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00:05:55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

카즈노미야 치카코에서 넘어옴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
和宮親子内親王
파일:external/www.lib.city.minato.tokyo.jp/114kazunomiya.jpg
▲ 코우치기를 입은 카즈노미야.
파일:external/www.tsukudo.jp/kazunomiya2.jpg
우키요에(浮世繪)로 그려진 카즈노미야.
출생 1846년 7월 3일
야마시로국 교토 하시모토 별저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1877년 9월 2일 (향년 31세)
일본 제국 하코네 하코네 온천
(現 일본 하코네마치 하코네 온천)
신체 143.4cm, 34kg, A형~ AB형[1]
배우자 에도 막부의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
(德川家茂, 1846년 - 1866년)의 정실(正室)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혼약2.3.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2.3.1. 덴쇼인과의 관계
2.4. 이에모치의 죽음과 이후2.5. 말년2.6. 죽음

[clearfix]

1. 개요

에도 막부 말기에 살았던 일본의 황족, 공주.

닌코 덴노 유복녀이자 막내딸이며 에도 막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실부인이다. 이에모치와의 결혼은 어찌보면 귀천상혼이라 당시 일본 역사 희대의 사건이었으며 이는 두고두고 일본의 여러 사극에서 소재로 사용되었다.

드라마 오오쿠에서의 배우는 미소라 히바리(1968년판), 아다치 유미[2003년판], < 아츠히메>에서는 호리키타 마키, 청천을 찔러라에서는 후카가와 마이가 카즈노미야 치카코 공주 역을 맡았다.

2. 생애

2.1. 유년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mperor_Nink%C5%8D.jpg

카즈노미야 치카코의 아버지 닌코 덴노.

1846년 7월 3일(코우카(弘化) 3년) 야마시로 국[山城國]의 고쇼[4] 동쪽에 위치한 하시모토 별저(橋本別邸)에서 일본의 120대 천황 닌코 덴노와 그의 측실 하시모토 쓰네코[橋本經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닌코 덴노가 이미 사망하였고 어머니가 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외가에서 유모의 손에 자랐다.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이다. 따라서 고메이 덴노의 아들인 메이지 덴노 고모가 된다.

고메이 덴노는 즉위한 후 1살이었던 여동생에게 '카즈노미야'(和宮)라는 칭호를 부여하였고 15살이 된 1861년에는 정식으로 '치카코(親子)'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2.2.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혼약

그녀가 태어났을 때 일본은 개국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7살이 되는 1853년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났고, 다음해는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국했다.

1858년 에도 막부는 미국에 떠밀려 천황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불평등조약인 미일수호통상조약(米日修好通商条約)을 체결했다. 일본은 에도 막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래로 네덜란드 외에는 각 지방의 번들이 서양국가와 교역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여 유지해 왔다. 이 사실은 외국을 싫어하기로 유명한 고메이 덴노의 심기를 건드렸고 미일수호통상조약으로 일본은 막대한 경제적 불이익을 받았으며 막부에 불만을 가진 존황양이 세력이 커져 가고 있었다.

