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마추어 시절
포철공고 시절 |
대구광역시 출신으로 대구수창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시작[1][2]하였으나, 성광중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키가 160cm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결국 야구를 그만두게 되고 경상공업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3]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키가 급속도로 자라기 시작하여 키가 30cm 이상 자라게 되었고[4], 당시 포철공고 야구부의 오대석 감독의 눈에 띄어 극적으로 포철공고로 전학을 간 뒤 고2 때부터 야구를 다시 시작할 만큼 남들에 비해선 출발(재)이 늦었다. #
사실 2002 신인드래프트에선 누구나 1차 지명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대구고등학교의 에이스이자 파워피쳐였던 대구고의 윤길현[5]이 있었기에 큰 이변이 없는 한 윤길현이 유력한 후보였다.
원래 권혁은 지역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 후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2000~2001년에 큰 키[6]에 140~145km/h까지 올라온 빠른 구속과 힘이 좋고, 릴리스 포인트도 높은 투구 동작을 바탕으로 한 내리찍는 파워풀한 스타일인데다가 좌완이라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삼성 라이온즈의 강력한 상위순번 픽으로 올라서게 된다.[7]
삼성은 이렇게 행복한 고민 끝에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미래 성장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하여 권혁을 지명하게 된다. [8]
당시 권혁의 지명을 가지고 일부 삼성팬들 사이에서도 다소 말이 많이 나왔었는데, 순전히 권혁의 피지컬과 왼손이라는 가능성만 믿고 뽑은 드래프트 픽이였는데다가, 가장 중요한 청소년 시기때 야구를 잠시 그만 둔 전력도 있었기 때문이다.[9][10][11]
결과론적으로 이 드래프트 픽은 삼성의 선택이 옳았고 대성공으로 이어졌다.[12]
이후 권혁의 성공으로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라는 말에 신빙성을 가지는 사람도 많이 늘어났다.
2. 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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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시절 |
포철공고 출신[13][14][15]이며, 2002년에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팀에선 선발투수로 육성할 목적의 투수였으며, 여타 다른 어린 투수들처럼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프로 경험을 쌓았다.
그러다 선동렬 감독이 부임한 2005[16]년 이후엔 선발과 불펜 사이에서 보직을 고민하다 결국 2007 시즌 개막전을 시작으로 고정 불펜 투수로 고정되었다.
불펜투수로 고정 된 이후엔 리그 정상급까지 올라서는데 성공했는데, 당시 권오준과 같이 쌍권총, 오승환과 KO펀치[17], 정현욱, 오승환과 JKO[18], 2011년엔 KBO 역사상 최고의 불펜진이라 평가 받는 JOKKA 라인 등으로 불리면서 리그 최고의 불펜 투수중 하나로 활약했다.
2014년 시즌 후 더 많은 출전기회를 위해서 FA 자격으로 한화로 이적했고, 한화에선 불꽃남자, 대전 아이돌 등으로 불리면서 제2의 전성기로 한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투구를 2년간 소화한 여파로 부상 등으로 끊임없이 재활과 부상이 반복되면서 이제 잊혀가는 선수가 되는 듯 했으나, 선수생활 말년에 두산베어스로 우여곡절끝에 이적한 뒤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면서 은퇴전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총 6번 차지하고 은퇴하게 된다.
커리어는 삼성에서 더 훌륭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는 2015시즌 엄청난 주목을 받으면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주인공이 되었던 선수라 한화에서의 이미지가 더 강렬하다는 평도 많다.
사실 불펜 투수가 이렇게 화제성이 높았던 경우[19]는 프로야구에서 찾기 쉽지 않다. 김성근 감독의 엄청난 혹사를 꿋꿋히 버텨내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라내는 모습과 꼴지를 전전하던 한화가 2015시즌 끝까지 가을야구 싸움을 하면서 얻은 투혼의 팀컬러와 잘 맞았기에 가장 언급이 많은 선수중 한 명이 되었다. 기존의 한화 프랜차이즈 스타 김태균과 더불어 2015년 한화의 아이콘이라고 불려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며, 당시 온갖 인터뷰를 비롯해서 큰 관심을 받았던 선수였다.
한화에서 김성근의 혹사가 논란이 되었을 때, 혹사를 우려하는 팬들의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권혁은 FA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은 선수의 입장상 대놓고 감독에게 불만을 표출하거나 항명을 할 수 없었고 본인 스스로도 워낙 투지가 강한탓에 오히려 '공을 마음껏 던질 수 있어서 좋다. 과도한 걱정이다'라고 발언했었다. 문제는 노리타들이 권혁의 투혼을 악용하여 김성근의 혹사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의 상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2.1.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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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시절 |
지역 연고팀에 극적으로 1차지명으로 입단 한 후, 선발투수로 육성되었으나 후엔 팀 사정상 불펜으로 완전 자리잡고 리그 정상급 불펜 투수로 발돋움하였다.
팀 사정상 KBO 최고의 마무리 투수인 오승환이 부상으로 이탈했을때는 정현욱과 팀의 더블스토퍼로 그 공백을 매꿔주기도 했으며, KO펀치, JKO펀치, JOKKA 라인으로 KBO 역사상 최고로 평가 받는 불펜진 멤버로 활약했다.
그러다 2013년을 기점으로 점차 기회를 잃어갔고, 2014시즌 후 FA를 취득하자 한화 이글스로 전격 이적하게 된다.
2.1.1. 2002 시즌
2002년 연고 팀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20]했다.당시 큰 기대를 받던 선수답게 첫 시즌에 바로 프로 데뷔에 성공한다.[21]
2002 시즌은 2경기(선발1) 1패를 기록하며, 여타 다른 신인투수처럼 크게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빠른 공에 비해 제구가 쉽게 안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장성호한테 제대로 장타를 맞으며 프로의 쓴 맛을 경험했다.
2.1.2. 2003 시즌
2년차였던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등판하기 시작했고, 덩치 좋은 좌완 파이어볼러를 선호했던 김응용 감독의 눈에 들어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몇 차례 기회를 가지게 된다.그 중 가장 인상적인건 9월 6일 수원 현대전에서 선발 등판해 5⅓이닝 1실점으로 프로 데뷔 후 첫 선발승을 따냈는데[22], 상대 팀이었던 현대의 선발 투수는 선발 21연승 행진을 이어가던 에이스 정민태였다.[23][24]
이 때까지만 해도 권혁은 제법 유망한 선발 유망주였고, 꽤 괜찮은 성과를 보여주던 시기였다. 실제로 삼성 코칭스태프 역시 권혁을 선발투수로 키우려 했었고, 대부분의 팬들 역시 권혁을 미래의 좌완 에이스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던 시절이었다.
2.1.3. 20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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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
당초 선발투수 후보로 이름을 올려 4월 7일 기아전에서는 무리 7이닝 4피안타 3볼넷 1실점의 QS+ 피칭을 선보이며 시작은 굉장히 좋았는데, 이후 13일 LG전[25]과 17일 두산전[26]에서 연거푸 쓴 맛을 보며 평균자책점이 7.15까지 치솟자 새로 부임한 선동열 코치에 의해 고정 선발투수 대신 팀 사정에 따른 전천후로 투입되며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던지게 되었다. 불펜으로서는 2~3이닝 이상을 던지기도 하는 등 롱릴리프로도 던졌다.[27] 그래도 선발로 기회를 가끔 부여 받아 투구할 때 5월 21일 SK와의 경기에서는 시즌 첫 경기 못지 않는 6⅔이닝 4피안타 1볼넷 5탈삼진 무실점 대호투를 펼진 적도 있으나 이 경기에서 승리투수는 하지 못했다.
7월 10일 현대전에서 선발로 3⅔이닝 4피안타(1피홈런) 2사사구 3탈삼진 1실점으로 조기강판 된 이후 사실상 롱릴리프로 고정되어 추가 선발등판 없이 중간계투로 시즌을 끝까지 치렀으며, 중간계투에서 점점 경기 내용 및 세부 지표가 개선되자 이 때부터 불펜으로 점찍어놨던 선동열 코치는 후에 감독이 되고 나서 부터는 완전히 권혁을 중간계투 요원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된 시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튼, 2004년 당시 삼성은 배영수, 권오준이 선발투수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던 시기이기도 했고, 당시 삼성의 투수 유망주 풀은 상당히 좋았던 시기로 평가 받는다.[28]
그리고 해당 시즌엔 권혁의 이름을 모두에게 알리게 되는 결정적인 경기가 나오는데, 바로 9월 18일 잠실 두산전에서 공인 156km/h의 구속을 찍게 된다. #
기세를 이어 9월 28일 LG전에서는 2이닝 동안 2피안타 1볼넷 허용하긴 했어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면서 무려 5탈삼진이나 잡는 피칭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 포스트시즌에서도 맹활약을 선보였는데, 특히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3차전 선발투수인 케빈 호지스 대신 올라와 3⅔이닝 무실점으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
다만, 팀은 현대 유니콘스와의 혈전끝에 매우 아쉬운 준우승을 기록하면서 시즌을 마감했다.
권혁은 2004년 정규시즌에서는 37경기(선발 9경기) 81이닝을 소화하면서 3승 3패 3홀드 ERA 4.78을 기록했고, 포스트시즌에서 총 10경기에서 13⅓이닝 ERA 3.38을 기록하면서 데뷔 3년만에 본격적인 풀 시즌을 치르는데 성공했다.
2.1.4. 2005 시즌
시즌 전부터 지난 시즌의 맹활약으로 큰 기대를 받았다. 오클랜드 영건 3인방인 팀 허드슨-마크 멀더-배리 지토를 빗대어 삼성의 뉴 영건 3인방으로도 각광받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삼성, 한국판 '영건 3인방' 뜬다하지만, 오키나와 캠프에서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하면서 우려를 샀다.
휴식과 재활을 병행하면 나아져서 시즌 초에는 복귀가 가능할것으로 보여지긴 했으나 #, 결국 시즌 끝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이는 지난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무리했던 후유증으로 보이는지 팔꿈치 통증에 시달린게 결정적이였다.
