 떨어져서 봐야한다.[12] 솔직히 제대로 감상하기조차 힘들다. 게다가 액자에 방탄 유리를 끼워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반사광으로 더 보기 어렵다. 너무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할 수도. 비수기때도 모나리자 앞은 인산인해다. 정말 사람이 없이 한산하게 보고 싶다면 미리 표를 예약한 다음 루브르 개장 2시간 전부터 기다려서 아주 빨리 들어가는 수밖엔 없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만큼, 그 중에 소매치기들도 상당히 섞여있다. 세계에서 소매치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장소라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니 혹시라도 보러간다면 짐 관리에 주의하자. 필요없는 짐은 미리 짐 보관소에 맡기는 것을 추천.

그리고 생각보다 굉장히 작다. 아마 당신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것보다 한참은 작을 것이다(...).[13] 원래 원본은 레오나르도의 화실 벽에 창문처럼 벽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운반하기 위해 그냥 양옆을 잘라냈다. 양쪽 끝에 보면 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2022년 코로나19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줄을 서서 관람하는 방식으로 질서있게 변경됐다. 벨트식 차단봉을 두고 관람하게 되어 있는데 거리두기 해제 등으로 대기열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돌아왔다.

6. 해외 전시

루브르 박물관을 떠난 공식적인 해외 순회 전시는 총 세 번 미국( 1962년 뉴욕 워싱턴 D.C)과 일본( 1974년 도쿄), 소련( 1974년 모스크바) 에서 진품이 전시된 바 있다.[14] 그림 한 점 갖다놓은 단독 전시였음에도 전시한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사회적 현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반응을 보여 새삼 모나리자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15]

7. 사건사고

7.1. 도난 사고

도난 사건도 많았고 도난 전설은 더욱더 많다. 1911년 모나리자의 도난은 아르헨티나의 사기꾼 발피에르노의 사주를 받은 이탈리아인 빈첸초 페루자(Vincenzo Peruggia)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는 그 전년에 도난을 막기 위해 그림 주위에 설치한 유리벽을 시공한 작업부이기도 했다. 프랑스 경찰의 수사 과정에서 시인 아폴리네르와 그의 친구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고.[16] 발피에르노는 모나리자가 도난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린 후 미국의 부호들에게 모사품 6점을 팔아치우기까지 했고, 이게 도난의 목적이었다.[17] 헌데 모사가 완료된 후 진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실행범인 페루자가 작업비(...) 대신 가져가버린 후 자기 아파트에 묵혀두고 있다가, 2년 뒤에 돈이 곤궁해지자 피렌체의 화상에게 진본을 매각하려다가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진본 모나리자는 이탈리아 전역을 순회 전시한 후 프랑스로 반환되었다.[18] 페루자는 열렬한 애국자로 이탈리아인이 그린 이탈리아인의 초상화가 프랑스에 있다는 데에 불만을 품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는 6개월의 옥살이 후 풀려났으며 조국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훔쳤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건 도난범인 페루자가 정상 참작을 노리고 한 발언이 공식적인 시초이지만, 워낙 이탈리아 내에서는 유명한 전설인지라 누가 최초로 저 말을 했는지는 불명이다. 사실은 훨씬 이전, 다 빈치 생전에 다 빈치를 후원하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물려받은 것이다.

프랑수아는 1515년에 이탈리아를 원정했는데,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프랑수아가 열렬한 르네상스 문화 애호가라는 점을 이용, 유명한 예술가란 사람들은 싹싹 긁어모아 프랑수아와 회담을 열었다. 그리고 레오의 작전은 완벽히 먹혀들어 프랑수아는 인기 연예인을 만난 열혈 팬처럼 흥분해버렸고, 군사적으로는 교황령을 압도하고 있었으면서도 교황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프랑수아 1세는 레오의 후원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와는 달리 다 빈치에게는 후원자가 없다는 점을 알았고, 이에 다빈치에게 여생을 충분히 보낼 수 있는 저택을 하사할 테니 프랑스로 함께 가자고 설득했다. 다 빈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듬해에 프랑수아와 함게 프랑스로 향했다. 그리고 왕의 수석 건축가 겸 기술자라는 칭호를 받고 3년을 살다가 1519년에 죽었는데, 죽을 때 자신을 후원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로 모나리자를 비롯해 프랑스로 올 때 싸들고 왔던 작품들을 몽땅 프랑수아에게 바쳤다. 즉, 다 빈치가 프랑수아 1세에게 모나리자를 준 것이므로 현대에는 프랑스가 소유하는게 정당하다. 모나리자가 있는 루브르 박물관 등 각종 미술관, 박물관들에는 해외에서 약탈, 수집한 문화재들이 워낙 많아서 이런 루머가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이다.

