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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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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敏基 | Kim Min-g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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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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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1

199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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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2

199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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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3

199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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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4

199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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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부터 음악 활동의 시작까지3. 대학 시절4. 탄압과 고된 그의 20대5. 서울로의 귀환, 그리고 해금과 학전의 설립6. 지하철 1호선, 그리고 제 2의 전성기7. 아동극에 전념, 그리고 한국 문화의 별이 되다
7.1. 추모
7.1.1. 정치권7.1.2. 문화예술계7.1.3. 학계7.1.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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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수 김민기의 일생을 다룬 문서이다.

2. 출생부터 음악 활동의 시작까지

김민기는 1951년 전라북도 이리시 중앙동(現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중앙동)에서 5남 5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중앙동 삼산의원에서 조수로 일하다 의사면허를 취득한 의사였고 1940년대 말 중앙동에 삼펜사이다 공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퇴각하던 북한군에게 부르주아로 몰려 뱃속에 있던 김민기를 두고 살해 당하고 만다.

어머니 김하련(1907-1996)은 함경도 원산 출신으로 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에 1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졸업을 앞두고 4학년 때 기숙사내 조선인 차별에 맞서다 퇴학을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땄고, 남부지방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삼산의원에서 일하면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전쟁 중 남편을 잃고 난 후 조산원 일을 하면서 남편이 생전 운영하던 간장공장과 사이다공장을 운영해 자식들을 키웠다. 훗날 한국여전도회(기독교) 회장을 맡아 대외적인 활동도 활발히 하기도 했다.[1]

작고한 남편 대신 많은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던 어머니는 늘 바빴고 형제들은 모두 직장이나 학교에 갔기 때문에 어린 김민기는 서너 살 때부터 늘 집을 혼자 지켜야 했다. 텅빈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있어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6.25 전쟁 직후의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유년시절의 체험은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으로 마음속 깊이 자리잡게 된다.
파일:국교김민기.png
이리중앙국민학교 시절, 남매들과 간 아버지 산소에서 스케치하는 어린 김민기

그가 이리중앙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상경하였고 김민기는 서울재동초등학교로 전학 가 졸업 후 당시로서는 전교권 성적의 학생들만 진학할 수 있었던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이었다.[2]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웃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마침 그가 있던 보이스카우트 활동실에 버려져 있던 우쿨렐레가 있었는데 재미삼아 연주하다 보니 이는 곧 그의 첫 악기가 되었고 캠핑을 가면 늘 그가 반주를 도맡게 되었다.

1966년 김민기 경기고등학교 에 입학하게 되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로부터 입학선물로 처음으로 클래식 기타를 받게 된다. 가르쳐줄 사람이나 교재가 딱히 없어 그는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보고 연주하여 독학하게 되었고 얼마 안 가 그는 학교 내에서 소문난 기타 연주자가 되어있었다.

그는 196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가세'(미발표곡)라는 곡을 작사, 작곡하게 된다. 이후 그는 동해로 간 보이스카우트 야영 중에 절친한 후배를 잃는 사고를 겪개 되고 이를 학생 대표로서 후배의 부모님께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에 참혹한 심경과 무책임한 어른들에 대한 분노을 담아 기차 안에서 즉석으로 ' 친구'라는 곡을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들기도 하였다.

3. 대학 시절

1969년 그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하였지만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입문자에 가깝게 맞춰져 있었던 교과 과정의 미술 수업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고 흥미롭지도 않았다. 따라서 학교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고 결국 그는 1학기 낙제를 한 뒤 2학기 휴학계를 제출하게 된다.
휴학 휴 집안 사정이 어려워 그림 물감을 살 형편조차 되지 않아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그에게 같이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고교시절 친구인 김영세[3]로부터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고교시절부터 기타를 잘 쳤던 김민기는 김영세 듀엣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곧 관객이었던 여학생들로부터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그룹 이름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작곡 활동과, 음악 활동을 동시에 전개하기 시작한다.
파일:도비두1.jpg
도비두 시절 사진. 왼쪽 김민기 오른쪽 김영세

그가 낙제를 하고 두 번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 을 만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 활동을 시작하며 기타를 잘 치기로 소문나 있던 그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해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 이슬을 비롯하여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가 이때 만들어졌다. 양희은의 첫번째 앨범의 통기타 반주 또한 그가 맡았다.
파일:양희은과 김민기.jpg
양희은의 노래에 기타 반주를 해주고 있는 김민기

