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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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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모델 P-MOD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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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P-MODEL 시기의 모습 (1992년) 왼쪽부터 : 코토부키 히카루, 히라사와 스스무, 아키야마 카츠히코, 후지이 야스치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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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ODEL 결성 당시의 모습 (1979년) 왼쪽부터 : 타이나카 사다토시, 아키야마 카츠히코, 히라사와 스스무, 타나카 야스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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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P-MODEL 시기의 모습 (1999년) 왼쪽부터 : 코니시 켄지, 히라사와 스스무, 후쿠마 하지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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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활동 형태 핵(核)P-MODEL (2018년) 히라사와 스스무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결성 | |
1979년 1월 1일 | |
도쿄도 카츠시카구 카메아리 | |
데뷔 |
1979년
7월 25일 데뷔일로부터 [dday(1979-07-25)]일 | [age(1979-07-25)]주년 |
싱글 | |
음반 | |
장르 | 테크노 팝, 포스트 펑크, 뉴 웨이브, 일렉트로닉 뮤직, 얼터너티브 록 |
레이블 |
워너 파이오니아 (1979~1981) 재팬 레코드 (1982~1984) 알파 레코드/EDGE (현 소니 뮤직 솔루션즈) (1985~1988) POLYDOR (현 유니버설 뮤직 재팬) (1992~1993) DIW/SYUN (1994~1995) 일본 컬럼비아 (1995) 일본 컬럼비아/TESLAKITE (1996~1999) 케이오스 유니온/TESLAKITE (1999~) |
링크[1] | | | [공식] [라이브] | |
[clearfix]
1. 개요
1979년 결성되어 2000년 활동을 중지한 일본의 테크노 팝 밴드.2004년 시동한 히라사와 스스무의 솔로 프로젝트 '핵(核)P-MODEL'에 대해서도 서술한다.
2. 역대 멤버
- 미우라 슌이치 (三浦 俊一)
- 요코가와 타다히코 (横川 理彦)
- 1957년 1월 29일 돗토리현 돗토리시 출생. 베이스, 바이올린 담당.
- P-MODEL 입단 이전엔 개정P의 코니시 켄지와 같은 '4-D'의 멤버였으며 P-MODEL 매니저에게 섭외되어 입단하게 되었다.
- 기본적인 포지션은 베이스지만 보컬과 작곡 능력도 출중한 멀티 플레이어. 바이올린 연주까지 가능해 앨범 'KARKADOR'의 바이올린 사운드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 미우라와 같이 밴드 활동이 힘에 부쳐 'KARKADOR' 발매 2개월 만인 1985년 12월, P-MODEL을 탈퇴한다.
- P-MODEL 탈퇴 이후로도 4-D로서의 활동이나 솔로 음반 발매, 영화 OST 제작 등 음악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 아라키 야스히로 (荒木 康弘)
- 1959년 1월 22일 니가타현 카시와자키시 출생. 드럼, 퍼커션 담당.
- 1985년 1월 타이나카를 대신해 들어온 드러머. 본래 '알레르기'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면서 1984년 서포트&퍼커션 담당으로 들어왔는데, 알레르기가 해체되고 타이나카가 탈퇴하자 그대로 타이나카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 밴드 내에선 '아-쨩'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음악을 직업으로 삼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부모님에겐 직장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활동해왔다. 대충 취미로 직장인 밴드나 하는 줄 알고 계셨다고. 결국 들켜서 1987년 3월에 P-MODEL을 탈퇴한 이후에는 음악 활동을 접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기 시작했다.
- 그렇게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다시 음악 활동을 재개했으며, 2012년 히라사와의 PHONON 2555 라이브에 게스트로 참가해 팀파니를 맡기도 하였다.
- 타카하시 요시카즈 (高橋 芳一) | |
- 1961년 8월 2일 도쿄도 출생. 키보드, System 담당.
