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마츠 마사지의 수상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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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마츠 마사지 平松政次 / Masaji Hiramats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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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47년 9월 19일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오카야마현 타카하시시 |
신체 | 176cm, 74kg |
포지션 | 선발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출신학교 | 오카야마현립 오카야마히가시상업고등학교 |
사회인야구 | 일본석유 (1966~1967) |
프로 입단 | 1966년 제2차 드래프트 2순위 (타이요) |
소속팀 | 타이요-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1967~1984)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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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1] |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現 야구해설자.
일명 '면도날 슈트(カミソリシュート)'라 불리는 고속 슈트가 주무기였던 투수로, 타이요 훼일즈의 원클럽맨 스타이자 구단 역사상 유일한 200승 투수다.
2. 현역 시절
2.1. 데뷔 전
오카야마히가시상고 3학년 때인 1965년 춘계 코시엔 대회에 진출해 당시 대회 신기록인 39이닝 연속 무실점을 쓰며 당시 와카야마현 대표였던 시립 와카야마상고[2]와의 결승전에선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끝내기로 우승을 달성했다. 같은 해 하계 코시엔 대회에도 진출하며 춘, 하계 연속 제패도 노릴 수 있었으나 첫 경기에서 도쿄 대표인 니혼대학제2고에 패했다.이후 당해 최초로 열린 제1회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의 4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을 희망했던 히라마츠는 지명 거부와 함께 일본석유에 입사해 사회인야구로 진출했고, 일본석유에서도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며 2년 연속으로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진출해 첫 해엔 준결승 진출, 2년차엔 우승을 달성했고 야구 월드컵 대표로 선발되기까지 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이후 1966년 제2차 드래프트[3]에서 타이요 훼일즈의 2순위 지명을 받았고[4], 이번엔 지명을 거부하는 대신 도시대항야구대회 진출을 위해 입단을 미뤘다가 대회 종료 이틀 후인 1967년 8월 10일에 정식으로 계약을 맺으며 프로에 데뷔했다.[5]
2.2. 타이요 훼일즈
입단 첫 해인 1967년엔 후반기 입단도 겹쳐서 16시합 3승 4패에 그쳤고, 이듬해인 1968년엔 선발, 계투를 안 가리고 51시합(13선발)에 등판했으나 5승 12패로 부진했다.그러던 중 3년차인 1969년 스프링캠프 때[6] 고속 슈트를 주무기로 가다듬으며 본격적으로 각성했고, 당해 리그 최다인 57시합(25선발)에 등판해 14승 12패, 평균자책점 2.56을 기록하며 본격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다.
본격적으로 선발로 풀이닝을 소화하게 된 1970년엔 무려 332.2이닝을 소화하며 23완투 6완봉에 25승 19패, 평균자책점 1.95를 기록하며 다승왕과 사와무라상을 수상했고[7], 이듬해인 1971년에도 17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을 수상하며 타이요의 에이스로 완벽하게 자리잡았다.
이후에도 팀이 워낙 약체였던 탓에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고 평균자책점도 3점대로 올라갔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타이요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매년 10승 이상을 기록했고 1979년엔 최우수 평균자책점(2.39)를 기록하며 팀의 요코하마시 연고 이전 이래 첫 A클래스 진출에 공헌했다. 특히 자신을 지명하지 않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요미우리의 스타인 나가시마 시게오 킬러로도 이름이 높아서 자신의 승수의 1/4인 51승을 요미우리 상대로 수확했고, 나가시마를 상대로도 타율 .193 8홈런 26타점으로 꽁꽁 묶었다.
1981년에 6승 7패에 그치며 서서히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고, 1983년 대망의 200승을 달성했지만 1984년엔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한 대신 1승 10패로 크게 부진해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635시합 등판(421시합 선발), 145완투 28완봉 201승 196패 2045탈삼진, 평균자책점 3.31이다. 또한 200승 이상을 달성한 선수 중 유일하게 우승 및 포스트시즌 경험이 없는 선수이기도 하다.[8]
3. 은퇴 후
은퇴 후엔 지도자를 맡지 않고 후지 테레비 등에서 야구해설자를 맡고 있다.4. 기타
- 타격 실력도 나름 괜찮아서 현역 시절에 통산 25홈런을 기록했다.
