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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8 12:18:42

루이지애나 구입

루이지애나 매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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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의 삼색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1. 개요2. 배경3. 비슷한 사례4. 후일담5. 여담

1. 개요

1803년 여름, 토머스 제퍼슨은 펜을 한 번 휘리릭 놀려서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늘려버렸다. 루이지애나 전체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한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은 축제 분위기를 가져왔으며, 미국 여론과 언론은 한 목소리로 칭송을 했다. 이로써 제퍼슨은 멕시코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미시시피 강 루트를 보호할 뿐 아니라, 영토범위를 북미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뻗는다는 “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손을 뻗치려는 팽창욕을 크게 억제할 수 있었다.
- 닉 래곤, 대통령의 결단
Louisiana Purchase / La vente de la Louisiane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3년 뉴올리언스(누벨 오를레앙, Nouvelle-Orléans)의 통상권을 요구하러 간 미국 대사에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에 면적이 무려 2,147,000 km2에 달했던 루이지애나(루이지안, Louisiane) 전체를 통 크게 단돈 1500만 금달러=7500만 금프랑[1]에 매각한 사건.

이 거래는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거래[2]이자 역사상 가장 평화적이고 즉흥적으로 진행된 최대의 영토 거래로 불린다. 1km2당 겨우 단돈 7달러의 가격이었다.[3][4] 이 구매로 인해 얻은 영토로 미국의 영토는 2배로 불어났고[5] 현재의 미국 영토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한다. 따라서 미국 역사에서 " 서부개척시대"의 시작을 알린 가장 중대한 영토 변동이었다.

명칭은 '루이지애나 구매'지만 현재의 미국 남부의 한 로 있는 그 루이지애나가 아니다. 물론 그 지역이 핵심이었고[6] 미국이 원래 사려고 했던 통상권 지역이기도 했다.

2. 배경

이런 큰 영토를 한 번에 팔아넘기는 것이 일반적으로 순조로운 과정이 아닌데, 그렇지 않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본래 루이지애나 지역은 스페인 탐험가 나르바예스(1528)와 에르난도 데 소토가 유럽인 최초로 찾은 곳으로, 스페인 제국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근거로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다가 1683년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살이 일리노이에서 출발해 미시시피강을 따라 멕시코만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이곳을 루이 14세 식민지, 즉 루이의 땅이라고 "루이지앵(Louisien)"이라고 이름붙였고, 나중에 미국식으로 "루이지애나"라고 불리는 기원이 되었다.

1699년, 프랑스 해군의 드 이베르빌 제독이 정착지를 세웠고,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스페인은 이 지역을 프랑스에 넘겼다. 이후 루이지애나는 절대왕정 식민지 개척 시대에 프랑스 식민제국의 확장으로 차지한 땅 중 하나가 되었다. 거의 영국의 동부 해안을 제외하고 모든 북미를 차지하고 있던[7]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는 당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의 이명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뉴올리언스가 있는 오를레앙(올리언스)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763년 7년 전쟁[8]의 결과로 북미, 인도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조약에 따라 현재의 캐나다 퀘벡 북쪽과 미시시피강 동부의 영토는 영국에게, 미시시피강 서부의 루이지애나 영토는 스페인에게 모두 할양했고 카리브해 도서지역을 빼고는 북미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했다.

그런데 이후 나폴레옹 전쟁 와중 1800년 나폴레옹이 스페인과의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미시시피강 서부의 옛 루이지애나 영토를 다시 빼앗았다. 미국은 스페인에 이어서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갓 독립한 미합중국 옆에 자국 영토와 비슷한 크기의 프랑스 식민지가 등장한 건 신생국인 미국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장 미시시피강에서 흙 파먹고 살던 농민[9]들이 물 등을 위해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근교를 지나며 통행세를 내야 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 정도면 그나마 괜찮은데, 남부의 농업 교역에 미시시피강 수운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프랑스령 식민지가 미시시피강 하류를 정확히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만약 프랑스가 미시시피강을 봉쇄했다간 남부가 의존하는 수운은 끝장이었다.[10]

