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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4:47:32

해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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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제2대 군주
부루왕 | 扶婁王
파일:삼국유사 동부여 본기.png
삼국유사에 실린 부루왕 기록.
<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출생 기원전 120년경 추정
부여
사망 기원전 60년경 추정(향년 60대 추정)
동부여
능묘 미상
재위기간 제2대 군주
~ 기원전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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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A5445><colcolor=#fbe673> 성씨 해(解)
부루(扶婁)
부모 부왕 해모수왕 / 단군
모후 유화부인
자녀 해금와, 서자(庶子)[1]
왕호 부루왕(扶婁王) }}}}}}}}}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동부여 건국2.3. 아들을 얻다2.4. 죽음과 사후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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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의 제2대 군주. 금와왕의 아버지.

삼국유사》의 부여 건국 설화에 의하면 북부여를 건국한 시조 해모수의 아들로 전해진다. 나라의 도읍을 옮겨서 동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해부루에겐 서손으로 우태가 있었는데, 그와 소서노 사이에서 백제 시조 비류 온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온조 시조설에 의해 온조는 고구려를 세우는 추모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에서는 여러 전승을 동시에 전하고 있으며, 비류 시조설에 따르면 백제 왕실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부여에서 내려온 것이 된다.

夫餘, 扶餘 상고한어로 /*pa.la/ '빠라' 또는 /*ba.la/ '바라'로 읽었을 것으로 재구되는데, 이와 음운적 연관성이 있기에 해모수(태양신)와 마찬가지로 부여를 의인화한 관념적 인물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2. 생애

2.1. 출생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늘에서 오룡거를 타고 내려온 해모수 흘승골성(訖升骨城)을 도읍으로 삼고, 북부여를 건국했으며 아들을 낳았다.

홀승골성(오녀산성)은 훗날 주몽이 졸본으로 탈출해 고구려를 세울 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고구려 건국 신화와 부여 건국 신화가 겹치는 부분이 많은 이유는 훗날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하면서 그 건국 신화가 융합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해모수는 아들의 이름을 부루(扶婁)라 지었으며, 그 성을 해(解)라 하였다. 이리하여 해씨 성과 이름을 얻게 된 해부루는 장성하여 북부여의 왕이 되었다.

한편, 조선 전기에 지어진 《 응제시주》에 따르면 하나라 우임금 시절부터 살아있던 것으로 나오지만 단군의 아들인 부루와 헷갈린것 같다.

2.2. 동부여 건국

그러던 어느날 신하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天帝)가 나타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 땅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너는 이 곳을 피하라. 동해 해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지가 기름져 왕도를 세울 만하니라."라는 계시를 내렸다. 물론 고대의 이런 기록들이 그러하듯 후대의 각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란불이 왕에게 이를 고하자 해부루는 이를 따라 나라의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라 하였다.
《삼국유사》 <동부여> 편
삼국유사 동부여편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지만 <북부여> 편에서는 단순히 상제의 명령을 받아 해부루 왕이 도읍을 옮겼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삼국유사》 <동부여> 편에서는 천제의 계시에 나오는 천제의 자손이 바로 동명성왕이었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모용선비의 침입을 받아 왕인 의려가 자살하고 자제들이 북옥저로 도망간 이후 왕자 의라가 왕위에 오르고 진나라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진서》< 동이전> 부여편
그러나 동부여는 이 285년 모용선비의 침입 때 일부 사람들이 수립한 체제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그 근거로는 《삼국지》<관구검전>에 북옥저를 '매구(루)'라고 호칭했으며, 광개토대왕릉비에도 동옥저가 미구루라고 호칭되어 있는 것과, 《자치통감》에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북부여가 서쪽으로 이동해 옥저와 교통이 끊어졌다'라는 기사가 있어 그 근거로 본다. 즉, 해모수-해부루-금와-대소로 이어지는 부여 4대왕은 모두 북부여의 왕이라는 것이다.

이 설화의 의미에 대한 가장 유력한 추정은 이렇다. 위 설화에서는 '국가를 통째로 버리고' 등 가섭원으로 천도하고 백두산으로 추정되는 태백산에서 유화를 만났다고 나오는데 이것이 위의 모용선비의 침략으로 인한 피난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후대의 누군가가 조작한 것으로 본다.

이에 반박을 제기하면서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들기도 하는데, 광개토대왕릉비 문서에도 서술했지만 추모왕이 북옥저를 복속했다가 285년 동쪽에 고립된 부여 유민이 북옥저에서 건설한 동부여를 복속한 상태로 놔두었으므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저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없다.

또 두 개를 별개로 존재한 정치체제가 그당시 존재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송호정 교수가 그러한데, 애초에 삼국사기에 금와-해부루-대소의 부여가 언제는 북부여라 나오고 언제는 동부여라 나오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이거야말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송호정 교수 자체가 최근에 좀 무리수를 많이 던지는 편이다.

또 간단히 이렇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도 하는데, 고구려 후기가 되면 동부여 출신 귀족들이 고구려 상류층을 형성하게 되며, 이중 연개소문의 집안은 고구려에서 상당히 강력한 집안이었다. 게다가 자신들만의 시조전승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한창 초기 기록 정리가 진행 중이었던 상황에서 이들이 역사를 왜곡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2.3. 아들을 얻다

이후 해부루는 나이가 들어서도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을 고민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내 아들을 얻기를 빌었다. 그러자 해부루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 앞에서 멈추어 서더니 눈물을 흘렸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해부루가 돌을 치워보니 그 아래에 황금빛 개구리 형상의 아이가 있었다. 해부루는 이 아이를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아들이라 하면서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는 태자로 삼았다.

2.4. 죽음과 사후

해부루왕이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해부루왕이 죽은 후에 그 아들인 금와왕이 부여의 재위에 올라 부여를 다스렸다.

3. 대중매체에서

파일:해부루왕.jpg
사극 주몽》에서는 배우 박근형이 연기하였다. 극중 해부루왕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군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한나라와 화친 정책을 펼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해모수가 해부루 왕의 아버지라는 것은 모순으로 취급되어 잘렸다. 그래서인지 아들인 금와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고조선 부흥군을 이끄는 해모수와 의기투합하자 이를 굉장히 못마땅해하는 듯한 모습도 드러난다.


[1] 비류 측 전승에 나오는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庶孫)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