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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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당 계획재정비서 겸 계획재정부장
前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홍석형 洪錫亨 | Hong Sok H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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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4FA2><colcolor=#FFF> 출생 | 1936년 10월 1일 ([age(1936-10-01)]세) |
경기도 경성부 | |
가족 | 조부 홍명희, 부친 홍기문 남동생 홍석중 |
학력 |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모스크바대학교 (경제학 / 학사)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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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홍명희의 손자이며 홍기문의 아들이다.2. 생애
1936년 10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였고, 아버지는 훗날 김일성대학 교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을 지낸 홍기문이었다. 1948년 4월, 홍명희의 월북 이후 홍기문도 월북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북으로 넘어갔다. 아마도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 중 거의 마지막 남한 출신자로 보인다. 할아버지 홍명희는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따라서 홍씨 일가는 북한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홍석형도 덕분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후 소련으로 유학, 모스크바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북한의 보도에 따르면, 대학 졸업 이후 금속공학기사의 자격을 취득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외국 유학 경험이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 않는지 어느 대학졸업인지는 보도를 하지 않았다.귀국 후 성진제강소 기술부기사장을 했다. 1981년부터 김책제철연합기업소 압연공장 공장장을 지내다가 1984년 7월 정무원 금속공업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85년 11월에 보직해임된 후 김책제철연합기업소 기사장으로 이동,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8년 9월 김책제철연합기업소 당책임비서 겸 함경북도 제2비서로 부임하였다. 이때 진중한 일처리로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급성장시켜서 김일성의 신임을 얻었다 카더라.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엄청난 거물이 되는데, 1993년 12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김달현의 뒤를 이어 신임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된 것이다. 그의 임명은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추인되었으며 12월 8일 조선로동당 6기 21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94년 4월 9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곧 이어 고난의 행군이 닥쳐왔고 개판이 된 북한의 경제를 매우 힘겹게 꾸려나갔다.
1994년 7월, 김일성과 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9월 5일에 홍성남 내각이 출범하면서 박남기에게 고되었던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이후 잠시 쉬다가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을 맡았다. 2001년에 함경북도 제2비서로 이동했다가 7월에 리근모의 뒤를 이어 함경북도 책임비서에 취임, 무려 10년 가까이 재임했다. 2003년과 2009년에 최고인민회의 11기, 12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2007년 6월, 리인모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0년 7월, 박남기가 김정일의 화폐개혁 실패의 죄다 뒤집어쓰고 처형당하자 오수용에게 함북 비서 자리를 물려주고 박남기의 자리였던 계획재정부장으로 이동했다. 2010년 9월 제3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자 비서국 비서,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로서 김정일-김정은 승계 시점에서 핵심적인 경제분야의 전문가로 좀 활약을 하려나 했더니 김정일의 방중 직후인 2011년 6월 6일에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직무조정을 이유로 비서에서 전격 해임되었다. 김일철, 리영호의 사례에서 보면 알 수 있지만 정치국이나 비서국의 일원이 해임된다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보도를 한다는 것은 북한에서 좋지 못한 징조이다. 이에 대해서는 북중경협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희생양이 된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안찬일은 그 외에 그가 중국식 개혁개방을 주장했다가 찍혔다는 설과 그가 중국 스파이로 몰렸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그나마 직무조정을 이유로 들었지 신병상의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일방적으로 내쫓긴 것은 아니니 김일철, 리영호급의 몰락은 아니지만 이후 어떠한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2012년 4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에서 방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13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2016년 5월 7차 당대회, 2019년 14기 최고인민회의 선거, 2021년 8차 당대회에서도 감감무소식이다. 고령의 나이이다보니 해임 이후 질병 등으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다가 2023년 9월, 건국 75주년 기념화보집에 홍석형의 이름이 적힌 로동신문 기사가 편집없이 실렸다. 적어도 역적 취급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3. 여담
동생 홍석중은 북한에서 유명한 역사소설가로 활동했다.4.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국가계획위원장 | ||
1993년 12월 7일 | 1998년 9월 5일 |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퇴임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
1993년 12월 8일 | 2010년 9월 28일 |
6기 21중전회에서 보선 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
조선로동당 함경남도 당위원회 책임비서 | ||
2001년 7월? | 2010년 7월? |
리근모의 후임으로 임명 오수용에게 이임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계획재정부장 | ||
2010년 7월? | 2011년 6월 6일? |
박남기의 후임으로 임명 3차 당대표자회에서 유임 정치국 회의에서 경질?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
2010년 9월 28일 | 2011년 6월 6일? |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정치국 회의에서 경질? |
조선로동당 6기 중앙위원회 계획재정비서 | ||
2010년 9월 28일 | 2011년 6월 6일 |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출 정치국 회의에서 조동 |
5. 참고문헌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북한의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