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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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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6c800><colcolor=#073180> 모기업 관련 정보 모기업 파일:야쿠르트 혼샤 로고.svg 야쿠르트 혼샤 | 과거 모기업 파일:일본국유철도 로고.svg 일본국유철도 · 파일:external/sankei.jp/logo_01.gif 산케이 신문
일본시리즈 우승
★★★★★★
1978 · 1993 · 1995 · 1997 · 2001 · 2021
리그 우승
(9회)
1978 · 1992 · 1993 · 1995 · 1997 · 2001 · 2015 · 2021 · 2022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9 · 2011 · 2012 · 2015 · 2018 · 2021 · 2022
시즌별 요약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경기장 1군 메이지진구 야구장 · 2군 야쿠르트 토다 구장 · 지방구장 봇찬 스타디움, 시즈오카 쿠사나기 구장
현역 선수 경력 무라카미 무네타카/선수 경력 · 아오키 노리치카/선수 경력 · 야마다 테츠토/선수 경력 · 오쿠가와 야스노부/선수 경력
홈 중계 채널 파일:후지테레비1 로고.jpg 후지 테레비 1
주요 인물 단장 오가와 준지 · 감독 타카츠 신고 · 선수회장 시미즈 노보루 · 주장 야마다 테츠토
구단 상세 정보 구단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도쿄온도 · 츠바쿠로 · 도쿄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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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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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태동기3. 1970년대4. 1980년대5. 1990년대6. 2000년대
6.1. 2009년 시즌
7. 2010년대
7.1. 2010년 시즌7.2. 2011년 시즌7.3. 2012년 시즌7.4. 2013년 시즌7.5. 2014년 시즌7.6. 2015년 시즌 이후
8. 2020년대

1. 개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역사를 기록한 문서. 시즌별 문서는 2015년부터 정리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2. 태동기

1950년 일본국유철도에서 노사단결 차원에서 고쿠테츠 스왈로즈라는 명칭으로 팀을 창단하였다. 팀명의 스왈로(Swallow)는 '제비'라는 뜻으로, 1950년대 일본국철이 메인스폰서였을 당시에 도카이도 본선 도쿄- 오사카를 달리던 특급열차의 이름인 츠바메(=제비)에서 따 온 것이다.[1] 프로 출신 선수가 한 명밖에 없었을 정도로 처참했다. 이후 전설적인 대투수 카네다 마사이치가 입단하였으나, 카네다 마사이치 원맨팀이라는 약팀 이미지[2]가 강했다. 정부가 관리하는 국영기업인 일본국철의 한계로 인해 선수영입이 원활하지 못했고, 1961년 3위를 기록했던 한 시즌을 제외하면 단 한번도 A클래스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에 모기업의 상황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1960년대부터 신칸센[3]이나 전국에 산재한 로컬선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일본국유철도의 재정 상황은 더더욱 힘들어져 갔다. 여기에 세이칸 터널 세토대교, 통근 5방면 작전에 따른 도쿄도 일대 노선들의 복복선화 공사는 보너스. 참고로 일본국유철도가 해체 전 마지막으로 흑자를 기록했던 연도 도카이도 신칸센이 개통했던 1964년. 그 뒤로 일본국유철도는 1987년 민영화 전 까지 단 한 번도 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4] 그리고 그 많던 특정지방교통선들은 대다수가 적자 83선으로 대표되는, 돈 안 되는 지방 적자 로컬선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결국은 국철재건법에 의해 공사가 정지되거나, 폐선되거나, 혹은 제3섹터로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산케이신문· 후지TV의 후지산케이 그룹에 1965년에 매각[5]을 했지만 여전히 약체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때 산케이신문이 구단을 인수하여 운영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미디어 관계 쪽으로는 여전히 산케이신문 후지TV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6]

3. 1970년대

긴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1970년 야쿠르트에게 구단이 인수된 이후[7] 1978년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의 관리야구로 첫 센트럴리그 우승에 이어 일본시리즈에서 4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한큐 브레이브스를 격파하고 처음으로 우승[8]을 했다. 에이스 마츠오카 히로무[9], 스왈로즈 사상 최고의 리드오프 와카마츠 츠토무, 스왈로즈 역사에 길이 남을 핵타선 클린업이었던 오스기 카츠오 - 찰리 매뉴얼 - 스기우라 토오루가 이 당시의 주요 선수였다.

