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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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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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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백국
Comitatus Tripolit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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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수도
토르토사 (1102 ~ 1109)
트리폴리 (1109 ~ 1289)
국토
파일:County_of_Tripoli_1135.jpg
1102년 ~ 1289년
위치 트리폴리, 현재 레바논, 시리아 해안
정치
정치 체제 봉건 군주제[1]
국가 원수 백작
주요 백작 레몽 1세 (1102년 ~ 1105년)
인문 환경
종교 국교 로마 가톨릭, 마론파,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인종 프랑스인, 아랍인
표어 DEUS VULT [2]
공용어 라틴어, 중세 프랑스어[3] 아람어
공용 문자 로마자
통화 데니르, 디나르[4], 베잔트[5]
주요 사건
1102년 건국
1109년 트리폴리 함락, 수도로 삼음
1111년 샤이자르 전투
1119년 합 전투
1144년 크락 데 슈발리에 등 동부 산맥의 요새들을 구호기사단에게 넘김
1152년 레몽 2세가 아사신에게 암살됨
1271년 바이바르스, 1차 트리폴리 포위
1289년 칼라운, 2차 트리폴리 포위
→ 트리폴리 멸망[6]
성립 이전 셀주크 제국
망명 이후 맘루크 왕조
언어별 명칭
라틴어 Comitatus Tripolitanus / Tripolis
프랑스어 Comté de Tripoli
아랍어 كونتية طرابلس
/ طَرَابُلُس (Ṭarābulus)
영어 County of Tripoli

1. 개요2. 성립
2.1. 레몽 1세의 상황2.2. 트리폴리 백국의 창설
3. 베르트랑 백작의 치세
3.1. 트리폴리 없는 트리폴리 백작3.2. 트리폴리 백국의 성장
4. 퐁스 백작의 치세
4.1. 퐁스의 외교 전략4.2.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를 거부하다
5. 레몽 2세의 치세6.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다.7. 구호기사단의 주둔8. 2차 십자군의 시대
8.1. 아사신에게 암살당하다
9. 레몽 3세의 치세
9.1. 동로마 제국을 해적질하다9.2. 누르 앗 딘에게 잡히다
10. 문둥이 왕의 섭정11. 망운이 드리운 왕국12. 멸망의 그 곳으로
12.1. 깊어지는 보두앵 4세의 병세12.2. 두 번째 섭정위12.3. 기 드 뤼지냥에게 굴복하다12.4. 하틴의 뿔12.5. 남은 것을 지키다
13. 안티오키아 공국의 봉신국이 되다
13.1. 3차 십자군13.2. 아르메니아와 구호기사단의 준동13.3. 거대한 이교도 군세의 말발굽 아래에서
14. 트리폴리에 휘날리는 예언자의 깃발15. 멸망16. 역대 군주1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1102년 4월, 1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툴루즈 백작 래몽 생 질이 제노바 공화국 함대의 도움으로 현재 시리아의 해안 도시인 타르투스(토르토사), 주바일 등을 빼앗고, 트리폴리[7] 포위에 나섰다. 도시 정면에 위치한 요새가 1103년에 함락되었다. 하지만 이슬람 측에도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기에 성안의 아랍인들은 수비에 촤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포위 도중인 1105년에 레몽 1세가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덧나 사망할 정도였다. 그는 죽으면서, 아들 알퐁스 주르당을 상속인으로, 기욤 주르당을 섭정으로 삼았다.

이후 기욤은 공성전이 장기화되자 주변의 항구인 아크레 등을 함락하였다. 한편, 레몽 1세의 서자이자 가문의 본토인 툴루즈의 섭정이던 베르트랑[8]이 우투르메르에 도착하자 기욤과 베르트랑 간의 다툼이 일어났다. 1109년 7월 12일, 예루살렘 왕국의 탕크레드가 보낸 원군에 힘입어 트리폴리는 함락되고, 그 후 트리폴리 백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집트의 구원 함대는 8시간 늦게 도착하였다. 이슬람 황금기에 축적된 트리폴리의 대도서관안 10만권의 장서와 함께 불타 사라졌고, 시민들은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 직전에 암살된 기욤 대신 베르트랑이 트리폴리의 첫번째 백작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1111년에 시돈과 1124년에 티레가 십자군에 함락되었다. 백국과 예루살렘 왕국의 남쪽 경계는 베이루트였다. 트리폴리 백국은 다른 십자군 국가들과는 달리 해안의 항구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따라서 10세기 이후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한 크리스트교 도시 공화국들의 지원을 받으며 쉽게 무슬림 세력의 공격에 견딜 수 있었다.

