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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세종/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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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적 평가2. 부정적 평가
2.1. 고증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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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적 평가

2. 부정적 평가

2.1. 고증 오류

이 사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뒤바꿈으로서 정통 사극으로서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용의 눈물, 왕과 비 이후 한동안 제작되지 않았던 정통 정치 사극이 부활한다는 것에 열광했던 사극 매니아층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을 외면했고, 정치 사극이라는 것 자체가 자칫하면 진행이 너무 무거워질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대다수 시청자들로부터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A와 B가 대화하는 것을 C가 듣고 있다가 행동한다거나 왕이 경호를 물리치고 죽창과 칼로 무장한 폭도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거나 특정인이 다른 인물과 대화를 나누었던 장면이 당시에는 보이지 않고 나중에 회상 신으로만 등장하는 등의 지나치게 진부한 감성 연출이 거의 매 화 반복되었을 뿐 아니라, 세종의 일처리가 신하에게 문제에 대하여 묻고 대책을 마련한 뒤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대책없이 무리한 시책을 강행하여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고 그걸 다시 감성에 호소하고 극적인 연출로 극복하는 모습[11]의 반복은 비판받아 마땅했다.

무시하거나 극작가 마음대로 바꿔치기한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실제로 임란 직전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 정보원의 숫자가 적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전후사정을 정보원을 통해, 비록 완전치는 않아도, 파악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 물론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나 주로 착용한 갑옷의 종류는 명확히 밝혀낼 자료가 없기에 요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걸 밝혀낸다면 그 연구자는 바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조선 전기가 그 이후에 비해 갑옷무장비율이 더 높았을 가능성은 높지만, 유물은 극히 부족하며 류성룡의 갑옷이나, 동래성 해자유물로 보아 임란 당시까지는 찰갑 계열이 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나마도 조선군이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기록도 흔하다. 그리고 입고 싸웠다는 기록이나 그림은 한참 후에나 그린 것이나 주워 들은 것이다. 다만 조선군이 다 벗고 싸웠다고 단정짓기도 힘들고, 입고 싸웠다는 기록도 분명히 있으므로 단정은 금물. 어쨌든 기존 사극에서 조선군을 쾌자로 통일한 것은 단순한 고증의 선택이니 무작정 잘못되었다는 비판은 맞지 않다. 오히려 17세기까지 전군에 군복을 입힌 나라가 얼마나 있었는가 생각하면 쾌자, 일명 포졸복을 폄하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조선 병졸들이 입고 있는 두정갑은 조선 중기가 되어서야 개발되어 조선 후기에 보급됐던 갑옷이므로, 제대로 고증하려면 찰갑이 나왔어야 했다. [3] 해당 인물은 설순이라는 사람인데, 실제로 배우를 중동계 사람을 출연시켰다. 설순의 할아버지인 설손은 고려 말엽에 고려로 귀화한 위구르인. 설순의 아버지 설장수도 조선 초기 조정에서 일했다. 다만 위구르인은 중동인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문화권의 유라시안 민족이기 때문에, 고증에 제대로 맞추려면 중국의 실제 위구르족 배우를 캐스팅하거나, 실제 위구르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의 유라시안 튀르크인( 우즈베크인, 투르크멘인) 배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하다못해 중앙아시아계가 아닌 한국계 유라시안(한미혼혈, 한러혼혈 등) 배우를 캐스팅했어도 일단 유라시안 배우라는 점에서 인종에는 맞는 캐스팅이 되었을 것이다. [4] 당시 병조판서였기에 잡으러 가는 군대를 이끌고 오히려 세자에게 가담하면 어쩌려느냐는 식으로 되려 힐문하고는 절대 반역은 일으키지 못할 이종무를 대신 보내라고 한다. [5] 용의 눈물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여말선초인 점을 반영하는 차원에서 주로 고려식 한복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왕세종의 경우 중국 명나라색도 꽤 짙은 의상이 많이 선보여지기도 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 왕실이 명나라로부터 여러 관복을 하사받은 역사적 사실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이다. 