4. 1980년대

1980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2 4 6 6 5 6 6 4 5 4

하지만 다음해인 1979년, 개막 초부터 연패를 거듭하면서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 끝에 자진 사임하는 악재까지 겹치며 단 1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팀에서 최하위를 기록하는 치욕을 맛보며 다시 약체로 몰락했고, 이후 1980년대에 저 황금세대가 대부분 은퇴함과 동시에 10년 동안 A클래스는 커녕 비밀번호만 찍으면서 이렇다할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채 그저 그런 약체팀으로 머무른다.

5. 1990년대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5 3 1 V2 4 V3 4 V4 4 4

1990년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취임하고서 특유의 ID야구로 다시 강팀의 이미지를 회복.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성장했다. 코시엔 스타 출신 강속구 투수 아라키 다이스케, 神算 후루타 아츠야, 좌우 에이스 이시이 가즈히사 가와사키 겐지로, 비운의 에이스 이토 토모히토[10]와 마무리 투수 '미스터 제로' 다카쓰 신고,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공격형 유격수 이케야마 타카히로와 강타자 1루수 히로사와 카츠미, 톰 오말리, 잭 하웰 등의 클린업이 가세하며 전력이 강해져 센트럴리그 4회 우승(1992년[11], 1993년, 1995년, 1997년)을 이루어내고, 일본시리즈에서도 3회나 우승(1993년, 1995년, 1997년)을 차지하며 스왈로즈 황금시대를 일궈냈다. 그리고 2001년에도 다시 통산 5번째로 우승하였다. 그러고 보니 첫 우승인 1978년을 제외하면 홀수해에만 우승한 게 특징인데 이걸 징크스로 봐야 하나(…). 그리고 1992년부터 2001년까지 무려 10년동안 기록한 순위는 1위 아니면 4위이다. 횟수도 1위 5번, 4위 5번으로 매우 공평하다.