그래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여기의 교역권이나 협상하자고 사람을 보냈는데[11] 정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덜컥 그냥 "차라리 그 땅을 통째로 다 사갈래?"라는 식으로 나섰다. 물론, 그 당시에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거액을 들여서 루이지애나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영국과 싸우는 것도 바빠죽겠는데 프랑스까지 적대하면서 양면 전선으로 확대되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것도 있었고, 어차피 병력을 소모하면서 손해를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돈으로 땅을 구입해서 전선을 막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땅 크기만 보면 나폴레옹이 정신줄을 놓았나 싶지만, 나폴레옹에겐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대혁명 이후 계속 전쟁을 치르던 나폴레옹으로서는 북미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침략 위협도 많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에서 일어났던 아이티 혁명까지 부담스러운 일이 마구 터지고 있었다. 당장 영국 해군의 함대 때문에 프랑스군을 아이티 등 카리브 식민지에 파견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지애나가 아무리 큰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지만 무역항인 뉴올리언스 정도를 제외하면 당장 나오는 이익도 별로 없는 마당에[12] 유지비는 크게 드는 등 제대로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미시시피강 하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탐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 지역에 대한 정보는 미국이 구입한 뒤인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탐사 뒤에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 대로 군사적 효용은 컸지만, 정작 당사국인 미국은 프랑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므로 당장은 큰 효용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13] 게다가 프랑스 본토에서는 이 멀리 떨어진 땅을 가지고 투기했다가 미시시피회사 거품 사태가 터지면서 경제가 박살날 위기에 처했으며, 이미 루이 14세의 땅이라는 루이지애나는 프랑스 본토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식민지가 아니라 내 삶을 망친 혹덩이가 된 지가 오래였다. 그의 내손 모가지를 단두대로 내친 마당에 그게 제값을 받을 리도 없기 때문에, 돈이라도 될 때 팔아버리는 게 나폴레옹 입장에선 중요한 문제였다.

즉 처음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새롭게 돌려받은 영토로 프랑스의 확장을 꿈꿨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3년 만에 접었다.[14] 토마스 재퍼슨은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체로 점점 퍼져나가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나폴레옹의 몇 수 앞을 내다본 전략적 판단이었던 셈이다. 후세에 역사책을 보고 단순히 땅 크기의 문제로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지만, 어차피 나폴레옹이 계속 소유했어도 패전 후 다시 영국, 미국 등에 제 값도 받지 못하고 할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도 훗날 세인트헬레나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어차피 가지고 있어봤자 영국에게 빼앗길 텐데 그냥 판 거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조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당시 스페인은 카리브 쿠바, 그리고 아시아 필리핀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스페인한테는 거꾸로 미국이 쿠바의 매각을 제안했지만[15] 사실상 아메리카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쿠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스페인은 이를 거절했고, 이후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와 필리핀까지 죄다 뺏기고 스페인 제국은 몰락해 버렸다.[16] 당시 스페인 상태로도 많이 투자를 했어도 도저히 지금 국력 상태로는 나라를 먹이고 살리기 바쁜 상태에서 필리핀까지 관리하기란 힘들었고, 오히려 매각했다면 그 돈으로 스페인 재정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나폴레옹은 처음에 1억 프랑(2천만 달러)을 불렀지만 중개를 맡은 런던 베어링스 은행(Barings Bank of London)과 호프스 오브 암스테르담(Hopes of Amsterdam) 두 은행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여 해당 영토에 대한 요구 가격을 8000만 프랑스 프랑으로 낮추었고 최종적으로는 1,500만 금달러(7,500만 금프랑)로 낙착되었다. 대금은 미국 정부 채권으로 지급되었으며, 나폴레옹은 대금으로 받은 채권을 즉시 두 은행에 액면가의 86.5% 가격으로 넘겨 현금을 마련했다. 두 은행은 받은 채권을 런던 암스테르담의 일반 투자자들에게 다시 판매했다.

야사에 따르면 나폴레옹이 이 매각서류에 서명하면서 "이것으로 미국은 영국에겐 해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며, 결국 영국은 머지않아서 그 오만한 머리를 미국에 숙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17]

3. 비슷한 사례

루이지애나에 맞먹게 유명한 미국의 영토 구매는 러시아 제국과의 알래스카 조약이다. 이 거래도 역시 미국이 횡재한 케이스다. 당시 국무장관 헨리 슈워드는 "720만 달러[18]짜리 비싼 냉장고를 샀다."고 비웃음을 샀는데 그 알래스카는 알다시피 자원의 보고였다. 석유와 광물로 가득찬 냉장고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1665~1667)에서 아직 미국이 영국 식민지였을 때 네덜란드는 승전의 대가로 인도네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받아오고 " 뉴 암스테르담"이라는 작은 식민지를 영국에 넘겼다. 왜냐하면 당시 뉴 암스테르담은 아메리카의 식민지 거점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던 반면 네덜란드가 얻은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당시 유럽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팔렸던 향신료인 " 육두구"의 주요 산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뉴 암스테르담이 나중에 뉴욕이 되었다. 역시 현재의 시각으로만 당대의 영토 거래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19]더구나 비연속국에 지키기도 힘든 루이지애나와 뉴암스테르담이 안보적으로 보장됐을 가능성도 적었고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무력으로 빼앗기느니 제값에 돈 받고 팔아넘기는 게 나으니.