레몽 3세 때에 안티오키아 공작의 차남을 양자로 들였기 때문에, 이후 안티오키아 공국 동군연합이 이루어져 하나의 군주가 두 십자군 국가를 다스리게 되었다. 보에몽 7세의 사후 일어난 계승전쟁 시에 제노바 공화국과 맘루크 왕조의 심기를 동시에 건드리는 병크를 내어 1289년 칼라운이 이끄는 맘루크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였을 때에 제노바는 도움을 거절하였다.

2. 성립

2.1. 레몽 1세의 상황

파일:Raymond_IV_of_Toulouse.jpg
툴루즈의 레몽 4세

1차 십자군이 막바지로 접어들 즈음에 대부분의 십자군 영주들은 레반트 지역에 자기 영지를 차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보에몽 1세는 안티오키아의 공작으로, 고드프루아는 사실상 신생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으로, 탕크레드는 갈릴레아와 타르수스의 영주로, 보두앵 1세 에데사 백국의 백작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세력이 크고, 심지어 교황 특사까지 대동했던 레몽 4세는 아무 영지도 집어먹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1101년에 서양에서 온 십자군 후발대와 함께 무엇인가 이뤄보려고 했으나, 1101년의 십자군 후발대와 동로마 제국의 연합군은 룸 술탄국에게 아나톨리아에서 대패하고 그 잔당만을 겨우 끌고 성지로 향했을 뿐이다. 그래도 1101년 십자군의 잔당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용사들이 많았고, 레몽 4세는 이들과 함께하면 십자군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목표는 영토는 넓지 않지만, 인구가 많고 땅이 비옥했던 트리폴리였다. 이 곳은 마찬가지로 이슬람 세력들에게도 주요한 지역이였으므로, 방비가 잘 되어있었다. 정공이 먹히지 않으리라 생각한 레몽 4세는 먼저 사전 작업을 마치기로 한다.

2.2. 트리폴리 백국의 창설

1102년 아직 트리폴리를 점령하지 않은 시점에서 트리폴리 백국을 선포한 레몽 1세는 먼저, 트리폴리 주변의 도시 토르토사를 점령하고, 트리폴리 시에서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순례자의 산'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한다. 이곳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십자군은 수 년에 걸친 장기간의 트리폴리 공성전을 시작한다. 전투는 소강상태와 열전을 거듭하며 이어졌다. 그러나 항구에 접한 트리폴리는 수년의 포위에도 끄떡 없이 보급이 이어졌고, 풍토병과 적의 기습이 십자군을 괴롭혔다. 1105년, 그가 이끄는 마지막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때맞추어 도착해 온 파티마 왕조의 지원 함대를 막을 해군전력이 없었던 십자군은, 결국 항구를 점령해내지 못하고 도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고령이었던 레몽 1세는 이후의 무슬림의 급습으로 화상을 입고 치료 중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만다. 트리폴리 시를 가질 모든 준비를 마친 그였으나, 결국 자신의 생애에서는 새 백국의 탄생을 지켜볼 수 없었다.

3. 베르트랑 백작의 치세

3.1. 트리폴리 없는 트리폴리 백작

아직 트리폴리 시도 가지고 있지 않은 트리폴리 백국에는 유력한 후계자가 세 명이나 있었다. 한명은 레몽 1세의 아들인 베르트랑 알퐁스 주르당이였고[9], 다른 한명은 그의 사촌인 기욤이었다. 레몽 1세의 가문은 베르트랑을, 주변국을 다 집어삼킬 기세로 약탈하고 있던 안티오키아 공국은 기욤을 후계자로 주장하며, 아직 가지고 있지도 않은 성에 대한 계승 전쟁을 벌였다. 보다 못한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1세는 기욤과 베르트랑이 각각 트리폴리 백국을 분할해서 가질 것을 명령했다.[10] 베르트랑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게 받은 막대한 유산으로 제노바와의 조약을 맺어 대 함대를 불러들였고, 남프랑스에서 1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해 트리폴리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했다. 제노바 용병들과 베르트랑의 군대, 그리고 기욤과 안티오키아 공국군은 결국 1109년 7월 12일에 트리폴리 성을 함략시킨다. 이 전투에서 베르트랑에게 행운이 찾아온다. 기욤이 군대를 이끌고 성으로 처들어가던 중, 화살에 맞아 숨졌던 것. 베르트랑은 이제서야 트리폴리 시를 가진 백국의 유일한 백작이 되었고, 제노바와 맺은 통상 조약, 레몽 1세에게 호의적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소규모 지원, 풍부한 물자와 병력을 토대로 튼튼한 백국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3.2. 트리폴리 백국의 성장

