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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2:19:42

탕사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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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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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당소의.jpg
중화민국 제1 ,20대 국무총리
정체 唐紹儀
간체 唐绍仪
한국식 독음 당소의
영문 Tang Shaoyi
소천(少川)
출생 1860년 1월 2일
청나라 광동성 향산현
사망 1938년 9월 20일 (향년 78세)
중화민국 유신정부 상하이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컬럼비아 대학교
직업 외교관, 정치가
국무총리
재임 기간
1대 1912년 3월 13일 ~ 1912년 6월 15일
20대 1922년 8월 5일 ~ 1922년 9월 19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신해혁명2.3.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2.4. 호법운동2.5. 국민혁명 반장전쟁2.6. 죽음
3. 가족4. 참고문헌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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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관료,외교관, 중화민국의 초대 국무총리. 신해혁명 시점의 인물이라 표기가 이 시기의 인물들이 다 그렇듯이 '당소의'와 '탕사오이' 둘 다 혼용된다.

중국의 공화 혁명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하였으나 말년에 한간의 길에 빠져들어서 잘 나다가 평가를 망쳤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output (1).jpg
미국 시절의 어린 탕사오이(오른쪽)컬러사진

광동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매사추세츠 주에서 초등학교를 코네티컷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영국령 홍콩에서 빅토리아 대학교를 거쳐, 1874년 청나라 3차 미국 유학생에 선발되어 컬럼비아 대학교에 진학, 1881년 귀국하였다가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의 수행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하였을 때 총을 듣고 묄렌도르프의 집 앞을 경호하여 위안스카이의 눈에 들게 되었으며 1885년, 위안스카이의 서기관에 임명되었다. 1889년 주용산상무위원, 주조선한성영사에 임명되었으며 1895년 주조선총영사가 되었다. 1891년 위안스카이가 모친상을 만나 귀국하자 위안스카이의 직무를 대리하여 조선의 청군을 지휘하였다. 1892년 5월 10일 장례를 마친 위안스카이가 조선으로 돌아오자 권한을 돌려주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와병한 위안스카이를 대신하여 사무를 처리했고 이홍장에게 전보를 쳐서 위안스카이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청나라의 입장에서 대단한 치욕이니 위안스카이의 귀국을 청했고 이홍장도 이에 동의했지만 청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탕사오이는 자신을 발탁해준 위안스카이에게 보답하기 위해 이홍장에게 다시 전보를 보냈다.
위안스카이 대관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 열이 몹시 높고 왼쪽 팔과 다리가 아파 견디지 못할 지경입니다. 조선의 정세가 위급하고 의약도 부족하여 한성에서는 고칠 가망이 없습니다. 이 모습에 신은 가슴이 타는 듯 합니다. 조선의 일은 위안스카이 대관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귀국하면 조정 가까이에서 대신들과 의논할 수 있어 전쟁을 벌이든 화친을 하든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를 그냥 버려두고 돌보지 않는다면 애석한 일입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감명받아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7월 18일 위안스카이는 모든 업무를 탕사오이에게 인계한 이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이후 탕사오이도 1898년 부친상을 당함에 따라 10년이나 되는 조선 생활을 마무리하고 본국으로 돌아와 인도 제국에 파견되어 중영장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교관의 업무를 수행했다.

2.2. 신해혁명

1901년 이홍장이 죽은 다음에 서태후의 명으로 산동순무 위안스카이가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위안스카이는 직예성에 부임하면서 탕사오이를 데리고 갔다. 1907년 총리대신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으로부터 봉천순무 자리를 받았으며[1] 위안스카이의 추천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진 이후 1911년 12월 7일 전권대표 위안스카이로부터 협상 총대표로 임명되어 혁명당의 왕징웨이, 우팅팡, 온종요 등과 협상했다. 혁명당이 공화정을 승인해야 회담을 시작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이를 위안스카이에게 알렸고 탕사오이는 국민대회를 열어 공화정과 입헌군주정 중 하나를 결정하자고 제안했고 융유태후, 위안스카이 등도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쑨원이 난징에서 임시대총통에 추대되자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멀어졌다고 여겨져 국민회의 방안을 승인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에 탕사오이는 총대표에서 사직했다.

혁명당은 위안스카이에게 공화정만 승인한다면 위안스카이를 총통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고 위안커딩, 탕사오이, 양사기, 장건 등은 위안스카이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1912년, 위안스카이와 혁명당의 협상이 완료되어 선통제가 퇴위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탕사오이는 중화민국 임시 약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탕사오이가 동맹회에 가입한 상태였기 때문에 난징의 임시참의원도 탕사오이를 흔쾌히 인준하였다. 남방의 혁명당은 교육총장 채원배, 사법국장 쑹자오런, 외교차장 우신조, 참모차장 유영건, 왕징웨이 등을 탕사오이와 함께 베이징으로 파견하여 위안스카이로 하여금 난징에 남하할 것을 촉구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씹었다.