결국, 시즌 도중에 토미 존 서저리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으면서 1군에서는 한 번도 등판하지 못했다.[29]
2.1.5. 2006 시즌
지난 시즌 수술과 재활 일정으로 인해 2006 시즌 후반기에 복귀 할 예정이라고 한다.그렇게 8월 1일 들어서 드디어 첫 실전에 복귀했다. #
이 후, 예정된 수순대로 8월 17일 부로 1군에 전격복귀했다. #
9월 13일 한화전 등판 직후 잠시 팔꿈치 통증으로 2군에 한 차례 내려가긴 했으나, 큰 문제는 아니었고, 얼마 안 가 9월 말에 다시 복귀했다. #
여러모로 당시 선동열 감독이 상당히 총애했던 투수였고, 복귀해서도 줄 곧 좋은 공을 던졌기 때문에 결국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들게 된다. 특히 10월 2일 현대전에서 1⅔이닝 동안 4탈삼진 무실점의 피칭이 결정적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과 5차전 총 2경기에 등판하여 알토란같은 활약을 했고, 팀도 이 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본인 커리어 사상 첫 번째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후엔, 일본에선 열린 코나미컵에 참가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스타 플레이어인 이나바 아츠노리로 부터 매우 좋은 직구를 던진다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
이때만 하더라도 부상에서 복귀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팀 사정상 잠시 불펜으로 뛰는것으로 보였고, 여전히 선발투수로 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살아있었을 시기였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엔 트레이드 소문이 잠깐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삼성에 빈약한 타선을 보강하기 위해서 투수들을 내주고 타자를 영입할 수도 있다는 소문 때문이였다.
다만, 팀에선 트레이드 절대 불가 7인의 선수에 권혁을 포함하면서 트레이드 소문은 가라앉았다. #
2.1.6. 20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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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
권혁의 삼성 시절 커리어하이 시즌. 시즌 전엔 선발투수로 준비하면서 팔꿈치 수술을 받은 배영수의 빈자리를 매꿀 선발투수로 임창용, 임동규와 함께 주요 기대선수로 시즌 전부터 주목 받게 된다.[30]
그런데, 선동렬 감독은 팀 사정상 불펜에서 던져줄 투수가 부족하다며, 시즌 개막 직전 권혁을 오승환 앞에 던지는 셋업으로 전환시킨다.[31]
다만, 이게 완전한 불펜 전환 계기가 되어 다시 선발투수로는 등판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계속해서 불펜투수로 활약하게 된다.
여튼 이 해 권혁은 엄청난 구위로 당시 오승환보다 공이 더 좋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였고, 2007 시즌엔 평균자책점 2.79, 7승 1패 19홀드로 중간계투 요원으로 100탈삼진을 달성하며, 순수 불펜 100탈삼진으로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불펜투수로 거듭나게 된다.[32]
이해 맹활약으로 올스타전에도 뽑혔고, 올스타전 이전인 5~7월까지는[33] 불펜투수임에도 선발투수인 류현진과 리그 탈삼진 1~2위를 다툴 정도였다.[34] 실제로 이 해 K/9(9이닝당 탈삼진 수)는 무려 11.69로 당시 권혁의 구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불펜투수인데도 선발 못지않게 이닝 소화를 꽤 많이 했기 때문에 시즌 중반까지는 규정이닝을 왔다갔다하며 평균자책점 순위권에 들기도 했다.
아쉬운 점은 팔꿈치 부상에서 복귀하고 맞이하는 풀타임 첫 해였기 때문에 관리를 해 줬어야 하는데 상술한 대로 권오준은 전년도에 무리한 탓에 구위가 떨어졌고 임창용을 선발투수로 돌린 상태에서 셋업맨으로 던질 선수가 권혁밖에 없었기 때문에[35] 선동열은 그를 전천후로 투입한다. 실제로 2007년 전반기에 2이닝 연투는 기본에 셋업맨으로 마구 굴렸다가 규정이닝을 왔다갔다 했을 정도로 혹사당하면서[36] 후반기로 갈수록 구속과 구위가 떨어졌고, 1점대를 찍던 평균자책점 역시 2점대 후반으로 다소 상승하며 시즌을 마쳤다. 게다가 8월 중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되면서 한 달 가량 쉬었는데도 최종적으로 77이닝을 소화하면서 쉬지 않았으면 100이닝 가까이 찍었을 페이스였다.
시즌후엔 2007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선발되면서 베이징 올림픽 티켓을 위한 최종 멤버로 발탁되었고, 여기서도 쏠쏠한 활약을 하며 팀을 베이징 올림픽으로 이끄는데 공헌한다.
3에 육박하는 WAR을 기록하고, 150km/h대 강속구를 던지면서 순수 불펜 세자릿수 탈삼진과 19홀드로 리그 정상급 불펜투수로 올라서는데 성공한 시즌.
2.1.7. 20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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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 |
2008 시즌은 전년도에 많이 던진 여파로 나름 관리를 받았던 시즌.[37]
이 시즌 삼성의 승리의 공식은 선발 투수로 5회까지 리드를 잡는다 → 권혁 1이닝 → 정현욱 2이닝 → 오승환 세이브.[38]
2008 베이징 올림픽 최종 멤버로도 발탁되어 활약했는데, 특히 일본전에 등판해, 실점을 막는 결정적인 아웃카운트를 잡는 등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하였고, 대표팀이 금메달을 차지하며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2008시즌 권혁은 여러모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였는데, 부상만 아니었다면 정말 엄청난 스탯을 찍었을수도 있었던 시즌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즌 성적은 1.32의 방어율과 6승 무패 15홀드, ERA+는 무려 314.1를 기록.
2.1.8. 2009 시즌
2009 KBO 리그 세이브 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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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
2009 시즌에도 변함 없이 정현욱, 팀의 마무리인 오승환과 함께 팀의 핵심 필승조로 활약하며 일명 'JKO' 필승조로 2008 시즌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팀의 7회-8회-9회를 나란히 책임졌다.
하지만, 팀의 마무리였던 오승환이 예상치 못한 부진과 동시에 부상이 겹쳤고, 결국엔 7월경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 판정을 받게 된다. 이로써 팀의 핵심 불펜이였던 권혁과 정현욱이 더블 스토퍼로 전환 되었다.
권혁과 정현욱은 승리 할 수 있는 상황만 되면 최대한 경기를 지켜내었고, 이는 팀이 시즌 끝까지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을 하는데 큰 힘이 되어준다.[39][40]
하지만 팀 선발진 붕괴와 두 투수에게 집중된 불펜 피로도로 인해 포스트시즌 진출에는 아깝게 실패하였고, 팀의 포스트 시즌 연속 진출 기록도 무산된 채 시즌을 마무리 했다.
권혁의 시즌 성적은 5승 7패 6세이브 21홀드(1위), 80.2이닝, ERA+ 168.2, ERA 2.90, WAR 2.51.
지난 시즌엔 관리가 되었지만, 2009년에 팀 사정상 다시 많은 이닝과 많은 투구를 하게 되었고, 고생은 많이했지만 홀드왕을 차지했다. 게다가 KBO 골든글러브 투수부문[41]에도 오르는 등 좋은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여러모로 리그 정상급 불펜 투수로써의 자리를 공고히 한 시즌이기도 하다.
그리고 2009 시즌은 삼성 투수들에게 매우 힘들었던 시즌으로 남아있는데, 팀으로썬 배영수의 충격적인 부진과 그 유명한 조원수박차도 나왔던 시즌이고, 오승환이 예상치 못한 부진과 부상으로 시즌 아웃 판정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2009 시즌 자체가 엄청난 타고투저 시즌으로, 리그 평균 방어율이 4.80에 달했고, 이는 타고투저로 매우 유명한 1999시즌에 이어 역대 2위에 해당하는 타고투저 시즌.
2.1.9.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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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
2009년엔 팀 사정상 과부하가 걸릴정도로 많이 던졌던 여파인지 속구 구속이 덜 올라온 상태로 시즌을 맞이했다.
예전에 비해 구속이 줄면서 본의아니게 컨트롤이 상당히 개선되었고 제구에 있어서 좋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시즌.
예전만큼 타자들에게 끔찍할정도의 강속구를 뿌려대지는 않지만 정교한 제구를 통한 코너웍을 이용해 타자를 처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게 되었다. 오히려 안정감만큼은 이제 무르익을때로 무르익어 완성형 불펜투수로 거듭났다는 평을 듣게 된다.[42]
시즌 내내 꾸준히 맹활약을 한 결과 시즌 성적 ERA 2.09에 7승 1패 4세이브 10홀드, ERA+ 147을 기록하며 정규시즌을 마무리 한다. 게다가 지난 시즌 실패했던 포스트시즌 진출도 성공.
이 시즌엔 불펜에서 포텐이 만개한 안지만도 제대로 합류하면서 정현욱과 함께 "안정권 트리오"[43]로 오승환이 빠진 빈자리를 훌륭하게 매꾸는데도 성공하게 된다.
정규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선동열 감독도 2010 포스트시즌에 그런 그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2.1.9.1. 포스트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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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오프 두산전에서 발생한 보크 |
2010년 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1차전, 팀이 스코어 5:6으로 이기던 9회 초에 5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사 1, 2루, 2S1B 상황에서 투수판을 밟은 상태에서 공을 떨어뜨리면서 보크를 범하고 만다.
이때 이 사건으로 아이작 권턴이라고 잠깐 불리기도 했다.[44] # # 보크를 저질러 1사 2, 3루가 되자마자 안지만으로 교체되었고, 안지만이 3번 타자 이종욱을 유격수 플라이, 4번타자 양의지를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시키고 경기를 끝내면서 최악의 결과는 막았지만, 이 경기 이후 예전만 못한 경기력은 이때 후유증이 발생한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이날 권혁은 0.1이닝 12투구수 1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홀드를 기록.
문제는 이 날 이후에 포스트시즌에서 부진하면서 자기 공을 제대로 뿌리지 못하게 된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선 4타자 상대하여 0.1이닝 16투구수 1피안타 2볼넷 1희비 1실점(1자책) ERA 27.00.
