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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5:24

차이허썬

파일:중국 공산당 문장 옐로.svg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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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채화삼.jpg
중국공산당 정치국 국원
본명 차이린허시안(蔡林和仙, 채림화선)
한문 蔡和森
한국식 독음 채화삼
영문 Cai Hesen
택응(澤膺)
윤환(潤寰)
출생 1895년 5월 30일 청나라 절강성 상해
사망 1931년 8월 4일 중화민국 광동성 광주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호남 제1사범학교
직업 정치가
종교 무종교 (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공산당 가입과 국공합작2.3. 국민혁명과 1차 국공내전2.4. 최후
3. 기타4. 참고문헌

1. 개요

중화민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의 고향친구로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활동을 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5년 상하이에서 출생했으나 호남성 쌍봉현에서 성장하였다. 본명은 채림화선인데 1913년 호남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면서 필명인 채림빈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때 친해진 인물이 다름아닌 마오쩌둥이다. 학창시절 차이허썬은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몇날며칠을 책만 탐독하는 지독할 정도의 학구파였는데 판초프는 그의 지적능력에 대해서 천부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한번 책에 빠지면 몇달 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을 정도의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차이허썬은 마오쩌둥과 함께 양카이후이의 아버지이자 호남 사범학교의 교수인 양창지의 밑에서 배웠으며 주말이면 그의 집을 방문하는 등 돈독한 사제지간이 되었다. 호법전쟁 이후 안휘군벌 푸량쭤 군사독재가 시작되자 차이허썬은 1918년 4월 14일, 자신의 집에서 마오쩌둥 등 13명의 청년들과 함께 <신민학회>를 설립하고 군벌 타도 운동을 벌였다. 호남사범학교 졸업 후 상강 지역에 정착하여 학문을 연구했다. 이후 양창지로부터 리스쩡, 우징헝 등이 주도하던 근공검학 프로젝트를 소개받자 베이징으로 상경,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때 마오쩌둥에게도 같이 프랑스 유학을 권했으나 마오쩌둥은 어머니가 와병한 관계로 집안을 돌봐야 해서 유학을 포기했다.

베이징으로 올라온 차이허썬은 바오딩의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프랑스어 등을 공부했다. 이후 1919년 5.4운동이 발생하자 이에 참가했다가 그해 말 프랑스로 유학가서 몽타르지 남자중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유럽의 정치상황을 보고 볼셰비키가 되어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당대의 세계혁명이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네. 나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반영임을 똑똑히 보았네. 그 중요한 사명은 자본 경제 제도를 타파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무산계급 전정일세. 그것으로 사회경제재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지. (...) 그래서 나는 향후 중국을 개조하는 데 사회주의의 원리와 방법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네.

또한 프랑스 유학 시절 리리싼 등과 교우를 맺고 확고하게 공산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2.2. 공산당 가입과 국공합작

1921년 10월, 차이허썬은 프랑스에서의 공산주의 활동 때문에 추방되어 상하이를 통해 귀국했고 바로 아내 샹징위와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요한 이론가이자 선전가로 활동했다. 1922년 5월 5일에서 10일까지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사회주의청년단 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타이레이, 탄핑샨, 덩중샤 등과 함께 대표로 참석하여 청년단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차이허썬은 중국 공산당의 독립적인 노선을 주장하며 장궈타오, 리다자오 등과 함께 천두슈 국공합작 반대노선을 지지하였다. 1922년 8월의 중공 2전대회와 서호회의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선전부장에 선출되어 마링의 주장에 반박했으나 코민테른 특사 마링의 설득과 강권으로 주장을 굽히고 9월, 쑨원의 환영 아래에 천두슈, 리다자오, 장타이레이와 함께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코민테른의 지시가 확고하자 차이허썬은 더 이상 국공합작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여전히 공산당이 국민혁명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1923년 1월 <외력, 중류계급과 국민당>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공산당이 노동계급을 국민운동의 연합전선으로 만들었다고 칭송했다. 5월, 차이허썬은 국민혁명 참여에 대해서 식민지에서는 혁명적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이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면서 국공합작의 이론적 토대를 작성하였다. 1923년 6월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3전대회에서 차이허썬은 중앙선전부장을 그만뒀으며 장궈타오와 함께 국민당의 당조직 확대에 대한 참여를 반대했고 마오쩌둥의 소극적 지지를 받았으나 그의 주장은 부결되었다. 하지만 차이허썬은 높은 지지로 중국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7월에는 천두슈의 요청에 따라 샹징위, 마오쩌둥, 뤄장룽 등과 함께 공산당의 원래 근거지인 상하이시 갑북으로 이주했다.

