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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2 10:45:38

핫피 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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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はっぴいえんど
1970/08/05
정규 2집 風街ろまん
1971/11/20
정규 3집 HAPPY END
1973/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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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ppiendo.jpg
(왼쪽부터) 오오타키 에이이치 · 스즈키 시게루 · 호소노 하루오미 · 마츠모토 타카시
<colbgcolor=#FFFDF4><colcolor=#000,#555>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DF4> 파일:핫피 엔도 로고.svg 핫피 엔도[1]
はっぴいえんど
Happy End
}}}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결성 1969년 9월[2]
도쿄도 치요다구
데뷔 싱글 싱글 1집
12月の雨の日/はいからはくち
데뷔 앨범 정규 1집
[[はっぴいえんど(앨범)|はっぴいえんど]]
해체 1972년 12월 31일
재결성 1973년[3], 1985년[4], 2021년[5]
멤버 호소노 하루오미 (보컬, 베이스, 기타, 키보드, 작곡)
오오타키 에이이치 (보컬, 기타, 작곡)
마츠모토 타카시 (드럼, 타악기, 작사)
스즈키 시게루 (기타, 보컬, 작곡)
장르 록 음악,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레이블 URC, Bellwood ⁄ KING

1. 개요2. 영향력3. 멤버4. 자국어로 록을 부르다5. 후일담6. 디스코그래피

[clearfix]

1. 개요

핫피 엔도 1969년 결성된 일본 포크 록 밴드이다. '에이프릴 풀'에서 활동하던 마츠모토 타카시, 호소노 하루오미가 떨어져 나와 오오타키 에이치와 스즈키 시게루를 영입해 결성되었다.[6]

음악 노선 차이로 분쟁이 발생해 결성 3년만인 1972년 해체하였기에 활동 기간은 길지 않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그 3년 간의 활동의 성과는 이후의 일본 록 음악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그룹 해체 이후에도 네 명의 멤버들은 각자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고, 큰 성과들을 이룩하며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YMO로 유명한 호소노 하루오미의 활동이야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고, 2010년대 후반 이후 시티팝이 재조명되면서 일본 AOR의 선구자로서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다시 주목받았다[7]. 또한 마츠모토 타카시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사가로 평가받으며, 스즈키 시게루는 세션 뮤지션으로서 600장 가까운 음반에 참여하였다.

2. 영향력

핫피 엔도는 3년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 밴드의 지속적인 유산은 1971년의 걸작 風街ろまん으로 대표하는 본질적으로 일본적인 역동적인 록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완전히 일본어로 노래된 이 노래들은 처음에는 혁신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1960년대 후반의 밴드, 리틀 피트 또는 킹크스를 떠올리게 하는 선명하고, 멜로디적이며, 스웨거링한 포크 록이다. 그러나 핫피 엔도는 1970년대 초반 포크 록을 개념적, 구성적, 감정적 깊이가 특징인 그들만의 스타일로 재탄생시켰다. 風街ろまん은 일본 아티스트들과 관객들에게 일본 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영향을 받은 팝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고, 이는 일본 팝의 궤적을 영구적으로 바꾼 돌파구였다.
피치포크 #
그 와중에 나타난 이단아 무리의 중심이 바로 핫피엔도였다. 당시 성행하던 브리티시 록에도 인색한 당시 일본이었지만, 그들은 상관없다는 듯이 버팔로 스프링필드와 버즈류의 포크 록으로 무장해 아직 공략되지 않은 급소를 노렸다. '브리티시 록이 미국 록을 카피해 태어났으니[8] 일본 록도 미국의 것을 카피해야 한다'라는 사상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 그들을 선구자적 존재로 추앙하게 만든 것이 바로 '일본어'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아주 멋있게.
izm 리뷰, 황선업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들국화, 영국의 비틀즈 같은 위치에 있는 밴드다. 다만 음악사적으로는 이정도 위치에 있는 밴드임에 틀림없으나, 현재 시점의 일본에서의 인지도로는 비틀즈는 물론 한국에서의 들국화보다도 밀리는 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멤버들이 워낙 걸출한 뮤지션들이었다보니 멤버 개개인은 잘 알려져 있다. 멤버들의 지명도의 합이 밴드로서의 핫피 엔도의 지명도를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다. 세 밴드 모두 멤버 전원이 작사, 작곡에 참여하고, 보컬 전담이 따로 없이 각자 작곡한 곡의 보컬을 맡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밴드의 주축이 되는 두 멤버의 음악적 노선 및 견해 차이가 원인이 되어 해체한 점도 비슷하다. 또한 각 국가의 굉장히 유명한 명반 리스트 1위 자리에 자신들의 앨범을 올려놓은 국민 밴드라는 공통점이 있다.[9]

