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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8:40:42

화신백화점

파일:external/blog.donga.com/20090702181012.jpg
화신백화점의 1960년대 모습.

1. 개요2. 역사
2.1. 화신상회 시절2.2. 화재 발생, 이후 재건 및 확장2.3. 광복 이후 쇠락2.4. 재개발, 그리고 철거2.5. 철거 전후의 이야기
3. 평가
3.1. 보존 옹호론3.2. 철거 지지론
4. 대중매체에서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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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가 무슨 집이에요, 아버지."
"저, 화신상……, 화신상이란 데야."
"화신상요? 그래, 아무나 들어가요?"
"그럼, 아무나 들어가지."
《천변 풍경》 - 박태원

일제강점기에 생긴 최초이자 유일한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백화점이자 근대건축 교육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 건축가가 설계한 최초의 근대식 상업 건물이었다.[1]

서울특별시 종로 종각 네거리, 현재의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던 건물. 운영법인은 화신그룹의 모기업이던 화신산업이었다.

1978년 시행된 도시재개발 및 종로확장계획에 맞물려 철거된 건물이나 이 건물이 철거되었기에 제일은행 본관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2. 역사

2.1. 화신상회 시절

조선 시대부터 종로는 육의전을 중심으로 길가에 시전행랑들이 늘어선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 한복판인 종각 맞은편에는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선전이 있었는데, 한때는 육의전 중 최고라고 불렸던 선전은 임오군란 중국인 상인들이 서울에 들어와 직접 물건을 팔면서 직구족들에 밀려 망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 1890년대 말 신태화란 상인이 신행상회란 이름의 귀금속 상점을 열었다가 1918년 자기 이름의 '화'와 신행상회의 '신'을 따서 상점 이름을 바꾼다. 바로 '화신상회'의 시작이었다.

종로를 기반으로 화신상회는 꾸준히 성장해 1922년에는 서울에서 가장 큰 귀금속 상점이 되었으며, 주력인 귀금속 외에도 여러 잡화를 취급하며 사실상 준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다 1931년, 화신상회의 경영권은 박흥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박흥식은 지물사업을 기반으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면서 화신상회에도 자금을 대고 있었는데, 화신상회가 경영난을 겪게 되자 구조조정을 이유로 신태화에게 화신상회를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한편 자신의 채권을 주식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 계획대로 화신상회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박흥식은 자신의 주식을 기반으로 곧바로 화신상회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원래 목조건물이었던 화신상회를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새롭게 지어올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기존 임원과 점원도 모두 갈아치웠다.

1932년, 화신상회의 바로 옆에 동아백화점[2]이 세워지면서 양 업체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으나, 방만했던 경영과 무엇보다도 기와집 1채를 경품으로 걸어버리는 경쟁자 화신상회의 패기에 버티지 못한 동아백화점이[3] 개점 6개월 만에(...) 화신상회에 인수합병되는 것으로 승부는 싱겁게 끝나버렸고 기존 화신상회 건물과 동아백화점 건물은 서로 연결되어 각각 서관, 동관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종로 상권의 패자로서 꾸준히 사업을 확장해 나가던 중에...

2.2. 화재 발생, 이후 재건 및 확장

1935년 1월 27일 저녁 7시 30분, 화신상회는 대형 화재로 건물이 통째로 타버렸다.