동로마 제국은 트리폴리 백국에 대해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베르트랑의 아버지 레몽 1세가 동로마와의 서약을 지킨 몇 안되는 십자군 영주였기 때문이다. 제국은 아직 이슬람화 되지 않은 트리폴리 주변 지역의 통치권을 베르트랑에게 수여했다. 마라클레아가 그렇게 백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동방정교회를 믿는 백성들이 속속들이 백국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또한 베르트랑은 시돈과 베이루트의 이슬람 소영주들에게 승리를 거두어 그들의 영토를 빼았았다. 제노바는 통상 특권과 함께, 항구 도시 하나를 가지고 새로운 조약을 맺기로 한다. 주바일 시를 주는 대신, 제노바의 용병대가 트리폴리 백국에 대한 영구적인 병력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그는 몬페란드 성을 이슬람에게 빼앗고 영지로 삼기도 했다. 베르트랑은 보두앵 1세가 자신을 지원해 준 감사를 표하며, 원래 형식적으로 동로마 제국령이었던 트리폴리 백국을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왕국령으로 전환했다. 보두앵은 이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트리폴리 백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병력을 보내주었다. 비록 영토는 작았지만, 수비하기 쉬운 지형에 있었던 트리폴리 백국은 산맥을 넘는 지역마다 요새를 설치해 투르크약탈자들을 손쉽게 방어했다. 1112년, 베르트랑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퐁스가 그 영토를 상속받았다.

4. 퐁스 백작의 치세

퐁스 백작은 아버지의 외교관계를 전환하여 동로마 제국과 연대하는 전략을 펼쳤다. 이 시기 동로마는 알렉시오스 1세의 히페르피온 통화정책의 성공으로 상업과 무역에 있어서 지중해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11] 그는 15살이 되던 해부터 트리폴리의 백작이 되었는데, 그는 즉위하자 마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는 후계자 계승 문제에 다른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사이가 좋지 못했던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유학하여 공작 탕크레드와 친분을 쌓고 경쟁 관계를 호의 관계로 돌려놓는 데에 성공했다. 탕크레드는 그에게 꽤나 감명을 받았던 모양인지, 유언장에 안티오키아 공국의 네 개 도시를 트리폴리에게 증여하겠다는 내용을 명시하기까지 했다.

4.1. 퐁스의 외교 전략

카톨릭 교회와 예루살렘 왕국 동로마 제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관계가 발전되는 것을 싫어했다. 퐁스 백작은 현명하게 처신하고 있었지만 아직 15살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고, 트리폴리의 대주교 알버트는 로마 제국이 트리폴리 백작에게 주었던 거액의 선물을 백국과 대주교령에 아예 귀속시키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알렉시오스 1세 황제는 퐁스 백작을 위해 실력 행사에 나섰다. 동로마는 바로 트리폴리 지역에 무역 금지조치를 내리고 해군을 동원해 봉쇄를 시작했다. 황제는 퐁스가 제국의 보호 아래 있으며, 그의 상여금이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함대를 물렸다. 퐁스 백작 개인적으로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통치에 도움을 주는 상황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그의 휘하에 있던 프랑크 기사들과 제노바 상인들은 동로마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2세도 그가 안티오키아 공작과 동로마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 중앙정부를 업신여기자, 분노하게 되었다.