상기했듯 오늘날 대외적 지명도에서는 오랜 기간 활동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은 사잔 올 스타즈에 밀리지만 이건 밴드로서 롱런을 못한 탓이 크다. 후배 사잔처럼 엄청난 롱런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80년대까지만 버텼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다만 멤버들의 1980년대 솔로 커리어 또한 레전드로 남아 있다. 핫피 엔도가 없었다면 사잔 올 스타즈가 데뷔할 토양이 확보되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후배 밴드 사잔 올 스타즈가 없었다면 핫피 엔도가 개척한 일본 록이 일본 대중음악의 대들보로 굳건해지는 과정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3. 멤버

파일:happiendo_members.jpg

1985년 재결합 무대 당시의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4. 자국어로 록을 부르다

1966년, 비틀즈가 일본을 방문했다. 아직까지 서구문화에 대해 보수적이었던 기성세대의 큰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도칸에서 라이브를 가졌고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록큰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내 수많은 밴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이들의 음악을 그룹 사운드, 줄여서 GS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그룹 사운드들은 일본 전통가요 엔카의 멜로디와 브리티시 록을 결합 시킨듯한 사운드로 일본 초기 록을 들려 주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는데, 바로 그들의 음악에 담긴 메시지가 일본 고유의 정서와는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자국어인 일본어 로큰롤을 한다는 화두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10] 이 논쟁은 GS 이후 등장한 그룹에서도 이어졌는데, 플라워 트래블링 밴드 같은 밴드는 이 문제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아예 무의미한 가사로 점철된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나아갔다[11] 반면 핫피 엔도는 이들과는 반대의 입장을 취하며,

당시 일본 음악씬에서는 '일본어로 록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일본어로 노래하는 록 음악이 당연해진 지금의 관점에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90년대 초반 대한민국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한국어의 음운적 특징이 랩에 적합한지'와 관련한 열띤 논의가 진행되었다.[12] 핫피 엔도는 확고한 실력에 의한 자기 스타일을 보여줌으로서 일본어로도 훌륭한 록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 파이오니어로 평가받는다.

이런 문제 의식은 밴드 명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발음해보면 알겠지만 Happy End의 일본어 음차 표기다. 일본어에서는 외래어를 가타카나로 표기하기 때문에 영어인 Happy End는 원래 ハッピーエンド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의도적으로 일본어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히라가나로 표기한 것이다. 즉 영어 단어를 우리의 문자로 표기하는 것처럼, 외국의 록에 우리의 정신을 담아내겠다라는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는 작명이었다.

그러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주위로부터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당시에는 외국의 음악을 온전한 일본어 가사로 부른다는 것이 매우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들렸기 때문이다. 멤버인 호소노 하루오미도 처음에는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에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드럼 담당이자 작사가인 마츠모토 타카시는 끝까지 일본어 가사를 고집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핫피엔도 2집 < 風街ろまん>에서 빛을 발한다.
파일:kazemachiroman.jpg
핫피 엔도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평가 받는 < 風街ろまん>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마츠모토 타카시, 스즈키 시게루, 호소노 하루오미, 오오타키 에이이치
데뷔작인 < はっぴいえんど>는 음악과 가사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 설익은 앨범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내놓은 < 風街ろまん>은 호소노 하루오미와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추구하던 아메리칸 록큰롤에 가깝게 다가가면서도, 마츠모토 타카시의 문학성이 정점을 찍은, 아주 세련된 걸작이었다. 이 앨범은 그 동안의 '자국어로 록을 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정말 일본 고유의 향취가 느껴지는 따스한 포크 록' 정도 되겠다. 그렇다고 듣기 거북할 정도로 왜색이 강하다는 것은 아니고 대표곡인 風街ろまん(바람 거리의 로망)는 은은한 동양 특유의 정서가 담겨 있는 훌륭한 포크 곡이다. 외국인들에게도 열렬한 지지를 받았을 정도.

음악적으로 페어포트 컨벤션이나 버즈[13], 버팔로 스프링필드, 리틀 피트, 모비 그레이프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편이다. 본인들 말로는 잭스 미야자와 겐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 같은 요조한 포크 영향력도 강한 편이다.

5. 후일담

핫피 엔도는 결국 멤버들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해 1972년 말 해체하게 된다. 밴드의 두 축인 호소노 하루오미와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음악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을 방문해 마지막 음반을 제작하자는 제의에 따라 3집 앨범 HAPPY END를 만들게 되는데, 이미 멤버들의 음악적 세계가 뚜렷해진 이후라 비틀즈의 화이트 앨범과 같은 옴니버스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 되어버렸다.