4. 후일담

5. 여담

루이지애나가 미국령으로 공식적으로 선포된 1819년 3월은 이른바 세 깃발의 날(Three Flag Day)이라고 불린다. 미국의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에도 실질적으로는 스페인 행정관이 루이지애나를 통제했는데[23]이 날 스페인 → 프랑스 → 미국 순서로 국기 하강식, 게양식이 열려 최종적으로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루이지애나의 소유권을 스페인에서 프랑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는 퍼포먼스인 셈.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13년 재퍼슨이 영국과 동맹하겠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서 팔았다는 이야기를 방영했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후술한 것처럼 영국 정부가 루이지애나 구입을 위한 대출을 승인했기 때문.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개척을 중단한 원인중에는 당시 열대 숲 모기 전염시키던 전염병 황열병도 있었다. 대체역사 만약에에서는 황열병이 없는 세계를 가정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여기서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팔지 않았고 패전 후 엘바 섬에서 탈출해서 팔지 않은 루이지애나, 즉 "누벨 프랑스"로 가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루이지애나 구입 때문에 미국은 다른 나라에 돈을 빌려야 했는데 다름 아닌 당시 나폴레옹의 적국인 영국의 베어링스 은행이었다.[24] 그래서 루이지애나 구입에는 영국 정부의 승인도 필요했는데 프랑스보다는 미국이 루이지애나를 갖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영국은 승인해 주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였던 걸 감안하면 매우 평화적인 거래였다.