- 입단 당시 키보드는 칠 줄 알았지만, 스테이지에서는 베이스만 쳐 봤던 상태였다. P-MODEL 이전에는 'ROOM'이라는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를 맡고 있었다고.
- 다만 P-MODEL 내에서의 역할은 사실 키보디스트보다는 사운드 엔지니어에 가까웠다고 한다. 포지션 중 'System'은 바로 이러한 역할 때문.
- 1991년부터 'UTS(Under Techno System)'이라는 솔로 프로젝트 활동을 하면서 나카노 테루오, 아키야마 카츠히코 등 前 P-MODEL 멤버들과 협업하고 있다.
- 후지이 야스치카 (藤井 ヤスチカ)
- 코니시 켄지 (小西 健司)
- 1955년 10월 20일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출생. 키보드, System-2, 베이스 담당.
- 본래 4-D의 멤버로 80년대부터 히라사와와 친해 서로 음악의 견문을 넓혀주는 사이였다. 95년 개정 P-MODEL의 멤버로 참가. 인터넷으로 후쿠마를 새 멤버로 헌팅했다고 한다.
- 무대에서 VR이나 파워 글러브를 사용하는 등 마치 사이비 교주같은 포스를 풍기는 것이 특징. 보컬이 특이하여 히라사와와 듀엣으로 부르거나 단독으로 부른 곡도 꽤 있다.
- 1999년에는 히라사와 스스무, 독일의 '한스 조어킴 로디우스'와 합작한 디지털 싱글 ' Drive'를 발매하였다.
- P-MODEL 해체 이후 4-D로 돌아가 계속 활동중. 히라사와가 종종 레코딩에 참여한다고 한다. 헤어스타일은 스킨헤드에서 모히칸으로 변경.
2.1. 변천사
초기 P-MODEL(1979~1980) | |||
히라사와 스스무 | 아키야마 카츠히코 | 타나카 야스미 | 타이나카 사다토시 |
탈 테크노 선언 이후(1981~198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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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사와 스스무 | 키쿠치 타츠야 | 타나카 야스미 | 타이나카 사다토시 |
ANOTHER GAME 발매 시점(19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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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b2726> 히라사와 스스무 | 키쿠치 타츠야 | 미우라 슌이치 | 타이나카 사다토시 |
KARKADOR 발매 시점(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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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사와 스스무 | 요코가와 타다히코 | 미우라 슌이치 | 아라키 야스히로 |
ONE PATTERN 발매 시점(198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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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719FA9> 히라사와 스스무 | 나카노 테루오 | 타카하시 요시카즈 | 아라키 야스히로 |
동결 직전 P-MODEL(1987~1988) | |||
히라사와 스스무 | 나카노 테루오 | 코토부키 히카루 | 타이나카 사다토시 |
해동기 P-MODEL(1991~199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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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사와 스스무 | 아키야마 카츠히코 | 코토부키 히카루 | 후지이 야스치카 |
개정기 P-MODEL(1994~2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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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사와 스스무 | 후쿠마 하지메 | 코니시 켄지 | 카미료 와타루 |
핵(核)P-MODEL(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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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사와 스스무 |
3. 역사
3.1. 전신 맨드레이크 (1973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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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레이크 시절의 히라사와 스스무. |
- 1973년, 히라사와 스스무와 아베 후미야스, 그리고 그의 섭외로 온 타나카 야스미, 타이나카 사다토시가 모이며 하드/헤비메탈 록 밴드 맨드레이크(マンドレイク, MANDRAKE)가 결성되었다. 결성 당시엔 타이나카를 제외한 전원이 기타를 원해 기타 연주 배틀을 통해 포지션을 결정했다고 한다.