플레이오프 3차전에선 1타자 상대하여 4구[45] 1실점(1자책) ERA 99.99.
플레이오프 4, 5차전에선 등판하지 못했다.[46]
여튼 플레이오프는 극적으로 삼성이 이기면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권혁은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 ⅔이닝 1홀드 2피안타 4볼넷 2실점(2자책) ERA 27.00, 1홀드를 기록한다.
다만, 한국시리즈에서도 좋지 못하면서 2010 포스트시즌 내내 좋지 못했다.[47]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1타자 상대하여 4구[48] 1실점(1자책) 평균자책점 99.99, 패전[49].
좌완 중계로서 권혁의 역할은 삼성 내에서 선동렬 감독에게 '유일무이'라고 불리운 그는,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2차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지던 8회초에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가을에 엄청 강한 타자인 박정권을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 박경완을 상대로 홈런을 맞았다. 이 피홈런의 여파로 다음 타자인 나주환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고 정인욱으로 교체되었다. 확실히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발생한 보크의 후유증이 꽤 컸다는걸 포스트 시즌내내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2010시즌 자체의 성적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삼성 선수단과 삼성팬들로서는 많은 아쉬움을 삼켰다. 이날 권혁은 ⅓이닝 16투구수 1피안타 1피홈런 1볼넷 1실점(1자책)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1:4로 패했다.
결국 권혁은 10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2010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등판하지 못했고, 팀이 시리즈 전적 3패로 몰린 10월 19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2010년 한국시리즈 4차전, 팀이 스코어 4:1로 지던 8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6번째 투수로 등판했지만, 첫 타자이자 8번타자인 박정권을 상대로 내리 3볼을 던지고 투구폼이 평소보다 매우 불안하다는 평을 받으며 1타자밖에 상대하지 못했다. 권혁은 이날 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4:2로 패했다.
2010년 한국시리즈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0.2이닝 1패 1피안타(1피홈런) 2볼넷 1K 2실점(2자책) ERA 27.00, 1패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종합, 2010 포스트시즌 9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1.1이닝 1홀드 1패 3피안타 (1피홈런) 6볼넷 1K 4실점 4자책점. ERA 27.00, 1패를 기록했다.
스포츠 기사나 선동열 감독 등의 인터뷰를 볼 때 '권혁을 비롯한 불펜의 부진'이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좋게 해석하자면 그만큼 권혁이 높게 평가받고 있었고 나쁘게 해석하자면 그만큼 권혁은 이번 포스트시즌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는 것.
2.1.10. 2011 시즌
작년 포스트 시즌 여파인지 이후로 투구 페이스가 좀 꺾였다. 그러면서 2011년 시즌을 2군에서 시작. 아무래도 2010년 포스트시즌의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떨쳐버리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오죽했으면 충격으로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체중이 6kg나 빠졌을 정도였다.그러나 팀에선 권혁의 비중이 큰 편이였기에 얼마 안가 4월 16일 1군으로 돌아오면서 JOKKA 라인이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다행히 제구가 좀 안잡혀서 볼넷이 늘어났지만, 피안타율은 상당히 낮았고 자기 역할은 충실히 잘 수행하면서 리그 최고의 불펜진의 일원으로 좋은 활약을 선보인다.
8월 2일 넥센전까지 38경기 11홀드 1블론 ERA 2.70 WHIP 1.33 30이닝 23피안타(1피홈런) 18사사구 15K를 기록 중이다. 보면 알겠지만 사사구 비율이 높아지고 탈삼진율이 낮아진 것 외엔 상당히 좋은 성적. 아무래도 볼넷율은 지난 포스트시즌 여파가 알게 모르게 있는듯 하다.
그러나 권혁의 이름값에 비하면 기대에 많이 못미친다고 볼 수 있었고, 이닝소화도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50]
경기당 1이닝이 안되는 수치로서 이는 당초 수행하던 역할인 강력한 셋업맨이 아니라 LOOGY, 즉 원 포인트 릴리프다.[51] 다만, 이 시즌 권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구가 잡혔던 지난 몇시즌과 다르게 유독 볼넷이 증가했다. 작년만 해도 73K/19BB로 상당히 좋은편이였고, 통산 K/BB도 2를 넘는데 올해는 확실히 볼넷율이 높다.
물론 리그에서 권혁에 비견 될 만한 좌완 불펜투수는 정우람과 박희수를 제외하면 아예 없다.
또 특이한 건, 좌우 상대 밸런스가 이상하게 안 맞았다.
좌타자 상대 14피안타(2루타 1개. BAA .241) 5K/11BB, 우타자 상대 9피안타(2루타 3개, 홈런 1개. BAA .191) 10K/6BB로 좌타보다 우타 상대로 더 잘던지고 있다.
사실상 LOOGY가 LOOGY가 아니다. 아무래도 좌타 상대로는 그라운드 볼을 유도하여 맞춰잡는 전략인 듯한데, 그게 잘 안 되는 듯했다. 사실 권혁은 간혹가다가 원포인트 역할을 수행[52]한 거지 커리어 대부분은 1이닝+ 투구와 좌/우 가리지 않고 던지는 투수긴 했다.
결과적으로 2011년에는 평균자책점 1~2점대를 유지하는 좌완 릴리버라는 점만으로도 이래저래 팀에 아주 유용하긴 했다. 다만, 예전처럼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평균자책점과 WHIP을 보면 알지만, 뜬금없이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고 안지만, 정현욱, 권오준이 올라와서 막은것도 꽤 된다.[53]
그래도 삼성은 권혁 없던 시즌 초반에 꽤 헤매던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삼성에서 없어선 안되는 중요한 릴리버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8월 6일 사직 롯데전에서 로나쌩이던 정인욱이 초반 제구 실패로 무너진 후 팀이 스코어 1:6로 뒤진 상황에 등판하였으나, 실책과 본인의 제구난으로 인해 오히려 5실점하여 팀이 4:11로 대패하는데 일조를 하면서 체면을 구겼다. 이 경기를 보면서, 많은 삼성팬들은 '삼성 핵심 불펜 중의 핵심이었던 권혁이 어쩌다 이렇게 된건지, 그것도 패전처리라니 반응을 보이면서 많이 씁쓸해했다. 분명 삼성의 특급 계투였던 그의 위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상황이 아닐 수 없으며, 그야말로 1년만에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삼성의 쓸만한 좌완 계투가 사실상 없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고 2011년 삼성 라이온즈의 우승을 위해서는 그의 부활이 정말로 절실했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페이스를 되찾으면서 잘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희망적인 면도 게속 보여주었다.
그런데 8월 24일 청주 한화전에서 8회 3:2로 앞선 상황에서 나와서 난타당하며 1사 만루에서 강판되면서 다시 안타까운 장면이 연출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뒤 이어 올라온 안지만이 오히려 역전을 허용하면서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타선 침체로 인해 3연패에 빠져 있었던 팀을 오히려 4연패로 몰아넣으면서 다시 분위기가 침체되고 만다.
결국 이날 안일하게 경기 운영하다 경기를 내준 류중일, 9회말 흔들리던 바티스타를 상대로 큰 스윙을 하다 삼진당한 채태인과 함께 삼성 팬들에게 비난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54]
그래도 부진은 오래가지 않았고, 8월 26일 두산과의 경기에서는 8회에 등판하여 호투하면서 2연승의 밑거름을 다져놓았다. 확실히 최근 한달사이에 좀 들쑥날쑥해도 두산에게만큼은 강한 점[55]도 있었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날은 구속이 어느정도 돌아와서 회복되는 모습은 확실히 고무적이었다. 올시즌 내내 원래 부족한 제구에 구속까지 안 나와서 고전하던 차에 나온 이날 호투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컸다.
시즌 성적은 1승 3패 19홀드 ERA 2.79, ERA+도 149를 기록하면서 한달 부진했던거 치고는 좋게 마무리했다.
그렇게 삼성은 최강 불펜진을 바탕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고 상대는 지난 시즌 맞붙었던 SK 와이번스.
권혁은 한국시리즈 5경기 중 3경기에 나와 ⅓이닝 2피안타 1볼넷으로 또 부진했지만, 그래도 실점은 없었다.
비하인드는 권혁 다음 투수가 1차전에서는 오승환, 4차전에서는 안지만인지라 분식회계를 안 당해서 실점이 없었다.[56]
여튼 한국시리즈에서 좋지 못했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고, 권혁 개인에게는 2006년에 이어 두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우승반지 2개째를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전체적으로는 권혁 이름값에 못미쳤고 아쉬운 모습도 보였지만, 리그 평균 이상은 했고, 좌완 투수로써 자기 역할은 나름 잘했다고 볼 수 있는 시즌.
2.1.11.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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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권혁/선수 경력/2012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통산 100홀드 달성에 성공하면서 이룬 개인통산 3번째 우승.
2.1.12.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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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권혁/선수 경력/2013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권혁이란 이름 값에 걸맞지 않은 정규시즌이였지만,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하며 개인통산 4번째 우승.
2.1.13.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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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
2013년 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 재활 차원으로 2군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당초 시즌초는 힘들다는 예상과 달리 시범경기에도 출장했고 개막전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경기에는 결국 나오지 못했고, 그러다 3월 31일 2군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4월 25일 1군에 복귀했다. 복귀 후 모습은 비교적 성공적.
4월 25일 넥센전에는 점수차가 큰 상황이긴 했으나 2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5월 4일 NC전에는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고 내려갔다.
5월 7일 SK전에는 4: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 등판하여 제구는 다소 불안했으나 1이닝을 잘 막았다. 그리고 9회에 팀이 SK의 필승조를 무너트리면서 행운의 승리 투수가 되었다. 시즌 첫 승리이자 2012년 7월 12일 이후 664일만의 승리 투수.
6월 4일엔 허리 통증 때문에 보호 차원에서 2군으로 내려갔다. 권혁이 내려가자 같은 좌완투수인 백정현이 올라왔다.