에도 막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막부와 황실의 대립관계를 풀자는 움직임이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결혼 추진이었다. 만약 둘의 결혼이 성사된다면 이는 공무합체(公武合體)로, 황실과 막부가 결혼을 통해 화합을 노려 볼 수 있는 기회였으며 일본 역사에 얼마 없는 귀천상혼으로 일본 역사의 새로운 한 획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 황실 측에서는 이를 반대하였고 카즈노미야의 상대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을 골라 두 사람의 정혼을 이미 확정한 상태였다. 이때 막부는 꾀를 썼는데 바로 고메이 덴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천황에게 '몇 개월 내에 쇄국 정책을 다시 펼치겠다'는 조건으로 이에모치와의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카즈노미야가 이에모치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막부의 쇄국 정책 복귀 선언은 조약으로 큰 충격을 받았던 고메이 덴노에게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기 때문에 막부의 결혼 요청을 이제 와서 다시 반대할 수는 없었다. 다시 반대한다면 변덕이 심하다고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인해 결혼하기 싫어하는 카즈노미야를 결혼시키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궁리해냈다.
카즈노미야가 결혼을 거부한다면, 대신 짐의 황녀 스마노미야(寿万宮)를 이에모치와 결혼시킨다. 그리고 카즈노미야는 린큐지(林丘寺)에 출가[7]시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삼촌과 어머니가 이에모치와 결혼하라는 천황의 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하자[8] 카즈노미야는 고심 끝에 마침내 마음을 열었지만 그에는 여러가지 조건이 달렸다. 아버지 닌코 덴노의 기일에 교토에 가게 해 줄 것, 에도에서도 황실과 같은 생활을 하게 해 줄 것, 자신의 휘하 시녀들을 같이 데리고 가게 해 줄 것 등. 고메이 덴노도 여동생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고 카즈노미야를 에도 막부에 시집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 에도 막부가 카즈노미야를 인질로 삼아 천황을 제위에서 끌어내리려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고메이 덴노는 이를 듣고 카즈노미야의 경호를 한층 더 강화시키라고 명했다.

1861년에 15살이 된 카즈노미야는 '치카코'라는 이름을 받고 동년 10월 20일 교토 고쇼를 떠나 에도 막부가 있는 에도 성으로 향했는데 이때 카즈노미야의 행렬은 장장 50km에 달했으며 수행원까지 포함하면 총 3만여명에 달했다. 고메이 덴노는 일부 반대파들의 습격을 우려해 본래 교토 에도 간 주요 도로였던 도카이도도(東海道) 대신 위쪽 산간 지방을 지나는 나카센도(中山道)로 이동하게 했다. 카즈노미야 행렬이 지나갈 때 도로변의 상점은 임시 폐쇄되었으며 고양이 우는 소리도 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카즈노미야는 1달 후인 11월 15일 에도의 시미즈(淸水) 저택에 들어갔다. 이로써 공무합체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듯 싶었으나…

2.3.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초반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고메이 덴노가 에도로 보낸 사신이 돌아왔는데 그는 카즈노미야의 에도 생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는 서신을 들고 왔지만 그 서신에는 카즈노미야와 고메이 덴노의 요구사항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기일에 교토로 갈 수 있게 해달라 했는데 사정으로 인해 연기가 계속되었다고 하고 황궁과 같은 생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시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덴쇼인의 대우, 오오쿠 내의 여성들과의 불화가 계속되었다고 한다.[9] 그러나 고메이 덴노는 '여자가 처음 시집가면 으레 있는 일이다.'고 생각하여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는 정식으로 결혼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카즈노미야의 강가(和宮降嫁)'다. 이 결혼은 이때까지의 쇼군들의 결혼과는 사뭇 달랐다. 에도 성 오오쿠에서는 쇼군의 정실을 미다이도코로(御台所)라고 불렀고 본래 미다이도코로는 공가나 무가의 여식이나 방계 황족 중에서 뽑았는데 평소에는 쇼군에 비하면 한 끗발 밀리는 위치였으나 이번에는 아내 쪽의 격이 더 높았다. 비록 서녀이긴 했지만 카즈노미야는 덴노의 친딸인 공주였기 때문에 남편될 이에모치보다 격이 높은 신분이었다.[10]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카즈노미야가 남편 이에모치보다 상석에 앉았다.