- 결성 초기엔 블랙 사바스의 곡들을 커버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갖춘 하드 록 밴드였으나 나중에 아베 후미야스가 바이올린을 가지고 오면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 전향, 착란의 문(錯乱の扉)[5]을 시작으로 오리지널 곡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 그러던 어느 날, 아베 후미야스가 돌연 잠적해버리고 만다. 멤버 구성에 공석이 생겨버린 탓에 히라사와 스스무가 억지로 보컬을 맡게 되었고, 타나카 야스미가 키보드를, 공석이 된 베이시스트는 히라사와의 절친이었던 세키 히로미가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 이후 적극적으로 라이브를 해왔지만 대부분 다른 밴드와 같이 공연을 한 경우였고 단독 공연을 열 땐 관객이 3명 남짓 오는 등 인지도가 한참 부족했다.[6] 참고로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공연에 따라다니며 호응해준 관객이 바로 아키야마 카츠히코.
- 세키 히로미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 니가타로 내려갔고, 리허설이나 라이브 때마다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 탈퇴한다. 세키의 후임으로는 프로그레시브 밴드 '破天荒'의 베이스였고 '新●月'의 멤버들과도 친분이 있었던 아쿠츠 토오루가 들어온다.
- 한편 멤버들은 섹스 피스톨즈를 위시로 한 펑크 록 붐을 바라보면서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고,[7] 때마침 서양에서 태동하던 뉴 웨이브를 받아들여 기존의 대작주의에서 벗어난 전자기기에서 날법한 짧은 전자음과 심플하고 빠른 템포의 뉴 웨이브, 펑크 록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
- 이리하여 맨드레이크는 결국 1978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를 맞이하게 되었다. 12월에 열린 마지막 라이브에서는 초반엔 프로그레시브 음악 위주로 후반엔 뉴 웨이브 음악을 연주하는 세트리스트를 통해 새로 결성될 밴드의 스타일을 암시, 이 라이브의 연출에는 맨드레이크의 오랜 팬이었던 아키야마 카츠히코가 참여하기도 했다.
- 이후 프로그레시브 록에 미련이 남아있던 아쿠츠 토오루는 떠나고, 1979년 1월 1일 도쿄 카메아리에서 히라사와 스스무를 중심으로 맨드레이크의 前 멤버였던 타나카 야스미와 타이나카 사다토시, 그리고 아키야마 카츠히코를 새 멤버로 맞아 P-MODEL이 결성되었다.
3.2. 초기 P-MODEL (1979 - 1981)
- 밴드의 이름을 알린 건 같은 해 XTC와 밴 헤일런의 일본 투어에서 오프닝 밴드를 맡은 것이었다. 이들을 따라다니면서 부도칸 등지에서 공연을 했으며 이 공연이 반응이 좋아 당시 플라스틱스의 키보디스트였던 사쿠마 마사히데와의 공동 프로듀싱으로 7월에 싱글 『 미술관에서 만난 사람이지(美術館であった人だろ)』를 발매, 8월에 앨범 IN A MODEL ROOM을 발매하면서 동시대 히카슈, 플라스틱스와 함께 YMO로 인해 촉발된 일본 테크노 열풍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밴드로 큰 인기를 끌게 된다.
- 각종 방송이나 대학 축제에서 활약했으며 1980년부터는 처음으로 자체적인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다. 다만, 밴드의 인기와는 별개로 멤버들의 생계는 여전히 좋지 못해 다들 본업을 유지하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 그때의 빈곤함이나 밴드를 깎아내리려는 갖가지 루머에 시달린 탓에 MC 도중 울분을 토한 적도 있다. #
- 1980년 5월, 일본 내 테크노 음악이 양산화되고 과열됐다고 판단한 히라사와와 타나카는 '탈 테크노'를 선언. 이후 P-MODEL의 음악 스타일이나 공연 컨셉을 대대적으로 변경하게 되었다.[8] 이 과정에서 아키야마 카츠히코와 밴드의 방향을 놓고 갈등이 생겨버렸고 결국 퇴출당한다.
