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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8-01-25 23:54:31

드래곤원정대

북송의 역대 황제
7대 철종 소황제 조후 8대 휘종 현황제 조길 9대 흠종 인황제 조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71px-Huizong.jpg
묘호 휘종(徽宗)
시호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
(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연호 건중정국(建中靖國, 1101년)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대관(大觀, 1107년 ~ 1110년)
정화(政和, 1111년 ~ 1118년 10월)
중화(重和, 1118년 11월 ~ 1119년 2월)
선화(宣和, 1119년 2월 ~ 1125년)
성씨 조(趙)
길(佶)
생몰 기간 1082년 11월 2일 ~ 1135년 6월 4일
재위 기간 1100년 2월 23일 ~ 1126년 1월 18일

1. 소개2. 생애
2.1. 천부적 재능2.2. 취미 생활을 위해 나라를 파탄내다2.3. 정강의 변2.4. 타지에서 죽다.
3. 그의 사후 평가4. 트리비아

1. 소개

공부 따위 안한 영웅 보다 더 멍청한 황제
송나라 최고의 예술가

북송의 제8대 황제. 묘호는 휘종(徽宗),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휘는 길(佶). 본업은 예술가. 취미는 암군.[취소선] 한마디로 요약하면 송나라 멸망의 원흉이자 암군. 그의 삽질은 당대에는 나라의 절반을 잃게 했고, 이후 송과 금 간의 원수 관계를 만들어 150여년 뒤에는 나라의 나머지 절반도 잃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혼덕공[2]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자라고 할 수 있겠다.

2. 생애

6대 황제 신종의 11남이며 전임 황제 철종의 이복 동생이다.[3] 황자 시절에는 단왕(端王)으로 불리었다. 그는 황제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는 말은 둘째로 치더라도 항렬이 멀었다. 즉 원래라면 계승권이 없었을 것이다[4]. 그러나 철종의 외아들 조무가 요절하고 철종 본인도 일찍 붕어하자 황태후(상태후)[5]가 철종의 친동생 간왕은 '누구는 황제 친동생이라서 예법상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대, 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신왕 조필은 눈병이 있는데 황제 업무 보기 힘들거라면서 반대하면서,[6] 단왕을 직접 차기 제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따라서 철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장돈 등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 분 노는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 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이 분이어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태후는 ‘단왕 조길의 외모가 잘생기고 단정하며,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펼치며 철종의 뒤를 잇게 했다. 이는 당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당쟁,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도 관련되어 있었다. 즉 신종의 정처[7]와 철종의 모후[8]와 사이가 나빴는 점과 선인태후 고씨 사후 상태후를 중심으로 재편된 구법당파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한 철종과 장돈 등 신법당파의 향후 헤게모니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단왕, 신왕 대신 단왕이 선택된 것이다[9]. 따라서 철종 사후 철종의 유지와 장돈 등 신하들이 예법대로 동복동생 간왕, 생존해있는 신종의 아들 중 철종 다음의 최연장자인 신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 무시되고 휘종이 옹립됐다.

2.1. 천부적 재능

파일:attachment/송휘종/Example.jpg
휘종의 수금체[10]
우선 휘종은 문인으로서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시서(詩書)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이 개발한 서체인 수금체(瘦金體)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후대의 역사가나 감정가들로부터 '글자에 기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서체'라고 까이기도 한다. 글씨에는 개인의 성품이 묻어난다는데 역시 그런 모양이다.

다음은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 그가 지은 문장이다.
비단을 오려내 포갠듯 은은하게 빛나는 복사꽃
이제 막 단장을 마친 너의 향기에 선녀들도 부끄러워하리.
아, 그러나 어찌 이리도 쉽게 진단 말이냐
무정한 비바람이여 나의 아픔이여
몇 번의 봄이 지났던고 내 정원은 얼마나 쓸쓸하더냐
내 한은 씻어낼 길 없건만 너희 제비들은 어찌 말이 없느냐
하늘은 낯설고 땅은 멀기만 하구나
산넘고 물건너 고궁은 어디멘고
어쩌다 꿈 속에나 만날까
어디에 머물꺼냐...
이젠 꿈에서조차 보이지 않는구나.
裁剪冰绡,轻叠数重,淡著胭脂匀注。
新样靓妆,艳溢香融,羞杀蕊珠宫女。
易得凋零,更多少无情风雨。
愁苦。
问院落凄凉,几番春暮。
凭寄离恨重重,这双燕,何曾会人言语。
天遥地远,千山万水,知他故宫何处。
怎不思量,除梦里有时曾去
無据
和夢也新來不做
절절하기 그지없다.
파일:external/www9.wind.ne.jp/hato.jpg
휘종이 그린 도구도. 복숭아 꽃과 비둘기를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화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휘종이 그린 그림들은 단순히 황제가 그린 그림이라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게 아니라 진짜로 그림을 잘 그렸다.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 踏花歸去馬蹄香"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더니 다른 화가들이 모두 데꿀멍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 시절 이야기.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황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스리라는 나라는 안 다스리고 본업인 예술 활동에 심취한 바람에 국정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예대 나온 대통령 물론 취미 생활을 즐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린 군주들도 얼마든지 있다.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을 뿐더러 나름대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선덕제라든지 셀주크 제국을 세운 토그릴 베그,[11] 수학과 천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치정에도 재능을 보인 울루그벡[12] 같은 군주들처럼. 하지만 휘종은 명나라 말에 취미 생활로 국정을 내팽개친 천계제 프리퀄 격으로 천재 예술가인 동시에 역대급 암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루이 16세 : 대선배격이네.