초저녁 도심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백화점 2동이 통째로 불에 휩싸이고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직접 나서 진화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등, 오늘날로 치면 숭례문 방화 사건과 맞먹을 이 화재는 어이없게도 작은 촛불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서관 옆에는 대창무역 소유의 공터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하던 과일 노점상이 놓았던 촛불이 사과를 덮은 겨에 옮겨붙고[4], 그 불이 서관 외벽의 목재 광고판에 옮겨붙고, 서관을 황폐화시킨 다음 연결통로를 타고 동관까지 옮겨붙은 것. 그나마 분리되어 있는 건물 구조 덕에 대화재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사건 후 박흥식은 당시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찾아가 "백화점 2동이 타버리는 동안 경성소방서(현 서울 종로소방서)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며 항의하였고, 결국 책임을 피할 수 없었던 총독은 '500여명에 달하는 점원을 놀릴 수 없으니 건너편의 종로경찰서 구관[5]을 빌려달라'는 박흥식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한편,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같은 해 한국에 119가 처음 도입[6]되는 등, 한반도의 엉성한 소방 행정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영업은 재개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던 만큼, 우선 그나마 반소(半燒)되어 형태는 어느정도 남아 있던 동관부터 증⋅개축에 들어가 1936년 12월 동관 일부를 다시 개장했다. 이 때 두 번 다시 불에는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건물에 셔터와 비상계단을 설치한 것이 포인트였다고. 한편 완전히 타버린 서관은 이렇게 된 이상 새로 짓기로 결정, 아예 문제의 대창무역 부지까지 사들여 연건평 2,000평이 넘는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관을 완성시켰다. 참고로 당시 경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신관이 완성된 1937년 10월, 이제는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상회'라는 이름을 떼어버린 화신백화점은 구관[7]과 신관을 합쳐 연건평 2,500평에 달하는 명실공히 당시 한반도 최대 크기의 백화점 자리에 올랐다.

구관 시절의 조잡했던 배치 대신, 넓어진 면적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각 층마다 최소한 15개 부류로 상품 진열을 나눠 구분하고 매장의 통로 좌우면에 쇼윈도를 두어 상품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하는 등 우리가 떠올리는 백화점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매장 안에 엘리베이터 4대, 그리고 에스컬레이터 2대를 조선 최초로 설치하는 한편 건물 옥상 정면에는 전광판을 설치해 그날 그날의 뉴스를 내보내는 등 당시 남촌에 밀집한 일본계 백화점들에 전혀 밀리지 않는 편의시설 혹은 볼거리를 갖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효과를 노렸고, 경성전기주식회사[8]와 협의해 전차정류장 이름을 “화신앞” 으로 정하여 백화점의 선전 효과를 거두었다.[9][10] 이러한 시도는 종로 보신각 네거리 한복판[11]이라는 입지조건과 시너지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건축학적 가치로서 보았을 때는 절충주의 양식 아래 최상층의 아치 처리와 처마끝 처리 효과 등 건축 양식 측면에서도 매우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화신백화점 신관은 우리나라 사람이 설계한 최초의 서양식 상업 건축물이라는 데 최고의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경영난을 겪고있던 평양백화점을 인수해서 화신백화점 평양점을 차렸고, 1938년 4월에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과 영친왕비 이방자가 이왕직 장관 외 다수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화신백화점에 임어(臨御)하기도 하는 등 승승장구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그렇지만 일본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조선 각지에서 물자들을 강제공출해나갔는데 화신백화점도 이를 피해갈수는 없어서 1944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운영에 큰 차질이 빚었다고 한다.

2.3. 광복 이후 쇠락

1945년 8.15 해방이 되면서 종업원들이 좌익성향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친일파 박흥식 사장 대신 화신백화점을 장악했다. 10월 4일부터 백화점 재조직을 위한 요구 사항을 내걸고 박흥식과 협상을 벌였으나, 협상은 실패하고 12일에는 미군정에 의해 자치위원회가 와해되면서 화신백화점은 다시 박흥식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화신백화점 평양점은 북한땅에 있었기 때문에 국영화되어서 평양제1백화점이 되었고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1946년에는 (주)화신에서 분사되어 독립법인이 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폭리와 면포·비누 등 생필품 불법유통으로 적발되기도 했고, 한국전쟁으로 백화점 내부가 불타고 물자가 부족하여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졌다.[12] 1956년 10월부터 개/보수 후 재개점한 뒤 일반에 임대운영된 바 있었다. 같은 해에 화신백화점 법인도 (주)화신에 다시 합병되어 '화신산업'으로 출범했다.

1961년 5.16 쿠데타[13] 이후 군정에 의해 ‘재건국민운동' 여파로 7월 15일부터 외래품 판매금지가 실시되었고, 10월 1일부터 정찰제가 실시되었다. 1967년에는 '신생어린이백화점'으로 유명한 (주)신생이 건물을 인수했다.