이후 같이 활동하던 김영세가 군에 입대한 후 김민기의 재능을 아끼던 당시 CBS PD이던 김진성과 최경식의 주선으로 김민기는 자신의 1집이자 인생을 바꿔놓은 앨범인 ' 김민기'를 내게 된다. 음반 <<김민기>>는 미국 민요를 번안한 '저 부는 바람'과 한대수가 준 곡인 ' 바람과 나'를 제외하면 전부 김민기 본인의 자작곡으로 되어 있어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음반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음반은 발매된 지 얼마 안 가 압수조치를 당하는데, 그것은 김민기가 1972년 봄 서울대학교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부른 '우리는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해방가', ' 꽃 피우는 아이'와 같은 노래들 때문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 있던 그의 음반들은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 피우는 아이는 그의 노래 중 처음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1971년 무렵,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를 처음으로 만나고 그가 만든 문화 연합회 '폰트라(Poem ON TRAsh)'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그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에 대해 틀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친구인 초중고 동창 이도성과 신정동에 '신정야학'을 열어 가난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을 가르쳤고[4]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4. 탄압과 고된 그의 20대

하루는 서울대학교 미대 수업의 일환으로 창경궁에 가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을 수정하기 위해 캔버스를 칼로 긁어내다가 뚫린 구멍 사이로 나무를 보고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김민기는 서양화 붓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학교도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된다. 그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5]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민기는 이후 단소 장구를 배우고 전통음악을 접한 후 1973년 초에는 김지하의 희곡 '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년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10월, 김민기는 카투사로 입대하게 된다. AFKN에 배치돼 그가 비교적 편한 군 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이 소위 유신찬반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끓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유신찬반투표 거부 집회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고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국군방첩부대에 소환되게 된다. 그곳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은 그에게 '유신에 찬성하는 노래를 만들라'라고 지시했지만 김민기는 도리어 사회 상황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는 내용의 노래인 ' 식구생각'을 만들어 제출했고 곧이어 사단 영창으로 보내진 뒤 최전방으로 전출되었다.

김민기는 강원도 원통에 있었던 그곳에서 나머지 군 생활을 보내며 그가 복무하던 연대의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고등학교 선배의 부탁으로 '수색중대가'와 그곳의 정년 퇴임을 앞뒀던 하사의 부탁으로 막걸리 서 말을 대가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6]

군에서 제대했을 때 김민기는 자신이 이미 운동권 사이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음과 그의 노래 대부분이 전부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의 본격적인 고난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다. 김민기는 여기저기 소환되며 조사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고문까지 당하게 된다.
옛날 보안사에 한 번 끌려 들어갔는데, 거긴 정면이 유리창이라 반대편에서만 안을 볼 수 있었지. 누군가가 취조받다 자살한 얘기도 심심찮게 들리고. 진짜 잘 패더라. 이만 한 공사장 각목 가지고 배를 한 대 치고, '욱' 하니까. 어느새 얼굴을 치더라고. 다시 위에서 '팍' 찍는데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어. 성냥개비로 만든 인형이 후다닥 사그라져 가듯이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나를 패는 놈들이 갑자기 슬로비디오가 되는 거야. 정신을 잃어기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나면, 나 때문에 공연히 이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너무 죄송하더라니까. 내가 없었으면 이 사람들이 죄를 지을 리가 없잖아. 예수가 죽어가면서 이 사람들 용서해달라고. 이들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던 그 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 (중략)
주철환과의 대담(2005) 중
눈에 수건을 가리고 시내를 한참 돌아다녔기 때문에 어떤 기관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이제 들어가니까 연행된 이유는 그 당시에 각 대학에 노래 서클들이 많이 생겨날 때였습니다. (중략) 좀 넘기다 보니까 아침이슬이 나왔어요. 노래에 전체적인 주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긴 유신 시대를 마감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주석을 열렬히 환영하자' 그런 것이 노래의 개요다, 이렇게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공식적으로 음반으로 출반된 것이 1970년도였습니다. 그럼 10월 유신은 몇 년도입니까?"[7] 그렇게 제가 반문을 해봤죠.
KBS 다큐멘터리 '유신시대 3부, 아침이슬의 수난' 인터뷰 중

이미 볼온한 자로 정권에 찍힌 김민기는 당시 소위 ' KS라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어디에도 취직할 수 없었고, 어딜 가든 형사들과 기관원들이 따라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는 길거리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도 모른 척해야 했으며 그의 지인인 양희은, 임진택 등도 김민기에 대해 불라는 협박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의 어머니는 한밤중에 방문을 걷어차며 집으로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놀라 심장병까지 앓기도 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24살이었다.