2.2. 취미 생활을 위해 나라를 파탄내다

신종 사후 어린 철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던 선인태후 고씨가 구법당을 다시 복권시켰던 원우연간 시기와 철종 친정기인 소성,원부 연간의 기간 동안 장돈 등 신법당파가 집권한 이후 북송의 당쟁은 점점 심해져갔다. 따라서 철종 사후 휘종을 수렴청정한 상태후는 구법당과 신법당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구법당의 한충언,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런데 상태후가 얼마 안 가 갑자기 죽고 채경이 등장하면서 정국은 다시금 요동치게 된다. 평소 그림 그리기와 회화첩을 좋아한 휘종에게 총애를 받은 내시 동관이 휘종의 명으로 항주로 가서 화화첩을 가지러 올때마다 그 옆에서 비위를 잘 맞추던 채경은 신법당이었지만 신뢰할 수 없는 이유로 증포 등이 믿지 않았고 신용없는 인사로 평가되어 파직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종의 측근내시 동관의 추천으로 채경이 다시금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고 휘종은 채경을 재상으로 등용한다. 그리고 16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자신에 반대된다면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13]
파일:external/www.chinaculture.org/xinsrc_480704031435582659826.jpg
기암괴석을 그린 송 휘종의 그림. 이런 소재를 앉은 자리로 옮겨오면 자기는 좋지만...

우선 선대 황제였던 신종, 철종 왕안석, 장돈, 증포 등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고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놨는데, 이걸 고귀하신 황제님께서 예술활동한다는 이유로 파탄내버렸다. 그러자 채경 등의 신하들이 나서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거나, 소유 문제가 애매한 토지들을 일괄적으로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식으로 파탄난 국고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부과하여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가는데 집이 있으면 집을 무너트리고 길을 내기도 했다. 워낙 이 기암괴석을 실고 가는 배가 많아서 '화석강' 이라고도 불렀다. 수호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양지 도 이 화석강 감독이다가 배가 침몰하자 죄인이 되어 도망다니게 되는 등 학정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암군.

결국 시달리다 못한 민중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방랍의 난이 있다. 더불어 수호지의 주인공인 송강 역시 이 시기 산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란군 지도자 가운데 하나이다. 반란이 점점 격화되고 방랍의 경우 아예 독립 국가를 세우는 수준에 이르자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지만, 송나라의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으니...

2.3. 정강의 변

이에 분노한 금태조가 군대를 파견하자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14]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아버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15]. 그러나 이미 무너진 군대가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진정될 리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깨끗하게 갈려 나가고 뒤이어 개봉이 함락당하고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혔다. 이 때 황자, 황녀, 황후, 후비, 제왕, 왕비 등의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 때 끌려간 황족들은 그나마 두 황제는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조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그나마 처지가 나았지만 나머지는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 특히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해당 사항이 없었고,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다.[16].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금나라 관기들의 기방인 세의원으로 보내져 창기(娼妓)가 된 경우도 많았다. 서진 시대의 영가의 난처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손들의 굴욕적인 몰락이었다. 개중에는 여러 남자들의 성노예가 되어 끌려다니다 간신히 남송으로 도망쳐 온 공주가 진짜를 사칭한 가짜라 해서 처형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그러나 이 공주가 사실은 진짜인데 그녀와 같이 금나라에서 돌아온 고종의 모후 위씨가 자신이 금나라에서 다른 남자를 모신 사실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공주를 모함해 죽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국 땅에서 온갖 수모를 겪다 간신히 돌아왔는데 계모에게 모함당해 죽임을 당한 게 된다. 사실이라면 진짜로 불쌍하다.[17]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이렇게 금나라로 끌려나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동생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으로 추정되는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송 태조의 자손들에게 송 태조만한 역량은 없었으니, 결국 비슷한 짓을 하다가 망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를 내려 조롱하였다. 사실 금으로 끌려가면서 휘종은 ' 기생 이사사와 함께 끌려가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 이처럼 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마당에 기생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말을 주절대는 꼬락서니가 금에서 보기에는 혼덕공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휘종 때문에 북송이 망했다는 주장도 사실 틀린 것도 아니고. 그 외에도 그를 금나라로 끌고 갈 때 한 백성이 술과 고기를 올리자 호송하던 금나라 대장은 그 술과 고기를 땅에 버린 다음 강제로 주워먹게 했다. 거기에 도중에 쉬는 도중 술을 마시던 대장이 흠종의 황후 주씨에게 술을 따르도록 권했고 주씨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 때 한 대신이 금나라 놈들은 인면 수심의 인간말종이다!라고 부르짖자 그는 끌려나가 맞아 죽었는데, 이것을 본 금나라인들은 "요가 망할 때는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이가 그래도 족히 10명은 되었는데, 송이 망한 지금은 의를 위해 죽는 자가 저 사람 단 한 명뿐이구나!" 라고 서로 말하였다고 한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것이 요와 달리 송은 이 시점에는 완전히 망하지는 않고 그나마 충성스러운 인재들은 다 남송으로 갔기 때문. 남송이 망할 때는 그래도 문천상이나 육수부 같은 인물이 나와서 나라가 망할 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태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송나라가 요나라의 인구수의 10배는 되었던 걸 감안하면[18] 안습이긴 하다.