충무로 일제강점기부터 백화점 거리로 알려져 왔는데, 해방 후에도 이곳을 중심으로 백화점이 줄을 이어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일본인 백화점이었던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은 이름을 동화백화점으로, 조지야백화점(丁子屋百貨店)은 중앙백화점으로 고쳤다. 이들 백화점은 귀속재산으로 미군정에 귀속되었고, 동화백화점은 규모가 커서 국가가 직영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관재청 직할로 운영되다가 1958년부터 조선방직에 불하되었으나, 1962년 동방생명을 거쳐 이듬해 삼성그룹에 넘겨졌다. 그리고 1963년 신세계백화점이 되었다.

반면 중앙백화점은 주한미군 24군단 PX로 바뀌어 미군 상대 영업을 했고[14], 1949년부터 '무역관'이 되어 한국무역협회 등이 입주했다가 1954년 대한부동산이 인수해 '미도파백화점'으로 바꿨으나, 이후 무협으로 넘어간 뒤 1964년 (주)무역협회로 독립했다가 1969년 대농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1998년 대농그룹이 몰락하면서 2002년에 롯데쇼핑이 인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백화점을 대표했던 화신백화점은 폭리와 면포· 비누 등 필수물자 불법유통으로 적발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조선인 백화점으로서는 선두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백화점 내부가 불타고 물자가 부족하여 백화점 직영이 곤란해지자 1956년 10월부터는 일반에게 임대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11월 15일에 화신산업은 종로1가 화신백화점 근처[15]에 자매백화점 '신신백화점'을 개점했다. 신신백화점 건물은 당시로는 드물게 넓은 유리창을 많이 달고 있었고, 헐리기 전까지 서울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가건물이었다.

1950년대 백화점 상권은 중앙백화점이 변신한 미도파가 선두를 지키는 가운데 화신과 신신이 그 뒤를 따르는 형세를 유지했다. 이들 백화점에는 당시 고급 소비품인 시계점·안경점·귀금속점 등 전문업체가 들어서 있었다. 1961년 서울의 백화점 수는 7개에 불과했지만 그 매상고는 1960년 44억원, 1961년 82억원으로, 1958년 시장에서의 매상액이 32억원인 것에 비교해 보면 매우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2.4. 재개발, 그리고 철거

그러나 화신백화점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했고 본가인 화신그룹도 기울기 시작했는데, 1978년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종로 확장계획과 맞물려 공평동이 도심재개발 사업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백화점 건물 면적의 절반(...)이 도로확장 예정 부지에 포함된 화신백화점이 철거 대상에 오르게 된 것. 이 소식에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언론과 전문가들이 철거를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했지만 시대가 시대였고, 게다가 안 그래도 몰락중인 상황에서 1979년 소공동에서 개점한 롯데백화점 본점에 손님을 많이 뺏기면서 자금난은 가속화되었다. 끝내 결정적으로 건물주인 화신그룹도 무리한 사업확장까지 겹치며 이듬해에 해체되었고[16], 한동안 (주)신생 소유였으나 1986년에 최종적으로 한보그룹 계열 한보주택이 화신백화점의 주인이 되었다. 어쨌든 철거는 기정사실이 된 상황에서, 한보주택 측은 그 자리에 새로운 백화점 신축계획을 세웠으며[17]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끝에 건축가 김무언의 설계안이 확정되었다. 김무언의 설계안은 이왕 건물을 원형보존할 수 없다면 새로 짓되 적어도 구 화신백화점 건물의 전면부, 그러니까 파사드만 남긴 뒤 이를 신축 건물에 대입하는 방식[18] 으로 화신백화점의 장소적 역사성을 살려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었다. 그러나 1987년 부지 소유권이 동방생명으로 넘어간 후 마침내 신규 건축 허가가 떨어지면서 화신백화점은 폐업되고 그 해 철거가 시작되었다.

