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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0:11:25

서철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참고문헌

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군인, 정치가.

2. 생애

1907년 4월 21일,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빈농 집안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나중에 발굴된 서철의 이력서에 따르면, 1930년에 하얼빈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1] 나중에 김일성 역시 서철이 하얼빈의학전문학교 출신이라고 언급하였다. 1930년 5월에 공청에 가입, 5.30 운동에 참가했다. 1932년에 중국 공산당과 유격대에 가입했으며 1938년에 김일성 유격대에 편입되었다. 이후 김일성을 따라 소련으로 퇴각, 88여단에 배속되어 소대장을 맡았다. 1945년 7월 조선공작단이 결성되자 당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해방 후 소련군으로부터 붉은 별 훈장을 수훈받았다. 귀국 후 원산으로 파견되어 당조직 사업을 맡았으며 중앙지도부 구성 이후에는 최용건, 김일과 함께 평안북도 당사업을 했다. 함흥시당 조직부장이 되어 박헌영을 추종하는 조선공산당 파벌을 쓸어내기도 했다. 1946년 8월, 보안간부훈련대대가 창설되자 제1소 문화부소장에 임명되었으며 인민군이 조직되자 1사단 산하 3연대 부연대장을 맡았다. 강동정치학원 군사교관으로 대남 공작원을 양성했으며 1949년 2월 7일, 강상호, 박금철, 전창철, 허봉학, 김창봉, 전문섭 등과 함께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인민유격대 총참모장에 임명되어 남한에 파견, 게릴라전을 지휘하다가 북으로 돌아갔다.

1953년 3월, 남로당파의 숙청으로 주중 대사가 공석이 되자 숙청당한 권오직의 후임으로 주중대사대리를 지내다가 1955년 2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주 북베트남 북한 대사로 임명되어 1958년 6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전창철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여 총정치국 부국장에 임명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차 당대표자회를 비롯하여 김일성의 대숙청으로 내부 정국이 혼란해지자 귀국 후 중장으로 진급, 1958년 9월부터 1960년 8월까지 김태근의 후임으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으로 재임, 군 내부에서 김일성 우상화를 적극 추동하였으며 1960년 1월에는 김경석, 리송운, 김익선 등과 함께 최창익, 박창옥, 고봉기, 김웅을 총살하고 박의완에게 10년형을 선고했다. 1958년 2월 5일, 김철만, 전문욱과 함께 국기훈장 1급을 받았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9년에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보선되었다. 1960년 9월, 4.19, 5.16 예견에 있어서 잇달아 헛다리를 짚은 연락부장 어윤갑이 숙청당하면서 후임 연락부장에 임명되어 1963년 2월까지 재임하고 류장식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 1963년 5월 강진건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3년 3월부터 1968년 4월까지 대외문화련락위원장으로 사업하였다.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외교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8년 5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다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파견되었다. 김영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한 후 1969년 12월에 정치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10월, 박문규 장의위원장을 맡았다. 이렇듯 빨치산 출신 중에서 특이하게도 외교 업무에 많이 돌려진 걸 볼 수 있다.

귀국 후인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상설회의 의원으로 선출, 1973년 1월부터 1977년 7월까지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으로 일했다.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의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8월에 총정치국장 리용무가 숙청당하자 2번째로 총정치국장에 임명, 1979년 8월까지 일했다.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중앙인민위원에 선출, 대의원자격심사위원을 했다.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9년 8월에 다시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에 임명,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및 검열위원장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및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5년 2월, 량광일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자격심사위원에는 재선되었으나 중앙인민위원에서는 물러났다. 1989년 7월에 검열위원장에서도 물러났다.

고령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는지 1989년 11월, 지방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참가를 마지막으로 동정보도가 중단되었으며,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 인민유격대 지휘 공로를 인정받아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박성철, 김익현, 조명선, 손종준, 최성숙, 강위룡과 함께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2년 9월 30일, 오랜 병환 끝에 사망했다. 부고에서 정치국 위원을 제외한 다른 직함은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보아서 그저 원로로 물러나서 쉬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김정일이 모두 장의위원을 맡았으며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은 공동으로 부고를 발표, "서철동지는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 밑에 민족해방, 계급해방 위업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 투쟁하여온 충직한 혁명전사이다. (...) 서철동지는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 복무로 하여, 확고한 로동계급적관점과 고결하고 소박한 인민적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서철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충직하게 투쟁한 주체형의 혁명가의 한생이였으며 동지의 혁명적풍모는 우리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여왔다. 서철동지의 서거는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로 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아들 서동명은 김정은 시대에 대외보험총국장을 지냈다는 보도가 있다.

5. 참고문헌


[1]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한의학을 배워 빨치산 중에서는 문식이 있는 편이었다고 한다. 북한 선전에서도 원래 의사 출신이었고 의사만 했어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는데도 혁명에 참여한 인물이라고 칭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