일할 곳을 찾지 못하던 김민기는 가까스로 부평의 한 봉제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상태였던 그는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의 배려로 중등교사 자격증과 함께 9년만의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그는 공장 제품에 붙어있는 라벨의 알파벳조차 읽지 못하는 공장의 어린 여공들과 배우지 못한 노동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출근하기 전 회사에 나 그들을 가르치는 '조학'을 열었다. 그는 점심시간이면 공장의 앞뜰에서 기타를 치며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자신보다 어린 노동자들에게 '계산적으로 살지 말고 느끼는 삶을 살아라', '꿈은 얻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8]
당시 공장에는 형편이 안돼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함께 사는 부부가 많았는데 그들을 위한 합동 결혼식의 축가로 김민기는 상록수를 작곡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지고 공장 사측에서도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것을 소위 '의식화 교육'으로 여기며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얼마 안 가 결국 김민기는 공장을 떠나게 된다.

정말로 갈 데가 없어진 김민기가 선택한 일터는 막노동판이었다. 여러 공사판을 전전하며 막노동꾼으로 살던 그에게 선배 한 명이 찾아온다.[9] 그 선배는 그에게 '노래 안 만드냐, 공장 다닐 때 생각 안 나느냐'고 물었고 그는 다시 노래를 한두 곡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들다보니 노래들의 흐름이 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결국 그는 두 달만에 하나의 작품, 공장의 불빛의 수록곡들을 모두 작곡하였다. 김민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공장의 불빛을 녹음하고 배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상으로는 약자 중의 약자인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을 비추고 이들에게 노동조합을 설립할 것을 말하는 내용의 공장의 불빛은 발매가 허가되지 않을 것임을 넘어서 이와 관련된 사람들이 고초를 겪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10]
그러나 김민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이골이 나있던 상태였고 또 자신이 직접 봐온 노동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나아갈 희망을 주기 위해 당시 서울대학교 민중가요 동아리 '메아리' 등 여러 대학교의 민중가요 동아리들을 모아 송창식의 배려로 그의 녹음실에서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녹음해 배포하였다.
감옥 아니라[11] 그보다 더한 처지에 놓이건 말건 달려들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노래굿 << 공장의 불빛>>이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칠 필요도 없는 이 명백한 불법 카세트테이프에서 나는 비로소 내 이름 석자를 떳떳이 밝힐 수 있었고 내용과 형식면에 있어서도 기존의 상업 가요의 틀을 마음껏 벗어던질 수 있었다.
김민기의 친필메모 중(1994년 경 추정)[12]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 당국의 탄압을 피해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곳인 익산으로 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김민기는 경찰서에 소환돼 몇 번의 조사를 받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고초를 겪지 않았다. 김민기는 이후 '아예 음악을 잊어버려야 겠다'라는 생각으로 농사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13][14]

익산에서 소작을 하며 농사를 짓던 김민기는 10.26 사건 이후인 1979년 12월에는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군사반란 5.17 내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다.[15]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정부에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면서 끝까지 참가를 거절했다.[16]

그는 농사를 더 크게 짓고 싶은 마음에 김제로 가 2년 동안 머무르다가 1981년 경기도 전곡으로 가 5000평 규모의 참깨 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 회사에 그 일대를 맡아 액체 비료를 살포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싹들이 모두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김민기는 홀로 원인 조사를 해 결국 비료 회사에서 정량의 5배나 과다 살포한 탓임을 밝혀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에 대해 철저한 데이터를 작성해냈고,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이기도 했다.

