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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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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시 CI.svg 경주시의 행정구역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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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사로국
辰韓 斯盧國
BC 2c
경주
慶州
935
안동대도독부
安東大都督府
940
경주
慶州
1012
경주
慶州
1204
계림부
鷄林府
1392
경상북도 경주시
慶州市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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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천년과 함께한 경주

경주는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다. 고구려 백제가 계속 수도를 옮겼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이라 불렸다. 신라 전성기 때 서라벌의 호수는 17만 8936호[1]로, 최대한으로 추산해보면 대략 90만의 인구가 나온다. 세계 최대의 양대 도시인 장안 바그다드의 인구가 100만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은 숫자인데[2], 그래서 오늘날의 수도권처럼 도시를 넘어선 근교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설, 골품제의 신분 유지를 이유로 호적만 경주에 두고 지방으로 이주한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설, 호가 아닌 구(口)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35만여 명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설, 당대 농업 개간 능력 고평가하는 관점에서 수도 경주의 면적을 다르게 계산해서 그 정도가 나온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가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을 감안하면 90만 인구는 경주와 경주 일대의 인구를 포함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수십만 이상의 인구 규모는 그 당시로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치임이 틀림없다. 일본 헤이안 시대 수도 헤이안쿄(지금의 교토)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살았는데 당시 교토와 경주의 면적이 비슷하고 신라와 일본의 체급 또한 엇비슷하기 때문에 경주 인구 100만설은 더욱 의문이 간다.

신라가 망한 이후 고려 시대에도 한동안은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신라 시대의 경주 시가지와는 지리적으로 좀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의 경주 시가지 중심은 현대 경주 시가지의 남동쪽인데 주로 논밭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황룡사 등의 유적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민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에 땅을 파헤치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건설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파일:attachment/gyeongju_old.jpg
신라시대 경주 시가지의 모형[3]

도로와 주택들은 도시계획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앞 부분에 경주 월성이 보인다. 단, 월성 안의 건물 배치는 상상일 뿐이다. 월성 북쪽에는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그 동쪽에 황룡사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가 분황사다. 임해전에 붙어있는 안압지 등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통일신라시대가 기준인 것 같다. 또, 월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월성 남북쪽으로는 너비 23m의 주작대로가 있고, 그 북쪽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인 전랑지(대궁지)다. 다만 이 곳은 현대 경주의 시가지에 포함되어 버렸고[4] 발굴과 연구가 미흡해서 정확한 이름은 불명이다. 아직까지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2. 시대별 역사

2.1. 선사 시대

경주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를 현재로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주변지역의 정황상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지금의 경주시 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신석기 시대의 흔적은 황성동, 내남면에서 약간의 토기 조각 정도만 나와서, 사람이 살긴 살았지만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경주분지에 사람이 많이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7세기로 그 때부터 만들어진 지석묘로 알 수 있지만 이들은 초기 신라( 사로국)의 주도 세력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다 기원전 3세기 말 ~ 2세기 초 즈음 서북한 일대의 고조선계 집단이 들어와 자리하고, 다시 기원전 2세기 말~1세기경 교과서에 나오는 세형 동검을 비롯해 초기 철기를 보유한 집단이 외부에서 들어온다.

아무래도 전자는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크게 패배해 요동에서 평양 일대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을 때 발생한 피난민 집단이고, 후자는 위만의 찬탈 당시 위만에게 동의하지 않았던 한씨 조선인들 및 위만조선이 망했을 때 내려온 위만조선인들로 해석된다. 또한 2세기 초중반에는 또 다시 낙랑계 조선인들이 내려오며, 이들이 2세기 후반~3세기 초반경 다른 조선계 집단을 아우르며 그 위에 서는 위계 체제를 확고히 하고 주도 집단으로 부상한다.[5]

2.2.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천 년 간 신라 수도였고, 왕경 일대가 서라벌, 금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자세한 사항은 서라벌 문서 참조.