2.4. 타지에서 죽다.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성[19]에 끌려가 한 칸자리 방에 수감되어 망국의 한을 품다 1135년 숨을 거뒀다.[20] 그나마 아들 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다. 남송으로 송환된 휘종의 유해는 고종이 황릉 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며, 이 후 도종까지 남송의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 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21] 아래에 묻혔다.[22]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 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더 심각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5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와 1960년대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밭으로 마개조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공현[23]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기 시작한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3. 그의 사후 평가

예술에 심취해 나라를 오지게 말아먹었기에 조선 포함 후세의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예술 활동을 반대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황제는 글씨만 쓸 줄 알면 됐지. 예술에 심취하면 송 휘종처럼 될 수 있다.'며 만력제의 예술 활동을 반대했다. 문제는 만력제에게 파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는 점은 생각을 못한 것. 이는 중국만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미쳐 조선 성종도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휘종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 라고 대차게 까여야 했다. 연산군이 예술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그의 말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휘종의 업적이 없다고만은 할수 없는데, 휘종 시기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의 미술은, 미술사학적으로 중국 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휘종의 예술 사랑은 궁내 도화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고, 재야 미술가 발굴과, 송나라 이전 미술품 들의 평가도 대대적으로 이루어 졌다. 초일류 갤러리스트 북송 시기에 이성과 범관 등 걸출한 미술가는 물론, 휘종 자신도 서예 뿐만아니라, 그림에 능해, 미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 냈다. 때문에, 송나라의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그것들이 문화대혁명 때 죄다 작살났다는 사실은 잠시 잊자.

중원의 황제는 일개 제후국의 왕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산이 생기고 없어지는 와중에, 그는 그 막강한 힘을 예술과 사치품에만 쏟았다. 그의 예술사랑은 북송은 물론이거니와, 남송 대에 풍부한 예술자원과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도자기 문화도 그 기법이 완숙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산과 개봉의 불야성과 송의 막대한 경제력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레시피도 송 대에 완성 되었다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완숙된 시기였으며, 현대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으나, 그것은 곧 ' 사치'를 의미하며, 사치는 언제나 망국에 다다르는 요소 중 하나 였다. 송 휘종은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동방을 아우르는 천자 였다. 중국 미술과 문화의 활로를 열었지만, 북송의 망국의 길도 열어버린 황제이다. 대국적인 경영과 경제 측면에서 고려한 문화 융성이 아닌, 개인의 단순히 취미과 사치를 위해, 대륙을 뒤엎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4. 트리비아