이는 팀의 고질적인 약점인 얇은 전력 때문인데, 팀 전력이 두텁지 못하다 보니 주전들을 쥐어 짜서 우승을 하고 나면 그 후유증으로 그 다음 해에는 4위를 하게 된다. 4위를 하는 동안 부상 등으로 이탈했던 전력이 다시 회복을 해서 그 다음해에 복귀를 하면 다시 그 주전들의 전력을 쥐어짜고 여기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던 용병이나 무명선수들, 다른 팀에서 더 이상 써먹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져 방출시킨 경험과 경력이 풍부한 베테랑들이 간간이 대박을 터트리면서 다시 우승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무라 감독 시절에는 잭 하웰이나 히로사와 카츠미같은 주축 선수들을 자금력에서 앞서는 팀에게 빼앗겨도 갑툭튀 에이스 타바타 카즈야나 중간계투진의 야마다 츠토무, 카나자와 츠기오, 마츠모토 시게루, 히로타 히로아키처럼 무명 선수들이 갑자기 대두하거나 스미 미츠오, 요시이 마사토, 츠지 하츠히코, 코바야카와 타케히코 등 타팀에서 활약하다가 기량저하 등으로 주전에서 밀려난 선수들이 야쿠르트로 이적한 뒤 부활하거나, 이토 아키미츠 등 이전에 혹사당해 기량을 잃었다고 생각한 기존 전력들이 부활해 활약하는 일들이 많았다. (망가진 선수의 커리어를 재생하는) 노무라 재생공장이라 불릴 정도. 심지어는 용병 중에서도 한신에서 버림받은 토마스 오말리, 롯데에서 뛰던 헨슬리 뮬렌을 데려와서 95년 우승할 때 쏠쏠하게 써먹기도 했다. 그 이후 와카마츠 츠토무 감독 시절에도 카와사키 켄지로 등의 에이스들을 FA로 내주는 악재가 있었으나 저니맨 이리키 사토시나 외국인 투수 케빈 호지스가 선발로 깜짝 활약을 하면서 기존의 왼손 에이스 이시이 가즈히사, 신인왕 후지이 슈고와 함께 선발진 공백을 완전히 지워내며 우승을 차지했다.
2001년의 우승 이후에도 1루수 로베르토 페타지니의 공백과 3루수 이와무라 아키노리의 부상으로 인한 코너 내야 공백을 90년대 말 세이부의 중심 타자였지만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성적이 하향세를 그리던 스즈키 켄을 영입해 OPS 9할을 찍을 정도로 부활시켜 1-2년 메운다던가 하는 식으로 써먹은 적이 있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던 저니맨 우완 키다 마사오를 필승조로 써먹는 등 방출 선수나 무명 선수를 쏠쏠히 활용해왔다. 지금도 오릭스에서 방출된 사카구치 토모타카 같은 선수가 야쿠르트에서 다시 활약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 선수들의 활약이 길게는 못 간다는 점. 다른 팀에서 전성기를 보내다 방출되어 야쿠르트가 줏어온 선수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이기 때문에 어찌저찌 1~2년 마지막 불꽃을 태운 뒤에 그대로 스러져 결국 이 선수들이 왜 전 소속팀에서 나와야 했는지 스스로 증명을 하면서 막판에는 초라한 성적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되고 팀을 떠나게 된다. 무명 선수들도 대부분 1-2년 반짝한 뒤 부상이나 기량 저하로 무명인 채 커리어를 마감했다. 그렇게 우승을 하고 나면 그 다음해에는 또다시 주전들의 부상 + 깜짝 활약을 펼쳤던 무명 선수 및 로또 긁는 심정으로 데려온 타팀 출신 베테랑들의 제자리 복귀 + 전년도의 활약으로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고 원래 기대치만큼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용병들의 먹튀화가 트리플 크리를 먹이면서 다시 4위로 하강 이 사이클을 무려 10년을 반복을 하게 된다. 이렇게 전력이 약해지는데도 못해도 4위였던 이유는 당시 센트럴 리그에서 더 불안정한 전력의 한신 타이거스,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히로시마 도요 카프 중에 꼭 두 팀씩은 바닥을 깔아줬기 때문이다.

6. 2000년대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4 V5 2 3 2 4 3 6 5 3

2000년대 들어서는 90년대 최강 포스는 많이 퇴색하여 01년 우승 이후로는 많이 약해졌다. 그 후 10년간은 대략 3위가 정위치라는게 대세. 00년대에 이미 인기팀 3강(요미우리, 주니치, 한신)중 한팀이 B클래스가 되면 남는 A클래스 자리를 채운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특이하게 00-09년의 10년간 1위부터 6위까지를 다 경험한 유일한 팀이기도 하다. 다만 상위권 6번(1위 1회, 2위 2회, 3위 3회)하위권 4번(4위 2회, 5위 1회, 6위 1회)으로 항상 중박은 치는게 보통이였다.

때문에 전력분석관들에게는 맨날 다크호스 취급. 어차피 5, 6위 베이스를 맨날 깔아주는 히로시마 와 요코하마, 그리고 맨날 2위만 하는 주니치 이 세팀은 매년 그게 그거라 예상하기 쉬웠고 만년 최강전력인 요미우리, 분위기 타는 한신을 제외하면 가장 순위고 활약이고 점치기 힘든 팀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LG 트윈스에서 페느님으로 불리던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황금기의 끝무렵이던 03년까지 이 팀에서 활약하였다. 그외에는 임창용이나 이혜천, 세스 그레이싱어등을 한국에서 영입하는등 한국과 관련있는 용병이 많아 한국에서 인지도가 많이 올라간 시기이기도 하다.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일본시리즈에 우승한 마지막 해인 2001년에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와의 일본시리즈 대결에서 4승1패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영원한 콩라인 긴테츠[12]

