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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5:38:26

카토 카즈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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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카토 카즈히코
加藤和彦 | かとう かずひこ
파일:katokazuhiko.jpg
출생 1947년 3월 21일
교토시 후시미구
사망 2009년 10월 16일 (향년 62세)
나가노현 키타사쿠군 카루이자와마치
애칭 토노반(トノバン)
직업 음악가, 가수, 프로듀서

1. 개요2. 바이오그래피
2.1.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2.2. 사디스틱 미카 밴드2.3. 솔로 활동
3.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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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음악인.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와 사디스틱 미카 밴드, 그리고 각종 프로듀서 활동으로 일본 가요 태동기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2. 바이오그래피

2.1.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


풋풋하던 감성을 엿볼 수 있는 데뷔작 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돌아온 술주정뱅이) 영상 속 더벅머리의 남자가 카토다.

교토 출신이었던 카토는[1] 본래 류코쿠대학을 다니던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음악과는 크게 연관이 없던 성장 배경이었다. 그러다 밥 딜런에 매료된 뒤 일종의 아마추어 동아리로서 포크 밴드를 하기로 결심, 잡지로 멤버들을 모집한 뒤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를 결성했고 언더 위주의 활동들과 싱글 발매로서 데뷔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취미에 가까웠던 밴드였던 만큼 앨범 하나 발매하는 추억거리만 만들고서 해산하고자 만든 취지로 결성된 정도였다.

멤버로선 키타야마 오사무(베이스), 히라누마 요시오(드럼)가 가입했는데,[2] 이들 역시 취미로 음악 생활을 하는 신분들로서 키타야마는 의대생, 히라누마는 가입 당시 고3 수험생 정도였다. 참고로 키타야마는 훗날 작사가로서도 명성을 떨쳤고 본업이던 정신과 학계에서도 네임드급 의사로 활약하는 비범한 성취를 이루던 인물이었다.

그렇게 내놓은 대표적 작품으론 帰って来たヨッパライ(돌아온 술주정뱅이), 임진강,[3] 悲しくてやりきれない(슬퍼서 견딜 수 없어)[4] 등의 싱글 위주였다. 그리고 자주 제작 앨범을 하나 소탈하게 발매한 채 소박한 목표를 이룬 밴드는 미련없이 해산하게 되어 각자의 본업으로 돌아간다.

허나 이들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수차례 소개되고 점차 대중 사이에서 급속히 회자되기 시작하며 노래 돌아온 술주정뱅이는 오리콘 차트 사상 최초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싱글로 남게 되어버린다! 하여금 밴드의 주축이었던 카토 카즈히코는 각종 레이블로부터 러브콜을 쇄도받았고, 얼떨떨하던 처음엔 제안들을 거절했지만 이내 동료였던 키타야마의 설득을 받아들여 대학교 중퇴까지 불사하면서 단 1년 시한부 활동만을 조건으로 레이블에서 소개시킨 프로 멤버들과 함께 다시금 재결성하게 된다. 이때 1968년 발매된 정규 앨범 ' 紀元貮阡年(기원이천년)'은 일본 가요 태동기에서 꽤나 중요한 작품으로 다뤄진다.

그렇게 라이브 활동 등 전국 각지를 도는 왕성한 활동 끝에 약속대로 1년을 채운 밴드는 다시 해산하여 카토는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밴드는 후일 어느덧 원로가된 멤버들과 이벤트성으로 재결성 공연으로서도 재개하곤 했다.

2.2. 사디스틱 미카 밴드

더 포크 크루세이더스 활동 종료 이후론 당분간은 솔로로서 작곡 활동을 진행하게 된다. 유독 당대 음악의 메카였던 영국으로 왕래가 잦았다고 하며 국내외 각종 인물들과도 회동하며 인맥을 넓히기도 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카토에게 기타를 가르쳐달라며 구애하던 '후쿠이 미카'와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되고서 실력 높던 세션들과 아내까지 포용하며 사디스틱 미카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의 활동은 별도 밴드 문서 참고.

2.3. 솔로 활동

그렇게 SMB를 일찍이 나와버린 그는 한동안 솔로 및 영상물들의 음악 감독 활동으로 뮤지션 생활은 이어나간다. 특히 80년대는 영상물 OST 작곡가로서 수많은 수상의 영예를 안는 등 프로듀서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던 시기였다. 솔로 앨범으로서도 십수장의 다작을 이어오긴 했지만 상업적으론 크게 돋보이는 내역은 없었다. 그래도 4집 앨범 ガーディニア(GARDENIA)는 삼바 보사노바가 융합되어 평은 좋았던 편이고[5] 시티 팝 애호가들 사이에선 자주 회자되는 수작이긴 하다.

당대 이름있던 작사가 야스이 카즈미와 1977년 재혼하여 둘은 작사작곡 듀오로서도 활약하기도 했다. 서브컬처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가 이들의 대표작으로 유명. 허나 야스이는 지병이었던 폐암에 시달리다 결국 1994년 길었던 부부 생활끝에 사별하고 만다.

밴드로서는 기존 포크 크루세이더스 멤버들과 라이브 활동으로서도 활동을 재개했고 SMB 또한 보컬을 마츠토야 유미 등을 객원 보컬로 맞으면서 3회 재결성을 갖기도 했고 그때마다 신보도 생겨나는 창작 활동도 왕성하게 이어갔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The Alfee의 사카자키 코우노스케와 함께 카즈코우(和幸)라는 밴드로 활동했다. 카즈코우로 활동한 마지막 공연은 그가 자살하기 한 달 전인 9월 20일에 열린 미나미 코우세츠의 콘서트.

2009년자로 호텔에서 갑작스런 자살 소식으로 당대 음악계에 충격을 던졌다.[6] 이미 굴곡많던 인생 속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오던게 큰 원인으로서 유서엔 창작 의욕이 떨어졌다는 호소도 발견될 정도였다.

3. 디스코그래피


[1] 말이 교토 출생이었지, 카나가와 도쿄까지 전전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주재지를 자주 옮겼기에 지역 기반은 크지 않았다. [2] 재수생이던 이무라 미키오, 아시다 아키 역시 초창기 멤버로서 5인조로 활동했지만 둘은 수험 생활에 밀려 얼마안가 탈퇴했다고 한다. 아시다는 후에 대입에 성공한 뒤 복귀했지만, 얼마안가 재차 탈퇴. [3] 별도 문서에 소개된 내막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당대엔 발매금지 처분으로 앨범에도 실리지 못했다. [4] 이 밴드의 또다른 대표작으로서도 자주 회자되는 곡으로, 후일 이 세상의 한구석에 애니메이션 ost로도 실리기도 한다. [5] 앨범 참여 세션들을 보자면 타카하시 유키히로, 고토 츠구토시 등 SMB 시절 멤버들이 대거 참여한 점을 보아선 해체 이후로도 멤버들과 교류는 많았던걸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사카모토 류이치, 스즈키 시게루 등 정상급 세션들도 이 앨범에 참여했다. [6] 불과 사흘 전만하더라도 지인들과 식사도 하는 등 이상 징조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