한편 막부가 카즈노미야의 결혼 조건으로 단 '몇 개월 안의 양이(쇄국 정책) 전환'이 실현되지 않자 막부에 반대하는 반대파가 늘어났으며 고메이 덴노의 친정을 기대하는 세력이 급증했다( 존왕양이). 교토에서도 여러 번 에도에 양이를 독촉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지만 막부측은 그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계속 미루었다.[11] 그러나 계속 독촉이 이어지자 이에모치는 어쩔 수 없이 상황을 설명하려 교토로 가게 되었다. 덴쇼인과 그 외 오오쿠의 여성들과 달리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의 사이는 꽤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12] 카즈노미야는 이에모치가 내정 때문에 교토로 가게 되자 그의 무사귀환과 건강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이에모치는 교토에 도착해서 처남 고메이 덴노를 알현했으며 황실의 공식 행사에 여러 번 참여했다. 한번은 고메이 덴노가 양이에 관한 말을 이에모치에게 하려고 했으나 이에모치는 독감을 핑계로 대답을 피하는 꾀를 썼다고 한다. 이 즈음 강력한 존왕양이를 표명했던 조슈 번이 교토 황궁을 습격하는 금문의 변[禁門の変]이 일어났는데 에도로 돌아온 이에모치는 이를 듣고 조슈 정벌을 선포했다. 1865년 이에모치는 막부의 군사들을 이끌고 조슈를 향해서 출병했다. 이때 카즈노미야는 이에모치의 위업 달성과 무사 귀환을 빌며 그를 배웅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2.3.1. 덴쇼인과의 관계

파일:external/i1043.photobucket.com/tenshoin1.jpg

카즈노미야의 시어머니뻘 되는[14] 텐쇼인[15]

상술했듯 애초에 신분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 많은 불화를 겪었으나 차후에는 화해했다. 본래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16] 에도 막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카즈노미야는 텐쇼인과 함께 막부를 응징하려는 사쓰마 군에 요시노부의 구명(求命)을 탄원했다.

2.4. 이에모치의 죽음과 이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Kazunomiya.jpg

이에모치 사후의 카즈노미야.

이때 열강들이 몰려와 효고를 개항하라고 압력을 넣자 고메이 덴노는 어쩔 수 없이 서양 세력을 받아들였다. 카즈노미야는 이에 대해 '양이를 조건으로 여기에 시집왔는데, 이렇게 되면 내가 시집온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면서 고메이 덴노에게 개항 반대 의지를 표명했다. 한편 조슈 정벌 중이던 이에모치는 격전지인 오사카 오사카 성에 머무르고 있었으나 1866년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카즈노미야는 에도의 절에 남편의 쾌유를 빌게 하고 의원을 오사카로 급파했다.

이러한 카즈노미야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에모치는 동년 7월 20일 오사카 성에서 사망했다. 카즈노미야는 불과 20살에 과부가 되었다.

차기 쇼군은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해 모두의 관심이 쏠렸는데 이에모치의 유언과는 달리 카즈노미야와 막부의 여러 대신들은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의 아들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를 차기 쇼군으로 세우기로 하고 이에모치가 후계자로 지목한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는 그의 후계자로 세우기로 했다.[17]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자 카즈노미야는 요시노부에게 여러 번 양이로 돌아서도록 요청했지만 요시노부는 이를 계속 거부했다.

동년 12월 9일에는 이에모치가 사망했기 때문에 카즈노미야도 세이칸인(靜寬院)이라는 법명(法名)을 받았지만 막부로 시집온 후에도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법명 뒤에 '미야()'를 붙여 '세이칸인노미야'라고 칭했다. 명불허전 황족 1867년 1월 30일에는 고메이 덴노가 사망했으며 어머니 칸교인이 그즈음에 사망했다. 카즈노미야는 어머니, 남편, 오빠를 거의 한꺼번에 모두 잃었다.

고메이 덴노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하였다. 메이지 덴노는 조정의 주요 인사를 모두 갈아치웠으며 막부와 대립했기 때문에 막부에 시집간 고모 카즈노미야를 다시 교토로 불러오길 원했다. 카즈노미야는 이때도 여전히 양이를 주장했다.