6.1. 2009년 시즌

2009년에는 다테야마 쇼헤이 등 선발진들이 활약하고, 임창용이 7월까지 0.00의 평균자책점을 유지하면서 잘 나가다가 임창용이 2군으로 내려간 후 한때 5위까지 미끄러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임창용이 다시 1군으로 승격한 이후 팀 분위기가 살아나면서 다시 재역전하여 2009년 10월 9일에 있었던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임창용이 1.2이닝 1볼넷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따내며 승리, 센트럴리그 3위를 확정,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였다. 근데, 최종성적은 71승72패1무. 승률이 5할도 안된다. 그리고 2위 주니치와 맞붙어 2패로 광탈하여 시즌을 끝냈다.

7. 2010년대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4 2 3 6 6 1 5 6 2 6

2000년 후반부터 부상자에 시달렸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부상 병동화가 옮아온 건지 매년 제 상태로 시즌을 진행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야전병원'(ヤ戰病院)이라 부를 정도이다.

이 시기의 스타선수라면 역시 아오키 노리치카. 다만 아오키가 2011년 시즌 이후 MLB로 건너간 이후 특출난 스타선수가 나오지 않다가, 최근에는 호타준족의 2루수 야마다 테츠토가 아오키를 이어 야쿠르트 등번호 1번의 계보를 이어받으며 간판스타로 활약중이다.

2012년까지 5년연속 꼴찌를 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를 대신하여 2013년부터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가 2015년 14년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년만에 5위로 추락하더니 우승하고 겨우 2년만에 다시 꼴찌로 되돌아갔다.

여담으로 2013년부터 3년 주기로 계산 시, 팀 순위의 합계가 13이 된다는[13] 기가 막힌 징크스가 존재한다. 심지어 2021년까진 3년 중 첫 2년이 B클래스+마지막 해 A클래스라는 징크스까지 있었으나 2022년에 리그 연패를 차지하며 이 징크스는 깨졌다.

7.1. 2010년 시즌

작년 3위의 흐름을 잇지 못하고 고질병 스러운 부상자 속출에 따른 분위기 다운으로 6월까지 승률 3할 때의 최하위를 달렸다. 결국 타카다 시게루감독이 휴양시켜 버리고 당시 1군 코칭 스탭이던 오가와 준지 감독을 1군 감독 대행으로 올렸다.

많은 팬들은 6월밖에 안됐는데 성급한 거 아니냐고 반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원래 스카우트 출신이라 선수 보는 안목이 있었고 2군 감독 경험이 길었던[14] 오가와 감독이 정말 빠르게 팀을 수습하여, 안좋은 흐름을 끊었다. 아오키 노리치카를 다시 1번으로 돌리고, 만년 후보였던 하타케야마 카즈히로를 과감히 4번에 기용하는등, 선수층을 제법 많이 물갈이 하여 이게 적중하였고 부상자 대신 2군에 있던 젋은선수들을 대거 기용해서 좋은 흐름을 잡았다.

결국 6월까지 거의 반시즌을 말아먹어 놓은 탓에 A클래스 진입은 실패했지만, 당시 3위던 한신 타이거스와 시즌 마지막까지 0.5게임차의 치열한 경쟁을 벌일정도의 저력을 발휘했다. 순수하게 오가와 감독이 지휘하던 시기의 성적만 뽑으면 승률 6할을 넘어 다음 해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7.2. 2011년 시즌

상술한 홀수해 징크스일 수도 있는 것이 2011년 한때는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니 전년 후반기의 좋은 흐름을 이어가면서 초반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을 선두권에서 보냈다. 특히 7월에는 2위 주니치 드래곤즈와 10게임차가 나는등 거의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8월부터 선발진이 부상으로 대거 이탈, 그동안 잘 치던 클린업이 급 선풍기 화 하면서 결국 9월말에 2위 주니치와 원정 4연전에서 1승 3패로 참패를 당해 1위를 내준 후, 그대로 DTD하여 2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는 요미우리에게 2승 1패로 힘겹게 이겨 올라갔지만, 클라이맥스 파이널 시리즈에서는 주니치에게 어드밴티지 포함 2승 4패로 패퇴했다.