퐁스 백작은 2년간 안티오키아에서 수학하며 큰 이익을 얻었다. 탕크레드 공작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사피타 등의 네 개 도시를 얻었으며, 다음 섭정인 살레르노의 루지에로와도 동맹을 맺은 것이다. 심지어 탕크레드는 유언을 통해 그의 아내인 프랑스의 공주 세실을 퐁스에게 새장가 들게 하였다. 그는 성년이 된 1114년에 트리폴리로 돌아갔다. 1115년, 보두앵 2세는 퐁스에게 부르수크가 이끄는 셀주크 투르크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퐁스는 미적대며 명령을 씹었다. 몇 개월간 명령을 무시하던 퐁스는 보두앵 2세가 직접 군대를 끌고 안티오키아 북부로 향하자 그제서야 병력을 소집했다. 안티오키아에서 루지에로의 군대와 합세한 그는 부르수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119년, 루지에로는 무모하게 아르투크 왕조의 일가지에게 반격을 가하다 아제르 상귀니스 전투에서 대패하여 사망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군대는 전멸당하고, 공국이 무방비로 노출되자, 예루살렘 왕과 트리폴리 군대는 안티오키아 방위를 위해 북상했다. 일 가지가 안티오키아 포위를 준비하기 딱 하루 전, 이틀의 간격을 두고 예루살렘 왕국군과 트리폴리의 군대가 안티오키아에 입성했다. 일가지는 공성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2.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를 거부하다

퐁스는 트리폴리가 독립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랬다. 이를 방해하기 위해 보두앵 2세는 안티오키아의 공작을 자신 영향력 안에 두고 트리폴리 백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트리폴리는 트리폴리 나름대로 제노바와 동로마를 끌여들여 예루살렘 왕국에서 반독립하기 위해 힘썼다. 1120년, 보두앵 2세는 나불루스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모든 봉신들을 소집해 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나 퐁스는 참석을 거부하며 대사조차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1122년, 트리폴리 백작은 자신들이 동로마에 속한 반독립적인 영주라는 명분으로 예루살렘 왕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분노한 보두앵 왕은 트리폴리를 공성할 기세로 병력을 이끌고 백국을 침입했다. 그러나 양국의 봉신들은 두 군주가 전쟁을 벌여 십자군 전체를 약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했으므로, 결국 그해 7월에 두 군주는 화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123년, 보두앵 2세는 아르투크 왕조의 발락 가지에게 생포되었다. 다행히도 구원의 손길은 금방 찾아왔다. 통상 수교 논쟁으로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와 해상전을 벌이던 베네치아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점령지를 포기하는 초강수까지 둔 상태로 티레인근으로 항행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이 대군을 이용하여 왕을 구출하는 대신 예루살렘 주변의 파티마 왕조 군대를 정리하고 영토를 확장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파티마 왕조가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팔레스타인 거점인 티레를 공성하기로 했다. 퐁스 백작도 서둘러 그들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명목상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다른 공작들과 라틴 총대주교의 가신으로써 참전했지만, 트리폴리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그를 십자군의 실질적 최고 지도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해 7월에 티레는 함략되었고, 퐁스의 깃발은 다른 대공들의 휘장을 제치고 티레의 가장 높은 성문에 걸리게 되었다. 훗날 보두앵이 풀려난 이후, 정치적 입지를 다진 퐁스는 더 이상 예루살렘 왕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도 1130년까지 그는 보두앵이 이끄는 일련의 군사작전을 도와 안티오키아를 수비하고 십자군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보두앵이 죽고 멜리장드 풀크가 예루살렘의 왕이 되자 왕국과 트리폴리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1132년, 안티오키아의 섭정 알리스 공주와 에데사 백국의 조슬랭 2세, 퐁스는 연합하여 풀크가 우르트메르에서 더 이상의 권력을 가지는 것을 막기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풀크는 1132년에 군대를 끌고 안티오키아를 기습했고, 수 개월간의 치열한 내전이 발생했다. 퐁스의 트리폴리 군대는 풀크의 군대를 안티오키아 성곽 밖에서 저지했으나, 풀크는 안티오키아 인근 항구지대를 점령하고 보급을 차단했다. 안티오키아 인근의 카스텔 루즈 요새에서 트리폴리 군대와 예루살렘 왕국군은 대 격돌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트리폴리군은 궤멸하고 퐁스는 도망치듯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결국 풀크의 십자군에 대한 주도권이 세워졌지만, 전투에서 트리폴리 군대의 저력을 느낀 풀크 왕은 더 이상 퐁스와 트리폴리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았다.