- 1981년 3월, P-MODEL은 기존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앨범인 Potpourri를 발매하였다. 앨범 녹음은 히라사와가 베이스까지 담당하였고, 라이브에서는 히라사와가 일하던 야마하 신디사이저 교실의 수강생 키쿠치 타츠야가 객원으로 참가해 나중엔 정식 멤버가 된다.
3.3. 중기 P-MODEL (1982 - 1988)
- 스타일의 전격적인 변화와 P-MODEL의 인기 멤버였던 아키야마의 탈퇴의 여파로 팬들이 잔뜩 떨어져 나가는 사태가 발생한다. 묵묵히 새 앨범 발매와 라이브, 방송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조금씩 회복하긴 하지만 히라사와의 중요한 파트너였던 타나카 야스미까지 아이디어 고갈을 이유로 탈퇴하면서 버블로 대표되는 일본의 문화적, 경제적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밴드도, 히라사와 개인적으로도 큰 변화와 고뇌를 겪게 된다.
|
앨범
SCUBA 발매 시점.(1984) 왼쪽부터 : 미우라 슌이치, 요코가와 타다히코, 히라사와 스스무, 타이나카 사다토시 |
- 타나카의 빈 자리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우라 슌이치가 채웠으며, 1984년 8월, 베이시스트 키쿠치가 탈퇴하고 요코가와 타다히코가 가입. 같은 해 12월에는 드러머 타이나카 사다토시가 탈퇴하고 밴드 '알레르기'의 아라키 야스히로가 가입한다.
- 1985년, 6번째 앨범 ' KARKADOR'을 발매하고 'KARKADOR TOUR'를 개최했으나 투어의 12월 최종 공연을 마지막으로 키보디스트 미우라와 베이시스트 요코가와가 동시에 탈퇴하고 만다.[9]
|
앨범
ONE PATTERN 발매 시점.(1986) 왼쪽부터 : 아라키 야스히로, 타카하시 요시카즈, 히라사와 스스무, 나카노 테루오 |
- 1987년에는 8번째 앨범으로 예정돼있었던 ' 몬스터'의 레코딩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소속 레이블의 행패로 난항을 겪어 무산되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아라키 야스히로가 탈퇴하고 초기 멤버인 타이나카가 복귀. 이어서 9월, 타카하시도 P-MODEL을 나가고 그 자리를 코토부키 히카루가 대신한다.
- 1988년 12월, 시부야 CLUB QUATTRO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동결'을 선언. P-MODEL은 잠정 활동중지에 들어갔다.
3.4. P-MODEL 동결기 (1989 - 1991)
- P-MODEL이 동결에 들어간 후 리더 히라사와 스스무는 솔로 데뷔 앨범 시공의 물을 발매, 솔로 활동에 전념하면서 타 아티스트들과 협업하거나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의 사운드트랙을 제작하는 등 활동범위를 넓혀나갔다.
-
코토부키 히카루는 새로운 밴드에 합류함과 동시에 히라사와 솔로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한다.
- 80년대 초 P-MODEL을 나와 따로 음악활동을 하던 아키야마 카츠히코 또한 히라사와 스스무의 솔로 투어에 참여해 1990년까지 베이스 세션을 맡게 되었다.
- 1990년, 팬 서비스 차원에서 P-MODEL을 임시로 재결성해 공연한 적이 있다. 멤버는 히라사와 스스무, 아키야마 카츠히코, 코토부키 히카루, 타이나카 사다토시.
- 1991년, 히라사와 스스무의 버츄얼 래빗 투어 마지막 날, 공연장에 P-MODEL의 재결합을 예고하는 전단지가 살포되었다. 그리하여 1990년 임시 재결성 공연에 참여한 멤버 중 일부가...
3.5. 해동 P-MODEL (1991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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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ROR OF UNIVERSE 오프닝 + Zebra |
- 1991년 9월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P-MODEL 해동 이후 첫 라이브 'ERROR OF UNIVERSE'를 개최.
