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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21:31:08

디에고 리베라

<colbgcolor=#000><colcolor=#fff>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
파일:gettyimages-515469080.jpg
본명 디에고 마리아 데 라 콘셉시온 후안 네포무세노 에스타니슬라오 데 라 리베라 이 바리엔토스 아코스타 이 로드리게스
Diego María de la Concepción Juan Nepomuceno Estanislao de la Rivera y Barrientos Acosta y Rodríguez
출생 1886년 12월 8일
멕시코 과나후아토 주 과나후아토[1]
사망 1957년 11월 24일 (향년 70세)
멕시코 멕시코시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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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화가
학력 산 카를로스 아카데미
배우자 안젤리나 벨로프 (1911년~1921년, 이혼)
과달루페 마린 (1922년~1928년, 이혼)
프리다 칼로 (1929~1939년, 이혼; 1940~1954년, 사별)[2]
엠마 우르타도 (1955년~1957년, 사별)
자녀 딸 2명
종교 무종교( 무신론)[3]

1. 개요2. 상세3. 일생
3.1. 유년기3.2. 청장년기3.3. 노년기
4. 화려한 여성편력5. 작품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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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의 화가. 생전에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명하였다.

2. 상세

생전에는 멕시코 미술계의 거장으로 유명하였으나 사후에는 프리다 칼로의 남편으로 훨씬 유명하다. 아래 후술할 여성편력으로 인해 그녀와 사이가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프리다와 결혼 후에 여러 이야기를 많이 남겼으며 다양한 작품도 남겼다. 1954년 7월 프리다가 먼저 사망한 후 3년 4개월 뒤인 1957년 11월 24일, 뇌일혈로 저택에서 사망한다. 죽기 전 화장되어서 프리다의 곁에 있고 싶어했지만 그 유언은 이뤄지지 않고 돌로레스 유명인사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일생

3.1. 유년기

1886년, 멕시코 과나후아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쌍둥이 형제가 한명 더 있었는데 아주 어린 나이에 일찍이 요절했다. 어려서부터 디에고 리베라는 사람들에게 엔지니어로 불렸는데 장난감을 뜯어 붙이는 솜씨가 뛰어나고 전차와 기차 그리는 것을 좋아하며 기계장치를 상상하고 그리는 것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되었을 때에는 거리에 있는 작은 판화 공방에 흥미를 느낀다. 그때 당시 세상 소식은 주로 장터의 노래꾼이나 떠돌이 시인, 기도문, 낱장짜리 인쇄문이었는데 판화는 그 인쇄물에 붙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디에고는 판화의 세계에 매료된다. 후에 이탈리아에 가서 14세기 프레스코 작품을 봤을 때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었다고 한다.

10대 후반에는 4년 동안 산 카를로스의 진부한 커리큘럼과 유럽식 회화 기법의 답습에 반항하고 멕시코 농촌을 오르내리며 집과 거리, 교회, 인디언, 화산 등을 그렸다.

3.2. 청장년기

1908년 22살에 리베라는 멕시코를 떠나 유럽으로 향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디에고는 스페인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친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작품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19세기 후반 그때 당시 무정부주의 사상이 널리 퍼진 스페인에서 디에고는 전단지와 소책자를 사들였다. 도서관에서는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드레퓌스 사건의 '나는 고발한다'를 쓴 에밀 졸라, 프랑스 노동이론가 조르주 소렐 등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이는 디에고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이후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을 돌아다녔으며 런던에서는 부둣가, 빈민가인 이스트엔드, 변두리 공장 지역에서 스케치를 쉬지 않았다. 빈민들이 일을 끝내고 런던 브릿지를 건너 템스 강둑에서 잠드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1910년 혁명이 시작된 멕시코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면 그는 주로 파리에 거처를 두고 1920년 겨울까지 10년간 유럽에서 지냈다. 파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모딜리아니와 사귀면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리에는 러시아에서 온 작가, 화가, 사상가들이 많았다. 그리고 디에고는 그때 첫번째 아내인 안젤리나 벨로프를 만났으며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정치, 혁명, 예술의 이상에 관해 토론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파리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에 기반한 시와 노래, 잡지 또는 기계와 노동자를 그린 페르낭 레제의 작품이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리베라를 사로잡은 것은 1920년 이탈리아에 갔을 때 본 14세기 프레스코 작품들이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비잔티움 에게 해 모자이크 조형 예술을 받아들여 화법을 발전시켰고 프레스코는 그중에서도 엄청난 문화유산이었다. 프레스코를 처음 접했을 때 리베라는 이미 30살이었고 화가로서 수련기를 어느정도 지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시에나에서 지오토, 우첼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같은 대가들의 전쟁화나 역사화를 꼼꼼히 공부했다. 프레스코는 화폭이 거대하고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으며 화랑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그림과는 차원이 다르게 보였었다고 한다. 리베라는 프레스코에 그려진 사람들의 신체 표현 방식이나 동작에 큰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프레스코 전체의 구조를 튼튼하게 만들고 벽의 배색과 장식을 어울리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는데 힘썼다.