[1] 2020년대 기준으로 30억 달러다. 200년간 국제 금시세(온스당 $18~$20→$1800~$2000), 빵값($0.005~$0.02→$0.5~$2), 일당노동임금($0.5~$2→$50~$200)을 고려한 것이다. 이 가치는 2023년 10월 30일 기준 한화 약 4조 5백억 에 달하는 금액이다. 그리고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1803년 1달러는 2023년 12월 8일 기준으로 27.23달러이고, 이를 대입하면 루이지애나 땅값은 고작 4억 845만 달러(약 5348억 원)인 셈이다. [2] 단순히 기존 미국 영토에 버금가는 크기의 땅을 헐값으로 사들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루이지애나를 구입하여 서부개척시대가 열리면서 미국의 영토는 캐나다와 함께 북아메리카 전체를 양분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즉, 본격적으로 국력이 성장할 수 있는 기초적인 요소인 광대한 영토를 획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루이지애나 구입을 계기로 미국의 본토가 태평양까지 뻗어나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은 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침략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미국은 유럽이 한창 식민지 쟁탈전과 땅따먹기 싸움으로 혼란했던 상황에서도 먼로 독트린을 주장하며 고립주의를 바탕으로 내실을 다질 수 있었고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초기에 관망만 한 채 무기를 팔아 거대한 이득을 볼 수 있었으며 세계 1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이 사건은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는 가장 큰 계기였던 셈. [3] 6,000만 프랑을 내고 1,500만 프랑은 미국이 프랑스 채무를 변제해 줬지만 이후 이 기록은 깨지는데 허드슨 베이 회사는 루퍼츠랜드(오늘날의  서스캐처원)라고 무려 39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땅을 캐나다 정부에 30만 달러에 팔았다. 앞의 기록은 그나마 1 제곱킬로미터당 몇 달러지만 여기서는 그냥 1달러당 몇 제곱킬로미터 수준이다. [4] 거의 1제곱킬로미터를 현대 가치로 26만~189만 원에 사들였고, 1ha(100m × 100m)를 단돈 2,600~18,900원에 사들인 셈이다. [5] 즉, 루이지애나 = 구입 전 미국 영토라는 뜻이다. [6] 뉴올리언스는 지금도 루이지애나의 최대 도시다. 당시 큰 루이지애나의 중심지는 당시부터 해안가의 미시시피강 하류 항구 도시인 뉴올리언스였다. [7] 물론 이게 깃발만 꽂고 점진적으로 개척촌을 세운 수준이긴 했다. 나머지는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존했다. [8] 북미 전역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9] 특히 신생주인 켄터키 테네시. 그 이남의 하류지방은 아직 주가 없었다. [10] 참고로 프랑스가 넘겨받기 직전 루이지애나를 통치했던 스페인은 1795년 미국과 핑크니 조약(Pinckney's Treaty)을 체결하여 미국-스페인 양국간 하천의 항해를 보장하고 통상을 정지하지 않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미시시피강에 대한 의존은 남북 전쟁 때까지도 여전해서, 북부 연방이 미시시피강 하류를 봉쇄하자 남부동맹의 해외 무역 90% 이상이 막혔다. [11] 근데 이 부분부터가 제대로 따지면 전쟁으로 갈 시비의 여지가 큰 부분이라 살짝 협박성에 가깝다. 그쪽 항구 지역 통행세 내는 게 거슬렸던 미국에서 일단 통행 허가를 요구한 것이다. 눈치 빠른 나폴레옹은 가뜩이나 루이지애나 주변 영국 식민지 때문에 거슬렸기도 하고, 프랑스가 가장 많이 지원했으며 독립전쟁으로 사이가 매우 좋아진 미국과 이 일로 사이가 틀어질까봐 우려했다고 분석된다. [12] 현대에 와서야 기술의 발전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이나 농업, 목축업, 공업 외 각종 산업으로 먹고 살기 좋은 동네지만, (특히 미네소타는 상당히 부유한 편이다) 당시엔 저 드넓은 땅이 거의 초원이거나 산맥이었다. 저 지역의 주들이 유독 크고 경계도 단순한 것이 당시엔 이정표로 삼을 만한 도시가 없어서 그냥 쭉쭉 그어서 경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루이지애나 구입 이후 크게 늘어난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정착민들에게 엄청난 크기의 땅을 헐값에 분양했는데 소설 초원의 집을 보면 미개척지에서 버티는 게 얼마나 헬인지 잘 묘사되어 있다. 많은 경우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초원에 오두막 짓고 가족들이 혼자 버텨야 했으며, 중서부 특유의 거친 환경(회오리 바람, 눈보라, 우박, 병충해 등) 때문에 한 순간에 1년 농사가 날아가거나, 에 산다고 해도 교통 상황이 열악해 마을 전체가 고립되기도 했다. 그나마 미국은 동부에서 농부들을 끝없이 보내 인구빨로 개척해낸 거지만, 본국이 대서양 너머인 프랑스가 저 드넓은 미개척지에서 제대로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당시로서는 없었다. [13] 시드 마이어의 문명 게임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언제든 적의 손에 넘어갈 수 있는 건너 대륙의 점령 도시를 우호적 문명에게 싸게 팔아치워 우호도도 올리고 이익도 취한 후 신경 꺼 버리는' 플레이를 종종 했을 텐데, 실제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일들이 종종 있었다. 알래스카도 이와 비슷하다. [14] 실제로 나폴레옹은 미시시피강의 해운에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뉴올리언스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중간에 아이티에서 예상 외의 손실을 입고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15] 미국도 이를 기대하고 사절단과 구매금액까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16] 그러나 미국도 필리핀은 현지의 저항을 물리치고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들이 원했던 쿠바는 먹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국력이 지금만큼 강하지 않았고, 아직 유럽 국가들의 힘이 강했으므로 유럽 열강들의 견제를 우려해서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바는 독립을 시키되 속국으로 만들고 관타나모만을 영구조차하는 선에 그쳤고, 그 대신 푸에르토리코를 얻었다. [17] 결국 140년 뒤에 현실이 되었는데 영국을 넘어서 나폴레옹의 조국인 프랑스를 포함한 전 유럽이 미국에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18] 오늘날 16억 7000만 달러. [19] 물론 거래가 없었더라도 다른 곳에서라도 뉴욕과 같은 포지션을 가진 도시가 세워질 가능성이 높다. [20] 조약에 변경은 없었다. [21] 오클라호마는 이 자치주 문제로 가장 늦게 가입한 주 가운데 하나다. [22] 남북전쟁 기간에는 네브래스카의 가입이 보류되면서 준주 지역이 네브래스카, 콜로라도주, 다코타(1861.3), 몬태나(1864.8) 등으로 구분되면서 사실상 주가 들어설 텃밭이 닦였다. [23] 나폴레옹은 아랑훼즈 조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뜯어냈지만 실질적으로 프랑스 관료들이 파견되기에는 거리도 멀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뉴올리언스에 파견된 프랑스 총독과 세인트루이스의 스페인 행정관이 공존하는 구조가 되었다. [24] 나중에 닉 리슨 때문에 망한 그 은행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