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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15:18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12월 3일 집회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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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img.sbs.co.kr/201000952_700.jpg
1. 개요2. 규모3. 배경4. 집회 중계
4.1. 주요 시위 장소4.2. 예정 루트
5. 참가자 추산6. 시위 진행7. 지역 시위
7.1. 수도권7.2. 강원7.3. 충청권7.4. 호남권7.5. 영남권7.6. 제주7.7. 국외
8. 반응
8.1. 한국 언론반응8.2. 외신 반응 기사
9. 기타10. 틀 둘러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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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숭례문 까지 모인 시민들.
BGM은 Coldplay - Viva la Vida.[1]
이날 광장이 보여준 압박의 밀도는 역사에 기록될 만했다. 주최 측 추산 전국 232만명이라는 규모도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타협할 권리를 입법부에 준 적이 없다”[2]라는 주권자 분노 입법부거대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폭발 직전의 기운이 넘실거렸던 6차 집회의 분위기는, 만일 탄핵안이 부결될 경우 한편에 치워두었던 저항권 행사가 선택지로 부활할 것이라고 강하게 암시했다. 6차 집회 이후 국회에서는 “탄핵이 부결되는 날에는 촛불 국회를 태워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 시사인> 기사 제483호 "광장의 촛불은 6월항쟁 완결판"
촛불 시민들도 정작 촛불이 정치권에 어느 정도나 압박이 되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시민들 상상 이상이다. 헌정 중단이 올 수 있고, 유혈사태나 엄청난 국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새누리당 의원도 당연히 고민을 한다.
(중략)
-12월 2일 상정이 불발되고 12월 3일 촛불집회에 232만명이 나왔다.
너무 감사해서 큰절을 하고 싶더라. 비박계를 한 명 한 명 끌어내는 일이 원내 작업만으로는 너무 어려웠다. 청와대, 국정원, 여당 지도부가 전방위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누구누구 표 확보했다고 청와대에 계속 보고가 올라가고. 그럴 때 그 촛불은 결정타였다. 그날 이후로 표 계산에 여유가 생겼다.
우상호 당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
2016년 12월 3일에 열린 6번째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2. 규모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다. 오후 9시 30분 기준 주최 측 추산 232만 명 참가로 사상 최초로 참가 인원 200만 명을 넘어선 최대 규모의 촛불 집회 #가 진행되었다. 대략 서울에서 170만, 지방에서 62만 명이 집회에 참여하였다.[3][4][5]

누적 인원을 고려하지 않는 경찰청 추산 순간 최대 인원은 서울 32만 명, 지방 도시 총 합계 10만 4천 명 규모다. 창원에서는 경찰이 정확한 인원을 산출하기 위해 계수기도 끌어들였다.

3. 배경

'○차 범국민 행동'이라고 번호를 붙여 부르던 집회 이름이 이번에는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로 바꿔 지난 29일 박근혜 3차 대국민담화에 대한 분노 표시임을 명확히 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주최 측에서는 분수대가 있는 청와대 앞 30m까지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집시법 11조의 금지규정[6][7]에 따라 법원에서는 법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범위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1월 29일까지 야간에도 청와대 앞 200m 밖에서 시위를 계속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둘 다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가 허가했는데 이 때문에 반대 측에서는 " 전라도 출신 판사 놈이 허가를 내줬다"고 성토하고 있지만 정작 허가를 내준 판사는 경북 안동 출신에 안동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판사 임용 후 근무지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근무한 적도 없다.(대전→수원→서울)

원래 11월 26일 집회를 마지막으로 광화문에서 하는 대규모 집회는 예정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2일로 예정돼 있던 탄핵 소추안 처리 일정이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에 따른 새누리당의 입장 번복 및 국민의당의 망설임으로 늦춰지자 주최 측에서 11월 29일에 대국민 담화 직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 날 집회를 다시 진행할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일어나게 되었다. 3차 대국민 담화 이후 여당에서 4월 퇴진론 카드를 들고 나왔고, 야당들도 분열할 징조가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오히려 저번 때 보다 참가자가 늘어 박근혜 대통령의 무조건 즉각 하야, 혹은 국회의 탄핵 말고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국회와 정부에게 똑똑히 알려 주었다. 즉 이 집회를 계기로 비박계가 탄핵 표결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고, 친박마저 반수 이상의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하였다. 또한 이날 집회는 서울 집중 집회가 아닌 지방 분산을 주안점으로 삼았는데도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나타나서 대통령과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우려를 제대로 보여 준 집회로 평가된다.