그 해 겨울, 그에게 약 5000평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고 그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 원을 벌어[17] 강원도 연천군 민간인통제선 안의 유촌리 마을의 한 폐가를 매입 후 그곳에서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민기는 그 마을에서 단순한 농사꾼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농촌지도자'로서 살았다. 동네의 옛 이름을 딴 '두개마을 청년회'를 조직해 마을의 여러 일을 도맡았고, 마을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접 배달 형식으로 팔아줌으로써 중간 유통 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마을의 농민들로 하여금 큰 이윤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의 행복했던 유촌리 생활은 3년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 당시 김민기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유촌리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추수 후 겨울에는 전라남도로 내려가 김 양식하는 노동을 하거나 서울로 가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고 김민기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불이 커져 집 안의 모든 것을 건질 수 없을 때였다. 김민기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불 타는 집 앞에서 밤새도록 막걸리만을 마셨고 그의 수많은 책과 메모들, 악보 뭉치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마을을 떠날 생각이 별로 없었고 마을 사람들도 그를 도와 다시 집을 지어주겠다고 했길래 마을에 머물려고 했지만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고, 결국 1984년,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와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5. 서울로의 귀환, 그리고 해금과 학전의 설립

33살의 나이에 다시금 서울로 돌아온 김민기는 <엄마, 우리 엄마>, <개똥이> 등의 아동용 뮤지컬을 만들어 레코드로 출반하려 했지만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의를 위한 접수 자체가 거부되어 수포로 돌아갔고, 1984년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하지만 이 음반도 공윤위에서 김민기의 노래를 모두 삭제하라고 지시했고,[18] 우여곡절 끝에 발매 뒤에도 음반사에 대한 기관원들의 압력 때문에 시중에 배포되지 못해 판매가 거의 안되는 초라한 신세를 겪었다.

1985년, 김민기는 34살의 나이에 아동극을 함께 만들던 당시 사무실 직원이었던 서강대 영문과 출신 이미영과 서울미술관에서 전통 혼례식을 올렸다.[19]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발표된 6.29 선언으로 인해 김민기의 인생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지금까지 만들었던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에서 해제되고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 또한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창작 활동에 박차를 가해 자신의 탄광 생활과 그곳 아이들의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아동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와 과거 심의가 거부되었던 <개똥이>의 노래를 담은 음반을 낸다. 그러나 공연윤리위원회는 여전히 김민기의 활동에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고 심지어는 <아빠 얼굴 예쁘네요>에서의 '까맣다'라는 표현도 문제 삼을 정도였다. 탄광이 까맣다라고 묘사하는 것조차 문제 삼는 것에 기가 찬 김민기는 '검다'라는 표현을 모두 탄광은 하얗다로 전부 바꿔버리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수록곡 몇몇을 빼는 선에서 타협할 수 있었다.

여전한 공윤의 행태에 의욕을 잃은 김민기는 창작 대신 사회운동에 발을 들이고 1989년 장일순, 김지하 등과 같이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한다.[20]
1990년에는 한겨례 신문사에서 주최한 '겨레의 노래' 사업의 총감독을 맡아 중국, 프랑스,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한민족의 노래를 찾는 활동을 하고 수집한 노래들을 모아 음반 <겨레의 노래 1>을 발매하였다.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겨레의 노래>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김민기는 이 공연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래를 대중들 앞에서 부른다



1991년 김민기는 드디어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열고 대표를 맡는다. 사실 이 과정에서도 사연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출신들이 만든 극단인 '연우무대'가 원래 그 소극장에 입주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연우무대는 그 과정에서 보증금 50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했고 건물주와 연우무대 사이를 중재하던 김민기가 지하 소극장 시설을 다 마련해놓은 건물주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대신 입주하기로 한 것이었다. 김민기는 그 50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한 음반사를 찾아가 나중에 자신의 음반을 낼 것을 약속하고 선불로 돈을 받았다.

그는 서태지의 등장으로 갈 곳을 잃은 포크 뮤지션들에게 선뜻 극장을 빌려줬고 김광석, 들국화, 시인과 촌장, 장필순, 강산에 여행스케치, 윤도현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학전에서 성장해나갔다. 이 중 김광석은 학전에서 단독 콘서트 1000회 돌파 기념공연울 하기도 했다.

1993년 김민기는 마침내 22년만에 자신의 모든 작품 39곡을 집대성한 음반 네 장을 발표한다. 이는 학전 보증금을 갚기 위한 것이었으며 << 김민기 1집>> 이후 22년 만에 나오는 솔로 음반이었다. 그는 이 음반 발매를 끝으로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 은퇴를 선언한다.

6. 지하철 1호선, 그리고 제 2의 전성기

대관료를 많이 받지 않았고 좌석 수도 적었기에 학전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곧 극장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에서 김민기는 독일문화원으로부터 독일 '그립스 극단'의 창작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공연 영상을 보게 된다. 이를 우리나라 정서로 번안하여 적용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김민기는 당시 무명이었던 황정민, 설경구, 나윤선 등을 끌어모아 '극단 학전'을 설립하고 ' 지하철 1호선'을 학전 무대에 올린다. 결과는 초대박이었고 이로 인해 학전은 폐관 위기에서 벗어나 1996년 2호 극장인 '학전 그린 소극장'을 오픈할 수 있었다.

