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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에 관한 문서다.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명성황후의 초상화와 사진이라고 알려진 모든 것들을 정리한 문서이다.2. 초상화
2.1. 명성황후 어진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표준 어진. 운현궁에 있다. 독립정신에 실린 사진을 바탕으로 하여 그렸다.
여주 생가에 있는 어진.
2.2. 민씨부인(閔氏夫人) 초상화
2017년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공개되었다. 역시 진위 여부는 불명. 단순히 족자에 민씨부인(閔氏夫人)이라고 써진 것에 대하여 명성황후로 추측하는 것인데, 일각에서는 운현궁에서 발견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의 아내 여흥부대부인의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하고 있다.[1] 사진 속 머리 두건은 일반적인 두건과는 다르다. 또, 왕비가 일반 부녀자 같이 머릿수건을 쓰고 있을리가 없다. 그림의 스타일 또한 전통적인 한국화 초상화와는 젼혀 다르고, 서양화 화풍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
2.3. Le petit Parisien의 삽화
프랑스의 Le petit Parisien 1895년 부록의 인물화로 아메리카 원주민 같은 차림새를 한 삽화다. 설명이 LA REINE DE COREE로 한국의 왕비란 뜻이다. 실제 모습과 전혀 상관 없이, 동양인이나 비서구인이면 다 똑같겠지라는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그려진 상상화로 여겨진다.
2.4. Novoe Vremy의 삽화
러시아의 Novoe Vremy 1895년 10월 21일자 별지 8쪽의 인물화이다. 살해당한 조선의 황녀라는 설명이 기사에 나와있다. 역시 중국풍과 아메리카 원주민 비스무리하게 그려졌다.
3. 사진
3.1. 떠구지 머리와 쌍비녀의 사진
Korean palace-woman in full regalia(대한제국멸망사, 1906) |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궁녀로 나와있는 기록도 역시 존재한다. 호머 헐버트의 <대한제국 멸망사>(1906-‘정장한 궁녀’)와 언더우드 여사의 <조선생활기>(1905-‘정장한 귀부인’), 샤를 알레베크의 사진엽서가 그것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고 원로 사학자들에 의하여 1977년부터 국사교과서에도 실린 명성황후 추정사진으로는 가장 유서깊은 사진이지만 비교적 근래에 부정론이 대두되어 논란 중이라 교과서에서 빠졌다.
이미 1900년대 초엽부터 알레베크 사진엽서[2]등 서구를 중심으로 궁녀의 사진으로 유통되던 사진이라 명성황후의 사진일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하며[3] 일각에서는 신발도 신지 않은 버선발 차림으로 사진을 찍는 등 왕비로서 지킬 체통과 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부정론이 있다. 또한 조선 시대 여성 복식의 중심은 가체(加髢)다. 가체를 보면 왕비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비녀를 두 개 꽂은 모양은 내명부의 신분이 높은 사람만 할 수 있으며, 떠구지머리 역시 상궁들이 하는 머리지만 왕비와 왕세자빈 역시 예장할 때 하는 내명부 공통의 머리다. 더구나 가체의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남아있는 구한말의 떠구지머리를 한 사진들 중에서도 매우 큰 편에 속한다. 가체의 크기는 지위를 상징한다. 버선발 차림도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의 문화를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으러 출궁해서 사진관으로 가는 식으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 궁내의 실내로 사진사가 들어와서 찍었기 때문에 신발을 신지 않았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중전이라고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것은 아니다. 발 역시도 단정하게 한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흔히 알려진 명성황후의 사진합성에 활용되었던 원본 배경 사진 # |
북한 같은 경우는 이 사진을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어쨌든 과거 정설로 여겨져서 교과서에까지 실렸던 이 사진의 위상은 많이 떨어진 게 사실이다. 복장도 순정효황후 사진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궁녀 사진이나 삽화와 유사점이 많으며 원본 사진의 배경도 단정치 못한 점 때문이다. 다른 왕실 사진은 단정한 배경들이 대부분이다. 아직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점점 부정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진의 영향력은 강력하여 드라마나 영화, 뮤지컬, 각종 행사 등에서는 여전히 떠구지머리와 쌍비녀의 명성황후가 자주 보인다. 아무래도 오랜기간 국사 교과서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실려있어서 명성황후 하면 바로 떠오로는 사진이고 목재로 된 나비 모양의 커다란 가채와 쌍비녀가 독특해서 일 것이다. 이는 역시 사진 논란이 있었던 흥선대원군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4]