- 멤버 구성은 당시 라이브 오프닝에서 최초로 공개되었으며, 리더 히라사와 스스무는 물론, P-MODEL 결성 멤버였던 아키야마 카츠히코(베이스, 키보드), 동결 직전 멤버이자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 투어의 세션이었던 코토부키 히카루(키보드, 신디사이저)가 복귀했다. 또한 R&B 밴드 'The GROOVERS'의 드러머 후지이 야스치카를 새로운 멤버로 영입.
- 탈 테크노 선언 이후로 약 11년 만에 더욱 강렬해진 테크노 팝 음악들을 만들어냈으며, 기존 P-MODEL의 곡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새로 편곡해 공연했다.
- 새 체제로 두 개의 정규 앨범을 내놓은 P-MODEL은 1993년 10월을 마지막으로 밴드 '대기'를 선언. 다시 활동을 정지하고 1년간 새단장에 들어가게 된다.
3.6. 개정 P-MODEL (1994 - 2000)
- 1995년 12월, 10번째 앨범이자 개정 P-MODEL로서의 첫 앨범 ' 舟'가 발매되었다. 인터넷이 민간에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에 발맞추어 P-MODEL의 활동 컨셉을 새로잡고 공식 사이트를 개설함과 동시에 조악하게나마 인터넷으로 공연을 중계하는 등 기술적으로 선구적인 행보를 보인다.
- 1996년 10월, 콘서트 'Branch-O'와 함께 'Unfix'라는 이름으로 P-MODEL 멤버들이 잠시 따로 활동하다 마지막에 함께 모인다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11월 15일 도쿄 신주쿠 리퀴드 룸에서 'Unfix #3 코뮤노 하이브리디아(コミュノ・ハイブリディア)' 개최. 멤버들이 다시 모여 각자의 음악을 선보이는 공연이었고, 히라사와 스스무 역시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당일 히라사와의 컨디션 난조로 인해 출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스탭 측은 감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히라사와가 직접 인터넷에 "나는 감기 따위로 쉴 인간이 아니다. 쉰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10]이라는 글을 남겼다.
- 이듬해 1997년 5월 15일, 기존 소속사인 I3 프로모션(アイスリープロモーション)을 탈퇴하고 직접 설립한 소속사 케이오스 유니온(ケイオス・ユニオン)으로 이적한다. 같은 날 카미료 와타루는 솔로 활동을 위해 P-MODEL을 탈퇴.
- 1997년 11월, 11번째 앨범 ' 전자비극/~ENOLA'을 발매.
- 1999년에는 결성 20주년 기념 프로젝트 '음악산업폐기물~P-MODEL OR DIE'를 개시했다. 이와 동시에 당시 레이블이었던 일본 컬럼비아와 계약기간 중도에 결별하고 'P-PLANT'을 출범. 공식 사이트에서 MP3 음원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 프로 뮤지션으로선 최초였기에 큰 주목을 받기도.
- 히라사와 스스무는 인터넷과 MP3의 보급과 발전을 통해 아티스트가 음반 레이블의 간섭에서 벗어나 더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전망하고 프로그래밍까지 배워가면서 MP3 판매 사이트를 개설하는 등의 과감한 시도를 이어나갔다.
- 1999년 9월, P-MODEL 마지막 앨범이 되는 ' 음악산업폐기물~P-MODEL OR DIE'를 발매, 이어서 10월부터 11월까지 같은 이름으로 역시 P-MODEL 마지막 라이브가 되는 ' 음악산업폐기물~P-MODEL OR DIE'를 개최했다.
3.7. 배양(培養)
- 2000년 12월 20일, P-MODEL은 인터넷을 통해 '배양(培養)' 선언, 다시 활동을 중지한다. 사실상의 해체. P-MODEL의 전 멤버들은 대체로 P-MODEL의 재결성에 호의적인 반응이지만 정작 리더는 P-MODEL을 재결성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12]
- 현재는 전 멤버들 대부분이 각자 인디 뮤지션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멤버들간의 교류나 작품 참여 또한 활발히 이뤄지는 중이다.
