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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8:07:27

돈 레비

돈 레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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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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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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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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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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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레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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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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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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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 감독
파일:돈 레비.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돈 레비 OBE
Don Revie OBE
본명 도널드 조지 레비
Donald George Revie
출생 1927년 7월 10일
영국 잉글랜드 노스요크셔 미들즈브러
사망 1989년 5월 26일 (향년 61세)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1]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레스터 시티 FC (1944~1949)
헐 시티 AFC (1949~1951)
맨체스터 시티 FC (1951~1956)
선더랜드 AFC (1956~1958)
리즈 유나이티드 FC (1958~1962)
감독 리즈 유나이티드 FC (1961~1974)
잉글랜드 대표팀 (1974~1977)
아랍에미리트 대표팀 (1977~1980)
알 나스르 FC (1980~1984)
알 아흘리 SC (1984~1985)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선수 경력3. 감독 경력4. 일화
4.1.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과의 악연4.2. 더티 리즈

[clearfix]

1. 개요

영국( 잉글랜드) 축구 선수 출신 감독.

리즈 시절을 이끈 레전드급 감독. 선수 시절 잉글랜드에서 나름대로 유명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감독으로서 선수 시절보다 훨씬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리그에서 13년의 세월 동안 집권하면서 리즈는 별볼일 없는 클럽에서 잉글랜드 제일의 클럽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아서는 잉글랜드 최악의 부진의 원흉으로 찍히고 말았다. 이후, 중동으로 무대를 옮겨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 알 나스르 FC, 알 아흘리 SFC 감독 등을 맡았다.

2. 선수 경력


돈 레비의 일대기를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상(1989)

파일:external/www.mightyleeds.co.uk/revie56cupdrink.jpg
맨체스터 시티 시절 FA컵을 들어올리고 있는 돈 레비.

레비는 1927년 6월 10일 미들즈브러의 요크셔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12살이 되던 해에 암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대공황 이후 직장을 잃어 여러 곳을 전전하여 앵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이렇듯 물질적으로 빈곤한 집안에서, 레비는 축구에 희망을 걸고 뉴포트 보이즈 축구 클럽에 가입하여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얼마 후, 미들즈브러의 감독 빌 선더슨은 그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일찌감치 미들즈브러로 데려와 친히 가르쳤다. 센더슨은 그의 집 안의 좁은 마당에서 누더기 한 보따리로 된 조그만한 골대를 설치하고 그를 포함한 어린 선수들에게 기본적인 축구 기술을 가르쳤다. 이러한 은사의 가르침은 훗날 그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나중에 감독이 된 뒤 어린 선수들에게 조그만한 경기장에서 소그룹으로 나누어 축구 경기를 함으로써 실력을 기르게 했다.

그런데 정작 프로로 데뷔한 클럽은 미들즈브러가 아닌 레스터시티였다. 이는 레스터 시티 측이 그의 잠재력을 눈여겨 보고 일정한 보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그를 영입한 것이다. 이리하여 1944년 8월, 레비는 레스터 시티와 프로 선수 계약을 체결했다. 또한 그는 축구 경기를 치른 후 남은 시간엔 견습 벽돌공으로서 일했다.

그는 그 곳에서 1949년까지 5년간 활약하며 96경기 25골을 기록했다. 1949년엔 FA컵 준결승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전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정작 결승전에선 코 부위의 정맥이 터지는 바람에 피를 과도하게 흘려 결국 경기에 뛰지 못했고, 레스터시티는 결승전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에게 3:1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레비는 1949년에 19,000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헐 시티로 이적했다. 사실 그는 아스날과 맨체스터 시티로 갈수도 있었다. 두 팀 모두 레비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에게 정식으로 제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두 팀 모두를 거절하고 헐 시티를 선택했다. 당시 헐시티에는 2차 세계대전 이전 잉글랜드 최고의 선수였던 레이치 카터가 감독직을 맡고 있었고 레비는 그를 존경했기 때문에 헐시티로 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헐시티에서의 생활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헐시티는 1949-50 시즌엔 중위권엔 머물렸고 1950-51 시즌엔 강등권 경쟁을 벌인 끝에 간신히 잔류했다. 당시 팀동료였던 앤디 데이비슨은 훗날 레비가 동료들이 자신이 자유롭게 패스를 찔러넣어줄 수 있도록 보호해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상대에게 번번이 공을 빼앗겨 성장이 정체되고 말았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고 밝혔다. 결국 레비는 카터가 경질되자 곧바로 팀을 떠났다.