여러 세력이 천황파가 되면서 막부의 존립 위기가 닥치자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미끼로 막부를 계속 유지하려 들었다. 천황 막부에 통치권과 영지(領地) 등을 모두 반납하라고 명했지만 요시노부는 거부하고 황실군과 막부군이 도바-후시미 전투, 보신 전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요시노부는 이 전투에서 패했지만 막부의 여러 대신들은 끝까지 싸우자고 했고 요시노부는 반대였다. 그는 마음을 누그러뜨려 천황에 복종(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며 카즈노미야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부를 다시 한 번 공격하자는 의견이 거셌는데 이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成) 등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때 막부를 타도하기 위한 군대의 총사령관은 어이없게도 카즈노미야의 원래 결혼 예정 상대였던 타루히토 친왕이었으며 타루히토 친왕의 전처는 도쿠가와 집안의 딸이었다.옛날의 동지가 지금의 적 결혼 못하고 그냥 화족과 결혼한 게 불만이었나? 근데 부인이 적군 집안 출신이라는 것도 함정

이런저런으로 막부의 존립 위기가 커져 가던 상황에서 조정의 대신들 중 이와쿠라 도모미(岩倉俱見)와 같은 막부에 대한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몇몇 인사들이 막부 응징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회담을 하여 몇몇 조건[18]하에 요시노부를 구하려도 했는데 이는 다행히도? 성공하여 요시노부는 이를 듣고 바로 에도 성을 개방했고 이에 따라 막부 정벌군은 에도 성에 무혈입성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천황의 군대에 저항하려는 몇몇 대신들이 아직도 막부 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카즈노미야가 발벗고 나섰다. 카즈노미야는 그들에게
"지금은 저항하지 않고 복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천황께 충성하는 것은 도쿠가와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다.[19]

카즈노미야의 이러한 뜻에 조정도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요시노부와 도쿠가와 가문을 살려두기로 정했다. 이에 대해 카즈노미야는 감사의 뜻을 조정에 보냈다. 이로써 도쿠가와 가문은 완전히 천황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요시노부는 조정으로부터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요시노부에 밀려 쇼군이 되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로 전락한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대신 도쿠가와 가문 종가(宗家)의 당주로 임명되었다.

2.5. 말년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잠시 묻혀진 카즈노미야의 교토행은 다시 언급되었다. 조정에서 카즈노미야를 교토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카즈노미야는 "물론 아버지( 닌코 덴노)의 능을 참배하는 등 교토행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직 시가(도쿠가와 가문)가 안정되지 않았고, 에도 사람들의 정서를 감안했을 때, 아직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1869년 카즈노미야는 마침내 교토로 향했다. 교토에 도착한 카즈노미야는 조카 메이지 덴노와 만나고 1년간 교토에서 체류하다가 1870년에 아버지의 능을 참배했다.

카즈노미야는 이후 에도( 도쿄) 천도를 함에 따라 메이지 덴노를 따라 다시 에도로 향하였으며 에도에서 도쿠가와 가문의 사람들과 자주 접하면서 교류를 쌓았다.

2.6. 죽음

카즈노미야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약한 몸이었다. 남편 이에모치는 평소 단 것을 워낙에 좋아해 충치가 심했고 각기병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20], 카즈노미야도 결혼 이후 점차 남편의 식성을 따라갔으므로 역시 각기병에 걸렸다. 각기병 말고도 왼손이 부자연스러웠다고 하는데, 뚜렷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병에 걸려 쇠약해진 몸을 조리하러 카즈노미야는 하코네 온천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지만 거처를 하코네로 옮긴 지 1달 만에 32세로 사망했다. 남편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므로 그에 따라 도쿄도 미나토구의 이에모치 묘 옆에 묻혔다. 여담으로 카즈노미야와 이에모치 내외의 무덤 옆에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정실 스겐인도 같이 묻혀 있는데, 히데타다 부부는 동시에 합장되어 있는 반면 이에모치와 카즈노미야는 무덤이 각각 따로 조성되어 있다. 그만큼 황녀로서의 지위가 높아서 무덤도 따로 조성된 걸로 추측된다.