6월 27일 김현우와 1군에 복귀했다.
이후 7월 5일 두산전에 등판하여 나쁘지 않은 투구를 보여줬다.
7월 24일 경기에서도 등판하였는데, 2이닝동안 전성기 수준의 피칭을 보여 팬들을 설레게 하였다. 유일하게 맞은 안타 하나가 전준우의 홈런인 것도 고무적, 그리고 7회초엔 삼성 타선이 대폭발 하면서 시즌 2승째를 챙겼다. 팬들은 이러한 활약에 권혁이 예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좋은 반응이 연달아 나왔다.
7월 25일 대구 NC전에서 10:6으로 앞선 9회초에 등판해 삼진 1개 포함 삼자범퇴를 기록하며 경기를 마무리했다. 이날 속구 최고구속은 149km/h를 기록했고, 대체적으로 빠른 속구들이 연달아 찍혔다.
7월 27일에는 1:1 동점 상황에서 등판해 1안타와 1볼넷을 기록했으나, 삼진 2개를 잡았다. 확실히 페이스가 괜찮은 게 삼진/볼넷 비율이 4를 왔다갔다 할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 게다가 최근들어 차우찬의 페이스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권혁의 이러한 모습은 다시 필승조에 들어가도 무방할정도라 바로 필승조에 포함될 듯 하다.
그렇게 잘 던지고 있다가 8월 6일 한화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맞게 된다.
그리고 8월 8일 롯데전에선 한 타자도 못잡고 1자책을 허용. 다만, 임창용의 결정적인 블론 이후 나온 것이라 모든 비난의 화살은 임창용에게 향했다. 롯데전에선 좌우놀이에 휘말려 1타자를 출루시킨 뒤 심창민의 깔끔한 분식으로 실점한 것이라 권혁에겐 비판이 거의 없었다
8월 11일 넥센전에선 이택근에게 2루타를 맞았으나 두 타자를 무사히 잡아내고 팀의 역전승을 견인했다.
8월 27일 롯데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6:4로 뒤진 5회초 2사부터 등판하여 타자들을 4타수 3K로 잡아내는 위력을 선보였다. 초반부터 무너진 용병과 이후 등판하여 같이 무너진 수건이 부진한 가운데 제 역할을 했지만, 팀이 스코어 11:4로 패배해서 활약이 빛바랬다.
그렇게 시즌을 무난히 마무리했는데, 문제는 구위나 부상문제는 확실히 회복된것으로 보이지만, 그 사이에 팀내 입지가 많이 줄어들어 출전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57]
그리고 팀은 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4년 연속 통합우승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여 서건창을 초구 외야 플라이로 잡아내고 배영수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그리고 이 등판이 유일한 한국시리즈 등판이 되면서 공 1개만 던지고 개인 통산 5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권혁이 삼성에서 남긴 주요 성적은 매우 좋은편인데, 고정 불펜 투수로 자리잡기 시작한 2007 시즌부터 2014 시즌 까지 총 8시즌 동안 438경기에 31승 18패 11세이브 106홀드, 447.2 이닝[58] ERA 2.67을 기록했을 정도로 매우 좋은 성적을 냈었던 리그 최정상급 불펜 자원이였다.
2.1.14. FA
시즌이 마무리된 후 본인 첫 FA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 반응은 삼성 잔류 50과 이적 확률 50으로 50:50으로 예상되었다. 고향팀이자 원클럽맨이라 쉽게 팀을 옮길까라는 의견과 줄어든 출전기회 때문에 비교적 불펜이 약한 팀으로 이적을 택할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었다.2014년 11월 26일, 삼성과의 FA 우선협상이 결렬되며 시장으로 나왔다. 자신과 구단이 제시한 금액의 차이는 크지 않아서 금전적인 문제는 아니었지만, 본인이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싶어서 FA 시장에 나섰다고 밝혔다. 보통 FA선수가 기회를 언급하면서 협상이 결렬되면 대부분의 경우 기회=돈으로 인식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권혁의 경우 확실히 좋은 공을 던지고 가치가 높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삼성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권혁과의 협상 결렬에 매우 아쉽다는 반응과 기회 적인면에선 대다수 이해한다는 반응이다.[59]
2014년 11월 28일, 한화 이글스와 FA 계약을 체결했다. 4년 총액 32억 원(계약금 10억 원, 연봉 4억 5,000만 원, 옵션 4억 원, 보장 28억)으로 큰 계약이 가득했던 FA 시장 상황에서 세간의 예상보단 진짜 낮은 금액으로 계약을 맺었다.[60] 이로써 정말 돈보다는 기회를 원해서 나온게 확실시 되었다. 아무래도 필승조나 마무리를 보장받길 원한 듯하다.
이로써 한화는 20인 명단에서 빠져 kt wiz로 이적한 윤근영이라는 좌완 불펜의 누수를 그 이상의 커리어를 자랑하는 선수로 대체하였다.[61] 좌완 불펜이 부족한 한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이며, 출장 기회를 원했던 그의 바람은 충분히 충족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좌완 투수를 매우 선호하며, 권혁과 같은 와일드 씽 유형의 불펜자원을 정말 잘 활용하는 김성근 감독도 마침 한화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어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물론, 이때는 훗날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전혀 몰랐다.[62] 오랜 감독 생활 중 처음으로 외부 FA 선수를 선물받은[63] 김성근 감독의 기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한편 권혁의 FA 보상선수로는 상무 입대를 앞두고 있는 포수 김민수가 지명되어, 김민수는 상무 제대 후 고향 팀에서 뛰게 됐다.
2.2.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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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시절 |
2.2.1.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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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권혁/선수 경력/2015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누군가 날 믿어준다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다.
ㅡ 인터뷰 中
ㅡ 인터뷰 中
권혁에겐 제2의 전성기이자 스포트라이트나 화제성으로만 따지면 본인에게 가장 많은 열광과 지지를 받았던 시기로 사실상 본인의 커리어하이를 갱신할 수 있었지만,[64] 막판에는 결국 눈에 띄게 팔 스윙이 느려지고 엄청나게 누적된 피로로 인해서 후반기를 씁쓸하게 마친 명과 암이 명확히 공존했던 다이나믹한 시즌이었다.
2.2.2.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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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권혁/선수 경력/2016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순수 불펜으로만 8월까지 95.1이닝을 던지며 작년 못지않게 굴려졌다.[65]
그러다 결국 8월 24일, 팔꿈치 통증으로 서산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모두가 우려했던 시나리오였지만 결국 10월 15일, 팔꿈치 수술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본인의 3번째 팔꿈치 수술이며, 뼛조각 제거 수술로는 두 번째이다.
2.2.2.1. 살려조
2016년 8월 24일, 권혁은 팔꿈치 통증으로 인해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당시 권혁은 2016년 시즌에 66경기에서 95.1이닝을 던지고 있었으며, 불펜 투수로서는 상당히 많은 이닝을 소화한 상태였다. 같은 시기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오승환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61경기에서 64.1이닝을 던진 것과 비교해 봤을 때, 권혁의 투구 이닝은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66][67] 권혁의 혹사는 단순한 기록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야구에서 불펜 투수의 피로 관리와 등판 빈도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사례가 되었다.권혁의 2015-2016년 시즌 혹사는 KBO 리그뿐만 아니라 현대 야구를 통틀어 최악의 불펜 혹사 사례로 꼽힌다. 그는 두 시즌 동안 무려 144경기에 나서 207.1이닝을 던졌다. 이는 10구단 체제가 확립된 이후 KBO 리그에서 팀당 한 시즌에 치르는 144경기에 해당하는 수치로, 권혁이 2년 동안 거의 매일 경기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펜 투수로서 2년간 207.1이닝을 던졌다는 기록은 매우 이례적이며, 이 같은 등판 빈도는 투수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극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펜 투수는 보통 선발 투수보다 짧은 이닝을 소화하고, 중요한 상황에서 등판하는 역할을 맡는데, 권혁은 이와 달리 긴 이닝을 던지며 팀을 지탱했고, 이는 결국 그의 팔꿈치에 큰 부담을 주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권혁이 2년 동안 던진 공의 총 개수였다. 권혁은 2년간 3,752개의 공을 던졌고, 경기당 평균 26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특히 최근 2년간 한 경기에서 4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날은 26차례나 되었고, 이 중 5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한 날도 6차례에 달했다. 기사, 박동희 칼럼 이는 대부분의 불펜 투수가 감당하기 힘든 수치로, 불펜에서 계속해서 긴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보여준다. 주목할 만한 점은, 권혁은 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선발 등판한 적 없이 오직 불펜에서 긴 이닝을 던지며 팀을 지탱한 것이다.
권혁의 혹사는 연투 횟수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그는 2015년 한 해에만 2연투 12회, 3연투 8회로 총 20회 연속 등판했고, 2016년에는 2연투 10회, 3연투 4회로 14회 연속 등판했다. 이는 매일 경기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화 이글스가 권혁을 거의 쉬지 않고 등판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동안 팀 동료 박정진도 총 41회의 연투를 기록했지만, 권혁이 훨씬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권혁은 2이닝 이상을 소화한 경기가 46회나 되었고, 그중 3이닝 이상을 던진 경기도 7회나 있었다. 이처럼 권혁은 불펜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선발 투수에 준하는 이닝을 던졌으며, 이는 그가 혹사를 당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권혁이 셋업 상황이 아닌, 경기의 승패와 상관없는 5점 차 이상의 경기에서도 자주 등판했다는 점이다. 그는 2년간 17경기에서 22이닝을 던졌고, 총 355구를 기록했다. 이 중에는 10점 차 이상이 나는 경기도 2경기가 있었다. 큰 점수 차에서 권혁이 등판한 이유는 경기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김성근 감독의 불안감에서 비롯된 등판이었다. 당시 KBO 리그는 타고투저 현상이 극심했으며, 5점 차 리드도 쉽게 뒤집힐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그러나 실제로는 2016년 기준 1,282경기 중 5점 차 리드가 뒤집힌 경기는 30경기(2.3%)에 불과했다. 기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성근 감독은 권혁을 자주 등판시켰고, 이는 권혁의 팔꿈치 부상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혹사는 정현욱과 같은 ' 국민노예'라 불리던 투수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정현욱은 2008년 53경기에서 127이닝을 던졌고, 2년간 115경기 206이닝을 기록했다. 그러나 정현욱은 선발 투수로도 나섰으며, 연투를 선호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연투에 대한 내성이 있었다. 반면 권혁은 선발 없이 오직 불펜에서만 등판하면서 정현욱의 기록을 뛰어넘는 혹사를 당했다. 권혁은 단순히 불펜 투수로서의 기록을 넘어,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심각한 혹사 사례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이 같은 혹사 문제의 배경에는 김성근 감독의 투수 운용 방식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은 투수를 자주 등판시키고, 한 번 믿음을 준 선수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KBO 리그에서 투수 혹사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게 만들었으며, 김성근 감독의 방식처럼 투수를 혹사시키지 않으면 혹사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인식을 퍼뜨리게 만들었다.