위에도 인용된, 원내에서 탄핵 교섭을 총지휘한 우상호 원내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탄핵 표결이 예정됐던 12월 2일 당시까지도 탄핵에 필요한 안정적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청와대의 로비가 집요했으며, 특히 박근혜가 던진 4월 퇴진 6월 대선 승부수가 비박계에 먹혀 들어가면서 25 ~ 40표의 찬성표가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원내의 확고한 탄핵지지세력 171명에 더해 가결을 위해선 최소 29표가 필요한 상황에서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 그런데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린 후부터 표 계산이 안정화되기 시작했으며, 탄핵 당일엔 최소 230표가 확보됐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촛불 시민들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

6일 뒤인 12월 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1표, 무효 7표로 가결되면서 여당이 주장했던 4월 퇴진론을 박살 내고 탄핵안 가결에 큰 영향을 끼친, 제6공화국의 역사를 바꾼 집회가 되었다. 거기다가 이후 국회의 탄핵소추안 부결 시 쿠데타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8] 이 집회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이날은 그야말로 역사에 보기 드문 희대의 대분기점이었던 셈.

4. 집회 중계


매주 주말집회 때처럼 종편에서는 매 시간 뉴스특보로 보도했다.

4.1. 주요 시위 장소

이 집회는 서울 도심 및 전국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여의도 일대에서도 집회를 하기로 확정되었다. 이는 새누리당 비박계가 탄핵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따로 당 차원에서의 집회를 하지 않았다.

4.2. 예정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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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에 100m 앞까지 행진했다. 주최측에선 30m 앞까지 행진 루트로 신고했고, 법원은 경찰의 행진 금지 통고를 취소하되 집시법에 명시된 제한선인 100m까지만 행진을 허용했다. 시간은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로 제한됐다. 한국일보 하지만 실제로는 허용시간이 넘었어도 경찰은 해산방송 몇 번 했을 뿐 해산시도조차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집회 참가자가 늘어났다. 시도를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9]

파일:100m.jpg

5. 참가자 추산


2016년-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하야 / 탄핵 요구 집회 연 참가인원(전국)
연도 일시 차수 경찰 추산* 주최 측 추산** 누적 연인원(주최 측 기준) 비 고
<colbgcolor=#c9c9c9,#363636> 2016년 <colbgcolor=#dddddd,#212121> 10월 29일 <colbgcolor=#dddddd,#212121> 1차 12,000 50,000 50,000 민중총궐기 주최측 주도
11월 5일 2차 48,000 300,000 350,000
11월 12일 3차 280,000 1,060,000 1,410,000 6차 민중 총궐기
11월 19일 4차 272,000 960,000 2,370,000
11월 26일 5차 330,000 1,900,000 4,270,000
11월 30일 총파업 8,000¹ 60,000¹ 60,000¹ 1차 총파업 ***
12월 3일 6차 430,000 2,320,000 6,590,000 경찰 추산 최대규모 촛불집회
정부 수립이래 사상 최대규모
12월 10일 7차 166,000 1,040,000 7,630,000 전날(12월 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12월 17일 8차 77,000 770,000 8,400,000
12월 24일 9차 53,000 702,000 9,102,000
12월 31일 10차 83,000 1,104,000 10,206,000 누적 연인원 1,000만명 돌파
2017년 1월 7일 11차 38,000 643,380 10,849,380
1월 14일 12차 비공개 146,700 10,996,080 경찰 추산 '비공개' 전환
1월 21일 13차 352,400 11,348,480
1월 28일 - - 11,348,480 설 합동 차례로 대체
2월 4일 14차 425,500 11,773,980
2월 11일 15차 806,270 12,580,250
2월 18일 16차 844,860 13,425,110
2월 25일 17차 1,078,130 14,503,240 7차 민중 총궐기
3월 1일 18차 300,000 14,803,240
3월 4일 19차 1,050,890 15,854,130
3월 11일 20차 708,160 16,562,290 전날(3월 10일) 대통령 박근혜
탄핵 인용(파면) 결정
최종 누적 연인원
(공식 누적 연인원)
16,562,290명
(16,581,160명)
괄호 안은 평일집회 등을 모두 포함한
주최측 공식 누적인원
2017년 3월 25일 21차 비공개 102,400 16,664,690
4월 15일 22차
109,600 16,774,290
4월 29일 23차
50,000 16,852,360
* 순간최대인원으로 추산 / ** 연인원으로 추산 / *** 촛불집회 인원과는 별도로 집계