그리고 2위면서 득점보다 실점이 많은 진기록을 세웠다(…).

7.3. 2012년 시즌

이제는 말하기도 지겨운 팀 전체의 스페랑카화가 절정에 달한 해였다. 임창용을 포함하여 주력급 부상 이탈자가 11명에 달하는 상황. 이중 절정은 주전포수 아이카와 료지인데, 4월에 한번 약 1개월 반을 골절상으로 이탈한 걸로 부족했는지 8월에 또 한 번 골절. 2ch에서는 골밀도 드립까지 나올 정도로 개그를 자아냈다.

말이 부상이탈 11명이지 부상자로만 팀 하나가 나올 지경. 이 때문에 4월을 선두로 마쳤으나 교류전에서 무섭게 DTD를 시전하여 교류전 최하위로 한때 5위까지 떨어지는 굴욕을 맛봤다.

그래도 이 와중에 각종 신인들과 2012년 NPB 최고 대박 외국인으로 투고타저속에서 1년차에 3할을 찍은 라스팅스 밀렛지, 백업포수였던 나카무라 유헤이의 분전,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하여 여태까지 백업에만 그쳤던 타카이 유헤이, 매년 구단 전통스럽게 존재하던 신인 좌완 2년차 징크스를 그럭저럭 잘 극복한 아카가와 카츠키, 어깨 빠지도록 애니콜로 등판한 우완 오시모토 타케히코와 좌완 히다카 료등등, 왠지 타팀에서 보면 듣보잡들이 하나 둘씩 갑툭튀하여 활약하였다.

그 결과 15년만에 B클래스 탈출을 꿈꾸던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9월 초에 결국 끌어내려서, 시즌 종료시 68승 65패로 3위에 안착한다. 그리고 히로시마는 DTD를 체험하며 비밀번호 15자리를 기어이 찍고 만다.

재밌는 건 강팀에게 강하고 약팀에게 약했다는 점. 2위 주니치는 항상 중요할때 야쿠르트에 발목을 잡혀서 망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11구단중 가장 분전한 편. 반면에 만인의 호구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는 10패나 퍼주는 인심을 보여줬다. 그리고 올해 요코하마의 첫 3연전 스윕이자 마지막 스윕도 한번 선물해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상대전적 및 나고야돔 전적에서 앞서고 주력 이탈로 해볼만 하다고 평가되던 주니치와 맞붙었으나, 부상 복귀한 주력급들의 컨디션과 경기감 난조로 3시합동안 3점밖에 못내는 빈타에 허덕이다, 결국 3차전 8회말에 주니치 4번 블랑코에게 역전 만루홈런 한방 쳐맞고 격침. 1승 2패로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패퇴하며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7.4. 2013년 시즌

선발진을 보자면 4월초부터 에이스 다테야마 쇼헤이가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며 시즌 아웃되었지만, 신인 오가와 야스히로가 두 자릿수 승리(8월 23일 기준 12승으로 다승 선두)와 2점대 자책점으로 선발진을 지탱해 주고 있다. 이시카와 마사노리가 방어율 3.45,리그 10위(8월 23일 기준)로 오가와의 뒤를 이어 분전하고 있지만 3승 7패, 승률 3할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있다. 게다가 실점이 54점인데 자책점이 41점으로 13점이나 차이난다. 3선발이라 할 수 있는 신인(2011년 입단이지만 풀타임 선발은 올해가 처음) 야기 료스케도 방어율이 3.62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지만 5승 8패로 승률 5할이 안된다. 작년 그럭저럭 성적을 냈던 아카가와는 3년차가 되더니 탈탈 털렸고, 아카가와와 비슷한 성적을 냈던 무라나카 쿄헤이는 4승 7패, 방어율 4.53으로 애매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중계-마무리를 보자면 작년 33세이브와 1.82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임창용의 공백을 메꿨던 토니 바넷은 불놀이를 하며 7점대 자책점에 1승 7패로 충격과 공포의 성적을 올리며 마무리 자리를 뺏겼다. 부상 후 돌아온 셋업맨 마츠오카 켄이치도 마찬가지로 7점대 자책점. 작년 분전했던 오시모토도 5.70의 방어율로 망했고, 히다카 료는 2경기 16.20의 막장스러운 성적만을 기록한 채 사라졌다. 신인 이시야마 다이치가 21홀드포인트, 작년 1.21의 방어율로 갑툭튀한 야마모토 테츠야가 12홀드-11세이브로 팀의 중심계투 역할을 맡고 있다.