다만 2020년대들어 반중감정이 국민적으로 강해진 걸 염려한 탓인지 태종 이방원에서는 용의 눈물때처럼 고려식 한복이 더 많이 선보여졌다. [6] 물론 후술하듯 그 정도가 지나치기는 했다. [7] 이렇게 왕족이 직접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려 하는 내용이 일본 서브컬처에 많이 나오는 것은 무인 중심이었던 근세 일본(특히 전국시대 에도 시대)의 영향이다. 물론 한국 사극이라도 삼국시대 후삼국시대가 배경이면 해당 시기는 전쟁이 워낙 잦아서 왕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8] 적이지만 훌륭하다며 적을 높이 평가하는 캐릭터가 많은 일본 창작물의 영향이다. [9] 이 밖에 본작에서 고려부흥세력 지도층 가운데 자결하는 인물이 셋이나 되는데, 이 역시 일본 문화의 영향이다. 실록에서 자결이니 자진이니 하는 단어로 검색하더라도 '왕명으로 자결하게 했다' 라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스스로 원해서 배를 갈랐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특히나 전행수 같은 경우는 다른 동지들에게 짐이 된다는 이유로 자결했는데, 이는 일본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자살에 대한 인식이 관대한 것 자체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영향을 받은 면이 강하다. 일본에서 자살에 대한 인식이 관대한 것은 할복의 영향이었다. 물론 전근대 한국에서도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자살에는 관대한 편이었지만, 이마저도 전쟁에서의 패배 같은 극단적 상황에 내몰렸을 때의 자살 한정이었으며 단순히 동지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10] 당장 세종과 신하가 대화하는데 하오체와 하소서체가 아니라 해체와 해요체를 쓴다고 생각해 보자. [11] 이것도 당시 상황을 뜯어 보면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리한 시책으로 등장한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들면 장영실에게 관직을 내리려 하는 것이나 칠정산을 만드는 것, 연분 9등법을 제정하는 것, 4군 6진 개척 등인데, 이 가운데 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다가 감성적으로 해결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12] 왕씨성을 가진 고려 왕족 세력은 이미 태조 때 철저한 숙청을 당했기 때문에 이후 두 번 다시는 고려 부활과 같은 움직임을 일으키지 못했다. [13] 애초에 금난전권이 세종 때가 아니라 정조 때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또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자면 화폐가 없으면 안 되는데, 상평통보가 발행되기 시작한 게 언제였더라? [14] 아예 신하가 왕하고 맞먹어버리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같은 작가의 후속작인 비밀의 문에서는 왕과 신하가 대놓고 야자타임을 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5] 실제로 제왕학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책은 정관정요다. [16] 조선인 여성은 유배 내지 사형이었으며, 일본인 남성은 대마도로 돌려보내 대마도주가 처형토록 했으나 이쪽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관점에서 간통을 중죄로 간주했던데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경계하게 된 상황에서 민간인끼리 사사로이 만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던 반면(같은 맥락에서 왜관을 감독하는 관리의 입회 없이 하는 밀무역도 엄금되었다), 일본에서 성매매는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7] 가장 단적으로 보이는 게 32화인데, 자기가 세자 자리까지 내놓을 기세로 싸고 돌던 외척 민무휼과 민무회가 사사당한 뒤에 반성 한 점도 없이 '나한테 반대하는 놈은 다 간신임. 간신이 어떻게 숙청되는지 똑똑히 봤지?'라고 한다. 언제는 충신이라며? 게다가 이후에는 여진을 정벌하고 국경을 넓히겠다며 수천명의 중앙군을 꼼수를 써서 멋대로 함경도에 이끌고 가버리려 한다. [18] 개차반처럼 광기있게 놀아제끼는 모습은 오히려 용의 눈물이 훨씬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의 양녕은 덕이 아닌 힘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역사를 어려서부터 보아 온 나머지 자신도 왕이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회의감을 느끼고, 그 결과 잡인들과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태조의 제를 지내러 절에 보내졌을 때 술과 고기를 즐기고 상여놀이를 한바탕 벌이기도 한다. 