2.5. 철거 전후의 이야기

화신백화점 철거 이야기는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나오고 있었다. 폐점 전 당시에는 화신백화점이라는 간판, 내부 구조는 그대로 두고 있었지만 "신생학생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써 온 건물의 시설은 겉보기는 그럴듯했지만 실제로는 낡을대로 낡아 있어서 엘리베이터는 자주 고장나고, 에스컬레이터도 종종 운행을 멈추고 사고를 내기도 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으며, 건물 내부의 전기와 수도 시설은 건물을 골조만 남기는 수준으로 뜯어내서 다시 짓지 않고는 답이 없던 상태였다. 또한 (2010년대에도 유지되고 있는 일본 건물의 특성인) 좁은 통로와 계단은 빠른 대피가 어려워서 화재나 사고 시에 인명 피해가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있었다.[19] 철거 직전의 상태는 소방법상 규정을 떠나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질서한 배선과 좁은 통로까지 막은 가판대와 상품 등,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다.

건축허가가 떨어진 다음 날인 87년 3월 17일에는 동아일보 등 각종 일간지, 잡지 등지에 전면광고까지 실어가면서 임대를 받기 시작했다.[20] 계획대로였다면 1989년에는 지하 5층 지상 18층 규모의, 하지만 전면부는 옛 화신백화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초대형 백화점이 종로 한복판에 세워졌겠지만... 종로타워 문서 참조.

그리고 층수도 있고 화려한 파사드 덕에 웬만큼 모양이 났던 화신 본 건물과 달리 자매백화점 '신신백화점(아케이드)'은 단층에 모양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별 의견 없이 제일은행으로 부지가 넘어갔고, 1983년 철거되었다.

3. 평가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최초의 백화점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조선총독부 청사과 유사하게 건물의 존치 여부를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3.1. 보존 옹호론

화신백화점은 2가지 측면에서 역사자원으로서 보존 가치가 있다. 첫 번째는 역사적 가치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인의 서울 진출이 크게 늘어나 일본계 백화점이 남촌 일대에 생겨났을 때 화신의 등장은 한인 백화점으로 우리나라 자본으로 북촌에 위치한 유일한 백화점으로 일본인 상권에 대응해 종로상권을 부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번째는 건축적 가치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한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근대 건축물로써 당시(1937년)의 건축양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백화점 건물로써의 특징을 갖는 건축사적 가치와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이라는 건축가의 대표 상업건축물로서의 가치이다.

1965년 윤일주[21]는 '한국인 신흥재벌이 처음으로 한국인 건축가에게 설계를 위촉하여 중세풍의 건축과 근대적인 건축들을 얻었음은 의미 깊은 일이며 피압박민족중의 유지 와 자산가가 처음하는 큰 역사를 더 이름있는 외인에게 하지 않고 동족의 젊은 건축가에게 맡겼음은 의의깊은 일이다' 고 하며 당시로서는 지어진지 30년도 채 되지 않은 건물이었으나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화신백화점은 건축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존에 대한 의식이 건축 전문가들과 건축학계 그리고 언론 일부에게만 있었을 뿐 도시계획을 집행하는 공공과 도시계획가들은 화신 보존에 대한 가치 인식이 없었다. 따라서 법정 도시계획에 의해 재개발구역에 포함되어 철거 재개발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몇몇 전문가와 일부 언론은 근대 역사환경으로서 화신백화점이 보존할 대상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도시계획과 관련된 전문가와 공공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가치인식이나 그 중요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정현, 김기호 "화신백화점의 보존논의와 도시계획적 논의" 내용 中

3.2. 철거 지지론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보존하기에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첫째는 건축 양식이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석재로 마감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이나 구 한국은행 건물, 서울시청 건물 등 다른 서양식 건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작품인지는 몰라도, 독특한 양식인 것도 아니다. 2번째로는 조선 건축가가 설계했다고는 하지만 민족 자본으로 일제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지어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친일파 박흥식의 자본을 동원해 상업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기 때문이다. 미쓰코시 백화점처럼 일본 자본이 직접 진출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생각하면 그보다 더욱 치욕스러운 유산이기 때문. 애초에 건물 용도 자체도 친일파가 자기 자신의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세운 건물이지, 한국 최초의 백화점이니, 근대건축의 시초니 하고 만든 목적이 아니었다.