살해 약 1년 전에 일본에서 석판화 양식으로 그렸다는 명성황후- 고종- 흥선대원군의 3자 합동 초상화인데 명성황후의 모습이 이 사진과 일치한다. 이 그림은 명성황후 관련 그림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이다.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이나 초상화는 모두 사후에 발행된 것이나 이것은 유일하게 생전에 나온 것이고 연대, 주소, 출판사, 발행일자, 편집자명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있으며 발행인이 일본에서 당대 최고의 석판화가이자 천황의 초상화를 최초로 보급할 수 있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매우 권위있는 사람인 출판사 신양당(信陽堂)의 '오카무라 마사코(岡村政子)'이다. 더구나 이 그림이 그려지기 6개월 전에 메이지 덴노 부처의 초상화를 역시 석판화 양식으로 그렸는데 실물과 같다. 만약 여기서 그려진 왕비 민씨가 실은 궁녀를 그린 초상화라 가정하면 고종, 흥선대원군 거기에 더해 메이지 덴노와 쇼켄 황후의 초상은 각각 본인의 얼굴을 그렸는데 명성황후만은 본인이 아닌 다른 궁녀의 모습을 그려넣었다는 얘기가 된다. 다른 사람의 초상화는 모두 본인의 실물과 같다. 이 그림은 일본에서 그린 것이라 서구에 비하면 훨씬 가까운 국가이고 일본 역시도 군주국으로 그 국민들 역시 군주국의 신민들이다. 왕후를 궁녀로 대충 그려넣는다는 것은 군주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례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위 사진이 명성황후라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는 증거가 되는 그림이다. 조선국귀현초상(朝鮮国貴顕肖像) (발굴특종②) 캐나다 거주 중국인에게서 입수한 명성황후 초상화
그러나 일본 석판화가 실물과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주장 역시, 논리를 한껏 비약시킨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아래에 열거된 프랑스, 미국 신문이 인종차별 황색저널이어서 엉뚱한 사진을 넣은 것이 아니다. 명성황후 문제의 핵심은, 당시에 그 누구도 명성황후의 사진을 구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사를 쓰다가 상상화나 엉터리 그림에 손을 대게 되는 것이다.[5]
출판사 신양당이 일본에서 얼마나 신용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들만이 명성황후 사진을 구할 수 있는 특단의 방법이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명성황후는 오래된 유교적 규범에 따라서 궁중에 숨은 채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처신으로 일관했다. 위의 석판화를 분석해보자면 상기의 알레베크의 사진엽서에다 얼굴만 특징 없이 무난한 조선 미인상으로 바꾼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든다.[6] 또한, 명성황후 생전이건 아니건 이 문제가 특별히 달라지는 점도 없다.
3.2.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려있던 사진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목구비를 조금씩 고쳐그린 수십 가지 합성본이 존재한다.[7] 그리고 이 사진의 원본 사진이 있는데,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링크 1990년에 명성황후 사진으로 국사 교과서에 실렸지만 논란 끝에 1997년 삭제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저 원본 사진의 캡션이 기생의 사진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본사진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바로 복식이다. 사진 속 여인은 한복을 입고, 손에 서양식 흰 면장갑을 끼고 있다. 장갑은 격식있는 의복을 상징하며, 저 당시 저런 장갑을 낄 수 있는 사람은 최소 귀족이나 왕족이라는 소리가 된다.[8]
단국대학교의 황필홍 교수는 이승만의 ' 독립정신'(1910년), 박은식의 '한국통사'(1917년), 장도빈의 '대원군과 명성황후'(1927년), '별건곤'이 발간한 사진 부록 '근대조선의 인물화보'(1932년)에 모두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고 실려있는 것을 근거로 이 사진이 실제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주장한다. 기사 무엇보다 명성황후의 조카였던 민영찬은[9] 이 사진을 명성황후로 지목했다. 민영찬의 생몰년도는 명성황후 생몰년도와 21년이나 겹치기 때문에[10] 얼굴을 못 본게 아닌 이상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가장 유력하다. 또한 차갑고 지적인 외모라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등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의 증언과도 들어맞고, 엄귀비와 영친왕이 닮았듯 왕세자 시절의 순종과도 닮은 면이 상당해 실제 혈족임을 뒷밭침한다는 주장도 있다. 윗문단의 떠구지 머리와 쌍비녀의 사진의 얼굴과 겹쳐보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견해 역시 있다.
이상의 이유 등으로 권오창 화백이 그린 명성황후 표준영정의 저본이 되었다.
3.3. 흥선대원군과 함께 찍은 사진
1891년 미국에서 발간된 박물관 보고서엔 "궁궐에서 시중을 드는 여인", 1893년 독일의 에른스트 폰 헤센-바르테크가 쓴 '코레아' 궁녀, 1894년 발간된 화보잡지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등의 책자에는 '조선 왕의 시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2006년 사진의 원본이 공개됐고 앨범에 함께 실린 4장의 사진중 왼편에는 고종과 순종의 사진이, 오른편에 명성황후 추정 사진이 있으며 아랫쪽에는 흥선대원군의 사진 2장이 배치됐다.