타자진을 보자면 발렌틴과 여덟 난쟁이 수준이다. 8월 23일 기준 규정타석에 들어와 있는 선수는 발렌틴, 하타케야마 가즈히로 세 명밖에 없다. 발렌틴이 0.332(3위)/0.452(1위)/0.786(1위) 44홈런(1위,8월 22일 45,46호를 쳤지만 공식 사이트에 반영이 되지 않음) 96타점으로 리그를 씹어먹고, 30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일본 신기록 갱신을 노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밀렛지(0.251/0.329/0.436 16홈런 49타점)와 하타케야마(0.221/0.282/0.376 12홈런 51타점)는 잉여롭기 그지없다. 기준을 200타수로 낮춰도 선수들 중에서도 3할은 여전히 발렌틴 혼자며, 2할7푼대 선수도 세 명, 발렌틴을 제외하면 두 명밖에 없다. 그나마 밀렛지는 중간에 부상으로 시즌 아웃.

야쿠르트의 2013 시즌은 한 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다. 팀 평균자책점/타율 모두 센트럴 리그 5위에 위치해 있는 것이 이를 나타낸다. 시즌 초반에는 4할 중반대의 성적으로 혼전의 중위권 싸움을 하고 있었으나 교류전에서 3할(7승 16패,0.304)의 승률을 거두며 12개 구단 중 11위[15]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DTD를 시전 중. 그나마 이번 시즌 센트럴 리그 자체가 2강 4중이라서 3위 히로시마와의 경기차가 6경기밖에 안나는 것이 그나마 희망이라면 희망이라 할 수 있었으나...

시즌 최종 성적은 144전 57승 83패 4무(승률 0.407)로 1위 요미우리와 28.5게임, 3위 히로시마와 11.5게임차 꼴지를 차지하며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의 6년 연속 꼴찌를 막아줬다.
시즌 후 남은 것은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아시아 최초 60홈런 달성[16]과 대졸 신인 오가와 야스히로의 단독 다승왕과 승률왕, 그리고 신인왕 .[17] 시즌 중반기부터 털리긴 했어도 새롭게 발견한 선발 야기 료스케와 이시야마 다이치, 야마모토 테츠야의 발견정도가 희망이라 할 수 있다. 19년 동안 뛰며 내야의 철벽수비를 책임진 레전드 미야모토 신야까지 은퇴하며 2013년의 야쿠르트는 정말 부진했다.

7.5. 2014년 시즌

팀의 레전드인 다카쓰 신고가 투수코치로 팀에 복귀했다.

4월 22일 기준으로 팀 ERA가 5.95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순위는 밑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가 깔아주고 있는 덕에 꼴찌는 아니지만 서로 겨우 1경기 차이며, 4위인 주니치 드래곤즈와는 경기차가 꽤 나고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팀의 승수의 반절을 책임지고 있던 소년가장 오가와 야스히로가 18일 선발등판 도중 3회에 오른손에 강습타구를 맞고 골절상을 입어 완치에만 최소 6주가 걸린다는 정밀진단이 나왔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 결국 걱정은 현실이 돼서 교류전에서 한신,카프와 함께 리그 만년 꼴찌 베이스보다 낮은 성적을 남기며 시원하게 망했다.