4. 대중매체에서

주로 근현대사를 다룬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데, 2002년 SBS 대하드라마 < 야인시대>와 2004년 MBC 특별기획 드라마 < 영웅시대>가 대표적인 예이다. 부천 판타스틱스튜디오에서도 재현되었지만 당연히 안전상의 문제로 다른 세트장과 함께 철거되었다.

5. 여담


[1] 진한 글씨처리 된 이유는 이 화신백화점이 최초인 부분이다.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백화점은 일본자본이 세운 1906년 미츠코시 백화점 서울지점이며,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은 1916년 김윤백화점이다. 화신백화점은 한국자본이 근대식 건물로 지은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이다. [2] 이 두 백화점은 전신인 화신상회와 동아부인상회(원래는 부인들이 주축이 된 판매조합이었지만 덕원상점을 운영하던 최남이 인수했다.)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4층 콘크리트 건물이었으며, 엘리베이터가 최고의 호객 요소였다고. 40년 뒤 개점한 대구의 이곳과는 전혀 무관하다. [3] 물론 동아백화점도 문화주택을 경품으로 내걸면서 맞불을 놓았지만 화신상회의 자금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4] 당시 과일의 완충재로 많이 쓰였고, 거의 1980년대 까지 쓰이다가 스티로폼으로 대체되었다. [5] 현재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 여담으로 박흥식은 이 자리까지 사들여 아케이드 구조의 신신백화점을 세워 영업구역을 확대했다. 지금의 모습은 제일은행이 잘 나가던 시절 신신백화점이 철거된 자리에 새 건물을 올려 이사해 온 것. [6] 일본은 1927년 처음 도입. [7] 화재 후 수리해서 쓰고 있던 동관. [8] 일제강점기 서울전차를 운행했다. 1961년에 이 경성전기와 조선전업, 남선전기 3사를 합병하여 현재의 한국전력공사가 탄생했다. [9] 전차정류장을 거쳐 버스정류장의 이름으로 이어진 '화신앞'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건물이 철거되고 난 90년대 중반까지도 건너편의 종로서적과 함께 약속장소의 이름으로 불렸었다. 화신앞 버스 정류장 이름은 지금 종로2가가 되었다. [10] 현대에 비유하자면 화신백화점 터 근처 1호선 종각역화신앞역으로 역명을 붙인 격이다. 현재는 부역명 유상판매 정책으로 상업시설을 부역명으로 붙이는 건 가능하지만, 주역명은 불가능한 점을 보면 현대 시각에서도 꽤 대담한 홍보 방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사례가 화신백화점이 지어지기 전 일본에 이미 있었는데, 바로 긴자선 미츠코시마에역이다. 이쪽은 미츠코시 백화점이 지하철역 건설비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붙인 것인데, 시기상 박흥식이 벤치마킹했을 가능성이 있다. [11] 보신각은 화신이 있던 자리의 대각선쪽 블럭 끝에 있다. [12] 배우 이호재에 따르면 인민군의 서울 진입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백화점 2층서 퍼레이드를 구경하던 서울시민들에게 인민군이 총격으로 위협했다고 한다. 감히 인민군을 위에서 내려다보느냐는 이유였다고 이호재는 설명했다. [13] 이정재가 조리돌림 당할 때 뒤에 찍힌 건물이 화신백화점 이다.파일:attachment/jjlee.jpg [14] 6.25 전쟁 직후에는 상술한 동화백화점도 PX로 운영했던 시절이 사진으로 남아 있다. [15] 조선시대 의금부가 있던 곳으로, 현 SC제일은행 신관 자리다. [16] 결국 화신그룹이 남긴 유산으로는 흥한재단과 광신학원밖에 없다. [17] 계획했던 백화점의 이름도 한보 화신백화점이었다. 반세기 가까이 종각 네거리의 터줏대감이었던 화신백화점의 명성을 그냥 버리기 아까웠던 것 [18] 구 대법원 청사인 서울시립미술관, 그리고 서울특별시청이 이렇게 외형이나마 보존되었다. [19] 1935년의 화재를 반면교사로 신경써서 재건축 했음에도 세월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20] 덕분에 올 컬러로 당시의 설계안 및 분양계획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일지도... [21] 윤동주 시인의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