원경왕후와 세자빈이 양녕의 정신을 차리게 한답시고 대궐에서 굿판을 벌이자 여기에 뛰어들어 신나게 깽판을 치며 굿판을 망치기도 하며, 급기야는 재상을 지낸 사람의 첩을 빼앗기도 한다. 폐세자가 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아서 아예 대놓고 당당하게 기방 출입을 하며, 거지 옷을 기꺼이 입고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노자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한다. 다만 본작에서의 양녕은 왕위에 올라도 태종의 뒤를 이어 훌륭하게 나라를 이끌 수 있었음에도 훗날의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던지고자 그러는 것으로 그려지는, 야사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19] 이런 모습 역시 용의 눈물에 나왔다. 태조에게서 그가 여진족이나 왜구를 상대할 때 쓰던 활을 선물로 받으면서 활솜씨를 보여 달라는 청을 받아들여 그 앞에서 백발백중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이며, 표창을 양 손으로 동시에 던져 까마귀 두 마리를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장면도 있다. 다만 이런 장면들은 "양녕은 원래 왕의 자질이 있었으나~" 를 부각시키는 정도로만 사용되었지, 양녕이 전장에 나아가는 모습은 물론이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20] 그나마 작중에 사병이 직접 나오지는 않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죽임을 당한다는 정도. 다만 가상 인물이자 노비 시절 장영실의 연인으로 나오는 다연의 아버지 한영로가 장영실을 처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창을 든 군사들이 도열해 있는데 아무리 봐도 사병이다. [21] 가령 강상인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것을 동래 왜관에 사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설정했는데, 실록을 뒤져보면 군권 이야기만 나오지 왜관의 왜 자도 언급이 없다. [22] 대마도 정벌 부분에서 윤회가 아주 대놓고 깐다. [23] 거의 매 화마다 관료들이나 고려 부흥 세력이나 일반 백성들의 입에서 '폭군' 이니 '폭정' 이니 '압제' 니 '통치력 부재' 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수준인데, 정말로 이랬다면 태종의 뒤를 잇는 국왕이 세종이 아니라 고려 왕이었을 것이다. [24] 용의 눈물에서의 태종은 카리스마로 누를 때와 그러지 않을때가 잘 구분되어 있는 편이다. 정책을 집행할 때는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용의 눈물은 역대 그 어느 사극보다 국무회의 장면이 많이, 그리고 상세하게 나오는 작품이다.)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공신숙청 등 뭔가 큰 일을 벌릴때는 밑밥 깔기부터 시작해 판을 철저하게 짜놓고 뚝심있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소리 한번 안지르고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노회한 책략가의 면모도 잘 나타난다. [25] 애초에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권신들이 함부로 세종을 꼭두각시로 만들지 못하게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심온을 숙청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태종 본인이 신하들을 동원해 세종을 견제하며 결국 상왕 태종의 지지로 힘을 얻은 조말생은 아예 권력의 기반이었던 태종 본인을 통수칠 정도로 과하게 성장하여 도리여 세종 치세에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이 된다. 이와 같은 묘사는 사실상 태종의 업적과 생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6] 다만 이것도 불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자는 것이었지, 본작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주 씨를 말리자는 것은 아니다. [27] 월인천강지곡 자체가 수양대군이 세종대에 지은 석보상절에서 출발했다. [28] 더욱이 우스운 게 극중의 태종조차 세종이 사찰로 행차했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차는데, 실록을 보면 태조가 숨을 거둘 무렵 禮가 아니기는 하나 승려들을 불러모아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향을 피우고 팔뚝을 지지기까지 한 사람이 태종 본인이었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이라는 황희의 진언은 덤. 