5. 레몽 2세의 치세

5.1. 아사신, 장기 왕조의 공세

트리폴리가 내전에 휩싸이자, 레바논 지방에서 흥기하던 아사신, 니자리파들이 점점 백국의 서방 영역으로 잠식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트리폴리 백국 주변 하마에 있는 마시아프 성에 웅거해 각지의 십자군 기사들을 암살하고 있었다. 사실 이들 아사신파는 십자군보단 셀주크 왕조들과 사이가 더 좋지 않았지만, 마시아프 주변에서 성전 기사단이 그들의 식량 수송단을 약탈한 이후로 십자군을 응징하기 시작한 것. 그 뿐 아니라 장기 왕조의 군대가 트리폴리를 조여오기 시작한다. 아미드 앗 딘 장기는 그의 군대를 1133년에 궤멸시키고, 그가 도망쳐간 몬페란드와 트리폴리를 공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군대는 풀크의 예루살렘군이 나타나자 후퇴했지만, 트리폴리군은 그 패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137년, 다마스쿠스의 맘루크 군대가 트리폴리를 공격했다. 퐁스는 트리폴리군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바즈왈이 이끄는 노예 군대를 상대했지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소수의 기사들만을 이끌고 퇴각하던 그는, 시리아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토착민들의 마을로 도주했는데, 그의 목에 걸린 현상금에 혹한 그들은 그를 바즈왈에게 넘겼다. 1137년, 그는 다마스쿠스군의 군영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들 레몽 2세가 트리폴리 백국을 상속받게 된다.

레몽은 즉위하자 마자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다마스쿠스의 맘루크 군대가 퐁스 백작을 살해한 것을 깨달은 장기 왕조는 군세를 이끌고 그해 7월에 트리폴리로 육박했다. 놀랍게도 트리폴리 백국은 궤멸적이었던 저번 피해를 수습하고, 전 영지에서 병력을 소집해 장기가 공성하고 있는 홈스로 향했다.[12] 그는 홈스에서 장기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였지만, 장기 군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두 번째 거점인 몬페란드의 공성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레몽은 풀크왕에게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예루살렘 왕국군은 파죽지세로 트리폴리 백국의 경계선상에 육박했지만, 이 때 비보가 전해졌다. 동로마 제국 요안니스 2세 황제가 감히 그와의 군신관계를 저버리고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한 안티오키아 공국을 함략시키려 4만 5천에 이르는 대군을 끌고 진격중이었던 것이다. 이 때 풀크 왕과 레몽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결정을 내린다. 공격당하고 있는 몬페란드와 홈스 일대를 2순위로 미뤄둔 채, 안티오키아를 구원하러 떠난 것이다. 장기는 그들의 군대가 북상하는 것을 확인하고, 그들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장기는 몬페란드와 홈스를 동시에 포위하는 척을 하며 그들의 북상에 관심이 없는 척을 하다가, 십자군이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국경선까지 진격한 상황을 틈타 매복 공격을 감행하였다. 수 천명의 병사들이 죽었고, 레몽 자신마저도 포로가 되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풀크 왕의 병력은 동로마 제국의 안티오키아 공성을 막을 만큼 충분하지 못한 상태로 줄어든 바람에, 결국 안티오키아 공국, 에데사 백국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봉토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안티오키아가 투르크에게 14년동안 빼앗기기 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영토였다는 것,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맺은 조약에 관한 황제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우리 조상들에게서 들어 잘 알고 있소, 그런데도 레몽 당신은 진실을 부정하고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거부해야겠소? ( 예루살렘 왕국 풀크 왕, 오데리쿠스 바이탈리스 XII 34p.)
예루살렘의 풀크는 결국 황제의 힘을 빌어 장기를 몰아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여기고, 안티오키아가 제국의 영역임을 확인하는 서신을 보내어 안티오키아 공작을 꾸짖었다. 바야흐로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중흥기가 시작된 참이었다.

6.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05e8e9720d2cbdcea1129bfdeab3069.jpg
레몽2세가 통치하던 시기의 레반트 판도. 트리폴리 북부의 홈스와 몬페란드 등의 영토를 아사신 장기 왕조에게 잃은 걸 볼 수 있다.