- 2009년에는 P-MODEL 결성 30주년을 맞아 히라사와 스스무 주도로 P-MODEL의 곡들을 환현주의 리메이크하는 프로젝트를 발표. 이후 2010년 앨범 ' 돌현변이(突弦変異)'를 발매했다.
3.8. 핵(核)P-MODEL (2004 -)
|
이중전망3.4(二重展望3.4) |
- 2004년, 리더 히라사와 스스무가 P-MODEL의 핵으로서 P-MODLE을 새롭게 재구축하는 솔로 프로젝트 '핵(核)P-MODEL'을 개시하고 앨범 ' VISTORON'을 발매했다. Big Brother 등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 명의로 발매된 곡보다는 초기/해동기 P-MODEL이 연상되는 음악성과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지고 적나라하게 사회의 모습을 풍자하는 곡들을 대거 수록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핵P-MODEL로서의 데뷔 라이브 ' 도쿄 비스토론(トーキョー・ビストロン)'을 개최.
|
DVD 패럴렐 코자크(パラレル・コザック) 다이제스트 |
- 이후 무려 9년간 소식이 없다가 2013년 여름에 2번째 앨범 발매를 예고, 11월에 2집 ' Гипноза (Gipnoza)'를 발매한다. 이듬해인 2014년 1월에는 라이브 ' 패럴렐 코자크'를 개최.
- 이 때 앨범 제작과 라이브에 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한 P-MODEL의 카피 밴드 'PEVO'의 멤버인 'PEVO 1호'가 참여하면서 비공식 멤버에 가까운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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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D HYBRID PHONON 다이제스트 |
- 2014년 9월에는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와의 결합 라이브 ' HYBRID PHONON'이 개최되었다.
|
DVD LIVE回=回 다이제스트 |
- 2018년 9월 2일, 3번째 정규 앨범 ' 回=回'를 발매. 그리고 같은 해 9월 14-15일 오사카, 11월 16-17일 도쿄에서 라이브 ' 回=回'를 개최했다. 앞으로도 현악기 사운드가 돋보이는 히라사와 솔로와 전자 음악에 집중한 핵P-MODEL을 번갈아가며 앨범을 제작할 것으로 보인다.
- 2023년에는 9년 만의 두 번째 결합 라이브 ' HYBRID PHONON 2566'이 개최되었다. 이번엔 기존 솔로+핵P-MODEL에서 P-MODEL까지 더해진 것이 특징. 이듬해 2024년에는 추가공연 ' HYBRID PHONON 2566+'를 개최.
4. 음악성
데뷔 직후 ' 플라스틱스', '히카슈'와 함께 당대 테크노 고산케로 묶이며 시대를 주름잡았던 밴드.다만 히라사와 스스무의 말에 따르면 멤버들이 영향받은 뮤지션은 999, 섹스 피스톨즈, Métal Urbain, 조르조 모로더라고 하며, 크라프트베르크, XTC의 영향에 대해선 부정했다. 또한 '테크노'라는 틀에 갇히는 것을 경계했는지 TV 프로그램에 나와 테크노 팝에 대해 질문받자 ' 옐로하고 매직한 사람들에게나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하기도.[13]
탈 테크노 선언 이후 P-MODEL은 사용 기재, 녹음 방법, 가사에 여러 실험적 시도들이 가해졌으며, 멤버와 음악성이 여러 차례 바뀌는 과정 속에서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타나카 야스미의 탈퇴와 레코드 회사와의 갈등으로 인해 히라사와 스스무가 겪은 정신적 불안이나, 그러한 와중 접한 융 심리학 등의 요소가 작품 세계관에 반영되기도 했다.
