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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8:12

마한왕(9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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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미상
성씨 미상
미상
선대 군주 마한왕 2세(馬韓王)
생몰년도 ? ~ ?
재위년도 ? ~ 기원후 9년 4월

1. 개요2. 생애

1. 개요

마한의 마지막 마한왕.

마한왕 3세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 3대 군주는 아니나, 실체가 파악된 순서로는 3번째 마한왕이기에 편의상 3세로 표기된 것이다.

2. 생애

마한왕 2세는 기원전 19년에 사망했으므로 그로부터 몇십 년 뒤 사람이라고 기록된 이 마한왕은 2세 이후에 즉위한 인물로 추정되며, 자세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 신라, 백제 초기 기년은 거진 대부분은 믿을 수 없으니, 이 마한왕은 위 사례 마한왕 본인이거나, 그 후계자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적어도 마한 목지국이 맹주 자리를 잃게 되는 건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중후반으로 해석되고 이 시기는 문헌상으로는 백제 고이왕~ 책계왕 때인데, 이렇게 되면 위 1과 또 다시 연대가 맞지 않게 된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백제가 마한에 대해 이래저래 제후의 입장에서 상국으로 예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침공해 온 말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뒤에 포로로 잡힌 말갈 추장 소모를 마한에 보낸다던가, 수도를 한수 남쪽의 한성으로 옮긴 뒤에 수도 옮긴 사실을 마한에 보낸다던가, 특히 기원후 6년( 온조왕 24년) 온조왕이 웅천(熊川)에 목책을 세우자 "북쪽에서 도망쳐서 막 강을 건너 와 발 디딜 곳도 없던 너한테 동북쪽 땅 100리를 떼 줘서 살게 해 줬더니 이제 와서 힘 좀 세졌다고 나한테 기어오르려 드느냐"고 사신을 보내 온조를 꾸짖어서 온조가 웅천책을 헐게 만들었다고 한다. 일단 백제 왕이 마한에게 숙이고 들어간 것인데, 조선 시대의 안정복은 마한정통론의 입장에서 해당 기록을 굉장히 인상 깊게 봤던 것인지 동사강목에서 이렇게 평하고 있다.
기준(箕準)이 나라를 잃고 분패(奔敗)한 나머지인데도 잘 싸워서 마한(馬韓)이 다시 왕호(王號)를 일컫게 되었으니, 그 재능이 역시 일컬을 만하였다. 그런데 후손이 미약하여 스스로 떨치지를 못해서, 국내가 갈라져 신라ㆍ백제가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왕강(王綱)은 풀리고 국토는 날로 줄어들어서 나라는 나라답지 않고 임금은 임금답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의 말 한 마디에 백제가 이미 쌓았던 성책을 허물게 된 것은 한 줌 명분과 의리가 오히려 남아 있어서였으니, 이는 참으로 쇠잔한 나라를 부흥시키고 난을 바로잡는 일대 기회였던 것이다. 왕이 이때에 덕정(德政)을 닦고 기강(紀綱)을 떨치며, 현능(賢能)한 이를 들어서 쓰고 장병을 훈련시켜, 안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밖으로 적을 방어하였다면 전날 조공(朝貢) 바치던 78개 국이[1] 반드시 다시 마한의 궁정에 북적댔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안일과 당장의 편한 것만을 취하다가 몇 년 못 가 멸망하고 말았으니 한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백제는 약해지는 마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2] 기원후 8년 약해지는 마한을 다른 나라가 먹으면 못먹으니만 못하다고 하면서 그해 11월 사냥을 핑계로 마한을 기습해 마한의 국읍(國邑)을 아울렀다고 한다.

기원후 9년 4월 마한의 원산성, 금현성 2성이 항복하면서 마한이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 온조 집단을 마한 거수국 중 하나로 승인해준 마한왕과, 이후 백제국에게 급습당해 위신을 잃은 마한왕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한강 유역으로 넘어오기 전에 우선 임진강에 자리잡은 상한 연대가 기원후 2세기 중반(고분 상한이 2세기 후반이므로, 그보다 한 세대 위를 상한으로 잡을 수 있다.), 하한 연대가 3세기 중반인데, 마침 신라에서 낙랑계 조선인 집단이 서라벌 일대에 내려와 다른 약간 계통이 다른 고조선 후예 집단을 아우르기 시작하는 시기도 상한이 현재로서는 기원후 2세기 초중반(서라벌 일대를 본격적으로 통합해 서라벌 내 다른 고분 집단들에게 강력한 위계체제를 관철하기 시작하는 고분들의 상한이 2세기 중반. 앞서와 마찬가지로 실제 내려온 시기를 그보다 한 세대 위로 잡을 수 있다.)이다. 따라서 온조 집단을 받아들인 마한왕은 박혁거세에게 조문을 받은 마한왕보다 후대 인물일 개연성이 높은데, 이는 문헌으로도 부합하는 사실이다. 한편, 이 두 마한왕은 의외로 존재 시기가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진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2세기 중반 ~ 3세기 중반 온조 집단의 임진강 혹은 경기도 체류를 승인해준 마한왕, 3세기 후반경 청당동을 함락당한 마한왕 모두 목지국 거수일 확률이 매우 높다. 이 당시 건마국은 토돈분구묘계 및 송국리유형 문화인 집단이 원래의 건마국 중심 세력이었던 옛 준왕계에게서 주도권을 가져온 상황이었으나 이미 영향력은 기원후 1세기 후반 ~ 2세기 초반 건국된 천안 목지국에게 내준 상태였기 때문이다.


[1] 마한 소국 54개 더하기 진한 변한 각 12국 합쳐서 78개 국. [2] 이듬해 7년 한성 민가에서 소머리는 하나이나 몸뚱이가 둘인 송아지가 나와 이웃나라(=마한)을 합병할 징조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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