김성근처럼 하지 않으면 투수 혹사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2015~2017시즌 동안 NC 다이노스의 김진성 역시 엄청난 이닝[68]을 소화했지만, 김성근처럼 극단적인 혹사 논란에 휘말리지는 않았다.[69] 그러나 리그 확장[70] 과 타고투저 현상이 겹치면서 투수들의 피로도는 점점 더 높아졌고, 많은 투수들이 권혁처럼 잦은 등판으로 인한 혹사를 겪게 되었다.[71]
김성근 감독의 방식은 한화 팬들의 기대와는 크게 어긋난 것이었다.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에 부임할 때 팬들은 그가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처럼[72] 약체 팀을 강하게 만들기를 기대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성적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경험 많은 베테랑 선수들을 선호하며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저해했다. 그 결과 팀에서 가장 잘 던지는 몇몇 투수들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등판을 하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권혁이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김성근 감독의 권혁 혹사 문제는 2016년 10월 엠스플뉴스 보도를 통해 더욱 심각하게 드러났다. 김성근 감독이 권혁에게 팔꿈치 통증에도 불구하고 무통주사를 맞고 경기에 나서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기사 권혁이 이를 거부하자, 김성근 감독은 '외박 금지' 규정을 만들어 권혁을 단속했으며, 심지어 권혁에게 자비로 수술을 받으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이는 선수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처사였고, 구단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많은 반발이 있었으나, 당시 김성근 감독은 구단에서 전권을 쥐고 있었기에 그의 결정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후 시간이 많이 흐른 2024년 9월, 권혁은 김태균 전 한화 이글스 선수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10:46부터 권혁은 201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직후 스프링캠프에서 45일 연속으로 단 하루도 쉬지 못하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다른 투수들은 4~5일 훈련 후 하루 휴식을 취했지만, 권혁은 예외였다. 당시 투수 트레이닝 코치였던 이홍범 코치조차 권혁이 너무 지쳐 보이자 몰래 실내 연습장에서 1시간이라도 쉬고 오라고 권할 정도로 권혁의 상황은 심각했다.
특히 권혁이 당시 33세였다는 점에서 그 혹사는 더욱 가혹했다. 23세의 젊은 투수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훈련 강도를 10살이나 많은 권혁이 소화했으며, 그는 2015년 스프링캠프에서만 3,300개의 공을 던졌다. 2016년 스프링캠프에서도 2,000개 이상의 공을 던지며 혹사를 견뎌냈다. 결국 그는 2016년 시즌에 66경기에서 95.1이닝을 던진 후 팔꿈치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구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권혁이 2년간 스프링캠프에서 던진 공은 약 5,500개에 달하며, 이를 시즌 동안 던진 3,752개의 공과 합치면, 그는 2년 동안 약 9,000개 이상의 공을 던진 셈이다. 이는 "어깨는 쓸수록 단련된다"라는 야구 지론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혹사였으며, 이 말을 들은 김태균이 놀라며 "진짜로? 너도 철인이다. 그렇게 던지고선 시즌 내내 그렇게 던진 거야?"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만약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 되어 김성근 감독이 "다시 (야구를) 하자"라고 권유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권혁은 "안 해. 다시는 못 할 것 같아." 라며 소회를 밝히며, 현재 팔 상태가 투수로서 사용할 수 있는 근육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모두 손을 쓸 수 없다고 전했다. 1:49부터
이렇게 한화 이글스에서 발생한 권혁의 혹사는 KBO 리그 역사에 남을 대표적인 혹사로 기록되었다.
2.2.3.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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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권혁/선수 경력/2017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6월까지 ERA 2점대로 잘 던지다가, 7월 들어 부상과 체력저하로 급격히 무너졌던 안타까운 시즌
2.2.4.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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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경기 출전 당시 |
사실 지난 3년간 던질 만큼, 아니 상상도 못할정도의 그 이상을 던졌으니,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성적이 나빠도 한화 팬이라면 차마 욕할 수 없을 것이다.
시즌 전 스프링캠프 승선에는 성공했으나 연습경기에는 등판하지 않았다. 아직 컨디션이 덜 올라온 것도 있고, 관리 차원으로 보인다.
3월 17일 NC와의 시범경기에서 3점차로 앞선 9회초 등판했으나 박석민에게 투런포를 허용하고 말았다. 그 후, 강진성을 간신히 삼진으로 잡고 정우람과 교체되어 0.1이닝 2자책.
결국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한다고 한다. # 팬들은 그저 안쓰럽다는 반응뿐.
4월 후반기쯤 복귀할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2군 로스터에도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실전 감각을 조율 중인것으로 보인다.
2군에서 7경기 연속 무실점 중인데, 마무리 투수인 정우람은 컨디션 관리를 위해 경기당 1이닝만 소화하고 있고, 팀내 유일한 좌완 불펜인 99년생 박주홍, 송은범 등이 페이스가 약간 떨어진 상태여서 한번쯤 올려볼만도 하다는 반응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추격조 장민재와 이태양이 2~3점대의 좋은 방어율을 기록 중이고, 박주홍은 가능한 한 경험을 어떻게든 쌓아야 할 입장이여서 딱히 내릴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 마침 팀 불펜진 방어율도 선두라는 엄청난 기세로 달리고 있으니, 더더욱 권혁이 무리할 필요는 없을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또 부상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허벅지 근육 파열로 인해 재활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2군에서 7경기 연속 무실점을 하면서 확실히 몸 상태가 올라오는 중에 다시 부상을 당했다 보니 팬들의 반응은 안타깝다는 게 대다수. 6월 후반까지 재활에만 4주가 걸리니 전반기 복귀는 사실상 물건너갔다.
한화 불펜이 방어율 1점대인 장민재, 박상원을 추격조로 쓰고 있을 정도로 역대급으로 잘 돌아가고 있으니 권혁을 무리하게 복귀시키기보다 회복에 전념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7월 19일 게재된 최계훈 2군 코치의 인터뷰에 의하면 재활이 순조로운 것인지 육성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8월 15일 드디어 1군에 올라온다고 한다. #
8월 29일 서머 리그 경기에서 올라와 1⅓이닝 동안 1K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최고구속은 147km를 찍어내며 컨디션이 거진 다 올라왔음을 보여주었다.
9월 5일 마침내 1군 리그에 다시 등판했다.[73] 등판 후 2타자 연속 삼진으로 맹활약했지만, 바로 다음 이닝에서 홈런을 하나 맞고 내려갔지만, 홀드는 기록했다.
9월 7일 등판, 선발이 7실점을 하면서 경기가 크게 기운 상황에 두번째 투수로 올라와 ⅔이닝 1실점을 하며 등판을 마쳤다. 팀은 크게 졌다.
9월 16일 LG전 8회초 등판해 박용택을 절묘하게 병살로 처리하며 0.2이닝을 소화하고 내려갔다. 이 등판으로 KBO 통산 11번째 7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9월 27일 1이닝을 2탈삼진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이후 이닝에서 팀이 역전하면서 올 시즌 첫 승을 기록했다. 이 승리는 권혁의 483일만의 승리였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 정말 오랜만에 진출한 한화에서 준플레이오프 엔트리에도 드는데 성공한다.[74]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선발투수 헤일 다음으로 등판하여 임병욱에게 안타를 맞은 후 교체 되었다. 이후 책임주자의 실점으로 이어졌고, 임준섭, 김범수, 박주홍 등 다른 좌완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며 더 이상 등판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경기가 한화 이글스에서 뛴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2.5. 방출
2019년 1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2군 선수도 포함된 1군 스프링캠프에서 제외된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일각에서 제기 되었던 연봉 부분은 이견이 없어서 종전의 연봉에서 큰 폭으로 삭감된 2억원에 무리없이 동의했지만, 1군 스프링캠프 명단 제외라는 통보를 받고 의견 차이가 생겼다고 한다.
2019년 1월 30일 결국 송은범, 이용규, 최진행과 함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지 못하게 될 뻔 했지만 나머지 3인이 극적으로 계약에 성공하여 권혁 혼자 남게 되었다.
권혁이 자유계약 선수를 요구했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한화측에서는 부정하는 기사가 나왔다.
일단 구단은 연봉협상을 계속 할 것이라며 언급했지만 “현장이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판단한 결정이다. 지난해 송은범도 2군에서 캠프를 시작했고, 좋은 성적을 냈다. 2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1군 캠프에 부를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권혁은 “돈 때문이 아니다. 선수로서 내가 뛸 수 있는 환경, 많은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받고 싶은 마음뿐이다”고 말했다.
결국 돈에 상관없이 기회를 많이 주는 팀에서 뛰고 싶다며 구단에게 자유계약 신분으로 방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인터뷰 권혁 입장에서 1군 스프링캠프에 들지 못하고 2군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상 팀이 리빌딩 기조하에 자신을 전력 외로 보는 것일테니 차라리 기회를 주는 다른 팀에 뛰고 싶다는 요지였다.[75] 한화는 내부 회의를 진행한 뒤 최종 면담을 한 번 더 하고서 팀에 잔류시킬지 자유계약으로 풀어줄 지 여부를 결정한다고 한다.