해동 이후에는 테크노 팝을 본격적으로 내세우며 1, 2집을 재해석한 사운드나 IT 용어, 사이버펑크 요소가 차용된 가사를 돋보이게 했다.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 데뷔 이후이기도 하기에 특유의 멜로디와 세계관이 관철되기도.
개정기에는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의 색깔이 짙어져 '아시안 테크노'가 지향되었으며, 코니시 켄지의 영향도 더해지며 이전의 P-MODEL과는 이질적인 음악성을 구축했다.
핵(核)P-MODEL에서는 데뷔 당시 초기/해동기 P-MODEL이 연상되는 음악성과 세계관을 내세웠지만, 이후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의 세계관과 연결되며 2018년 앨범 ' 回=回'에 이르러선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에 가까운 음악성을 보이게 됐다.
5. 디스코그래피
5.1. P-MODEL
5.2. 핵(核)P-MODEL
6. 여담
- 한 가지 특이한 사실로 1980년대 한국, 특히 경남지역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이 때는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금지한 시기였지만, 부산을 비롯한 경남지역에서는 일본의 라디오나 TV신호[14]가 잡혀서 시청이 가능했었다. 그 시기에 나름 핫하던 여러 가수들과 함께 P-MODEL도 라디오에서 간간히 나오던 시기였기에 콘도 마사히코와 함께 유명세를 탔다. 때문에 이러한 음악이 퍼지고 퍼져 이태원동의 다방가까지 퍼지기까지 했다. 당시 일본 음악 좀 즐겨 들었다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 중 P-MODEL을 아는 사람이 제법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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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LANDSALE 발매 전후 쯤의 투어에서,
데이비드 보위가 이들의 공연을 몰래 관람하고 크게 호평한 적이 있다. 공연 후 대기실에 불쑥 찾아와 깜짝 놀란 멤버들 모두가 어쩔줄 몰라하다가 황급히 기타에 사인을 부탁
하는 한심한 요구를했다고. 데이비드 보위 사후 히라사와의 회상(번역)
[1]
리더 히라사와 스스무의 관련 링크들이다. P-MODEL과 핵(核)P-MODEL에 대한 안내도 겸하는 중.
[공식]
[라이브]
[4]
참고로 입단 당시 무려 고교 2학년이었다.
[5]
이후 초반부를 재작업하여
IN A MODEL ROOM에 '위대한 두뇌(偉大なる頭脳)'라는 이름의 곡으로 수록된다.
[6]
모 대학 캠퍼스에서 착란의 문을 연주하니까 어떤 구경꾼이 "Smoke On The Water나 불러!"라고 소리치며 쓰레기통을 던진 적이 있었다고. 당시 맨드레이크의 어려움을 대표하는 사건.
[7]
후일 히라사와는 인터뷰에서 전자기기의 보급으로 인하여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세상을 보고 프록이 갖는 서정성과 대곡지향성에서 위화감을 느꼈다고 밝혔다.
[8]
훗날 히라사와는 그냥 1,2집과 같은 앨범을 계속 냈으면 스타디움 공연을 할 만큼 잘나갔겠지만 현재와 같은 음악은 영원히 못했을 거라며 이 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9]
훗날 요코가와와 미우라는 밴드의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활동에 지쳤었다고 밝혔다.
[10]
이후 트위터를 통해 당시 살인적인 스케줄 때문에
공황장애까지 왔었다고 밝혔다.
[11]
CG디자이너. 히라사와 스스무 솔로활동의 가장 큰 이벤트인 인터랙티브 라이브의 CG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12]
다만 히라사와 스스무가 직접 트위터를 통해 본인 이외의 역대 멤버들이 모여 P-MODEL로서 활동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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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후 당시
YMO에 대해선 퓨전인줄 알았기에 그렇게 발언했다고 회고했다.
[14]
당시
후쿠오카 송신소나 키타큐슈 송신소에서 발신한 신호가 잡힌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