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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0:57:50

여주 전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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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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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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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전투
驪州 戰鬪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시기 1차 : 1592년 (선조 25년) 6월 7~9일 중 (음력 4월 28~30일)
2차 : 1592년 (선조 25년) 7월 20일~24일 (음력 6월 12~15일)
장소

경기도 여주 일대
원인 일본군의 경기도 침공
교전국 <rowcolor=black> 조선
(수세)
일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원호
지휘관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고니시 유키나가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조선의 승리
영향 일시적인 일본군 진격 저지

1. 개요2. 전개
2.1. 여강/신륵사 전투2.2. 여주를 비우다2.3. 구미포/마탄 전투2.4. 금화 전투2.5. 원호 사후
3.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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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시기 원호 여주를 중심으로 벌인 전투들.

2. 전개

2.1. 여강/신륵사 전투

6월 4~5일(음력 4월 25~26일), 강원도 조방장으로 있던 원호는 일본군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 병력을 이끌고 평해(현 울진군)에 다다랐다. 하지만 일본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한다.[1]

6월 6~7일(음력 4월 27~28일), 원호는 일본군의 충주 탄금대 다음 관문인 여주로 먼저 향해 인근의 향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2]

6월 8~9일(음력 4월 29~30일), 원호는 여강( 여주의 강변)에 주둔한 일본군의 선발대를 쳐서 섬멸하고 신륵사에 거점을 잡았다. 이로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이 남한강을 따라 한성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게 되었다.

2.2. 여주를 비우다

그러나 강원감사 유영길이 원주로 적의 대군이 진격할 기미가 보인다며 원호를 원주로 불렀다. 원호는 강원도 조방장이었기 때문에 국가 전체의 그림보다 강원도의 명을 먼저 따라야 했다. 또한 강원도 내에서 그나마 쓸만하고 남아 있는 군은 원호군 뿐이었다. 이에 원호가 탄식하며 군을 원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이 남한강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 한성으로 향하며 6월 11일(음력 5월 2일) 한강 전투까지 돌파한다.

이후 여주는 일본군의 수중에 놓이는데, 강원감사 유영길의 말대로 원주를 노리는 쪽의 군이 1군으로 조총도 가졌으며, 여주에 주둔하는 쪽은 2군으로 활과 칼만 가졌는데 포악하여 민가를 잔인하게 노략해 '백정왜'라 불렸다.

7월 초(음력 5월 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근왕군을 모집하는 격문을 곳곳에 보낸다.[3] 이에 원주에 있던 강원도 군도 와해된다.

2.3. 구미포/마탄 전투

7월 20~23일(음력 6월 12~15일), 원호도 슬며시 다시 여주에 돌아와 병사들을 모았고, 구미포(현 여주시 흥천면)에 둔진한 일본군을 새벽을 틈타 기습하여 50여명의 목을 베었다.

더불어 마탄('마암'이 있는 현 여주시 상동 132)에 많은 일본군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 이천부사 변응성과 함께 논의했다. 궁사수 중에 정예를 뽑아 배에 정렬하고, 배 위에 덮개를 덮어서 화물선으로 가장하여 마탄에 정박하러 가는 듯 위장했다. 왜병들이 노략할 화물선으로 여겨 강가에 늘어서자, 때를 놓치지 않고 궁사수들이 이들을 격파했다.

이렇듯 원호가 여주를 다시 되찾자, 이천/여주/광주/지제/광주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동남부가 평온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남한강 보급로가 다시 차단되었다. 이 시기 원주에 진을 친 왜군은 지평/양근/양주/광주를 통해 한성과의 연결로가 차단되었고, 충주에 진을 친 왜군은 죽산/양지/용인을 통해 한성과의 연결로가 차단되었다.

2.4. 금화 전투

7월 24~25일(음력 6월 16~17일) 중, 강원감사 유영길은 원호에게 함경도를 휩쓸고 강원도로 남하하는 일본군과 맞서 강원도 금화(현 김화군)로 향하라고 명한다.

7월 27일(음력 6월 19일), 원호의 게릴라 특공대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군에 맞서기엔 중과부적이었고, 일본군이 미리 알고 병력을 매복까지 시켜 놓아 병력 대부분이 죽게 되고, 원호는 자결한다.

2.5. 원호 사후

류성룡 징비록으로 원호의 죽음을 두고 "이로써 강원도에는 적에 대항할 인물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적었다.

8월 중, 시마즈 가문은 금화에서 춘천, 홍천으로 남하하며 별다른 전투 없이 점령한다.

9월 28일 (음력 8월 23일), 영원산성 전투가 발생하며 강원도 원주도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며, 강원도 전역이 일본에 떨어진다.

3. 출처


[1] 신립 상주 전투(6월 4일, 음력 4월 25일) 결과를 듣고도 충주 탄금대 전투(6월 7일, 음력 4월 28일)를 준비하며 경상도 방어선을 자진 해체. [2] 선조실록에 원호가 병사가 없었는데 도망한 이들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여주 인근에 제 위치를 지키지 않고 도주한 향병들을 모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이광의 근왕군 3만은 7월 13일(음력 6월 5일) 용인 전투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에 대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