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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1:02:22

김달현(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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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선로동당 마크.png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colcolor=#FED11E> 상무위원 <colbgcolor=#fff,#222>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일성· 김일· 오진우· 김정일· 리종옥
가나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박성철· 최현· 림춘추· 서철· 오백룡· 김중린· 김영남· 전문섭· 김환· 연형묵· 오극렬· 계응태· 강성산· 백학림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최영림(승진)· 서윤석(승진)[1]
[1] 북한의 공식 약력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김만금도 정치국 위원을 지냈으나 언론보도상으론 확인할 수 없음.
1983년 3월 리종옥(강등)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허담(승진)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리근모(승진)· 홍성남(승진)
1988년 3월 6기 13차 전원회의 계응태(재승진)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전병호(승진)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광(승진)· 한성룡(승진)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김영주(복귀)
후보위원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허담· 윤기복· 최광· 조세웅· 최재우· 공진태· 정준기· 김철만· 정경희· 최영림· 서윤석· 리근모· 현무광· 김강환· 리선실
1981년 4월 6기 3차 전원회의 강희원
1981년 10월 6기 4차 전원회의 계응태(강등)
1982년 4월 6기 5차 전원회의 홍성남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전병호· 김두남
1983년 6월 6기 7차 전원회의 안승학· 홍성룡· 김복신
1983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김중린(강등)
1986년 2월 6기 11차 전원회의 홍시학· 홍성남(복귀)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한성룡· 홍성남(강등)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태복· 김철만(복귀)· 최영림(강등, 복귀)
1992년 12월 6기 20차 전원회의 연형묵(강등)· 김달현· 김용순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양형섭(강등, 복귀)· 홍석형[2]
[2] 이후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보선되었으며 그가 송두율이라는 주장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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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제1부총리 1982년 8월 31일 직함 신설
강성산1982-1984[1] 연형묵 1985-1986 김윤혁 1986-1986 홍성남 1986-1987
1987년 10월 14일 직함 폐지,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대체

[1] 1984-1985년 사이 남한 언론에서는 최영림이 제1부총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북한 문헌에선 당시 제1부총리 직함을 사용하지 않았음.
<rowcolor=#003478,#C39335> 정무원 부총리
5기
1972-1977
정준택·박성철·김만금·홍원길·최재우·남일(1972)
리근모·정준기·홍성남·허담(1973)
김영주(1974)
공진태(1975)
리종옥·계응태(1976)
6기
1977-1982
계응태·허담·정준기·강성산·공진태·김두영(1977)
강희원·로태석(1978)
김경련(1979)
조세웅·서관히(1980)
홍시학·김회일·홍성룡·최광·리근모재임명(1981)
7기
1982-1986
강성산·계응태·허담·홍성룡·홍시학·최재우·공진태·최광·김창주·김회일·김두영·김복신·정준기(1982)
김환·김영남(1983)
최영림·조세웅재임명·김복신재임명·김창주재임명(1984)
연형묵·안승학·현무광(1985)
홍성남재임명(1986)
8기
1986-1990
홍성남·김영남·김복신·정준기·김창주·김윤혁·최광·정준기(1986)
조세웅재임명(1988)
강희원재임명(1989)
9기
1990-1998
홍성남·강희원·김윤혁·김창주·장철·김영남·최영림·김복신·김환·김달현(1990.5)
홍시학재임명(1990.10)
공진태재임명(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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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3478,#C39335>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정준택 박창옥 리종옥 림계철
<rowcolor=#003478,#C39335>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정준택 윤기복 최재우
<rowcolor=#003478,#C39335>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홍성남 홍성룡 로태석 공진태 홍성룡
<rowcolor=#003478,#C39335>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홍성남 박남기 홍성남 김달현 홍성남
<rowcolor=#003478,#C39335>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최영림 김달현 홍석형 박남기 김광린
<rowcolor=#003478,#C39335>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로두철 김일철 박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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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김일성 말기에 크게 주목받은 경제 엘리트지만 김일성이 채 죽기도 전에 몰락했다.

2. 생애

1941년 평남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해방 이전에는 청진에서 유랑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 김일성의 외가쪽 5촌 조카인 강관주의 여동생 강관숙과 결혼하였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김일성 일가에 포함된다.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이후 주로 소련, 동독, 체코로 유학가는 북한 엘리트들 중에서는 특이하게 알바니아로 유학했다. 귀국 후 1963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을 지냈다.