<지하철 1호선>의 성공에 탄력을 받아 김민기는 그립스 극단의 또다른 뮤지컬을 번안한 <모스키토>, 영국의 원작 뮤지컬을 6.25 시대의 한국 배경으로 번안한 <의형제>, 창작 뮤지컬 <개똥이> 등을 올릴 수 있었고 이중 '<의형제>'는 우리나라 정서에 잘 적용시킨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백상예술대상 등 큰 상을 여럿 수상하였다.

< 지하철 1호선>은 1996년 좌석 점유율 100%를 넘고 11개월 동안 연속 공연하는 진기록을 세운 끝에 2000년 2월 6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보다 먼저 1,000회를 돌파했고[21] 2003년에 2,000회, 2006년에 3,000회 돌파 기록을 세우고 원작지인 독일, 일본, 홍콩, 베이징 등 수많은 해외공연을 이뤄낸 끝에 2008년 마침내 4,000회를 달성한다. 그리고 김민기 대표는 독일 최고의 문화 훈장인 괴테 메달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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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괴테 메달을 수상하는 김민기

그러나 김민기는 승승장구하고 있던 <지하철 1호선>을 무대에서 과감히 내려버리는 결정을 한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신이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아동청소년극을 하기 위해서, 둘째는 돈만 벌다 보면 돈 안 되는 일을 못할 거 같아서였다.[22]

7. 아동극에 전념, 그리고 한국 문화의 별이 되다

절대 (장례식을) 화려하게 하지 마라. 추모 공연도 하지 마라. (조문객들) 밥은 배불리 먹여라.
생전 마지막 유언
김민기는 이후 '우리 모두 어린이이던 시절이 있었고, 결국 미래는 어린이들이다'라는 일념으로 어린이극에 몰두한다. 초기에는 번안 작품인 '우리는 친구다(2006)', '슈퍼맨처럼!(2008)', '그림자소동(2008)', '고추장떡볶이(2008)', '무적의 삼총사(2009)', '복서와 소년(2012) 를 대부분 무대에 올렸고, 이후에는 본인이 직접 창작하고 연출한 '도도(2011)', '유령놀이(2014)', '연이의 일기(2016)', '아빠 얼굴 예쁘네요(2016)', '진구는 게임 중(2017)' 등을 학전에서 공연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장애아, 광부를 아버지로 둔 탄광의 아이들, 고아, 왕따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한 김민기 대표는 아이들의 삶 그 자체를 보여주는데 주력했으며 학전의 어린이극들에서는 전형적이고 자극적인 요소들은 거의 없었으며 '아이들에게 생 악기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라는 그의 신념 때문에 학전의 어린이극은 전부 라이브 음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어린이극은 애초에 돈이 안되는 일이었고 심지어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도 연극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김민기 대표의 신념에 학전 어린이극의 입장료는 시세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었고 학전엔 적자가 한없이 늘어 몇 억으로 불어났다. 거기에 2020년에 닥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학전은 직격탄을 맞은 거에 그치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민기 위암 말기 진단까지 받게 된다.

결국 학전 2024년 3월 15일을 끝으로 1991년 3월 15일 개관으로부터 딱 33년 만에 폐관을 하게 된다. 이후 2024년 4월 21일부터 5월 5일까지 그의 일생과 학전의 역사를 다룬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방영되었다.

김민기는 이후 자신이 연출했던 어린이극들을 좀 더 손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항암 치료를 이어갔지만 # 자신의 인생을 바친 학전이 폐관된 후 불과 약 4개월 만에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2024년 7월 21일, 결국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며칠 전인 2024년 7월 17일에 기존 학전 건물은 리모델링을 거쳐서 정부 주도로 어린이, 청소년 중심의 공연장인 아르코꿈밭극장으로 개관했다.