7.2. 훼손 시도

8. 대중매체에서

9. 여담



[1] 목제 패널에 그린 그림이다. 캔버스화가 아니다. 모나 리자의 패널은 포플러 나무로 만들어졌다. [2] 참고로 이 애매한 미소는 스푸마토라는 기법이 적용된 것으로, 입가에 음영을 넣어서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3] 2019년 CNN 선정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 10가지 [4]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47419/yearly-visitors-to-the-louvre-in-paris/ [5] 여담으로 이 배경은 토스카나의 키아나 계곡(Val di Chiana)을 모델 삼아 그려낸 가공의 장소로 여겨지는데, 이는 가공의 장소를 배경으로 초상화를 그린 거의 최초의 사례이다. [6] 보통 최후의 만찬을 다빈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한다. 이는 모나리자 도난이전 루브르 박물관 가이드에서도 나오는 내용. [7]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여인 초상화를 보면 모두들 눈썹이 있다. [8] 아래에 서술한 프라도 카피본의 확인으로, 이 가설이 현재는 가장 유력하다. [9] 포토샵의 레이어를 생각하면 된다. 통상적으로 서양화는 그림을 모두 칠하고 위에 코팅지를 입히는 느낌으로 바니시를 칠하지만 다 빈치 특유의 완벽주의 + 시간이 오래걸리는 특성 때문에.. [10] 천재 괴짜 화가 반 아이크가 개인용으로 그린, 정면을 보는 자신의 부인의 초상화 외에는 예가 없다. [11] 화가들은 인물을 그릴 때 모델과 관계 없이 자신의 얼굴과 닮게 그리는 일이 많은데, 의도하지 않고도 그런 결과가 나오는 일이 많다. 이유는 가장 친숙한 것이 매일 거울에서 보는 자신의 얼굴 또는 유아기에 잠재 의식에 각인된 자기가 닮은 부모의 얼굴이기 때문일 것이다. [12] 펜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긴 한데, 어린이만 된다. 어떤 여성이 그림에 머그잔을 던져 그림이 훼손될 뻔한 이후로 보안이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림에는 손상이 없었다. [13] 77㎝×53㎝면 대략 A4용지 여섯 장 수준이다. [14] 미국 소련의 경우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서의 인연이라는 명분으로 대여를 허락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경우 이유가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5] 참고로 한국의 경우 2007년, 단독 전시가 아닌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이 석 달간 80만명의 관람객 수를 기록한 바 있다. [16] 웃기게도 아폴리네르가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당하자 피카소를 덩달아 지목했다. 이게 친구냐고 한탄할수도 있겠지만 피카소 역시 혐의를 피하기 위해 절친한 친구였던 아폴리네르를 "나는 그런 사람 모른다"고 잡아뗐느니 참으로 유유상종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며칠만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7] 잭 리치(Jack Ritchie)가 쓴 미스터리 단편 "The Con Game"이 이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화와 달리 소설에서는 실제로 모나리자를 훔치지는 않고, 도난되어 모사품과 바꿔치기 된 것처럼 꾸민 다음, 모사화들을 진품으로 파는 트릭을 쓴다. [18] 당시에는 도난된 예술품을 원주인에게 반환한다는 국제 조약 따위는 전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결정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이탈리아의 국채 대부분을 소화해주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정치적이기도 한 반환 결정일 듯하다. [19] 도쿄 전시회 때는 작품의 도난에 대비한 거액의 손해 보험, 무장 장갑차의 호위 후송 및 몰린 인파에 대한 3렬 종대로 1열 당 관람시간 16초 제한 등이 무색하게 이러한 상황이 터졌다. [20] 심지어 안아주라고 하지만 무시한다. [21] 가상의 미술관. 실제로는 영국에 실존하는 국립 박물관에서 촬영됐다. 닥터후에서 아셀스탄의 컵이 도난당한 곳. [22] 아이들이 미술 시간에 음식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을 마개조시킨 듯. [23] 이때 레오의 얼굴을 제대로 때림과 동시에 그를 강에 빠뜨리게 된다. 큰 충격에 빠진 채 자신의 뺨을 만진 레오의 표정은 덤(...). [24] 다만 이것도 감독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25] 누드 모나리자의 존재도 언급된다. [26] 물론 현실에서 모나리자의 가치가 40조원 이상이기 때문에 1500억원으로는 모나리자를 못산다. 애초에 프랑스 정부가 이걸 팔 리가 없잖아 억수르는 "중고라 싸게 샀나봐"는 멘트를 한다. [27] 모나리자 한정은 아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2D 그림은 전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