1921년 멕시코로 돌아온 리베라는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하는데 보는 것마다 나의 잠재적 걸작이었다고 한다. 군중, 시장, 축제, 행진하는 부대,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 들판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온통 빛나는 어린아이들. 나의 스타일은 아이가 태어나듯이 그 순간에 태어났다고. 무엇보다 공공미술에 강한 신념을 가졌는데 때마침 혁명 정부는 미술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벽화 제작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프로젝트의 첫번째 과제는 멕시코시티 교육부 건물 전체의 내부를 장식할 벽화였다. 수년 후 이들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교육부 건물의 벽화 작품은 이탈리아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유럽 회화 특유의 우아하고 가는 선, 격조 있는 걸작들과는 판이한 멕시코 벽화 르네상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참고로 그때 당시 리베라 말고도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시케이로스 등 다른 외국 화가들도 벽화 제작에 참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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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대통령궁 벽화, 1945년[4]

리베라는 오로스코와 함께 인종과 정복의 서사시를 그렸다. 교육부 지상층의 디에고의 벽화 중에서 3개의 그림이 특히 인상적인데 하나는 광산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들, 다른 하나는 설탕을 휘젓고 있는 일꾼들이다.[5] 마지막 하나는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아마포를 물들이고 있는 테오틸루아칸 여인들의 모습이다. 요컨데 리베라는 대통령궁의 벽화를 통해 스페인에 의한 비통한 정복과 제국주의, 그리고 전통을 통한 민족의 회복을 그려낸 것이다.

그리고 이 벽화 작업을 하던 도중 1927년 자화상으로 유명한 프리다 칼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의 화가로서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어린 시절의 사고와 10대의 교통사고로 상처를 받은 칼로를 격려하고 21세의 나이차이 그리고 프리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9년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결혼한다. 그러나 리베라의 여성편력으로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고 1939년 이혼했다 1년 후 다시 재결합을 한다.

3.3. 노년기

1930년대 리베라는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긴다. 1920년대 말 리베라, 오로스코의 벽화 그림들이 미국에 알려졌고 미국은 1929년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대중 예술 지원 정책을 세운다. 이로 인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는 개념이 생격났다. 1930년 칼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리베라는 오래된 예술인 마을 몽고메리 거리에 스튜디오를 두고 일하면서 미국의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파일:록펠러 센터 벽화.jpg
록펠러 센터 내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1932년 리베라는 중서부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로 자리르 옮긴다. 굴지의 기업가 헨리 포드의 주문으로 디트로이트 미술학교에 노동자들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33년에 완성된 이 벽화는 미국의 공업화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리베라 자신도 자신의 주요한 작품으로 인정할 정도. 그러나 이 프레스코 벽화는 급진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후 1933년 록펠러 가문에서 뉴욕 록펠러 센터 안을 장식할 벽화를 주문했을 때는 리베라는 그 벽화에 20세기 사회와 정치, 산업과 과학의 가능성을 모두 그리고자 했다. 록펠러 센터 내 RCA의 그림 속에는 노동자들이 벌이는 거대한 메이데이 행진이 들어갔다.[6] 그런데 이 행진을 이끌며 노동자들을 마치 그리스도처럼 보듬고 그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레닌의 초상이 선명하게 그림 속에 들어가 있었고, 잠시 에이브러햄 링컨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국 이 초상을 제거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리베라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이 벽화는 파괴되었다.