1977년 11월 과학원 부원장을 지냈으며 1980년 정무원 참사실 실장, 1982년에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86년에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1987년 3월 19일, 김환의 뒤를 이어 정무원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에 임명되면서 중용되기 시작했고 1988년 2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에서 해임되어 홍성남의 뒤를 이어 국가계획위원장으로 이동했다.[1] 1988년 6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대외경제위원장으로 이임했으며 1988년 10월 7일에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정근의 뒤를 이어 정무원 무역부장을 겸하게 되었다. 정무원에서 자리가 높아짐에 따라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는 한편 정무원 부총리에 선출되었다. 1991년 6월, 연형묵과 함께 태국을 순방하였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고 3월에 이집트, 6월에 리비아를 순방하였다. 귀국 후 미국 및 일본의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으며 7월에는 무려 열흘이나 서울을 방문하여 남한에 상당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이때 노태우 대통령과 접견하였다. 당시 북한의 어려운 사정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토로하는 등 노태우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남한 측으로부터 말이 통하는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이것이 나중에 숙청 사유가 된 것으로 보인다. 12월에는 이란을 방문하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남한에서는 북한의 온건개혁세력으로 평가받았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12월 10일 조선로동당 6기 20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 1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대외경제위원장에서 해임되어 최영림의 뒤를 이어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대외경제위원장 자리는 리성대가 물려받았다.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4차 회의는 이를 추인하였다. 이후 1993년 5월 군민다리 준공식, 9월 자재공급 일군대회에 참석하는 등 여러 활동을 보였으며 주민생활 향상과 경제혁신 실현이 자재공급 분야의 당면과제라고 강조하였다. 이어 가격일군대회도 참석하였다.

하지만 1993년 12월 7일, 3차 7개년 계획의 실패의 희생양으로 찍히는 바람에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직무 이동을 구실로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장에 해임되고 홍석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소문에 의하면, 흥남비료공장의 현대화를 위해 북한에서 압축식 터빈기 자체제작이 가능한지를 검토했다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솔직하게 결론내렸지만, 김달현을 미워하던 김정일이 이걸 트집잡아서 간부강연회에서 그를 조리돌렸다고 한다. 강명도의 주장에 따르면, 신임 대외경제위원장 자리를 두고 김달현은 리성대를 지지했는데, 최정근을 지지한 김국태가 이에 반발하여 김달현을 몰락시켰다고 한다. 1993년 12월, 6기 21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해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2.8 비날론 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강등당하였는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등을 지낸 것 외에는 별 다른 소식이 없었으며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에 탈락하는 등 김정일에게 찍혔음이 확실시되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계속 이름이 오르내려서 1990년대 후반에 강성산의 후임 총리로 발탁되었다는 보도가 수차례 나온 바가 있다.

이후 소식은 없으나 2000년 경에 김정일이 김달현을 미워하여 그를 확실히 조지기 위해 연형묵을 검열단장으로 하여 2.8 비날론 연합기업소를 검열하게 하자 사무실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풍문이 전해졌다. 이 풍문에 따르면 김정일은 김달현이 목숨을 끊자 그 처자식에게 죄를 물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버렸다 카더라. 하지만 이런 류의 풍문들을 보면 김일성은 어떻게든 나라 살리려고 했는데 사치에 물든 수꼴 김정일이 일방적으로 패악을 부려 망했다는 내러티브라서 신빙성이 높진 않다. 확실한 것은 김달현이 김정일과 사이가 좋지는 않아 보인다는 것 정도. 통일부 자료에서도 2000년 정도까진 2.8 비날론 연합기업소 지배인이었던 것이 확인되는데 그 이후에는 동정이 확인되지 않아 2000년 즈음에 죽었을 수도 있다. 태영호는 김달현이 지방에서 울화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국정원의 보고에 따르면 2000년 즈음에 북한 안에서도 김달현이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며 장진성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이 나중에 김달현이 옳았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믿거나 말거나....

3. 여담

4. 참고문헌


[1] 후임 화학-경공업위원장은 김환. [2] 이만갑 544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