레비는 1951년에 25,000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다. 그는 맨시티에서 1951년부터 1956년까지 5년간 활동하며 148경기 35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레비는 당시 맨시티 감독이었던 레스 맥도월과 갈등을 빚었다. 1955-56 시즌이 개막하기 몇 달 전, 맥도월은 시즌을 준비하기 위해 트레이닝을 실시했다. 그런데 레비는 그 트레이닝에 2주 동안이나 무단으로 불참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당시 트레이너였던 라우리 바렛으로부터 휴일에 기차여행을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 후 2주 동안이나 팀에 복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격노한 맥도월은 레비에게 27파운드의 벌금을 매겼다.

그후 레비는 감독에게 단단히 찍혀 경기에 제대로 출장하지 못했다. 그나마 1956년에 FA컵을 우승한 것이 이 시기 그의 유일한 성취였다. 결국 레비는 맨시티에 더 이상 있어봐야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절감하고 1956년 10월 2만 2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선덜랜드로 이적했다.

그는 선더랜드에서 2년간 64경기 15골을 기록했고 1958년 11월 1만 4천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후에는 팀의 주장으로서 활동하며 4년간 76경기 11골을 기록한 후 1962년에 은퇴를 선언했다. 레비는 잉글랜드 국가대표로는 6경기 출장하였으며, 커리어에서는 501경기 출장에 108골을 득점했다. 말 그대로 무난한 공격수였다.

3. 감독 경력

3.1. 리즈 유나이티드

파일:external/www.ozwhitelufc.net.au/Revie%20Don%20Manager.jpg
파일:external/i.telegraph.co.uk/1972-revie-bremner_1371159i.jpg

감독으로서의 데뷔이자 최전성기였던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1961년, 리즈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감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절 리즈는 2부리그에 있었고, 주요 우승컵을 든 적이 없는 약체팀이었다. 그러나 레비가 감독을 맡은 이후 리즈는 성적이 급상승하게 되는데 1963~64 시즌에 2부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었고, 1부리그에 승격한 후 1968~69시즌과 1973~74 시즌에 1부리그 우승을 이끌어낸다. 그외에도 FA컵 우승 1회, 리그 컵 1회 우승, 채리티 실드 1회 우승, UEFA컵의 전신인 인터시티 페어컵 2회 우승까지 이끌어낸다. 2부리그에서 재정 문제로 골골거리던 팀을 1부리그에 올린 것으로 모자라서 UEFA 컵 위너스 컵,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제외한 나머지 대회 우승컵을 모조리 수집했으니 그야말로 감독 커리어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었다. 1969~70시즌 중에는 축구계에서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관보링크 [2] 이 당시 팀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빌리 브렘너 잭 찰튼은 지금도 팀의 레전드로 대우받고 있다.

3.2.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파일:external/equaliserblog.files.wordpress.com/revie2.jpg

1974년 6월, 레비는 13년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던 리즈를 떠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했다. 전임 잉글랜드 감독이자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을 이끌어냈던 명장 알프 램지는 1974년에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자 짤렸고, 그 후임으로서 영전하여 들어가게 되었다. 유명한 저널리스트였던 브라이언 글랜빌은 레비의 취임 소식에 "레비는 최고의 선택이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레비는 잉글랜드에서 최악의 흑역사를 창조하고 말았다.
레비는 언론과 신뢰관계를 맺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잉글랜드 선수들과 자주 사적인 미팅을 가져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맨체스터에서 대표팀 선수단 전원과 함께 가진 미팅에서, 그는 선수들에게 국제 경기에서 이기거나 비길 때마다 보너스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나중에 축구 리그 협회의 회장 앨런 해데커에게 이 사안에 대해 건의했다. 그러나 해데커는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것은 FA의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거부했다.