[1] 출처 유골 조사 결과 나온 키하고 몸무게 및 혈액형이다. [2003년판] 역사와는 다르게 작중에서는 활발함과 동시에 쿨시크한 모습을 보여준다. 첫 약혼자인 타루히토 친왕을 "말 많은 수다쟁이"라고 디스하고 도쿠가와 이에모치와의 혼인에 응한 이유도 초상화에 그려진 얼굴이 잘생겨서(...)다. 게다가 이에모치의 생모, 즉 시어머니뻘인 짓세인의 말을 초면부터 쿨하게 씹어 버리는 동시에 짓세인이 하는 말마다 또박또박 받아치는 패기를 보여준다(...). 에도로 시집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 에도에서도 시종일관 교토식 풍습만을 고수했던 실존인물과는 달리 교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면모까지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짓세인을 제외하고 다른 오오쿠 일원들과는 크게 갈등을 겪지 않고 비교적 에도식 풍습에도 잘 적응하는 걸로 그려졌다. [山城國] 8세기 간무 덴노의 헤이안 천도 후 메이지 시대까지 교토고쇼(京都御所)가 있었던 일본의 구니. 현재의 교토 남부. [4] 천황과 그의 가족들의 거처다. [橋本經子] 1826년 곤다이나곤(權大納言) 쿠게(公家) 하시모토 사네히사(橋本實久)의 딸로 태어났다. 닌코 덴노가 사망한 후 칸교인(觀行院)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했다. [有栖川宮熾仁親王] 1835년 - 1895년, 일본 황실 미야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노미야의 9대 당주. 8대 당주였던 타카히토 친왕(幟仁親王)둘다 '치인친왕' 장남이다. 이 때의 파혼의 원한으로 메이지유신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 공으로 의회 원로원 의장, 일본 적십자 초대 총재 등을 지냈다.
파일:external/www.sakai.zaq.ne.jp/img490.jpg
[7] 고메이 덴노는 막부가 쇄국정책 약속을 하였을 때 카즈노미야가 이에모치와의 결혼을 눈치채기 전에 이미 타루히토 친왕과의 결혼을 파기했으며 이 때문에 카즈노미야는 이에모치와도, 타루히토 친왕과도 결혼을 하지 않게 되어 이도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당시 결혼을 하지 않는 일본의 귀족이 불교에 귀의하는 규범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8] 아무리 당시 천황이 힘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 실무에 한정된 일일 뿐이고 당시에도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하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무거운 죄였다. [9]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카즈노미야는 강가할 때 휘하 궁녀들을 막부에 데리고 왔는데 무사 가문의 여식들이 대부분이었던 오오쿠 시녀들과 교토의 공가(公家) 귀족 여식들과 부인들인 궁녀들의 사이는 물과 기름 급으로 나빠서 가치관과 자존심, 상관 문제 등의 마찰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10] 애초에 황가/공가와 무가는 같은 범주가 아니라 신분차를 비교하기 애매했다. [11] 한번은 이에모치가 병에 걸려 아예 사신들과 대면하지 않았다고 한다. [12] 동갑내기였기 때문에 빠르게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禁門の変] 조슈 번의 일부 양이 세력이 막부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품고 교토로 쳐들어와 막부파와 황궁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던 사건 [14] 덴쇼인은 이에모치의 생모가 아니다. 이에모치의 생모는 지츠죠인/짓세인(実成院)으로 워낙 화려한 것과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저녁 오오쿠 시녀들과 연회를 벌였던 것을 당시 오토시요리(총책임자)였던 타키야마가 지적했다는 얘기가 있다. [15] 이에모치의 사촌형인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 이에사다는 이에모치를 후계자로 정하면서 그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동시에 양아버지가 된다. 즉 그의 아내인 덴쇼인도 양어머니에 해당한다. [16] 요시누부는 이에모치와 쇼군 자리를 두고 경쟁한 사이이며 이에모치 대신 실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17] 이는 요시노부와 이에사토의 나이 차이가 거의 30세에 달하기 때문에 그런 결정이 나온 것이다. [18] 에도 성을 개방하고 막부 군대의 무장 해제 등. [19] 비교적 낮은 신분이었던 덴쇼인이 중심이 되는 적지 않은 일본 사극들에서는 덴쇼인의 아이디어라고 포장되는데 사실이 아니다. [20] 각기병 비타민 B1의 결핍으로 생기는 비타민 결핍증으로, 단 것을 즐겨 먹으면 비타민 B1이 부족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