1913년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2]

2.3. 중화민국 초대 국무총리

파일:당소의내각.jpg
탕사오이 내각의 모습, 제일 오른쪽이 탕사오이다.

탕사오이는 혁명 이후 중국 동맹회에 입당하였고 이 때문에 탕사오이 내각은 '동맹회 내각'이라고 불렸다. 허나 내각 내부의 내무, 군사, 재정 등의 요직은 무당파와 통일당이 차지한 상태였고 이들 대부분이 위안스카이 지지자들이었다. 탕사오이 내각은 초기부터 꼬이기 시작했는데 조각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혁명당은 황싱을 육군총장으로 지지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를 완강히 지지했고 이 때문에 3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내각이 조각되었다. 이로써 외교총장에 루정샹, 내무총장에 자오빙쥔, 재무총장에 슝시링, 육군총장에 돤치루이, 해군총장에 유관웅, 사법총장에 왕충후이, 공상총장에 천치메이[3], 농림총장에 쑹자오런, 교육총장에 차이위안페이, 교통총장은 탕사오이가 겸하기로 했다. 위안스카이는 황싱을 달래기 위해 명목상의 참모총장 자리를 주었고 황싱이 거부하자 그를 난징 유수로 떠나보냈다.

하지만 내각이 조각되고 나서도 탕사오이 내각은 안정되지 않았는데 근본적으로 중화민국 임시 약법은 대총통 중심제와 내각 책임제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불완전한 법률이라서 대총통과 총리의 책임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고 위안스카이가 탕사오이가 남북화의에 총대표로 참가한 시점에서 탕사오이가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들과 너무 가까운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위안스카이와 탕사오이의 관계가 나빠진 것이었다. 탕사오이도 위안스카이의 충복으로 활동하던 옛날과 달리 공화제의 대의에 수긍하여 위안스카이와 자주 국정 문제를 두고 낯을 붉히며 언쟁을 벌였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탕사오이가 혁명당의 세력을 믿고 독자적인 파벌을 형성하려 한다고 여겨 탕사오이가 총리가 된 데에 불만이 많던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시켜 내각회의에 불참하게 하고 사소한 문제로 트집을 잡게 하는 등 탕사오이의 명령에 불복종하게 했다. 재무총장 슝시링은 출석은 하지만 사사건건 탕사오이와 충돌했고 교통총장으로 내정된 스자오지는 신병치료로 아예 톈진으로 가서 각의에 출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중요 국정이 총리가 아니라 대총통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운용되었기 때문에 탕사오이는 유명무실한 총리였다.

이후 정부가 베이징으로 옮겨지자 위안스카이의 내각 무시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탕사오이 내각은 벨기에와 협상하여 백만 파운드의 차관을 들여오려 했는데 이를 두고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4개국이 항의하였고 이 때문에 차관을 빌리는 일은 실패했다. 위안스카이는 이를 탕사오이 내각을 공격할 좋은 기회로 여겨 탕사오이 내각이 제멋대로 혁명당을 위한 군비를 꾸어온 것 같다는 말을 뿌렸고 이 때문에 탕사오이의 입장은 굉장히 난처해졌다. 여기에 위안스카이의 지시를 받은 공화당이 탕사오이 내각을 성토하였고 위안스카이는 걸핏하면 탕사오이에게 "난 늙었네. 자네가 이제 총통을 하게.",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자리는 조만간 내줄 거야."라는 말을 하면서 탕사오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난징에 주둔한 제3군 군장 왕지상의 직예도독 임명건을 두고 탕사오이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무시되었다. 1912년 직예성 성의회가 동맹회원 왕지상을 직예도독으로 추대하자 탕사오이는 이를 승인하여 왕지상을 직예도독에 임명했는데 위안스카이는 이를 승인하고도 자신이 그런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며 왕지상을 선무사로 임명, 난징에 보내 혁명당의 민군을 정리하게 했다. 탕사오이는 왕지상을 선무사에 임명하는 일에 서명을 거부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임명에 필요한 총리의 서명을 무시하고 명령을 집행했고 자신의 무력함을 느낀 탕사오이는 1912년 6월 15일 총리직을 사퇴하고 6월 17일 톈진으로 떠나버렸다. 위안스카이는 량스이 돤치루이를 보내 형식상 탕사오이의 사퇴를 만류했지만 탕사오이는 사사로운 관계로 공적인 도의에 손상을 줄 수 없다고 복직을 거부했다.