1933년 12월 멕시코로 돌아온 리베라는 좌파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파와 기업주들로부터는 경멸을 샀다.

1940년대에도 여전히 멕시코를 사랑했으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그려냈고 1957년 11월 14일 멕시코시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 그는 그의 결혼 생활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 프리다 칼로의 곁에 잠들기를 원하였지만 결국 무산되고 멕시코시티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4. 화려한 여성편력

파일:디에고 안젤리나.jpg 파일:디에고 과달루페.jpg
첫 번째 아내, 안젤리나 벨로프 두 번째 아내, 과달루페 마린
파일:디에고와 프리다 실물.jpg 파일:디에고 엠마.jpg
세 번째 아내, 프리다 칼로 마지막 아내, 에마 우르타도

디에고 리베라는 자신의 예술적인 창조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자신의 행동에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로 유명한 안젤리나 벨로프는 러시아 출신의 멕시코 화가다. 리베라하고는 1909년 말에 만나 1911년에 결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둘의 관계는 꽤 낭만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폐합병증으로 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거기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아서 벨로프가 리베라의 그림 활동을 위해 나가서 일을 하는 등의 여러 희생을 했다. 그러나 리베라는 그녀에게 이미 마음이 떠나버렸고 1921년 이혼을 했다. 참고로 벨로프는 리베라의 영향을 받아 작품이 어두워졌고 이혼한 후 다시 재혼하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인 과달루페 마린은 멕시코의 모델이자 소설가다. 리베라의 그림 모델이 되면서 서로 사랑을 하게 되었고 1922년 결혼을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리베라를 보고 1928년 이혼하고 바로 시인 호르헤 쿠에스타라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1933년 이혼했다.

세 번째 아내는 그 유명한 프리다 칼로다. 자세한 내용은 프리다 칼로 문서 참조.

1954년 프리다 칼로 사망 후[7] 1955년 마지막 부인인 자신의 에이전트이자 출판 편집자 에마 우르타도와 바로 결혼을 했다. 하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진 리베라는 1957년 사망했고 에마 우르타도는 리베라와 2년 남짓이라는 결혼 기간을 가지게 되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이 인간은 한순간에 불타는 사랑만을 쫓아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다고 보면 편하다. 그리고 결혼한 와중에 아무렇지 않게 바람을 피우고 혼외자식을 만든 것을 보면 죄의식이나 도덕적 관념이 매우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사랑했던 연인들은 그의 작품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영향을 준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또한 배우자들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프리다 칼로와는 빈말로도 좋은 남편이었다고 할 수 없고 프리다도 이에 맞바람으로 대응했을 정도였으나, 프리다는 디에고의 바람기에 고통스러워하고 이혼까지 했으면서도 이내 재결합하고 마지막까지 함께했고 디에고 역시 프리다가 죽는 순간까지 곁에 있었으며 자신이 죽을 때도 프리다와 함께하고 싶어한 걸 보면 서로를 예술적으로 소울메이트로 여겼던 듯.

자녀는 벨로프와의 사이에서 2살에 요절한 아들이 있었고, 벨로프와 결혼 중에 사귄 마리아 보로비에프 스테벨스카와 낳은 딸인 무용가이자 배우인 마리카, 과달루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이자 건축가로 유명한 루스를 두었다. 또한 칼로의 모델이기도 했던 칼로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는 그의 모델이기도 했는데 이를 넘어서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단 얘기가 있다.

5. 작품

6. 기타



[1] 광산도시로 불린 곳이다. [2] 1939년에 이혼했다가 1년 후 재결합. [3] Philip Stein, "Siqueiros: His Life and Works" (International Publishers Co · 1994), 176쪽, # [4]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시장을 묘사하였다. 벽화 문서의 이 그림 또한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다. [5] 중남미의 설탕 제조업은 뜨거운 설탕 가마 앞에서 고단한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6] 뉴욕은 사실 메이데이 창설과 연관이 깊은 도시였다. [7] 참고로 프리다 칼로가 사망하자 리베라는 "프리다에 대한 사랑이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말을 했는데, 그래놓곤 바로 다음해 1955년에 엠마 우르타도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