한편 안강읍 일대는 신라 초기 때 음즙벌국이라는 소국이 있었다가 파사 이사금에 의해 정복되어 신라 소속의 비화현이 되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일대는 모혜현, 북구 신광면 일대는 동잉음현이라는 고을이 있었다.

6세기 중반 진흥왕의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았던 마한 소국 중 하나의 근거지인 충주 일대가 신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는데, 진흥왕이 이 일대를 국원으로 명명하면서 옛 가야인들을 비롯한 서라벌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사민하게 된다.

이후 삼국통일전쟁 기간을 거쳐 통일신라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인들이 가장 많이 섞여서 살게 된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보덕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고구려인을 서라벌에 정착시켰고, 백제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역시 적지 않은 백제인을 서라벌에 정착시켰다. 또한 삼국 출신들로 구성된 중앙군 9서당을 서라벌에 설치하여 구삼국의 인력들을 수도 방비에 동원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무래도 왕경인으로서 대우받게 된 정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통일신라 지방민으로 편입된 고구려인, 백제인과는 달리 전원 고구려인, 백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순탄하게 신라인으로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비화현, 모혜현, 동잉음현은 각각 안강현, 기계현, 신광현으로 개편되었다. 다만 신라의 이러한 천년 영광은 견훤의 서라벌 함락으로 큰 상처를 입으면서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하게 된다.

견훤은 서라벌을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인 뒤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다. 경주는 폐허가 되었고, 장인 및 궁녀 등등 포함하여 많은 이들을 포로로 잡아 수도 전주로 옮기게 되는데, 적어도 경주가 이런 식으로 조직적 약탈을 통해 타 지역으로 사민당한 건 이 시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책적인 이주로 따지면 전주가 충주에 이어 두번째였지만, 6세기 충주 사민은 진흥왕이 국가 발전을 위해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한 것이고 10세기 전주 사민은 견훤이 순전히 자국을 강화하고 타국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라 같은 선상에서 비교는 어렵다.

2.3. 고려 시대

고려 시대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경주
(慶州)
(천수 18)
안동대도독부
(安東大都督府)
(940)
동경
(東京)
(987)
경주
(慶州)
(1012)
동경
(東京)
(1030)
경주
(慶州)
(1204)
동경
(東京)
(1219)
계림부
(鷄林府)
(1308)

주로 크게는 경주동경이라고 불렸다. 그 외에도 안동[6], 계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전 신라시대와 비교하여 면적이 넓어졌다. 지금의 외동읍에 해당하는 임관군, 문무대왕면에 해당하는 약장현을 통합하였다.

935년(천수 18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이후 태조 왕건에 의해 경주(慶州)라고 부르고 경순왕 김부를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이후 987년(성종 6년) 개경( 개성시), 서경( 평양시)과 함께 고려 3경을 이루고 왕이 가끔 행궁에도 방문했을 정도. 그러나 이후 1012년(현종 3년) 현종에 의해 경주로 격하되었지만 곧 1030년(현종 21년) 다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견훤의 서라벌 함락과 이후 경순왕의 개경 상경으로 주민이 많이 유출된 이래로, 적어도 신라 시대에 비해선 인구는 크게 줄었던 게 분명하다.

흔히 남경의 설치로 동경이 쇠락했다는 주장이 만연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경주가 동경에서 격하된 주요 이유는 반란이나 관제의 변경 때문이지 남경의 성장 때문이 아니다. 남경의 설치 이후에도 동경으로서의 위상은 거의 유지하였고 1308년 격하될 때는 남경도 같이 격하되었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새벽에 작은 누(樓) 머리에 일어나서, 발[箔]을 걷고 하늘을 쳐다본다. 누 아래는 곧 계림이니, 기괴한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고. 늙은 나무에 연기가 부슬부슬, 일만호(一萬戶)에 비꼈네. 흰 구름은 동쪽 산에 날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달린다. 우뚝 솟은 황금절들, 서로 바라뵈며 아침 햇빛 따사롭구나. 반월성(半月城) 가운데 빽빽하게 서 있는, 꽃과 대[竹] 이제는 주인이 가고 없네.
(중략)
멀리 조망하려고 서루(西樓)에 오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 남쪽 트인 곳에 인가가 조밀하며,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일세. 금찰(金刹)들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열에 아홉은 되는 듯. 성적(聖跡)이 세속에 섞여 있어서, 지나가는 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도다. 큰 저택과 아름다운 절들이, 전란(戰亂) 뒤엔 들밭을 이루었구나.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 경상도 경주부 백률사