주최 측은 30분마다 추산인원을 집계한다.
경찰의 추산 방식은 순간 최대 인원이고 주최 측의 추산 방식은 연인원이기 때문에 직접적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두자. 참고로 이 날 경찰의 추산 인원수는 오후 7시 10분 기준 약 32만 명이었는데, 이 인원 역시 역대 경찰 추산 시위 중 최대규모다.

2일 방송된 궁금한 이야기 Y에 따르면 경찰측은 1평 즉, 3.3m²에 5~6명이 올라간다고 가정을 하고 페르미 추정법을 사용·추산한 수치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실험을 해본 결과 3.3제곱미터에는 그 3~4배인 16~20명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나왔다.

6. 시위 진행

7. 지역 시위

12월3일(토)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전국 일정

7.1. 수도권

7.2. 강원

7.3. 충청권

7.4. 호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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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주최 측은 가로 3m, 높이 2m 크기의 쇠창살로 된 감옥을 준비했다. 감옥에는 박근혜와 부역자들을 감옥으로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렸다. 감옥에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새누리당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가자 시민들은 한명 한명의 이름을 외치며 “당장 하옥하라”고 외쳤다.

대형 ‘소녀상’도 등장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소녀상에 청와대를 상징하는 영상을 투영하며 정부의 ‘한일 위안부 협정’을 비판했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탓에 결국 오늘과 같은 사태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증현 스님은 촛불 집회 시작을 알리는 대회사를 통해 “박근혜는 범죄자일 뿐이며 국민들은 새누리당에게 박근혜 퇴진 일정을 결정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면서 “질서 있는 퇴진이란 있을 수 없다. 즉각 퇴진과 탄핵만이 있을 뿐이다. 박근혜 퇴진은 국민들이 결정한다. 즉각 퇴진하라”고 주장했다. 집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2개 대열로 나눠 1시간가량 금남로를 행진했다.

한편 이날 촛불 집회에서 주최측의 김영광 시민운동본부 공동위원장은 “오늘 집회는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탄핵을 지연시킨 정치인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는 게 좋게 비치지 않을 것”이라며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해 천정배 국민의 당 전 공동대표 등 정치인에게 자유발언 기회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주최측의 의사와는 달리 참가한 시민들의 요청으로 문재인 전 대표는 발언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15]

파일:external/www.newscj.com/391309_354507_547.jpg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267914_article_99_20161203234227.jpg

파일:external/file2.nocutnews.co.kr/2016120320061389532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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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unews.net/1480773473-87.jpg

7.5. 영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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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교체식

7.6. 제주

7.7. 국외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박근혜 퇴진 집회를 하였다

8. 반응



8.1. 한국 언론반응

8.2. 외신 반응 기사

9. 기타

9.1. 친박 단체 맞불 집회

이 날 있었던 박근혜 탄핵 및 하야를 반대하는 3차 맞불집회 문서는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경과.