1924년 1월,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향도, 중국청년 등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국민당 우파를 공격했고 국민당 내부의 조직공작을 위해서 노력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국민당 내부의 상당한 반공주의자들을 확인하게 되자 그리고리 보이틴스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차차 미하일 보로딘의 국민당 지지 노선을 비판하였다. 1925년에 개최된 중국 공산당 4전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중앙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천두슈, 펑수즈, 장궈타오, 취추바이로 구성된 중앙국의 일원이 되었다. 5.30 운동이 일어나자 5월 28일, 긴급회의를 조직하여 천두슈, 취추바이, 펑수즈, 윈다이잉, 리리싼 등과 함께 연합전선 확대를 결의하고 5.30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런데 1925년 6월, 차이허썬이 5.30운동 와중 얻은 천식과 위병으로 인하여 베이징에 치료를 받으러 간 사이에 중앙여성부장을 하던 아내 샹징위가 잘생긴 중앙선전부장 펑수즈와 바람이 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조혼으로 엮인 다른 부부들과 달리 차이허썬, 샹징위 부부는 자유연애로 결합되었으며 공산당 내부에서 모범부부로 불리는 잉꼬부부였다. 심지어 샹징위는 여성 공산당원들에게 평소에 도덕에 대해 설교하길 좋아해서 여성 공산당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3개월이 흐른 9월, 병 치료를 마친 차이허썬이 천두슈와 함께 상하이로 돌아오자 아내의 고백을 받은 그는 정치국 회의 자리에서 모두가 토론해보아야 할 문제라며 갑자기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다. 샹징위는 나중에 이런 식으로 중앙위원회에 문제를 폭로하는 남편의 행동이 이기적이라며 비난했으나, 회의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치국 회의 자리는 발칵 뒤집혔고 경악한 공산당 지도부는 중앙집행위원회 직권으로 차이허썬과 샹징위를 모두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차이허썬은 중국 공산당의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6차 확대회의 대표에 임명되었으며 샹징위는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 유학을 가는 형식이었다. 천두슈는 정치국원들에게 이 사건을 철저히 함구할 것을 부탁했지만 입이 쌌던 선전부원 취추바이가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결국 온 공산당에 소문이 다 퍼지고 말았다. 분노한 남성 당원들은 불륜남인 펑수즈를 조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회의 자리에서 비판받는 이상으로 문제가 커지지는 않았다.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차이허썬은 즉각 리리싼의 아내 리이춘과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1926년 말 샹징위와 이혼한 뒤 둘은 급기야 모스크바에 살림을 차렸고 리리싼은 혼자서 중국에 돌아가야 했다. 샹징위도 1927년 공부를 마치고 홀로 귀국해 호북성 당서기로 지하활동을 전개하다 사로잡혀 1928년 5월 1일 총살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차이허썬은 매우 슬퍼하며 '샹징위 동지 전기'를 출간했다.

그리고 이 때 중앙위원회의 비판에 의기소침해지고 연인을 떠나보낸 선전부장 펑수즈(팽술지)는 낙담하여 마구 술을 마시며 지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부터 알고지내던 선전부원 뤄이농의 연인 천비란과 사랑하게 되어 또 불륜 안건으로 중앙위원회 정치국을 괴롭히게 된다.

2.3. 국민혁명과 1차 국공내전

1926년 5월, 직봉풍전쟁에서 참패한 펑위샹이 모스크바로 외유를 떠나자 그의 사상적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펑위샹은 귀국하여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하게 된다. 차이허썬은 1927년에 귀국하였으며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1927년 5월 중국 공산당 5전대회에서 취추바이를 지지, 마오쩌둥 등과 함께 국민당에 대한 유화정책을 주장했던 총서기 천두슈와 선전부장 펑수즈를 맹공격하였다. 차이허썬은 5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이 되었고 곧 정치국 상무위원에도 선출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을 호남성 당위원회 재건 책임자로 추천하였고 이는 6월 24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채택되어 마오쩌둥은 창사로 파견되었다. 7월, 한커우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참석한 차이허썬은 마오쩌둥과 함께 국민당에 대항한 군사봉기를 주장했다.

8.7 긴급회의에서 정치국에 자리를 받지 못했으나 이어 열린 8월 9일의 중공중앙 임시정치국 1차 회의에서 중공중앙 북방국 비서로 임명되었다.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 6전대회에서 대표자로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천두슈에 이어 무장폭동 노선을 지도했던 취추바이가 맹렬한 비판을 받고 샹중파와 장궈타오, 리리싼에게 지도권을 내주었다. 차이허썬은 6기 1중전회에서 쑤자오정, 저우언라이, 샹중파, 취추바이, 장궈타오, 샹잉(항영) 등 6명과 함께 정치국 위원이 되었고,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선전부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벌였다. 또한 니콜라이 부하린이 연 정치좌담회에 참석, 중국 혁명의 성격과 정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후 병치료차 소련에 잔류하였다.

2.4. 최후

1931년 차이허썬은 상하이를 통해 귀국, 광동성 지역의 당무를 처리하기 위해 영국령 홍콩으로 갔으나 구슌장(顾顺章, 구순장)의 배신[1]으로 8월,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어 광동군벌 천지탕에게 인도되었다. 체포된 후 차이허썬은 독방에 갇혀 벽에 매달은 후 칼로 찌르고 쇠못을 박아대는 끔찍한 고문을 당했으며 결국 감옥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3. 기타

장남 차이보는 모스크바에서 야금학을 배우고 귀국해 철강회사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차남 차이린은 중국인민대학을 졸업하고 베이징복장학원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했다.

장녀 차이니는 베이징외국어대학 러시아어 교수를 지냈다. 차녀 차이좐은 스탈린 제2국립의대를 졸업해 우한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누나의 딸 류앙은 농업기계부 부부장, 화중과기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4. 참고문헌



[1] 아이러니한 건, 이 자는 펑파이를 배신한 비서 바이신(白鑫, 백흠)을 처단한 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