호소노 하루오미는 실험적인 성향이 강했다. 솔로 1집 < HOSONO HOUSE>는 완전히 포크로 회귀한 앨범이었고 그 이후 낸 <トロピカル・ダンディー>, <泰安洋行>, <はらいそ>는 당시 유행하던 트로피컬 사운드를 접목시킨 앨범들이었다. 이후 호소노는 사디스틱 미카 밴드의 드러머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키보디스트 사카모토 류이치를 끌어들여 일렉트로닉 그룹인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일명 YMO)를 결성하고 실험적인 전자음악으로 해외에서도 큰 성공을 거둔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문서 참고. 후에 YMO가 해체되고 나서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해나갔으며 장르를 막론하고 수많은 뮤지션들과 교류하고있다. 물론 현재진행형.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일찍이 상업음악의 저력을 알고 '나이아가라'라는 이름의 레이블을 설립한다. 나이아가라를 통해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누키 타에코, 사노 모토하루 등 재능있는 뮤지션들을 발굴했지만 음반이 잘 팔리지않아 경영의 난항을 겪는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사단 출신 야마시타 타츠로의 RIDE ON TIME이 크게 히트하면서부터 나이아가라 뮤지션들 역시 재조명 받으며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경영자로 물러났지만 뮤지션으로도 간간히 활동해온 그는 전 동료인 마츠모토 타카시와 함께 < A LONG VACATION>[14]과 <EACH TIME>을 발표해 큰 호응을 얻고, 시티팝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두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해 각각 오리콘 앨범 차트 2위와 1위를 기록한다. 이후 프로듀서와 CM송 작곡가로 활동하다가 1997년, 12년만의 컴백을 선언하며 '幸せな結末(행복한 결말)'을 발매한다. 이 노래는 게츠쿠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의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아주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말년에는 야마시타 타츠로의 라디오방송에 간간히 얼굴을 비추다가 2013년 12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15]

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 스즈키 시게루는 주로 호소노의 백업세션으로 활동했다. 뿐만아니라 많은 뮤지션들의 기타 세션으로도 활동해왔다. 여담으로 마약 투여 혐의로 인해 포니 캐년/킹 레코드 등에서 음반 판매가 중지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 쪽에서는 이게 관행이라는듯.[16] 물론 유료 다운로드도 한동안 막혔다. 현재는 제재가 풀려 다시 구할 수 있다. 솔로 앨범인 BANDWAGON과 LAGOON은 명반으로 평가받으니 들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마츠모토 타카시 역시 세션 활동을 이어가며 특히 작사가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특히 일본의 전설적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의 히트곡들을 많이 담당했다. 일부 곡에서는 작곡으로 참여한 호소노 하루오미 및 오오타키 에이이치와 협업하기도.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솔로 음반 작업에도 협업하여 상술된 <A LONG VACATION>과 <EACH TIME>이라는 일본 가요 역사상 길이 남을 명반을 함께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 외 콘도 마사히코, 나카야마 미호, KinKi Kids의 곡들을 많이 작사했다. 요새 유명한 작사 작품이라면 성간비행이 있겠다.[17]

이렇게 보면 호소노가 실험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오오타키는 조금 대중적인 성향이 강한 것으로 보이나, 의외로 핫피 엔도 앨범을 들어보면 그 당시에는 호소노가 대중적인 포크 음악을 선호했고, 오오타키가 도전적인 하드 록 트랙들을 많이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둘 다 여러모로 밴드 시절과는 다른 커리어를 이어나간 셈.
오오타키 에이이치 작곡의 바람이 부는(風立ちぬ) 호소노 하루오미 작곡의 천국의 키스(天国のキッス)
두 곡 다 작사는 마츠모토 타카시가 담당했다.
멤버 네 명 모두 마츠다 세이코와 협업한 것으로 유명한데, 마츠모토 타카시는 마츠다 세이코의 1980년대 초반 전담 작사가로 활동할 정도였고, 호소노 하루오미, 오오타키 에이이치, 스즈키 시게루 모두 마츠다 세이코에게 곡을 제공했다. 마츠다 세이코의 4집 앨범 風立ちぬ는 아예 A 사이드의 5곡 전곡을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작곡 및 편곡을 담당할 정도였고, B 사이드 5곡 중 4곡은 스즈키 시게루가 편곡, 그중 ' 黄昏はオレンジ・ライム (황혼은 오렌지라임)'는 작곡까지 담당했다. 6집 앨범 Candy는 A 사이드 B 사이드 양면 모두에 호소노와 오오타키가 사이 좋게 자신의 곡을 하나씩 제공해 총 4곡이 핫피 엔도 멤버의 곡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마츠다 세이코 외에도 마츠토야 유미 등이 핫피 엔도 멤버들과 두루 교류한 것으로 유명하다.