9.2. 그 외

파일:external/pbs.twimg.com/Cyvt-14UQAEFqdD.jpg
파일:광화문횃불.jpg
이 횃불부대를 담은 사진 중엔 경복궁 광화문과 맞물려서 공성전 연상하게 하는 장면도 나왔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2063003_PH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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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관련 문서
( 박근혜 퇴진 운동 · 민중총궐기 · 탄핵 반대 집회)
2016년 10월 29일 1차 범국민행동
11월 5일 2차 범국민행동
12일 3차 범국민행동 (6차 민중총궐기)
19일 4차 범국민행동
26일 5차 범국민행동
30일 1차 총파업*
12월 3일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12월 9일 박근혜 탄핵안 가결 이후
10일 박근혜정권 끝장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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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9차 범국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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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14차 범국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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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박근혜 탄핵안 헌재 선고 이후
11일 20차 범국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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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22차 범국민행동
29일 23차 범국민행동
10월 28일 촛불은 계속된다 사전대회***
여의도 촛불파티
* 매주 토요일에 주최하는 범국민 대회가 아닌 하야 요구 집회
** 설 명절로 인하여 촛불집회 대신 세월호 합동차례로 대체
*** 1주년 기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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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몰락한 왕 최후를 다루는 가사의 노래를 영상에 삽입한 것을 보면 정말 적절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후에 콜드플레이는 본인들의 노래가 일명 '탄핵 찬가'처럼 불려졌다는 것에 상당한 놀라움과 고마움을 표했다고. [2] 당시 국회에서는 박근혜의 11월 29일 담화를 기점으로 국회가 협상 후 4월 퇴진론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박근혜가 퇴진한다는 약속 자체를 믿을 수가 없었으며, 여야 협상은 필요 없고 오직 탄핵 표결만을 밀어 붙이라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3] 사실 기사마다 인원 수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232만 명보다 조금 더 많거나 적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참가 인원이 200만 명이 넘었다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4] 인구 대비해서도 150만 명이 참석한 6월 민주 항쟁(3.6%)보다 많은 4.6%가 참여한 역대 최대 규모와 참여율을 기록한 집회였다. 1987년 당시보다 인구가 23%가량 증가했지만 참석 인구는 57%만큼 증가하였다. [5] 2016년 한국 인구가 5122만 명, 서울 인구가 983.5만 명이다. [6] 주요 국가기관 및 외국의 외교기관 반경 100m 내에서는 시위가 금지된다. [7] 다만 외국 대사관은 이번 집회는 외국 대사관에 대한 집회가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휴일에는 11조 4항의 예외규정이 적용되어 근처에서도 시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화문 앞 미국 대사관도 정문만 경찰차벽으로 막은 것. [8] 그나마 당시 계획안은 실현 가능성이 제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9]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있어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모든 사람을 뒤로 물리는게 좀 힘들 것 같아서 방치했다는 말도 있다. 그동안 잘 했는데 알아서 가겠지? [10]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경찰들이 스스로 청소한 것이라 답해 빈축을 샀다. [11] N.EX.T의 경우 2009년 노무현 추도식에서도 공연한 바 있다. 리더였던 신해철 노무현 대통령과 2012년 당시 대선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 바 있다. [12] 시위가 진행되면서 참가자가 늘어나 청와대 인근부터 사직로까지 인파가 빼곡해지면서 사실상 광화문 광장으로 복귀가 불가능해져 광화문 주최 측에서도 "청와대 대열은 내려오지 말고 그 곳에 있으라"고 제안했다. [13] 대통령이 제대로 해명하지 않고 있는 세월호 7시간을 의미함. [14] 광주인구는 16년 당시 150만으로 10%에 해당한다. [15] 당시 기사에서는 안희정 충남지사도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고 보도했으나, 정작 안희정 지사는 대전 둔산동 촛불집회에 참여 중이었음이 SNS, 기사, 목격담 등으로 인증되어 기자가 팩트 확인도 안하고 기사쓴다는 쓴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사실 안지사님 축지법 쓰신다 카더라 [16] 공평네거리에서 직진→종각네거리→동신교→청구네거리→MBC네거리에서 우회전→새누리당 대구광역시 당사 [17] 공평네거리에서 우회전→봉산육거리에서 좌회전→삼덕네거리→수성교→대구은행네거리→범어네거리에서 좌회전→검찰청, 법원→새누리당 대구광역시 당사 [18] 참고로 대구는 박근혜의 유일한 선거구였으며 사실 상 정치인으로써의 홈그라운드나 마찬가지었다. 근데 대구마저도 이정도면 박근혜가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19] 참고로 6월 항쟁을 대표하는 사진이 바로 이 문현교차로에서 찍혔었다.
파일:/image/pressian/2008/10/17/60081016175711.jpg
- 아! 나의 조국!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로터리, 한국일보 고명진 촬영.
[20]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일어나자, 본 집회 이후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를 생까고 당선된 바이든에게 집중했다. 매우 공교로운 부분 [21] 인원을 의도적으로 세월호 참사 날짜에 맞춘걸로 보인다. [22]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가 주가 되고 몇몇 다른 단체나 대학 퀴어모임에서 같이 참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