탕사오이가 사퇴한 이후 동맹회에선 영미의 방식을 따라 각료 전원이 따라서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통일공화당은 탕사오이의 사직을 만류하고 정 안되면 국무총리만 바꾸는 안을 제의했고 일각에서는 거국내각을 조성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7월 14일, 쑹자오런, 왕충후이, 차이위안페이, 왕정팅 등 동맹회 소속 각료들도 동반 사퇴하면서 탕사오이 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무당파이며 전 네덜란드, 러시아 공사를 역임한 외교총장 루정샹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2.4. 호법운동

이후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잇달아 일으키며 독재를 강화했고 1913년 국민당의 봉기인 계축전쟁을 진압하고 1914년 국민당을 강제해산하여 중화민국 국회 해산까지 단행했다. 그리고 1914년 5월 1일 중화민국 신약법을 발표해 종신임기, 세습까지 가능한 초급총통제라 불리는 황제적 총통제를 실시했지만 위안스카이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황제를 꿈꾸었다. 결국 위안스카이는 1915년 홍헌제제를 단행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호국전쟁으로 전국 각지가 위안스카이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결국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1916년 6월 사망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의 유언에 따라 부총통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계임하여 구 국회와 임시 약법을 부활시켰는데 탕사오이는 외교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장쉰, 니쓰충 등 군벌들이 2차 서주회의를 개최, 탕사오이를 외교총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정부를 위협하면서 어쩔 수 없이 퇴임했다. 이후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리위안훙 사이의 정쟁인 부원지쟁이 벌어져 정세가 혼란해졌다. 돤치루이는 세계대전 참전을 주장했는데 탕사오이는 열강이 싸우는 동안 중국이 발전해야 한다고 참전에 반대했다. 부원지쟁은 1917년 장강순열사 장쉰이 정치적 조정을 핑계로 베이징에 들어와 장훈복벽을 단행하는 결과로 이어졌는데 이때 탕사오이는 7월 4일 쑨원의 초청으로 장빙린(章炳麟), 손홍이와 연명하여 복벽 토벌을 선언했다.

7월 12일,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가 복벽을 진압하고 공화국을 회복시켰는데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구 국회 회복을 거부하고 멋대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등 독재를 일삼았다. 이에 쑨원은 광저우로 남하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는데 탕사오이도 호응하여 해군총장 정벽광, 왕징웨이와 함께 광저우의 호법정부에 합류했다. 돤치루이는 쑨원 등에 대한 체포령과 호법정부 토벌령을 내렸고 호법전쟁이 벌어졌다. 탕사오이는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된 쑨원에 의해 재정총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쑨원은 천춘쉬안 루룽팅, 탕지야오의 음모로 호법정부에서 사실상 축출되었고 호법정부는 북양정부와의 화의를 도모하였다.

탕사오이는 4월 군정부 개조 이후 쑨원, 탕지야오, 우팅팡, 임보택, 루룽팅, 천춘쉬안 등과 함께 정무총재로 선출되었으며 1918년 11월 호법전쟁이 종결되자 호법정부의 화의대표로 선출되어 1919년 2월 20일부터 상하이에서 북양정부 대표 주치첸(朱啓鈐)과 같이 남북화의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오로지 정부의 명에 의해 참여한 것이라 성의가 없었다. 회의 중에 5.4 운동이 벌어지자 학생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다. 화의가 남방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호법정부는 탕사오이를 소환하고 맹종요로 교체했다. 결국 남북 쌍방이 양보하지 않아 화의는 결렬되었다. 탕사오이는 익우사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정무를 꾸려나가려 했으나 천춘쉬안과 루룽팅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호법정부에 실망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1920년 6월 3일, 쑨원, 탕지야오, 우팅팡과 함께 선언을 발표해 돤치루이에게 대일밀약 및 중일군사협정의 취소를 요구하였다.

돤치루이에 대한 선언 직후, 쑨원이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자 탕사오이는 쑨원, 탕지야오, 우팅팡과 함께 4총재의 명의로 천춘쉬안 루룽팅을 비난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정무총재의 법정수 부족으로 광저우에는 정부가 없으며, 참중 양원이 동시에 다른 데로 가버렸으므로 광저우에는 국회가 없다. (...) 국민이 부탁하는 중책을 받아 같은 마음으로 힘을 합쳐 위난을 제거하며 주장을 관철하고자 한다. 이에 이미 공동으로 결의하기를, 군정부를 인전하기로 했다. 사오이가 화의 총대표를 수임하며 (....) 영구화평을 위해 북방에 8조의 화의를 제출했으며, 그중에서도 밀약과 군사협정은 처음부터 무효라고 선포하는 것을 가장 중시했다. 이제 임무를 계속하니 북방의 화답을 기다린다. (...) 이후 호법을 주장하는 서남의 각 성구, 각 군은 군정부의 공동 조직에 속한다. 북방에 대해서는 화의를 계속하는데, 상하이를 의화의 지점으로 하여 의화 총대표는 개회를 준비한다. 현재 광저우에 있는 거짓 명의의 기관은 군정부 밖에 있는 것이니, 그 일체의 명령, 행동, 북방과의 사사로운 접촉 및 차관은 모두 무효이다.