이 대목은 용의 눈물에서 아주 충실히 고증되어 나온다. [29] 이 경우 군신관계에 대한 묘사를 마치 현대 정치인들이 국무총리나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게 그린 것도,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을 똥군기에 백성들 죽이는 정책으로 묘사한 것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게 된다. [30] 더욱이 극중 충녕대군의 귀양 사유는 조선의 왕자가 조선 왕실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귀양에 처해진 것인데, 더 골 때리는 것은 그 발언이라는 게 조선 왕실이 고려 왕족들에게 충분한 사죄를 하라는 발언이라는 것. 작가가 주인공이 15세기의 군주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작가 개인의 이상적 지도자를 투영하여 그려낸 사례 중 하나다. [31] 이것은 조선 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에서 볼 수 있다. [32] 장영실 외에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들면, 중종 때의 정막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역적 모의를 사전에 고발한 공을 인정받아 정 3품 상호군에 제수되었는데, 장영실도 대호군까지는 올랐지만 상호군에 임명되지는 못했다. 다만 반란을 고변했다는 이유로 고위직을 받아서는 앞으로 거짓으로 고변하는 사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데다 정막개 자신의 성격이 영 개차반이라 나중에 관직을 박탈당하긴 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건 "천것에게 고위직을 주면 안 됩니다" 가 아니라 "역적 모의를 고변한 공으로 고위직에 앉혀서는 앞으로 비슷한 사례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였다는 것. 다시 말해 천민이라도 공을 세우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33] 덧붙여 관직에 임명된 직후의 장영실이 관상감 관료들이나 천체관측도구를 제작하는 목수들로부터 인정받는 과정은 대본 작가가 이미 썼던 '불멸의 이순신' 에 등장했던 가상인물 조수창이 조선소 지휘장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과 거의 똑같다. [34] 실제로 은둔했던 인물이 드문 것도 아닌데, 당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도 이색이나 길재, 원천석 등이 있다. [35] 단순히 '내 생각에 그랬을 것 같다' 라는 식이라면, '내 생각에 세종은 여성이었을 것 같다. 근거는 없지만 내 생각에 그랬을 것 같다' 해 버려도 된다. [36] 최만리라고 하면 무엇보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 세종은 격분하기는 했지만 하루 동안 옥에 가둔 뒤 풀어주었다. 즉 최만리가 세종 폐위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극렬한 반대파였다면 상소를 얼마든지 다시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두 번째 상소는 올라가지 않았다. [37] 그도 그럴 게 최해산은 화약과 화포 기술자였고, 장영실은 천문기기, 시계, 활자 등을 발명했다. 즉 두 사람의 행적을 철저히 사실대로 그렸다면 서로 엮일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 이후에 방영된 드라마 장영실에 최해산은 안 나온다. [38] 통신사 사행록까지 갈 것도 없이, 한글의 원이름이 '훈민정음' 인가, '훈민정어' 인가? [39] 당장 왕족도 아니고 정상급 관료들로 구성되지도 않았던 통신사행단이 수백 명 규모였는데, 명 같은 대국과 전쟁이 임박한 상황인데 수백 명의 인원을 차출할 여유가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설령 모은다 한들 왕족들의 안위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밖에 왕비가 사행단에 속했다는 것도 문제가 되는데, 국왕의 적통 왕자도 아니고 서자를 파견할지언정 왕비를 외국으로 보냈던 예는 한 번도 없었다. [40] 양녕은 계유정난은 물론 세조 8년인 1462년에 졸했으며, 효령은 세조에 예종 지나서 성종 17년(1486)까지 살았다. [41] 1617년 사행록에도 당시 조선에 '平調興' 이라고 알려졌던 일본인 柳川調興을 만나고 나서 柳川이 성씨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調興의 별호(別號)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도 예외가 아니라 ' 豊臣秀吉' 이 '平秀吉' 로 기록되거나 ' 小西行長' 이 '平行長' 으로 바뀌어 있으며, 도요토미의 경우 실록에 '豊臣秀吉' 이라고 기록된 기사는 세 건에 불과한 반면 '平秀吉' 으로 나오는 기사는 85건에 달한다. [42]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에 파견되었던 첫 번째 통신사(회답겸쇄환사)의 사행록을 보면, 일본 측이 조선의 국서에 대해 답서를 보낼 때 명의 연호를 쓸 것이냐 일본의 연호를 쓸 것이냐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정미년이라고만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인즉 일본 내에서 통용되던 문서에는 일본 연호를 썼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