구단에서는 송은범의 사례[76]를 들었지만, 반대 사례로 끝끝내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고 방출된 심수창의 경우도 있다. 물론 심수창은 우완이었다는 점이 다르지만,[77] 기회를 얻기 위해 삼성을 떠나 온 한화로 온 권혁 입장에선 2군 스타트는 주변 상황과 구단의 기조로 보아 전력외 판정이나 다름없었다.
한용덕 감독이 인터뷰에서 '작년 송은범 사례를 참고해서 추진하기로 한 결정인데 권혁이 이런 반응을 해서 곤혹스럽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을 볼 때, FA로 영입됐던 선수들과 감독 간의 의사소통도 잘 안 된 것으로 보인다.[78]
결국 2019년 2월 1일 한화 이글스측에서 자유계약공시를 요청함에 따라 한화와 권혁의 4년간의 동행이 마무리 되었다. # 혹사의 여파등으로 인해 기량이 확실히 떨어진것은 맞지만 즉시전력감 좌완투수가 필요한 팀은 널렸기에, 향후 거처도 굉장히 주목 받고 있는 선수 중 한명이다. 친정팀인 삼성은 좌완 불펜뿐만 아니라 심창민의 입대와 최충연 선발 전향으로 인해 불펜진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라 노려볼만한 후보 중 한 팀이다.
이에 대해 권혁은 "한화 구단에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나로서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나"면서 "그저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생각뿐이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이재국의 직선타[79]
한편, 이미 선수 등록 마감일을 넘겼기 때문에 권혁이 어떤 팀으로 이적하든지 육성선수 계약만 가능하고, 1군 경기는 2019년 5월 1일부터 출전할 수 있다. 당연히 권혁이 어느 팀과 계약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렸고, 초반에는 LG 트윈스로 간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차명석 단장은 검토는 해보겠다고 하면서도 바로 조만간 결정하겠다는 입장은 아닌 듯 하다.
2.3. 두산 베어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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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2019년 2월 3일 두산 베어스에서도 권혁에 관심이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다른 팀이 고민하는 있는 사이에 일사천리로 2019년 2월 3일 바로 오피셜이 나오면서 순식간에 두산에 합류하게 되었다. 관련기사
두산은 권혁이 가진 구위와 경험, 불펜 활용 가치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한다. 자유계약 공시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영입 합의까지 다다른 이유. 그리고 두산은 프런트와 코칭스태프가 재빨리 모두 상의한 결과, 강력한 구위와 불펜 활용 가치가 높다는 점을 인지하고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특히 스프링캠프에서 선수단을 지휘하고 있는 김태형 감독의 의중이 크게 반영됐다. 두산 관계자 역시 "프런트와 코칭스태프 상의 결과 권혁의 구위와 불펜 활용가치가 여전하다고 판단했다. 김태형 감독의 뜻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이 영입으로 좌완 불펜난에 허덕이던 두산은 가뭄끝에 단비를 맞은것 같은 효과를 보았다.[80] 다만, 다소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면 2월에 자유계약 선수가 되었기에 육성 선수로 계약하게 되고 1군 등판은 2019년 5월 1일부터 가능해진다. 공교롭게도 2019년 4월 30일 ~ 5월 2일 3연전이 두산 vs 한화 전이다. 이적 후 첫 1군 등판이 한화 상대, 심지어 대전구장에서일 수도 있다는 것.
두산팬들은 오키나와 캠프 도중 권혁 영입 소식에 좌완 불펜 부족이 해결될 수 있다면서 대환영의 뜻을 보내고 있다. 한화팬들은 권혁을 욕하는 사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로 갈라졌으며, 권혁을 응원하는 사람들중 소수는 아예 응원팀을 두산으로 바꾸는 팀세탁을 했다.[81]
두산 유니폼을 입게 된 권혁은 "두산이라는 좋은 팀에서 뛸 수 있게 돼 영광이다. 선후배들과 합심해 올 시즌 우승을 목표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SW이슈] 권혁 품은 두산, 어떻게 일사천리로 영입 합의했나
권혁은 2002년 삼성에 데뷔할 때부터 한화까지 줄곧 등번호 47번만을 써 왔지만, 두산에서는 47번이 홍상삼과 겹쳐 47번을 고집하지 않았다. 두산에 남아 있는 번호 8번과 64번 중에서 8번을 선택했다. 인터뷰 영상에서 "(의미를 부여하자면) '8회에 등판해서 막는다' "라며, "팬 분들은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8)라고 표현해주신 분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산 베어스의 공식 유튜브 채널인 베어스포 TV엔 권혁의 합류 영상이 올라왔다.
이로 인해 두산팬들의 많은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고, 평소 동갑내기 친구였던 이현승의 많은 환대를 받았다.
2.3.1.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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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권혁/선수 경력/2019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좌타자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했으며, 본인의 6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2.3.2. 2020 시즌
권혁은 김승회, 배영수와 함께 지난 시즌 팀의 베테랑 불펜투수로 팀 우승에 일조했는데, 배영수는 아름답게 은퇴하면서 현역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반면, 권혁과 김승회는 게속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2020시즌에도 활약하게 되었다.
등번호는 기존에 47번을 사용하던 홍상삼이 방출 이후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면서 공석이 됨에 따라 19번에서 47번으로 변경했다. 덕분에 데뷔 이후부터 줄 곧, 본인을 상징하는 47번을 두산에서도 달 수 있게 되었다.
시즌을 완주할 경우 FA 재자격자가 된다.
이미 지난 시즌 150홀드를 넘어섰고, 200홀드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제 권혁도 선수로서는 40에 가까운 상당한 고령인데다가 2015년, 2016년에 겪은 어마어마한 누적 투구와 젊은 시절부터 겪었던 혹사의 여파로 우타자에게 심한 상성을 탈 만큼 확실히 구위나 몸 상태가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권혁에겐 아주 중요한 시즌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좌타 상대로는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좌타 전용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약할 가능성이 높다.
4월 21일, LG 트윈스와의 연습경기에 5회말 등판했으나 1아웃을 잡고 내야안타 후 3루수 실책에 이어 1루수 실책으로 실점했고, 이후에도 내야수들의 실책과 상대 타자들의 연속 안타로 인한 악재가 겹쳐 강판되었다.
뒤 이어 올라온 최원준(1994)이 남은 주자를 모두 들여보내면서 0.1이닝 3피안타 4실점 1자책을 기록했다. 당일 경기는 권혁 본인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운도 없고 컨디션이 올라오지도 않은 경기였다.
4월 27일, SK 와이번스와의 원정 연습경기에 8회말에 등판했으나 한화에서 그동안 혹사를 너무 당한 후유증과 에이징 커브[82]가 다시 드러나기 시작한것인지, 연속 안타로 무사 1, 3루를 허용한 후 2루 땅볼으로 실점했고 볼넷을 내주는 등 1아웃을 잡는동안 매우 고전하면서 책임주자 2명을 남기고 함덕주와 교체되며 강판당했다. 이어서 제이미 로맥이 함덕주에게 쓰리런 홈런을 치는 분식까지 당하면서 이날 0.1이닝 3실점을 기록하였다. 전체적으로 구속은 140km를 살짝 넘기는 직구였고, 몇몇 직구는 130km 후반대로 낮아졌으며, 그 동안 빠르고 강한 직구 위주로 피칭했던 권혁의 플레이 스타일을 감안해보면 느려진 구속을 구위나 제구로 커버할 상태도 아니기에 쌓인 관록과 로케이션으로 승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4월 29일, 키움 히어로즈와의 원정 연습경기에 4회말 등판했으나 2아웃을 잡고 연속 볼넷 후 안타로 실점했고, 2사 1, 3루에서 피처 보크[83]까지 하면서 3루 주자를, 이후 안타를 또 맞으면서 총 3점을 내주고 강판되었다. 다음 투수가 3구 삼진을 잡으면서 이 날의 기록은 0.2이닝 3자책. 안 그래도 지난 시즌 키움에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날도 구위가 살아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엔 개막전 1군 엔트리에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도, 시즌 초 권혁은 두산에게 필요한 존재였고, 여전히 허약한 팀 불펜 사정과 2군에서 몸 상태를 끌어올렸다는 판단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1군에 합류했다.
5월 21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박치국에 이어 올라왔다. 그리고 8회 2사 득점권 위기에서 결정적인 삼진을 잡아내면서 팬들과 팀에 환호를 이끌어냈다.[84] 그리고 9회 1사까지 범타로 처리한 뒤 우타인 대타 박석민이 들어서자 이형범과 교체되며, 내려갔다. 이 날, 권혁은 좋은 투구 내용으로 홀드도 기록했다.
그러나 뒤에 엄청난 반전이 있었는데, 남은 2아웃을 잡는 동안 무려 9실점이라는 충격적인 대역전패를 당했다.[85]
5월 26일, SK 와이번스전에 등판했다. 8회 2사 1루 상황에서 정진기를 땅볼로 처리하며 0.1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8회 팀이 역전하며 시즌 첫 승을 거뒀다.
5월 30일, 롯데 자이언츠전에 등판했다. 11회 1사 1루 상황에 등판해 병살타로 깔끔하게 위기를 막았다.[86] 0.2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11회말 허경민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며 팀의 승리투수가 되었다. 어느새 시즌 2승째를 거뒀다.
확실히 최근 페이스가 좋다.[87] 그리고 박치국의 최근 호투에도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한걸로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88]
6월 9일, NC 다이노스전에선 4회말 4-6 역전당한 상황에 최원준(1994)의 뒤를 이어 등판했다. 올라 와서 삼진 1개를 잡았으나, 이후 안타를 두 방 맞으며 선행주자 2명을 홈으로 불러들였고 아쉽게 강판당했다. 이후에 등판한 김강률도 난조를 보이면서 권혁의 자책점은 더 늘어난 채 경기가 끝났다. 이 날, 0.1이닝 2실점으로 ERA가 순식간에 9점대로 폭등했다.