이후 천중밍의 도움으로 루룽팅이 축출되고 2차 광저우 군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재정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쑨원이 총통제를 주장하자 이에 반대하여 재정총장직을 거절하였다. 이듬해인 1921년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선출되는 것이 법리상으로 맞지 않다고 반대하다가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선출되자 사직하고 군정부에서 이탈하였으나 얼마 안가 다시 재정부장으로 복귀하였다. 1922년 직예군벌들이 임시 약법을 복구시키고 리위안훙을 총통에 복직하였는데 법통중광 후 첫 내각인 옌후이칭 내각이 붕괴되자 남북화의를 위해 리위안훙 총통으로부터 신임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리위안훙은 탕사오이의 측근인 노신을 농상총장에, 정학계의 장요증을 사법총장에, 보정파의 고능위를 재정총장에, 장소증을 육군총장에, 낙양파의 가은홍을 교통총장에 임명함으로 탕평을 실시하려 했지만 우페이푸가 탕사오이와 정학계의 인선에 격렬히 반대하였고 탕사오이도 취임의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여기에 중의원에서 탕사오이가 취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각동의안을 심의할 수 없다고 기각하자 왕충후이가 대리하고 있던 탕사오이 내각은 한달만에 붕괴되었다.

2.5. 국민혁명 반장전쟁

1924년 2차 직봉전쟁 북경정변을 통해 임시 집정에 추대된 돤치루이는 국민회의 소집을 주장하는 쑨원을 무시하고 선후회의를 소집했다. 돤치루이는 장빙린, 리위안훙, 량치차오 등과 함께 탕사오이에게 선후회의 참가를 요청했으나 탕사오이는 거절했다. 1925년 국민정부가 수립된 이후 국민정부 감찰위원회 위원 겸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을 일으켜 중국 천하를 장악한 후에는 반장파에 속했고 1929년 중산현 훈정실시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여 중산현을 전국의 모범현으로 만들겠다고 선전했다. 1930년 1월 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3월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중산현 현장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2월, 장제스가 탕산 사건을 일으키자 이에 반발한 서산회의파, 개조파, 계계군벌, 월계군벌이 연합하여 일으킨 1차 양광사변에 참여하여 광저우 국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12월에 장제스가 하야하면서 1932년 1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 재통합했다. 1931년 12월 28일 제4기 1중전회에서 탕사오이는 중악마찰위원 겸 국민정부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린썬이 정부주석, 쑨커가 행정원장이 되었다.

탕사오이는 리쭝런, 후한민, 천지탕 등 60여명과 연명하여 광저우의 중국 국민당 비상회의와 국민정부 취소를 통전하고 당권을 중앙에, 통치권을 통일정부에 돌려준다고 선포하고 4전대회의 결의에 따라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서남정무위원회, 서남군사위원회 분회를 설치하여 초공작전에 노력하겠다고 하였고 그 자신도 서남정무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광 지역은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터질 때까지 반독립적인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936년 2차 양광사변으로 서남정무위원회가 취소된 이후에는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다.

2.6. 죽음

1937년 탕사오이는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로 이주했는데 중일전쟁이 벌어지고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상하이가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일본 치하에서 살게 되었다. 탕사오이는 공개적으로 정치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일본의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는 상하이의 정객 이국걸, 주봉기를 통해 탕사오이에게 접촉하여 중화민국 유신정부 합류를 제안했다. 이를 알게 된 상하이 시민들은 분노하여 반대시위를 전개하고 탕사오이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 규탄했다.

이 접촉에 대해 알게 된 남의사의 수장 다이리는 탕사오이 암살을 지령하였다. 1938년 10월 30일, 탕사오이는 자택 거실에서 골동품 상인으로 위장한 조사통계국 요원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구걸, 주봉기도 모두 암살당했다.

3. 가족

아내가 4명이었다. 6남 13녀를 두었다.

장남은 푸단대를 졸업하고 싱가포르,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인도, 일본 등의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딸 탕바오웨는 구웨이쥔과 결혼했다.

셋째 부인은 조선 출신이다.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이때 같이 임명된 것이 돤즈구이였는데 흑룡강 순무로 임명되었다가 조정에 엄청난 뇌물을 뿌린게 걸려서 쫓겨났다. [2] 이때 7개 당적을 동시 보유했다. [3] 하지만 취임하지 않아 공상부 차장 왕정팅이 대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