정지상은 고려 중기 김부식과 동시대 사람이고 이후 기록은 고려 말 14세기 문인 박효수의 시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신라의 왕궁이었던 경주 월성은 무너져 대나무이 무성해졌지만 시가지는 거대했고 황금빛 사찰이 빛나 지나가는 사람이 구경하기 바쁜 화려한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몽골 전쟁으로 많은 큰 건물들이 폐허로 남은 상황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204년( 신종 7년) 무신정권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 다시 경주로 강등되었다.[7] 그러나 1219년( 고종 6년) 다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308년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를 제후국 체재로 개편하라는 원의 압박으로 인해 계림부(鷄林府)로 격하되었다. 당시에 고려의 경(京) 다음으로 고려의 최상급 행정기관인 목(牧)도 제후국 체제로 개편되면서 없어지는 판국이다 보니 부 정도만 해도 나름 위상은 있는 편이었다.

흔히 무신정권 기간에 신라부흥운동으로 인해 경주는 서울에 밀려 3경(京)의 위상을 잃었다고 하는데,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이 일어난지 겨우 15년이 지나 다시 동경이라 불리며 원간섭기에 황제국만 가질 수 있었던 행정구역이 제후국의 위치에 걸맞도록 격하되기 전까지 부수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2.4. 조선 시대

조선 시대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계림부
(鷄林府)
(1392)
경주부
(慶州府)
(1394)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 고려말의 계림부(鷄林府) 지명이 이어지다가 1394년 경주부(府)로 개칭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부(府)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부목군현 중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조선 전기에는 전국에 6개만 존재했는데, 고려시대 4경인 개성, 한성, 평양, 경주에다가 조선 왕실인 전주 이씨의 어향인 전주, 함흥이 부로 승격되면서 조선 전기에는 단 6개의 부가 존재했다.[8]

조선시대에도 전전조 신라의 고도, 경상도의 수부 도시, 유교와 양반 문화의 근거지로서 경주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18세기 후반만 해도 인구 약 7만 2천명으로 그 당시 경상도 최대도시였다. 다만 조선 건국 직후에 잠시 경주에 소재했던 경상감영이 상주목으로 옮겨가고, 조선 후기에는 대구도호부가 경상감영 소재지가 되면서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고려시대와 비교하여 지금의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에 해당하는 안강현, 지금의 포항시 기계면에 해당하는 기계현, 포항시 신광면에 해당하는 신광현, 경산시 자인면에 해당하는 자인현 4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조선시대에 특기할 사항으로는 이언적의 본향으로 지금의 양동마을로까지 이어지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흔히 경주에 널려 있는 불교 유적 때문에 경주 = 불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교에서도 꽤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학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이언적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는 양반 문화가 발전한 지역이었다.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는 증거로 1909년 호구 조사의 결과에 있는데, 당시 경주 내에서 양반이 2,599호로 전국에서 양반이 제일 많았다. 인구 비율로 보나 전체 인구로 보나 대도시 중에서는 경주보다 양반이 많은 곳은 없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사상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동학의 탄생지라는 점.

18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이 되었다.