시즌 초, 호투를 보이다가 최근 들어 갑자기 팔 스윙이나 릴리스 포인트 등 기존과 다른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 날 경기를 마지막으로 2군으로 내려가 재조정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7월 1일, 정상호 이교훈이 말소된 자리에 장승현과 함께 1군에 콜업되면서 다시 복귀했다.
7월 2일, 키움 히어로즈 전에서 7회초 7-7 동점 상황에 바로 등판했다. 그리고 서건창을 맞이해 아쉬운 3루타를 허용하면서 곧 바로 내려갔다.[89] 정상적인 권혁이라면 이 정도 공이 약간만 몰린 것은 쉽게 장타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얄짤없이 장타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씁쓸함과 안타까움만 느끼게 했다.
이후, 등판한 윤명준이 승계 주자를 마저 불러들이면서 팀은 역전을 당했고, 그대로 패전투수가 됐다.
최근 6타자를 상대하면서 1아웃 5피안타 3자책을 기록 중인데, 이 중 2루타, 3루타 등 장타만 2개다. 몸 상태도 그렇고 서서히 한계에 다다르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2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렇게 2군에선 아주 가끔 등판중인데, 감각 관리 차원으로 보인다. 2군 등판한 경기를 보면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90]
그러다 한달여가 지난 후인 8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전에 권휘, 장승현과 1군에 등록되면서, 1군에 깜짝 복귀했다.
그리고 당일 9:2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8회말 등판했고, 4명의 타자를 상대하면서 0.2이닝 1피안타 1볼넷 1삼진을 기록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경기 내용은 삼진, 볼넷, 안타 모두 기록했다.[91][92]
이 날 구속은 140km를 겨우 넘기거나 약간 못미쳤지만, 날카로운 코너 제구와 하이패스트볼, 슬라이더를 보여주면서 베테랑 투수다운 내용을 선보였다.
다만, 늘어난 투구수로인해 아쉽게 내려갔다.
다음 날인 8월 19일, 허리통증을 호소하며 다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93]
그리고 이 경기가 본인의 마지막 1군 등판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포수는 정상호.
팀은 3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서 정규시즌을 끝마쳤다.
두산은 준 플레이오프에서 LG 트윈스에 2승을 거두며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했으나, 여전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아 결국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그렇게 시즌이 끝난 후에는 본인 스스로 더 이상의 선수 생활 연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결국 파란만장했던 권혁의 19년 현역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기사 링크
3. 국가대표 경력
3.1. 2008 베이징 올림픽
2008 베이징 올림픽 |
|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2 | 0 | 1.2 | 0.00 | 0 | 0 | 0 | 0 | 1 | 1 | 0 | 0 | 2 |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2 | 0 | 2.2 | 0.00 | 0 | 0 | 0 | 0 | 2 | 0 | 0 | 0 | 3 |
경기 | 선발 | 이닝 | 방어율 | 승 | 패 | 홀드 | 세이브 | 피안타 | 실점 | 자책점 | 4구 | 삼진 | 상세 |
3 | 0 | 1.1 | 0.00 | 0 | 0 | 0 | 0 | 0 | 0 | 0 | 1 | 2 |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 총 3차례 발탁 되어 활약했다.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선 2경기 1.2이닝 1실점 2K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김경문호/2008년/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에서도 연달아 발탁되어 2.2이닝 무실점 3K로 좋은 모습을 선보였다. 이 활약을 토대로 올림픽 본선 명단에도 들게된다.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본선에서도 3경기 1.1이닝 무실점 2K로 활약했는데, 일본전에 나와 9회말 무사 2,3루의 위기 상황에서 아베 신노스케를 짧은 좌익수 뜬공으로 잡아내면서 실점을 막았다. [94]
전체적인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좌타 원 포인트 릴리프였다. 보직상 비중이 크진 않았지만, 나온 경기는 임무를 충실히 완수 했고 이때의 활약으로 병역면제[95]를 받았다.[96]
여담으로 2007년엔 대표팀에서 박찬호에게 코치를 받기도 했다. [97]
이어, 구대성의 공백을 매울 좌투수로 각광 받은적도 있다. [98]
2008 베이징 올림픽 명단 발표 당시 일화 [99]
2008 베이징 올림픽 활약 당시 기사 [100]
[1]
이때는 다른 선수들처럼 꽤 재능을 보였고, 야구도 잘하면서 무난했다고 한다.
[2]
#
[3]
권혁의 회고에 의하면 개인적인 사정과 경상공고 시절은 본인의 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권혁의 피지컬로 보면 상상이 가지 않는 스토리.
[4]
심지어 입단후에도 게속 자랐다.
[5]
고교야구계에 이미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었을 정도로 두각을 드러낸 우완 유망주였고 덕분에 연고팀 삼성의 1차 지명 유력 후보였다. 또 다른 유력 지명 후보로는 포철공고의 동료였던 화교 투수
유혜정도 있었다.
[6]
훗 날, 입단 후에도 게속 자랄 만큼 성장이 지속되었다.
[7]
https://www.joongang.co.kr/article/885612
[8]
이때 비하인드 스토리로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응용 감독이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인 덩치 크고 공 빠른 왼손 투수라 윤길현 대신 권혁을 1차 지명으로 뽑아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다는 말도 있다.
[9]
https://www.joongang.co.kr/article/885612
[10]
이 시절 대구-경북 지역 팜에는 지난 5년간 김진웅-배영수-이정호-윤길현으로 당시 우수한 전국구급 유망주들이 연달아 나오던 시기였다.
[11]
결국 삼성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2차 지명으로 나온 윤길현은 당시 신생팀 혜택으로 우선지명권을 갖고 있던
SK 와이번스에 지명된다.
[12]
삼성의 2002년 드래프트는 KBO 역사상 손에 꼽힐정도로 성공한 드래프트로 평가받는다. 1차지명 권혁 이외에도 최형우, 조동찬, 손주인, 안지만, 노병오 등을 동시에 픽했다.
[13]
강민호가 포철공고 후배인 동문이며, 같이 베이징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고 포철공고로 금의환향 했다.
[14]
https://sports.v.daum.net/v/20080802165808322
[15]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oid=003&aid=0002263631
[16]
수술로 시즌 아웃
[17]
2007년
[18]
2008년
[19]
2015시즌
[20]
계약금 1억 5,000만원, 연봉 2,000만원
[21]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1027724
[22]
프로 입단 후 첫 승은 2003년 8월 15일 불펜으로 등판해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도 수원 현대전이었다. 당시 선발로 나왔던
임창용이 3이닝 5실점 하며 무너지자 추격조로 등판해서는 3이닝 1K 무실점의 퍼펙트한 피칭을 보여주었고 그 사이 팀 타선이 7회 초에 기어코 역전을 시키고 경기 역시 최종 7:6으로 역전승 하면서 프로 데뷔 후 첫 승을 올리게 된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양 팀 투수들이 모두 흠씬 두들겨 맞는 와중에 어제의 기세를 이어 동점 상황에서 올라온 권혁은 1이닝 2실점으로 다시 역전을 내주면서 결국 8:10으로 지게 되었고 첫 승을 한지 바로 다음 날에 시즌 첫 패전을 떠안고 말았다.
[23]
정민태는 이 날 3회에 3점, 6회에 1점을 주긴 했었어도 7이닝 까지 4실점으로 버티고는 있었으나 타선이 도통 힘을 내주지 못하고 있었고, 4:1로 지고 있던 8회 초에도 등판하여 어떻게든 연승을 이어보고자 고군분투 했으나, 결국 8회에 삼성 타선에게 연속 안타를 잇따라 허용하면서 3실점을 더 한 채 7⅔이닝 10피안타(2피홈런) 3사사구 2탈삼진 7실점을 한 채 마운드를 내려갔다. 경기 또한 최종 8:3으로 삼성이 이기면서 정민태의 선발 연승 기록도 여기까지 였다.
[24]
정민태와 권혁은 12년 뒤인 2015년부터 한화에서 선수-코치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25]
2⅔이닝 5피안타(3피홈런) 4탈삼진 5실점
[26]
1⅔이닝 3피안타(1피홈런) 3볼넷 2탈삼진 3실점
[27]
패스트볼은 매 시즌 더 빨라져서 당시에 150km/h를 아주 쉽게 찍었지만, 여전히 제구 불안 문제는 남아 있었다. 심지어 6월 16일 두산전에서는 선발 등판하여 3⅔이닝 동안 5피안타(1피홈런) 8사사구 3실점이라는 도무지 답이 없는 피칭 기록을 남긴적도 있다. 이 당시 빠른 구속 못지 않게 구위도 좋아 탈삼진도 곧잘잡았지만 6월 중순까지 37⅔이닝을 소화하면서 피안타가 44개(피홈런 9개), 사사구가 무려 26개로 세부지표가 굉장히 좋지 못했다.
[28]
정현욱,
윤성환,
지승민,
안지만,
강영식 등
#
[29]
권혁 커리어 역사상 유일하게 던지지 못한 시즌
#
[30]
https://sports.news.naver.com/news?oid=119&aid=0000020472
[31]
지난 시즌
권오준은 너무 많이 던진탓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고,
오승환은 확고한 마무리라서 예외로 본다면 당시 삼성의 전반기때 확실한 셋업이 부족하긴 했다.
[32]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vod/index?id=13169&category=kbo&listType=total
[33]
https://m.news.nate.com/view/20070516n05547?sect=spo&list=rank&cate=interest
[34]
https://sports.chosun.com/news/news_o2.htm?name=/news/sports/200705/20070517/75q12002.htm
[35]
안지만은 2007년까지만 해도 선발과 불펜을 오갔고,
정현욱은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마치고 그해 후반기에야 선수단에 합류한다.
[36]
훗날 한화로 이적한 뒤 이를 다시 재현해내는데, 문제는 시즌 끝까지 이랬다.
[37]
지난 시즌보다 멀티이닝 투구는 다소 줄어들게 되었고, 철저히 1이닝 투구나 좌타 핵심 셋업으로 나서는 경기가 많아졌다.