이후 레비와 FA간의 사이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1976년에 부임한 FA의 회장 해롤드 워리스 톰슨 경은 잉글랜드 대표팀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고 레비를 자기 말만 듣게 만들려고 했다. 이 악명높은 회장의 간섭 때문에, 레비는 자신의 의사를 좀처럼 대표팀에 반영하지 못했다. 게다가 레비는 리즈에서 성공했던 방식인 더티 리즈 스타일을 잉글랜드 대표팀에도 적용하려 했지만 선수들은 이에 따르기를 거부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함으로서 그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다. 심지어 콜린 토드라는 선수는 레비가 잉글랜드 감독에 맞지 않으며 오직 피지컬 위주로만 훈련을 시키는 그의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렇듯 내부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팀이 잘 나갈 리 없다. 유로 1976 예선에서, 잉글랜드는 체코슬로바키아, 포르투갈, 그리고 키프로스와 한 조를 이루었다. 이 중 단 한 팀이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는 웸블리에서의 1차전에서 체코를 3:0으로 제압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홈에서 0:0으로 비기는 바람에 수많은 비난에 시달렸다. 그래도 이후 잉글랜드는 키프로스를 홈에서 5:0으로 격파하고 원정에서도 1:0 승리를 기록하여 1위를 굳건히했다.

이제 남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와 포르투갈과의 2경기뿐. 이 두 경기를 잘 치르기만 한다면 잉글랜드는 유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잉글랜드는 체코슬로바키아에게 2:1로 패하고 말았고 레비는 공격 전술이 부재하다는 팬들의 비난에 직면했다. 게다가 리스본에서의 원정경기에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과 1:1로 비겼고 체코는 키프로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둬 1위로 직행했다. 이리하여 잉글랜드의 1976 유로 본선 진출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팬들은 레비가 취한 정책들에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대표팀의 주장인 앨런 볼 엠린 휴즈를 로스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과 찰리 조지 앨런 허드슨을 벤치에 박아둔 채 경기에 투입시키지 않은 점, 그리고 선수들이 주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에서 뛰게 하여 경기력이 저하되게 만든 것에 대한 비난이 거솄다.

이러한 비난을 뒤로 한 채, 레비는 1978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잉글랜드의 예선 상대는 이탈리아, 핀란드, 그리고 룩셈부르크였다. 잉글랜드는 핀란드와 연달아 만나 홈과 원정에서 각각 2:1, 4:1로 격파하면서 좋은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로마에서의 원정 경기에선 이탈리아에게 2:0으로 패했고, 이후 룩셈부르크와의 홈 경기에서 5:0으로 대승은 했지만 이탈리아전 패배로 인하여 또다시 월드컵 진출에 차질이 빚게 생겼다. 팬들은 그가 엠린 휴즈, 데이브 클리먼트, 로이 맥팔랜드, 그리고 밀크 밀스를 기용하지 않는 것과 선수들을 제 포지션이 아닌 엉뚱한 곳에 배치하는 것에 비난을 퍼부었다.

이러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FA 회장 해롤드 톰슨 경은 그를 불신했고, 1976-77 영국 홈 챔피언십에서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게 밀려 3위에 그친 것에 분개하여 레비와 갈등을 빚었다. 게다가 레비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를 앞두고 아랍에미리트에 속한 두바이를 관광하러 갔다가 정작 친선경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비난이 극에 달하자, 레비는 잉글랜드 감독직을 사임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FA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은 론 그린우드가 이미 그를 대신해 새 감독이 되기로 약정이 되어 있었다.[3] 한편 브라질과의 친선경기는 0:0으로 끝났고 뒤이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와의 경기도 무승부로 끝났다.