1906년 기계면과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죽장면이 청하군으로, 동해면이 장기군으로[9], 외남면(현 울주군 두동면, 두서면)이 울산군에 편입되었다.[10]

2.5.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이후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경주군
(慶州郡, 1914)
경주시
(1955)
월성군
(月城郡, 1955)
경주시
경주군
(1989)
경주시
(1995)

1914년 양남면과 양북면이 환원되었다. 1931년 경주면이 경주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7년 양북면 일부가 감포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 초기에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었으나 점차적으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가 성장함으로 인해 경주는 전국 대도시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경상도 내에서의 주요 도시로만 기능했다.

2.6. 대한민국


1950년 6.25 전쟁 초기부터 끝까지 조선인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 방어선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사수된 덕분이다. 낙동강 전선이 최대로 밀렸을 때, 경주 북쪽 안강까지 내려왔으나 결국 경주는 방어선 안에서 지켜졌다. 그래서 경주에는 국보급 문화재들이 전란에 휩쓸리거나 파괴당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되면서 인근 포항, 울산보다 산업화 면에서 뒤쳐지게 되었다. 항구도시 포항, 울산보다 입지가 밀리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문화재 보호 때문에 거의 도시 전체가 개발이 제한되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동안 경부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혜택을 받지 못 했고, 관광을 제외하면 성장 동력이 없었다. 포항, 울산, 부산, 대구로 인구가 많이 유출되었다. 현재 개발이 진행되어 아파트가 들어서는 곳, 공장 위치 등등 산업 인프라의 절대다수는 다른 시와의 경계지역에 가까운 읍면지역 및 그와 맞닿은 행정동 일대에 조성되어 있다.


[1] 삼국유사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 [2] 학계는 통일신라의 전체 인구를 최대 400만 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 400만 명 중 90만 명에 가까운 숫자가 경주와 그 근처에서 거주했다는 것은 역시 전근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치이다. 일단 한 곳에 집중적으로 밀집된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살리려면 그만한 엄청난 규모의 인근 곡창지대와 도로, 각종 시설 등의 인프라가 필요한 터인데 경주와 그 일대에서 이러한 인프라에 관련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된 예는 매우 드물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라는 높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굶주리지 않고 살았는지 의문이다. 비슷한 대규모 도시인 고대 로마 등지에서 아직도 무수한 수도시설과 도로 등의 거주편의시설이 남아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의문이 가시지 않는 사실. [3] 이 모형은 경주타워에 있다 [4] 현재에도 거주지 및 경주고등학교, 알천남로 일대의 주유소와 이런저런 철물점 등등이 전랑지 바로 옆에 붙어있다. 더 동쪽에는 경주소방서 본부까지 1996년 이전해 현재까지 이어져온다. [5]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고조선 유민들이 이들일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하겠다. 이들이 삼국사기에서 등장하는 6촌에 속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6촌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신라 건국 신화다. [6] 고려 태조가 고창 전투 이후 작금의 경북 안동시가 생겨났다. 다만, 경북 안동은 경종 4년(980) 영가군으로, 다시 995년에 길주로 고쳐졌다가 고려 말 공민왕 치세에 이르러서야 다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기에 의외로 겹치는 지명은 아니었다. 더욱이 안동(安東)은 한자문화권에서는 "동쪽을 평안케 했다"라는 보통명사에 가까운 편이었다. [7] 강등된 것도 모자라 경상도의 이름도 바꿔버렸다. 경상도의 경(慶)을 삭제시켜 아예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8] 조선 초기에는 4개의 부가 있었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의주, 광주가 추가되었다. [9] 편입 직후 양북면과 양남면으로 분리. [10] 환원된 양남면과 양북면을 제외하더라도 무려 면적상으로는 현재 포항시 북구의 과반, 울주군에서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들이 떨어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큰 면적을 자랑하는 경주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그만큼 주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조선시대 행정구역 상으로는 큰 고을일수록 관할지가 넓었기 때문. [11] 신라의 도성 이름인 ' 경주 월성'에서 따온 것이다. 대구-달성, 수원-화성과 비슷한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