[38]
상황에 따라
정현욱과 권혁의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일명 JKO펀치.
[39]
7월 8일엔 당시 엄청난 기세였던 롯데를 상대로 마무리로 등판해 천금같은 2이닝 세이브를 따낸 경기가 백미.
[40]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vod/index?category=kbo&tab=&listType=keyword&date=&gameId=&teamCode=&playerId=&keyword=%EA%B6%8C%ED%98%81&id=7245&page=36
[41]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vod/index?category=kbo&tab=&listType=keyword&date=&gameId=&teamCode=&playerId=&keyword=%EA%B6%8C%ED%98%81&id=16252&page=36
[42]
특히 삼진 개수는 유지하면서, 사사구 개수가 예전보다 월등히 줄어들었다.
[43]
문자 그대로 그들이 올라서면 안정권에 접어들 수 있게 된다는 것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44]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의 패러디.
[45]
스트레이트 볼넷
[46]
등판을 하지 못한 것 자체가 치명적이었다. 팀이 3, 4차전 모두 7명의 투수를 쏟아부었기에 4, 5차전에서 투수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권혁은 중심 불펜이였으므로 팀에겐 더욱 타격이 컸다.
[47]
2010 한국시리즈는 역대 최악의 경기력이라 불릴 정도로 SK 와이번스가 원사이드하게 우승한 한국시리즈라서 대체적으로 삼성 선수들이 다 부진하긴 했다.
[48]
스트레이트 볼넷
[49]
오승환이
김재현에게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결승점을 득점한 주자를 내보낸 권혁이 패전투수가 되었다.
[50]
그 사이 감독이 류중일 감독으로 바뀌면서 선동열 감독시절때와 다르게 투수 운용법도 좀 바뀌게 된 영향도 있어 보인다.
[51]
물론 예전과 달리 선발 투수들의 소화 이닝이 6이닝 이상까지 올라간 영향도 있고, 8회에는 당시 절정이던
힙합전사, 9회에는
인간투석기이 풀가동 중인 점을 감안하면 이는 6~7회의 아웃카운트 4~6개를
정현욱,
권오준과 나눠 소화하게 되기 때문에 팀 불펜이 풍족한 영향도 있다. 이러한 여파로
권오준만 해도 경기당 1이닝이 되지 않는다.
[52]
국가대표팀이나 간혹 팀 사정상
[53]
불과 3~4년 사이엔 권혁이 그랬던걸 감안하면 상황이 뒤바뀌었다.
[54]
2011시즌 권혁의 성적은 1승 3패인데 3패가 모두 한화전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삼성은 이 시즌에 유일하게 한화에게 상대전적에서 뒤졌다. 한화전을 제외하면 권혁의 시즌 성적은 확실히 이상적일정도로 좋아지긴 했다. 1승은 7월 19일 SK전.
[55]
2004년부터 유독 두산을 상대로 강한 모습이긴 했다. 2007년
민병헌에게 안타를 허용하던 면을 제외하면 사실상 두산상대로 상당한 강점을 나타냈다.
[56]
상세하게 따지면, 1차전에서는 1타자 상대 1피안타, 3차전에서는 팀이 1: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SK의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고 4차전에서도 1타자 상대 1볼넷을 기록하고 내려갔다.
[57]
기회가 적었다던 2013년에도 50경기 넘게 출전했으나 2014년에는 38경기로 급감했다.
[58]
경기당 1이닝이 넘는 이닝을 알 수 있듯이, 온전히 1이닝 이상을 책임지던 핵심 셋업이였다.
[59]
권혁이 삼성을 떠난 후, 2018년부터 삼성의 47번은
강민호가 사용한다.
[60]
당시 소문에 의하면 한화외에 모 지방구단과 모 수도권 구단이 권혁 영입을 위해 더 큰 돈을 제안했다는 썰도 돌았다. 권혁의 경우 시장에 나오자마자 비교적 빨리 계약한 편인데, 기회를 가장 주겠다는 팀과 또 그럴만한 팀을 빠르게 택한것으로 보인다.
[61]
공교롭게도 두 선수의 등번호가 동일하기 때문에, 한화 관련 커뮤니티에선
주황색
잉어킹이
푸른색
갸라도스로 진화했다는 식의
드립이 인기를 끌었다.
[62]
선수 본인도 계약을 체결하며 "김성근 감독님과 야구하고 싶었다"라며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63]
의외로
김성근 감독은 FA 영입과 별 인연이 없었다. FA 제도 시행 후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맡았으나 두 구단 모두 김성근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 외부 FA를 잡아주지 않았고, 오히려
양준혁(LG),
이진영(SK) 등 내부 FA를 타팀에 빼앗기는 등 김성근은 감독 생활 하면서 FA의 재미를 거의 맛보지 못했다.
[64]
말도 안되게 등판해서 무작위하게 던지지 않고 정상적인 선에서 던졌으면 진짜 가능했다. 시즌 초반에는 그만큼 구위가 좋았는데, 가면 갈수록 마구잡이식 등판으로 개인 성적 관리가 전혀 불가능했다.
[65]
오히려 2015년보다 심각한 것이, 시즌 끝까지 이 페이스였다면 순수 불펜 126이닝 페이스였다.
[66]
오승환은 전문 마무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그런 오승환조차 최근 잦은 등판으로 인해 혹사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67]
당연히 오승환도 정상적인 불펜투수의 이닝수보다는 많이 던졌다 [보통]다만 이 혹사에 가려진 것뿐이다.
[68]
특히 16~17년도 연속 80이닝 이상 소화 단,권혁은 2년동안 200이닝 이상 소화했고 김진성은 3년 동안 200이닝을 넘게 소화했고 권혁이 올해 30이닝 남짓만 소화했음에도 김진성하고 1.1 이닝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69]
훗날엔 김성근 감독의 이슈가 시들해지자 김경문 감독의 이런 엄청난 불펜 혹사와 두산 시절에 있었던
KILL 라인도 주목을 받게 된다.
[70]
NC 다이노스와
kt wiz의 리그 참가로 인해 10구단 체제로 개편되면서 2014년 128경기에서 2015년에는 144경기로 늘어났다.
[71]
2016년 8월 셋째주 한 주동안 KIA
김광수와
박준표, 롯데
이정민이 4연투, 한화
심수창이 5연투를 했다.
[72]
그러나 사실 알고보면 김성근 재임 당시 이 팀의 연봉 총액이 1위였다. 게다가 모기업이 튼튼하지 못해 이는 몰락의 단초가 된다.
[73]
이 날 현장 팬들의 환호성은 마치 한국시리즈 우승한것처럼 어마어마 했다.
[74]
큰 경기 경험이 워낙 많아서 권혁만한 베테랑을 포스트시즌에 안넣기는 힘들었을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복귀 이후, 구위도 꽤 올라온걸 보여주었다.
[75]
실제 이 시즌이 끝나고 많은 베테랑들이 방출 및 전력 외 판정을 받았으며, 한화의 프렌차이즈였던 송창식, 박정진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혁 입장에선 몸 상태가 언제까지 유지 될지 모르는 시간이 절실한 상황에서 주변의 이런 분위기와 구단의 기조상 이대로 은퇴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을것으로 보인다.
[76]
사실 송은범 사례는 아주 특이 케이스다. 사실상 커리어가 다 끝나가던 선수가 우연찮게 투심의 비중을 높이면서 아예 다른 투수가 된 경우라 확실히 일반적이진 않다.
[77]
2018시즌 한화의 우완 불펜은 좌완에 비해 상당히 넉넉했다. 젊은 선수들도 많았다.
[78]
훗날 되돌아보면 권혁을 포함해 외부에서 온 베테랑들인 조인성, 배영수, 심수창, 송은범, 이용규 등 상당수가 한화에서 방출되거나 떠났다.
[79]
사실상 본인도 커리어가 진짜 얼마 안남았다는걸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80]
함덕주를 제외하면 좌완 불펜이 사실상 전무한 상태였다.
이현승은 2018 시즌 부상으로 2019년에는 시즌 중반까지 콜업되지 못했다.
[81]
인스타그램과 네이버 블로그를 보면 권혁 때문에 한화에서 두산으로
팀세탁했다는 사람들이 보인다.
[82]
권혁은 2020 시즌에서는 한국 나이 기준으로 벌써 38세가 되었다. 서른 중반에야 1군에서 활약하며 비교적 싱싱했던
박정진과 같은 선수가 아니라면 이 나이면 대부분은 은퇴를 선택하니 이상할 건 없다.
[83]
셋포지션에 들어갔다가 몸 균형을 유지해주고 있던 왼발이 미끄러지면서 공을 아예 던지지 못했다.
[84]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vod/index?id=663222&category=kbo&gameId=20200521NCOB02020&date=20200521&listType=game
[85]
이 날은 권혁의 공이 좋았는데, 권혁으로 마무리 하라는 팬들의 의견이 주를 이뤘는데, 결과론적으론 권혁이 마무리 하는 게 나았을 법 했다
[86]
최주환의 호수비도 좋았다.
[87]
http://osen.mt.co.kr/article/G1111361207
[88]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3796232
[89]
지난 시즌부터 키움에게 유독 약한 모습인데, 특히
서건창한테 약하다.
[90]
그래도 2군에서 삼진율은 상당히 좋다.
[91]
https://sports.news.naver.com/kbaseball/vod/index?category=kbo&tab=&listType=game&date=20200818&gameId=20200818OBLT02020&teamCode=&playerId=&keyword=&id=700942&page=2
[92]
3:00:50 부터
[93]
http://osen.mt.co.kr/article/G111141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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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포인트 릴리프로의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95]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96]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8/20080818014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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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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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해 경기 수의 절반 정도의 이닝수를 감독이 승리를 위해 투수 운용을 했을때의 적정 이닝수로 본다162경기면 81이닝 144경기에서는 72이닝이 기준인데 다만 요즘에는 살려조 등의 여파로 인해 팬들의 기준이 엄격해져 60이닝 중후반대가 적정 이닝수로 인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