7.1. 추모

7.1.1. 정치권

7.1.2. 문화예술계

7.1.3. 학계

7.1.4. 기타


[1] 김민기의 회고에 따르면 김민기의 어머니는 전쟁 중 불구거나 한센병을 가진 아이들도 태어날 때 무급으로 받아주었다고 한다 [2]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다른 학교들과 달리 경기중학교에서는 특별활동 반이 있었고 학교에서 전액 지원을 해줬다고 한다. 그는 이것저것 다 하고 싶은 마음 에 13개(!) 정도를 듣다가 두 가지(미술반, 보이스카우트)로 줄였다고 한다. [3]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로 현 이노디자인 대표. 무한도전 디자이너 특집에도 나왔던 그분 맞다. MYK의 부친이기도 하다. [4] 이때 신정야학의 교사이자 김민기의 동료였던 인물들 면면이 꽤 화려한데 앞서 언급했던 이도성은 중앙일보 정치부장을 지냈고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이인용 전 삼성전자 사장, 김한 전 광주은행 은행장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5] 하나뿐였던 그의 기타를 후배에게 주어버렸다고 한다. [6] '김민기'란 이름은 이미 금기시되었기에 김민기는 서울미대 후배인 '김아영'의 이름을 빌려서 늙은 군인의 노래 양희은에 '김아영 작사, 작곡'으로 수록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군인들 사이에서 노래가 널리 퍼지자 처음으로 국방부장관이 직접 '군 사기저하' 사유의 명목으로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7] 박정희 정권에 의해 10월 유신이 선포된 날은 1972년 10월 12일이다. [8] 당시 소년 노동자였던 곽기종 씨는 학전 그리고 김민기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위 사실을 밝혔다. 곽기종 씨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들을 가훈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9] 그 선배가 정확히 누군지는 김민기의 기억에는 없다고 한다. [10]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 김민기는 '김민기'라는 이름 때문에 전혀 그럴 의도가 없던 노래들이 전부 금지되고 무척이나 시달려야 했기에 급기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기까지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민기' 석 자를 전면에 내세운 퍼뜨리는 일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이었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11] 원문에서도 '감옥 아니라'라고 되어있다. [12] 여담으로 김민기는 당시 3개의 마스터테이프를 만들어 2개는 누군가에게 나눠주고 1개는 복제용으로 숨긴 다음 자신이 고문당했을 경우에 그 사람들의 이름과 마스터테이프의 행방을 말하지 않기 위해 자기암시를 반복적으로 세게 했는데 정말로 깡그리 잊어버려 나중에 김민기가 2000년대에 다시 공장의 불빛을 복각할 때 마스터테이프가 없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3] 실제로 김민기가 공장의 불빛을 완성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점인 1978년부터 그가 농사를 그만두고 서울로 다시 돌아온 1984년까지 7년 동안 그가 만든 노래는 전혀 없다. 그가 대학시절 약 5년간 지은 노래가 30여 곡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음악을 잊고 싶었던 그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부분. [14] 다만 문화와의 끈을 아예 놓지는 않았던 건지 전라도 지방의 탈패, 노래패들과 어울리며 '1878년에서 1894년까지'(당시의 제목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라는 마당극을 익명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15] 이때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학살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광주로 향했으나 계엄군에 막혀 실패했다는 사실이 사후에 밝혀졌다. # [16] 이때 허문도가 김민기를 회유하기 위해 흰 종이를 한 장 내밀며, "원하는 액수를 쓰라"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김민기는 풀 뽑으러 가야 한다며 거절. [17] 여기에도 슬픈 일화가 있는데 그는 처음에 전국에서 가장 큰 탄광이 있던 강원도 태백을 찾아갔으나 그를 ' 간첩'이라며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18] 이 심의를 통과하기 위해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10곡이라도 건지기 위해 약 70개나 되는 곡을 심의 신청했다고 한다 [19] 김민기는 한 방송에 출연해 이미영과 함께 하던 음반 작업이 엎어진 이후 일자리를 잃게 만든 악덕 사장이 되기 싫어서 결혼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20] 한살림은 2023년 전국적으로 조합원만 84만 명이 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생활협동조합이다. 조합원들이 친환경-유기농산물를 생산해서 전국에 있는 직영매장에서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나, 해외 언론과 유기농 업계에서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협동조합 운동에선 최고의 성과로 주목받고 있다. [21] 이 과정에서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한국의 <지하철 1호선은 원작보다 뛰어나며, 별개의 작품으로 봐도 될 정도다\'라는 극찬을 받으며 2000년부터 <지하철 1호선>에 대하 저작료를 일절 면제했다. [22] 출처: 한겨례 인터뷰 <아침이슬, 그 사람> [23] 김민기의 음악을 포크 록과 관련시킨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조국 포크록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