1977년 6월 12일, 데일리 메일지는 레비가 잉글랜드 감독직에서 물러나 아랍에미리트 감독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레비는 두바이로 단순 관광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아랍에미리트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기로 비밀리에 계약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FA는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아랍에미리트 감독이 되기로 한 레비에게 분개했고 그에게 10년간 감독 자격을 정지하는 중징계를 내렸다. 이에 대해 레비는 FA의 징계가 부당하다며 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법원은 몇달간 심의를 벌인 끝에 FA가 권한을 지나치게 남용했다는 판결을 내리며 징계를 취소시켰다. 이리하여 감독 생활이 자유로워진 레비는 곧바로 아랍에미리트 감독으로 부임했다.[4]

3.3. 중동 시절

레비는 아랍에미리트 국대와 4년간 주급 34만 파운드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아랍에미리트 국민들은 그를 탐탁지 않아했고 그를 "용병"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UAE는 이라크에서 열린 1979 걸프컵에서 7개의 팀들 중 6위를 기록했다. 그는 1980년 5월에 UAE를 떠나 알 나스르의 신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83-84 시즌 리그에서 3위에 그친 뒤, 알 나스르는 그를 경질했다. 이듬해, 레비는 이집트의 최강팀인 알 아흘리 SC의 감독으로 부임했으나 4개월간만 팀을 지휘하고 1985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QPR이 그를 선임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QPR은 다른 감독을 선임했고 레비는 축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3.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1987년부터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으로 투병하면서 1988년에 마지막으로 리즈 홈 구장인 엘런드 로드에 참석하여 팬들과 만남을 가졌으나, 1989년에 에딘버러에서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리즈 유나이티드 홈구장인 엘런드 로드에 그의 이름을 딴 돈 레비 스탠드가 있으며, 앨런드 로드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4. 일화

4.1.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과의 악연

관련 자료

브라이언 클러프와 돈 레비의 썰전 영상 (1974)

자존심이라면 한 자존심하는 브라이언 클러프는 '더티 리즈'라는 별명에 걸맞게 거친 플레이를 하는 리즈, 그리고 그 매니저인 돈 레비를 정말 싫어했던 편이다. 그러다보니 리즈가 돈 레비의 후임자로 브라이언 클러프를 낙점했을 때 클러프는 부임 즉시 팀에서 레비의 색을 지워내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클러프가 취임 직후부터 해고당할 때까지 질러댄 이적료는 레비가 13년동안 쓴 이적료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았고. 이런 대량의 이적으로 인해 리즈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들로부터 반발을 사게 되었다. 이런 클러프의 급진적인 팀 변화 정책이 팀의 케미스트리를 박살내버릴 위기에까지 처하게 되자 클러프는 44일만에 해임당하고 말았다.[5][6] 그러다보니 클러프로서는 리즈와 돈 레비를 더더욱 싫어하게 되었을지도.

위의 영상으로 나와 있는 요크셔 TV 프로그램에서 썰전을 벌이면서 더더욱 라이벌리는 강조되었다. 오죽하면 포포투가 아르센 벵거 vs 알렉스 퍼거슨 급의 역사적 라이벌 베스트 6에 선정했을까.

4.2. 더티 리즈

당시 리즈의 팀컬러였던 '더티 리즈'의 분위기를 만든 감독. 어떻게 보면 2부리그급 팀을 빠르게 1부리그에 정착시키고, 그런 팀을 우승권 팀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던 상대팀 입장에서는 리즈의 선수들이 거칠게 플레이를 해서 선수들이 나뒹굴고 부상당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화가 날 상황이였다. 그런 남자의 축구를 해서 결과물이라도 안 좋으면 모를까, 그 축구로 결과물을 뽑아내니까 팬들이나 타 팀 감독들이 꽤나 싫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이런 팀 컬러를 열심히 깐 인물이 바로 위에 나온 브라이언 클러프.

(본 문서는 영국 위키백과 내 Don Reive 문서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작성되었습니다.)

[1] 5피트 11인치 [2] http://www.mightyleeds.co.uk/seasons/196970part2.htm [3] 브라이언 클러프도 차기 국대 감독 물망에 올랐으나 톰슨 회장에 의해 그린우드로 정해졌다. [4] 한편, 레비가 물러난 잉글랜드는 이후 10월 12일에 열린 룩셈부르크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했고, 11월 16일에는 이탈리아를 으로 불러들여 2-0으로 승리하면서 설욕했지만, 득실차(3점차)로 인해 2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5] 그나마 클러프는 영국 역사상 빨리 짤린 순위에서 10위이다. 가장 순식간에 짤린 사람은 10분만에 짤린 르로이 로지니어. [6] http://www.fourfourtwo.co.kr/news/news_view?idx_B=1645&RNUM=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