특히 명성황후 추정 사진 설명문에는 필기체로 'Die ermordete Königin'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살해된 왕비'라는 뜻이다. 대원군과 사진의 배경이 정확히 일치하며 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점, 유순한 눈빛과 다르게 날카로운 인상이 기록과 일치함으로 명성황후의 실물 사진이라는 의견이 있다. 서울대학교 이태진 명예교수는 여성 사진의 뒷배경이 같은 사진첩의 대원군 사진 속 배경과 똑같아 명성황후가 함께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접견한 드 게르빌이라는 프랑스 여행작가가 1차로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10월호에 사진과 함께 명성황후라 소개했고, 1895년 12월 14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아메리칸>에 쓴 ‘명성황후는 왜 살해됐나(Why Queen Min Was Murdered)에도 나왔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첩인 초선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명지대학교 김차규 교수는 사진 속 여인이 평복을 입었으며 뒷배경이 같은 대원군 사진이 임오군란 뒤 중국 억류 때 즐겨 입은 중국풍 복식 차림이란 점을 들어 대원군을 수행한 시종일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또한 동(同)대학교의 조효순 명예교수는 황후는 평상시 소례복 차림이어야 하는데 머리 위에 올린 가채에 떨잠 장식이 없고, 저고리 위에 황후가 입는 당의가 없으며 홑치마가 아닌 두 벌의 치마를 입어야 해서 궁중 복식의 예법에 맞지 않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의친왕의 딸 이해원 여사는 대원군의 첩인 초선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오른쪽 아래의 대원군 사진의 카페트와 뒷배경이 같아 같이 찍은 것으로 보이며[11] 대원군 사진은 복장을 보면 시기상 임오군란이후 청나라에 억류된 뒤 귀향한후 찍은것이고 관복이 아닌 평복차림을 볼때 사저인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명성황후가 출궁해서 운현궁으로 가서 사진을 찍었다는 말이 되는데 조선시대에 왕비가 무려 평복차림 그것도 속이 비치는 시스루 치마를 입고 출궁해서 시아버지를 만나고 사진을 찍었다는 얘기가 된다. 시스루 차림을 하지 않았더라도 왕후가 궁 밖으로 출궁하는 것은 드문 일이고 만날려면 왕이나 왕비의 가족이라 해도 그 가족이 입궁해서 알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대원군이 입궁해서 같이 찍는 게 자연스럽다.
궁안이라도 다른 사람들 눈이 있는데 실외를 시스루 치마 차림으로 돌아다니긴 어려웠을 것이다. 대원군의 중국식 복장으로 보아 청나라 억류 이후로 추정되는데 그후 권력에서 배제되어 입궁한 적이 거의 없다. 입궁해서 찍었더라도 관복을 입지 저런 옷을 입고 입궁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철천지 원수지간이지 한가롭게 가족사진이나 같이 찍고있을 사이는 더더욱 아니다. 대원군이 암살 시도를 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명성황후가 암살 위험을 느낄 것인데 그것을 감수했을 리가 없다.
1898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기사로 호머 헐버트가 썼다. The Corean Empress Who Was Murdered라는 설명으로 살해당한 한국의 황후란 뜻이다. 호머 헐버트는 지한파 미국인으로 고종황제의 측근 역할을 했던 사람이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라는데 힘을 실어주는 증거중 하나다.
사실 여부와 별개로 찡그린 표정이 꽤 사악하고 악독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인터넷 등지에서 명성황후를 깔 때 자주 쓴다.
4. 사진 및 초상화 부재설
명성황후는 살면서 어떠한 사진도 촬영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남아있는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다는 것이다. 왕비의 초상화는 없던 게 관례이던 조선의 왕비이기도 하고 명성황후의 생애를 고려하면 사진이 없다는 설이 가장 논리적으로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고종을 비롯하여 많은 왕실 인사들의 사진이 촬영되었고 중전은 아니지만 엄귀비와 같은 왕실 여성들의 사진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현대에는 유명인의 사진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명색이 왕비인데 사진 한 장은 남기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명성황후가 살던 시기에 휴대하기 편한 소형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커다란 플래시가 강한 빛을 발하는 대형 카메라가 현역이었다. 파파라치가 몰래 촬영한 사진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사진은 피사체가 되는 사람이 사진사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해야 촬영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초상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 왕실에서 거주하는 입장이 되어 보자. 명성황후가 자신의 사진이 시장바닥에 돌아다니는 것을 원하겠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극단적으로 유교적인 왕실의 시각에서 왕비의 사진이 불량배들의 손에 들어가는 상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간단하게 생각하니까 사진 한 장은 남겼을 거라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시대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명성황후의 사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명성황후가 사진을 촬영하였다면 그 사진은 바로 서양의 신문사에서 1면을 장식한다.