여담으로 핫피 엔도와 함께 이 도전을 했던 록 뮤지션이 한명 있는데 RC 석세션의 보컬이였던 이마와노 키요시로(忌野清志郎)이다. 이마와노 또한 일본 록의 역사를 파고 들어가다 보면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다. 핫피 엔도가 자국의 언어로 스며든 따스한 포크록을 지향했다면 RC 석세션은 자국의 언어로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방향성의 차이가 있었다. 두 밴드 모두 후배 록 밴드들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이 해체하고 1년 뒤인 1973년, Off Course가 메이저로 활동하게 되며, 일본 록은 대중 사이에 보다 넓은 지평으로 맥을 이어나간다.

13년 뒤인 1985년, 국제 청년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행사 'All Together Now'의 무대에 오르며 일시적으로 재결합하였다. 도쿄 신주쿠의 국립 경기장에 조성된 무대에 오르며, 핫피 엔도 시절의 곡을 뉴 오더 느낌이 나는 1980년대 신스팝 풍으로 선보인 것이 특징. 아마도 호소노의 YMO 활동이 이러한 편곡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2013년 오오타키 에이이치가 사과 조각에 의한 질식사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밴드 멤버 전원이 모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나머지 세 멤버는 간간히 모이는 편인데, 오오타키의 장례식에도 세 멤버 전원이 참석했고 NHK에서 제작한 명반 다큐멘터리 시리즈에 출연해 風街ろまん 제작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6. 디스코그래피

발매년도 제목
1970년 はっぴいえんど(앨범)
1971년 風街ろまん
1973년 HAPPY END


[1] 영어 발음대로 한다면 해피 엔드(Happy end)가 되어야 하나, 일본식 발음을 히라가나로 표기한 밴드 명에 의의가 있기에 대체로 '핫피 엔도'로 표기한다. [2] 핫피 엔도의 전신인 발렌타인 블루의 결성일. [3] 정식 해산 후, 라스트 라이브 출연. [4] 국제 청년년 기념 ALL TOGETHER NOW에 출연 [5] 마츠모토 타카시 작사 활동 50주년 기념 무도관 콘서트에서 호소노, 마츠모토, 스즈키 세 사람이 36년 만에 "핫피 엔도" 명의로 무대에 올라 3곡을 연주했다. [6] 공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에이프릴 풀 멤버였던 '코사카 츄'도 백밴드로 도움을 줬다. [7] 특히 본인이 1974년 설립한 나이아가라 레이블을 통해 뉴뮤직 세대인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누키 타에코, 사노 모토하루 등 후배 뮤지션들이 인지도를 쌓을 수 있도록 지원해준 공으로 인해 J-Pop의 막후 인물로도 거론된다. [8] 아닌 게 아니라 브리티시 록이 미국 대중음악계를 완전히 접수하고 나서 록이라는 개념이 장르로 완성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음악에 맞춰서 흔들다, 로큰롤의 줄임말, 현재의 Swag마냥 넣는 뭔가 있어보이는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9] 핫피 엔도의 경우 2007년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 2019년 뮤직 매거진 선정 100대 명반에서 1위에 風街ろまん가 선정된 바 있다. [10] 이건 일본의 사례가 좀 특이한 편인데, 50년대에는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된 민요가 번안되지 않은 채로 로큰롤로 편곡되어 미국에서 소소하게나마 히트를 친 사례가 있고, 우리나라에도 이미 우리나라의 로큰롤은 우리의 정서와 언어를 담아야 한다는 시대를 앞선 생각을 한 뮤지션이 이미 60년대 초부터 활동했다. [11] 물론 이들도 훌륭한 음악적 성과를 거둔 밴드인 것은 분명하며, 영미권에서 인정받으며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12] 80~90년대에는 한국어로 헤비 메탈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13] 한국 밴드 Buzz가 아니라 밥 딜런 옹의 향기를 풀풀 풍기는 미국 포크 밴드인 The Byrds를 지칭. [14] 사실상 일본의 시티 팝 유행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앨범이며, 일본 대중음악 명반을 꼽을 때 절대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앨범이다. [15] 사과를 먹다가 질식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 [16] 덴키 그루브의 피에르 타키가 코카인을 유통, 흡입하였음이 적발되자 덴키 그루브 앨범과 그가 출연한 게임, 드라마 등이 유통 중지 된 사례가 2019년에 있다. [17] 2020년 9월 24일 주간문춘과의 인터뷰에서 20년 동안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고 밝혔다.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로, '보지 않으면 인생의 손해'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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