원래 칠때 시원하게 치고, 못칠땐 더럽게 못치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이 8월 들어서면서 말그대로 폭발. 연속시합 2자릿수 안타, 8월 팀평균 타율이 4할대에 근접하는등 미친듯한 공격성을 보여주고 있다.투수진을 제물로 삼아 공격을 얻었다는 말이 나오는 수준의 시합들을 벌이고 있는데, 8월 5일 한신전에서는 패배했지만 한신의 메신저를 상대로 20-11(...)[18],그 후 8월 7일에는 13-4, 지금까지는 은행 취급 당하면서 털리던 요코하마를 8월 8일 12-3으로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도대체 이런팀이 왜 리그 꼴찌인거냐는 한탄이 팬들사이에서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투수진은 답이 없었고 9월 29일 히로시마 원정경기에서 패하며 2년 연속 꼴찌 확정. 1위 요미우리와는 21게임차, 5위 요코하마와는 6.5게임차로 2년 연속 꼴찌확정. 타선은 타출장 0.279(1)/0.339(1)/0.412(2)로 리그 최상위의 성적이고 규정 타석 채운 3할 타자가 5명에 20홈런 이상도 3명으로 리그 톱의 성적을 달렸다. 2루수 주전자리를 차지한 야마다 테츠토는 타출장 0.324(3)/0.403(4)/0.539(3)의 비율스탯과 29홈런 89타점 106득점 15도루을 기록하며 포텐을 터트렸다.[19] 수비만 믿고 본다던 외야수 유헤이[20]도 3할-20홈런을 치는 대활약으로 베스트나인에 선정. 다만 지난 시즌에 대활약을 했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112경기동안 31홈런 69타점이라는 해괴한 성적으로 기대에 못미친것이 흠.

문제는 투수진. 문자 그대로 붕괴수준이다. ERA 4.67로 혼자서 다른 세계서 놀고 있다.[21]선발진에선 에이스 오가와는 시즌 중 부상을 당하고나서 롤러코스터 피칭, 한때 에이스던 이시카와는 선발 로테이션을 유일하게 지키긴 했지만 커리어 로우, 작년에 발견했던 선수들도 폭망. 그래도 아키요시 료[22] 라는 신인이 불펜을 지탱하며 또 한줄기 희망을 발견했다. 결국 오가와 준지 감독이 사의를 표명하며 쓸쓸하게 시즌을 마무리 하게 됐다.