게다가 명성황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당시에 궁녀로 변장하면서 목숨을 건진 경험이 있다. 만약 사진을 남겨서 얼굴이 반란 세력에 알려지면 명성황후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이미 생명의 위협을 받은 후 남은 일생을 철저하게 사진을 기피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여지가 있다. 을미사변 당시에도 명성황후는 궁녀로 변장하여 피신하려고 시도한다. 범인들이 명성황후를 알아차릴 방법이 없어서 많은 궁녀들을 일단 살해한 것이라는 생존자의 증언도 있다. 최종적으로 누가 명성황후의 얼굴을 확인한 것인지도 의견이 분분한데 우범선일 수도 있고 고무라의 딸일 수도 있어서 확신하기 어렵다. 명성황후의 사진이 없어서 얼굴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상화도 사진과 다르지 않다. 조선은 어진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숙종 이후에도 왕비의 초상화는 남기지 않았다. 원경왕후처럼 개국 초기의 왕비들만 초상화를 그렸다. 명성황후가 그러한 전통에서 예외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나마 반론하는 입장에서는 명성황후가 서양의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니 폐쇄적인 전통을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왕비가 되기 전의 이름도 불확실한 명성황후가 사진이나 초상화가 없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명성황후는 자신이 보유한 막대한 권력과 무관하게 철저히 궁궐에서 은둔하였다. 촬영된 하나의 사진을 명성황후의 사진이라고 특정하려면 조선 왕실에서 명성황후의 사진을 언제 어디에 공개하였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게 없다면 명성황후가 아닌 다른 여성을 촬영한 것이고 명성황후가 맞더라도 신빙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1]
순종의 모습과 닮았다.
[2]
사진아래에 설명이
프랑스어로 Dame du Palais. Costume de ceremonie로 써있다. 이는 정장 차림의 궁중 여인이라는 뜻으로
궁녀로 해석된다.
왕비였으면 여인을 뜻하는 Dame란 단어 대신 왕비를 뜻하는 reine을 썼을 것이다. 더구나
샤를 알레베크는 자신이 만든 총 48장의
알레베크 사진엽서에 명성황후 장례식 사진을 다수 실을 정도로 명성황후 장례식을 중시했는데 명성황후를 궁녀로 설명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1900 파리 엑스포에 기념품으로 사진을 팔았는데 왕후를 궁녀로 설명한 사진을 팔았다는 얘기가 된다. 또한 그는
1897년 한국에 처음 왔는데 그 때는 이미
을미사변 이후이다. 다만 연대상으로 더 빠른 조선국귀현초상에 이미 같은 그림이 있다는 점을 볼 때 알레베크 사진엽서의 사진들이 다 그가 찍은 것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다. 더구나 그의 사진에는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사진도 있기 때문에 명성황후가 있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탁지부 대신
이용익이나
친러파 권력자
김홍륙 같은 정부 고관부터 농민, 아녀자, 아이, 기생같은 다양한 다양한 사람들의 사진도 있어 역시 추론을 더 어렵게 한다.
https://fr.wikisource.org/wiki/Souvenir_de_S%C3%A9oul,_Cor%C3%A9e_:_1900
[3]
다른 명성황후 추정사진 엽서로 한일통신합동기인
1909년의 엽서로 An Old Woman in the Corean Court, 韓國宮中の老女(한국궁중의 늙은 여자)라 쓰여있다.
[4]
다만 1866년경 병인양요 당시 촬영되었다는 흥선대원군의 사진은 곧 흥선대원군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며 촬영 시기 역시 1860년경이 아닌 1880년대 중반으로 밝혀졌다.
[5]
비슷한 현상이 현대에서도 일어난다. 북한 김정은이 처음 거론되었을 때 아사히 신문에 실린 엉터리 김정은 사진을 생각해보라.
[6]
만약 알레베크의 사진엽서가 명성황후라면, 신양당측도 그 사진을 똑같이 모사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얼굴을 바꾼 것을 보면, 당시 신양당측도 알레베크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즉, 알레베크 사진은 역시 명성황후가 아니다.
[7]
후술한대로 일개 기생이 아니라, 오히려 본인이 맞기에 사실왜곡을 위해 일제가 사진을 고쳤다는 주장이 있다.
[8]
관련 영상 출처
#
[9]
민영환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혈통상은 21촌
[10]
1874년~1948년
[11]
심지어 뒷배경의 주름까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