[취소선] 그었지만 딱히 틀린 말이 전혀 아니다. [2] 굴러들어온 복을 망친 얼간이. [3] 생모는 진귀인(陳貴人)으로서, 흠자황후(欽慈皇后)에 추존되었다 [4] 철종의 이복 동생이지만, 철종의 생존한 동생 중에서도 신왕 조필에 이어서 두번째 연장자인데다 철종의 친동생 간왕 조사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신종의 생존한 아들들 중에서도 제위 계승권 상 휘종 앞에 2명이나 있었고 만약 철종의 아들인 조무가 살아있었다면 제위 계승권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5] 신종의 황후였던 흠성황후 상씨로 철종과 휘종에게는 친어머니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므로 어머니, 흠종과 고종에게는 할머니이다. 당시 황실 어른 중에서는 가장 어른이기도 했다. [6] 당시 신왕 조필의 눈병은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왕은 심한 안질로 거의 앞에 있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는 과거 중국 황제 중 지능이 모자란 이들보다 더 큰 결점으로 인식되었다. [7] 흠성황후 상씨(欽聖皇后 向氏) [8] 흠성황후 주씨(欽成皇后 朱氏)로 이 당시에는 덕비 주씨라고 불렸다. 따라서 그녀의 아들이었던 철종은 적자가 아닌 서자였다. [9] 물론 상태후 생전에는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균형적 인사 속에서 재상으로 증포가 선택되는 등의 조치가 있었다. [10] 천지현황의 현玄자를 원元으로 쓴 것은 송 황실의 시조인 조현랑의 이름자 중 玄을 피휘한 것이다. [11] 천문학과 시나 온갖 글에도 재능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갓 세우면서 온갖 전쟁도 이기며 국토도 엄청 넓힌 군주다. [12] 티무르 제국 황제로 8자리 소수까지 계산하는 수학 재능과 같이 온갖 천문대를 만들고 천문학에서도 재능을 보이던 인물이다. 심지어 코페르니쿠스보다 더 정확하게 항성 간 거리를 측정하는 등 수학과 천문학에 보이던 기록과 재능은 서구 천문학자들까지 감탄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독일 천문학자 폰 마들러(1794년 ~ 1874년)는 울루그벡을 칭송하며 자신이 발견한 달에 난 분화구를 울루그벡이라고 이름지어 그를 기렸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무슬림인 울루그벡이 종교적으로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자 아들이 극단파랑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참수당하고 만다. 하지만 아버지와 많은 형제를 죽이고 제위한 아들 압달 라티프 미르자는 겨우 6달만에 똑같이 반란으로 무너져 나이 서른에 아버지랑 똑같이 참수당해 죽는 인과응보를 당한다. [13] 채경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면 신구법 인물에 상관없이 약 300여명을 모조리 몰아내고 나아가 그 자손들까지 연좌제로 과거응시금지 등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조치 등을 무기 삼아 조정 전체를 장악했다. [14] 당시 휘종은 수도가 함락되면 자신이 다시 제위에 복귀하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15] 휘종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연회를 즐기고 후궁들과 어울리는 평상시와 같은 생활을 했다. [16] 처녀들은 물론이고 유부녀들도 얄짤없었다. 또 원래 모시던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져 또다시 첩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 사람이 죽은 후에는 다시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 [17] 사실 송고종의 항목에도 일화가 있듯이 위씨가 뻔뻔한 안면 몰수의 철면피라는 것을 보면 진짜 이게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18] 대충 요는 500만, 송은 5000만은 잡는다. [19] 오늘날의 한반도 북부,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 회령청년역 자리 라는 설이 있지만 오늘날 하얼빈 이란현 부근이라는 설이 정설이다. [20] 다만 정강의 변 항목에도 나오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21] 남쪽, 즉 남송의 기운을 진압한다는 주술적인 의미의 탑으로 도굴을 한 것은 양련진가가 남송의 부활을 막기 위해 건의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도굴에 있었으며 이런 짓을 한 것은 혹여나 죽은 황제들과 황후들이 자신에게 해를 입힐까봐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정복 왕조도 어쨌건 이전 왕조를 계승한 것으로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양련진가의 이 만행은 원나라 조정 내부에서도 당연히 문제가 되어 결국 주살되었고 그의 수하 승려들은 같이 주살당하거나 부장품 분배를 가지고 싸우다가 이미 죽은 경우도 있었으며 병으로 갑자기 모두 죽었다고 한다. 당시 원 세조는 양련진가가 도굴한 보물들을 몰수해서 대도에 절과 탑을 지았다고 전해진다. [22] 진남탑의 구체적인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진남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서는 이와 비슷하지만 대치되는 기록이 있다. 양련진가에 의해 황릉이 비참한 피해를 입자 이를 비통하게 여긴 그 일대 주민들이 황야에 버려진 역대 황제와 황후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상자에 담고 비단으로 싸서 감람나무 아래에 묻었다. 그 대신 소뼈와 말뼈를 황야에 흩어놨고 이걸 자기가 버린 황제의 유해인지 알았던 양련진가는 완벽하게 속았다. 그런데 이 기록이 사실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감람나무를 찾을 길이 없다. 8백년 가까이 됐는데 그 나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진남탑이든, 감람나무이든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어딘가 땅 속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을거다. [23] 낙양 근처에 있다. [24] 영종의 둘째 딸이자 신종의 누이동생 [25] 『고려사』권122, 「열전」35 ‘방기’ 이령 [26] 둘다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똑같이 나라를 말아먹었다. 그래도 이욱은 백성을 쥐어짠다던가 하는 폭정은 하지 않았다. [27] 고구가 건달이던 시절로 당시 단왕 시절 [28] 그나마 등장한 장면도 큰 돌을 부둥켜안고 "이 돌은 숨을 쉬나니.."(...) 이러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