[1]
유니폼 뒷면에 적힌 KAWASAKI는 당시 타이요의 연고지였던
카와사키시를 의미한다. 타이요는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당시 구단들 중 최초로 유니폼 뒷면에 이름을 넣었는데 이때 홈 유니폼은 지역명인 카와사키, 원정 유니폼은 선수명이 들어갔고 이후엔 홈, 원정 유니폼 모두 지역명과 선수명을 혼용했다고 한다.
[2]
당시 와카야마상고의 주전엔 이후
한신 타이거스의 원클럽맨 대타자가 되는
후지타 타이라가 있었다.
[3]
당해 한정으로 드래프트를 1, 2차로 나눠 진행했는데, 1차 드래프트는
국민체육대회(약칭 국체)에 출장하지 않은 고교야구 및 사회인야구 선수가, 2차 드래프트는 대학야구 선수와 국체에 출장한 고교야구 및 사회인야구 선수가 지명 대상이었다.
[4]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1순위 지명자였던
릿쿄대학의
포수 츠치다 마코토의 지명에 실패할 시 히라마츠를 지명할 예정이었으나, 츠치다의 지명권을 뽑는 데 성공하면서 히라마츠의 지명이 무산되었고 히라마츠는 후에 요미우리에 입단하지 못한 게 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히라마츠를 밀어내고 지명된 츠치다는 요미우리에서 백업 멤버로 뛰는 데 그치다 1977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은퇴하며 프로에선 성공하지 못했다.
[5]
아마추어-프로 관계상 아마추어 대회 도중 프로 입단을 선언할 시 아마추어 자격이 박탈되어 향후 프로 이외의 야구 활동에 지장이 생길 수 있었기에 지명을 미룬 것이었다. 여담으로 히라마츠가 계약을 맺은 8월 10일은 타이요의 지명권이 소멸하는 당일이었는데, 당시 대회가 8월 10일 이후까지 질질 끌릴 시 계약도 못하고 지명권을 날릴 수 있었던 데다 하필
요미우리가 히라마츠의 타이요 입단을 막기 위해 대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히라마츠를 은신시킬 것이라는 소문까지 돈 탓에 타이요 관계자들은 "제발 8월 10일까지
도시대항야구대회가 끝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고 한다.
[6]
당시 비가 와서 타이요 선수들이 야구장 대신
체육관에서 단체 연습 중이었는데, 히라마츠가 투구 연습을 하는 걸 보던 선배 타자
콘도 카즈히코와
콘도 아키히코가 "그런 공밖에 못 던져?"라고 핀잔을 줬다고 한다. 이 말에 화가 난 히라마츠가 제대로 한 번 보여주겠다는 듯이 지금껏 잘 안 던지던
슈트를 전력으로 6개 던졌는데, 그 전력으로 던진 슈트볼이 예리하게 타자의 몸 쪽으로 들어가 모두들 놀랐고 이를 계기로 면도날 슈트라 불리는 고속 슈트볼을 갖추게 됐다.
[7]
당시 평균자책점 1위도 충분히 노릴 수 있었으나
한신 타이거스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무라야마 미노루가 0.98이라는 말도 안 되는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바람에 타이틀을 놓치고 말았다. 여담으로 당해 패전 수도 1위였다.
[8]
노모 히데오도 일본 시절 리그 우승 경력이 없지만
메이저 리그 첫 해인 1995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서부지구 우승을 달성해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했던 경험은 있다. 다만 디비전에선
신시내티 레즈에게 3연패로 패퇴했고, 이후에도
월드 시리즈와는 현역 은퇴 때까지 인연조차 맺지 못하고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