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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1 14:58:18

김중린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대남비서 시절2.3. 근로단체비서 시절 및 말년
3. 장의위원회 구성4. 여담5.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대남, 근로정책의 전문가로 김일성과 김정일 시대의 대표적 당료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923년 12월 7일, 현재 자강도 우시군에 해당되는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났다. 김영주의 처가 친척이라는 말이 있으나 90년대 이전 떠도는 북한 간부들의 친인척 관련 정보는 증거 없는 풍문이 많아서 믿을 것은 못된다. 신의주보통학교 졸업 이후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독학하여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여 전문학교 입학시험 응시자격을 취득하였고 소학교 교원이 되어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교원생활을 하였다. 머리가 좋았는지 고등문관시험 예비시험도 통과했다고 한다. 해방 후 공산당 열성분자로 돌변, 1946년 벽동군 당위원회 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7년 조선로동당 중앙당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피현군당 선전선동부장, 1948년 함북도당 부장을 거쳐 1952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에 배치되었다.

이후 1953년 소련 고급당학교 유학의 기회를 얻기 되었으며 1954년 귀국하여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을 거쳤다. 글재주, 일본어, 영어 등이 능통하였기 때문에 각종 외교업무에 동원되어 1956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 1958년 9월 전원회의에서 국제부가 신설되면서, 국제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59년 2월 북일 적십자회담 대표에 임명되었으며, 1960년 5월, 대남총국 산하에 대외연락부가 설치되면서 대외연락부장에 임명되어 남한 문제를 전담하였다. 1961년 5월 조평통 중앙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김일성 우상화를 국제적으로 수출하는 것을 잊지 않음으로 김일성의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김일성 전기를 조총련을 통해 영어, 불어, 일어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수출한 것이 김중린이 주도한 사업이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가 개최되자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1년 2월, 행정부장 안영이 알바니아 대사로 조동됨에 따라 1962년 후임 행정부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5년 9월. 김은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2.2. 대남비서 시절

한편 김일성은 60년대에 남한에 대대적으로 게릴라를 보내면서 박정희 정권을 뒤엎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대남 강경론을 주도하던 허봉학, 김창봉 등의 세력이 커지는 결과로 돌아오자 이들을 숙청하게 된다. 김일성은 자신이 대남노선을 다시 장악하는 과정에서 1969년 김중린을 대남비서로 전격 발탁하였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가 개최되자 김중린은 대남비서로 유임되는 한편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2년 8월, 방북한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이며 신의주고보 1년 선배인 고려대 교수 김준엽과 만나서 회후하기도 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 채택 이후에는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 1973년 1월, 정준택 장의위원,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김중린은 남한 사회를 교란하기 위한 지하당 공작을 지휘하는 한편 1973년 남북대화 중단 이후에는 남한에 대한 여러 테러를 지휘하였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여기에 1975년 10월에는 남침 땅굴이 발견되는 사고가 터지는가 하면, 전 중앙위원회 대외조사부 부부장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김중린이 박정희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40만 달러나 들여서 남한 군부를 매수하려다가 사기꾼에게 죄다 날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한편 대남공작 부서를 장악하기 위해서 나서던 김정일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서윤석에게 지시하여 무려 6개월 짜리 초강도 조직지도부 검열을 대남공작총국에 때려버렸고 김중린은 김정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을 기쁘게 하느라 그렇게 됐다고 변명하였다. 이에 김정일은 대노하여 이는 빨치산 20만이 호응한다고 한 박헌영의 궤변과 마찬가지라고 김중린을 혹독하게 질책한 다음에 아예 대남비서직과 대남공작총국을 폐지해버리고 문화부를 공중분해하여 남조선연구소로 격하시켰다. 김중린도 남조선연구소장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아주 몰락한 것은 아니라서 1976년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78년 1월 대남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에 재기용, 3월에 정치국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김중린은 다시 대남비서 겸 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었고 1982년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4월에는 최현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1983년의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때문에 다시 한번 타격을 입게 된다. 아웅 산 테러 사건은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의 사회주의 외교에는 상당한 호기로 작용했으나 서방 외교는 그야말로 망하고 말았고 뭣보다 목표인 전두환은 죽이지 못하고 남한의 어그로만 끌었다. 이 때문에 김중린은 1983년 12월, 대남비서에서 해임되어 허담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1985년 1월에는 후보위원 자리마저도 빼앗겼다.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김중린만한 전문가가 없었는지 1985년 2월, 다시 대남비서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변덕이 무슨 죽 끓듯 하여 1986년 2월 5일부터 8일간 진행된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대대적 인사개편이 이루어져 공진태, 홍성룡, 안승학이 정치국에서, 연형묵, 안승학 그리고 김중린이 비서국에서 해임되었다. 정치국에는 홍성남, 홍시학이 보선되었고, 비서국에는 김환, 리근모, 계응태가 보선되었다. 1987년 조선중앙통신사 사장, 공보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88년 11월, 6기 14중전회에서 다시 대남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 1월 조선로동당 6기 17중전회에서 윤기복에게 대남비서 자리를 넘겨주고 근로비서로 이동함으로 20여년간 맡아온 대남업무를 마쳤다.

2.3. 근로단체비서 시절 및 말년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에 위촉,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가 열리자 자격심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의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김일성, 오진우, 최광 등 김일성 시대의 최고 엘리트들이 줄줄이 노환으로 죽으면서 당의 원로로서 계속 서열이 올라갔다.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 2002년 6월, 최홍희 장의위원,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도 지냈다.

죽기 직전인 2010년까지도 각종 대회에 참석하였으나 2010년 4월 28일 1시 10분, 심근경색으로 86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공동명의의 부고를 발표하여 "일찍부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령도를 높이 받들고 당을 조직사상적으로 더욱 강화하고 당과 대중의 일심단결을 튼튼히 다지며 조국통일과 혁명의 국제적련대성을 강화하기 위한 투쟁에 온갖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였다고 하면서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앞에 세운 그의 공적은 길이 남아있을것"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국장을 거행하기로 결정, 전병호를 장의위원장으로 위촉하고 40명을 장의위원에 임명했다.

4월 30일 평양에서 국장이 거행되었고 북한의 주요 엘리트들이 대거 참석했다. 최태복이 추도사를 하였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012년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 김정은은 개회사를 통해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김락희, 안달수와 함께 김중린을 언급하였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지만원은 김중린이 할짓이 없었는지 1980년 5월에 광주까지 다녀간 134광수라고 주장한다.(...) 김일성에게 축지법 배운 것으로 추정

5.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