7.6. 2015년 시즌 이후

8. 2020년대

2020 2021 2022 2023 2024 2025 2026 2027 2028 2029
6 V6 1 5 5

2020년대가 시작되자마자 답이 없는 6위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정규리그와 일본시리즈를 우승했다! 그리고 다음해 92-93시즌 이래로 29년만에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1] 참고로 저 열차 이름 "츠바메"는 아직도 큐슈 신칸센에서 쓰고 있다. 다만 츠바메가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51계 전동차로 운행하는 특급 코다마가 등장해 제일 빠른 열차 타이틀은 코다마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 '치면 병살, 지키면 실책, 달리면 아웃'이라는 구호도 있었다고 한다. [3] 이것도 도카이도 신칸센까지는 당시 국철 재정으로 어찌저찌 커버가 가능했으나, 산요 신칸센, 도호쿠 신칸센, 조에츠 신칸센은 고가와 터널 비중이 급상승하면서 건설비도 덩달아 뛰어올랐다. [4] 1980년대에는 국철 전체를 통틀어 흑자 노선이 몇 없었고 나머지 절대 다수가 적자였던 시절도 있었다. 오죽하면 난부선 항목에 국철 7대 흑자 노선이라는 표현이 있었을 정도. 그 표현 자체는 틀렸으나 흑자 노선이 몇 안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그 적자 노선들의 범주도 주간선급 노선부터 지방 벽지 로컬선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규슈 및 홋카이도에서는 민영화 전후로 수 많은 노선들이 사라졌고, 홋카이도의 경우는 지금도 계속 사라지고 있다. [5] 정확히는 1962년 8월에 구단매각을 전제로 후지TV, 산케이신문과 업무제휴를 체결했다. 당시 구단의 명칭 및 구단 법인의 회사명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사실상 후지TV, 산케이신문이 운영하는 구단이 되었다. # [6] 그 예로 2015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마지막 4차전은 후지TV에서 생중계했고, 다음날 산케이신문 산하의 산케이 스포츠만 유일하게 야쿠르트의 일본시리즈 진출을 1면 톱으로 실었다. 그 외의 나머지 신문은 모두 요미우리 자이언츠 하라 다쓰노리 감독 사임이 1면 톱기사였다. [7] 정확히는 1969년, 적자경영을 견디지 못한 산케이 측에서 야쿠르트에게 구단 주식지분 일부를 넘기면서 산케이+야구르트가 공동으로 구단을 경영하다가 (그래서 팀명이 모기업명이 안붙은 아톰즈가 된 것) 시즌 종료 후 산케이가 구단 운영을 포기하면서 야쿠르트에게 구단이 인수되었다. [8] 만년 꼴지였던 스왈로즈의 우승은 그 밖에도 여러 에피소드를 낳았다. 그 중 소설가 에비사와 야스히사의 대표 소설인 '야구감독'은 스왈로즈의 우승을 소설화 했다. [9] 여담으로 팀 응원가 "날아올라라 야쿠르트 스왈로즈(とびだせヤクルトスワローズ)" 를 직접 불렀다. 현재도 간간히 구장에서 불려진다. [10] 변화가 크고 빠른 고속 슬라이더로 야쿠르트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나, 혹사로 인하여 33살의 나이로 2003년도에 은퇴를 하였다. H2에서 쿠니미 히로가 후반부에 고속 슬라이더를 마스터 하는 장면은 이 선수의 오마쥬로 추정된다. [11] 이 시즌에는 선두 야쿠르트와 최하위 주니치간 승차는 단 9경기였다. 심지어 야쿠르트의 승률은 0.531로 69승 61패. 이 시즌에 한신과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장시간 경기를 벌인 적도 있었다. [12] 그 긴테츠는 기타가와 히로토시(현 한신 타격코치)의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올라왔다. [13] 2013~2015: 6+6+1=13/ 2016~2018: 5+6+2=13/ 2019+2021: 6+6+1=13 [14] 1999 시즌부터 2군 감독을 역임했으며, 그 전에 1993~95 스카우터, 96~98 2군 수비, 주루 코치 경력도 있었다. [15] 꼴지는 요쿄하마. 그런데 시즌 성적에선 그 요코하마에게 밀리고 있다. [16] 시즌 최종성적 130경기 439타수 145안타 60홈런(1위) 131타점(2위) 94득점(1위) 0.330(2위)/0.455(1위)/0.779(1위). 잉여로운 야쿠르트 타선만 아니었다면 블랑코를 제치고 타점 1위도 먹을 수 있었으나... 답이 없는 야쿠르트의 타선때문에...규정타석을 채운 선수가 발렌틴밖에 없다. [17] 시즌 최종전에서 공동 다승왕을 노리던 히로시마 에이스 마에다 겐타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패전을 먹였다. [18] 그 날 메신저는 2안타 4타점을 적립했다. [19] 안타, 득점, 2루타, 총루타 1위. 안타의 경우 193개를 쳤는데 일본인 우타자 안타 시즌기록을 세웠다. [20]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케이스다. [21] 1위 요미우리부터 5위 한신까지 모두 3점대. 5위 한신도 3.88로 야쿠르트랑 1점 가까이 차이난다. [22] 무슨 이유에선지 다음 일본야구 기록실이나 국내 야구기사등에서는 아키요시 요시라고 잘못 쓰고 있다. 良를 료가 아닌 훈독인 요시라고 읽어버리면 그럴 수 있다. 야쿠르트 공홈과 위키백과에서는 아키요시 료라고 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