장기 왕조는 잘 조련된 강력한 군대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진 지방 강국일 뿐이었다. 콤니노스 왕조의 마지막 번영기 시절이었던 당시의 로마 제국군은 장기도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장기는 요안니스 2세가 안티오키아와 에데사를 복속했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후퇴를 결심했지만, 로마군은 이미 장기를 위협할 수 있을 만큼 남하한 상태였다. 장기는 요한네스 황제에게 협정을 제안했다. 트리폴리 백작을 포함해 포로로 잡은 수천의 기사들을 풀어 주는 대신, 자신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로마 황제는 이미 해가 9월로 접어들었으므로, 추수철도 대비할 겸, 로마군은 후방을 위협하는 아르메니아 왕국도 정리할 겸, 장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는 그 후 1138년부터 1142년까지 수 차례 장기 왕조를 몰아붙이며 십자군 공국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러나 트리폴리 백국의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기 왕조는 1137년 레몽에게서 몬페란드를 빼앗아갔고, 아사신들은 트리폴리의 영역 내인 노사이리 산에 웅거하여 십자군을 위협했다.

1137년, 레몽 2세는 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많은 재화와 소규모의 방위병력을 지원받았다. 그러나 레몽 자신은 저번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컸으므로, 로마 제국의 시리아 원정에 종군할 만한 병력이 없었다.

7. 구호기사단의 주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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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년경, 레몽 2세는 트리폴리의 부콰이 평원이라고 불리는 동부 변방 대부분을 구호기사단에게 넘겼다. 그 지역에는 쿠르드인들이 많은 요새와 성채를 남긴 채로 떠나있는 상태였는데, 구호 기사들은 이를 수십년간 마개조하기 시작하여 당시 최강의 요새로 알려진 크락 데 슈발리에를 완성시켰다. 레몽은 동부 변방 평원 뿐만 아니라 장기 왕조에게 빼앗겼던 라파니야와 몬페란드의 소유권도 구호기사단에게 넘겼는데, 이는 그들이 두 지역을 탈환한다면 그곳을 구호기사단의 영지로 제공하겠다는 약조였다. 당시는 각 기사단들이 그 시작을 알리던 때였다. 레몽은 이들이 동부 영지를 수호하며 그의 봉신으로써 남아있어주기를 바랬지만, 결국 구호기사단은 이 영지를 토대로 반독립적 기사단령을 창설하여 우르트메르에서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이들은 아나즈, 텔 카라크, 콰랏 엘 팔리스, 마르다베크등을 경영하면서 트리폴리 백국의 방위를 도왔다. 몇년 뒤에는 성전 기사단도 이들의 해안영지에 정착하여 타르투스에 요새를 짓고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8. 2차 십자군의 시대

레몽은 이 이상의 영지를 빼앗기지 않는 선에서 트리폴리 백국을 안정화 시키고 싶었지만, 시류는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멜리장드 풀크가 십자군의 군왕이 된 후, 에데사 백국은 결국 장기 왕조의 손에 떨어졌다. 남은 영토는 동로마 제국의 손에 팔려나갔지만, 그들도 수복에는 소극적이었다. 십자군 백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온 서유럽에 경각심을 심어주었고, 결국 에데사 탈환을 위한 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2세에게 있어서 십자군은 별로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그의 친척이자,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영주였던 툴루즈 백작 레몽의 적통[13]인 알폰소가 2차 십자군의 주요 영주로 참전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는 자신의 서자인 베르트랑과 대군을 거느리고 지중해를 횡단중이었는데, 그는 마음만 먹으면 트리폴리 백국에 클레임을 걸고 삼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1148년 6월, 십자군 영주들은 모두 아크레로 모여 다마스쿠스를 공략할 방법을 정하기로 했지만, 트리폴리 백작 레몽은 이에 참석하지 않았다. [14] 시시각각 알퐁스의 군대는 트리폴리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백국 귀족들의 두려움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오랜 항해로 인해 병이 생긴 알퐁스는 성지에 도착하자마자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아들 베르트랑은 일단 십자군 본대와 함께 다마스쿠스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방향을 틀었다.

트리폴리가 맞이한 가장 큰 적은 바로 유럽의 십자군이었다. 유럽 계열 십자군들은 트리폴리 백작이 알퐁스를 암살했다고 주장하고 기소하려 들었지만, 일단 그의 아내의 누나인 멜리장드의 중재로 타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르트랑과 툴루즈 군대는 트리폴리 백국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으려 들었다. 결국 그들은 트리폴리의 아라이마 항구를 점령하고 주요 요새들을 공성하기 시작했다. 트리폴리 백국에는 이미 이들을 막을 군대가 없었다. 하지만 도움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다마스쿠스 공성에 참가하지 않고 옛 동맹을[15] 지켜 준 감사의 의미로, 다마스쿠스 영주 무인 앗 딘과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이 트리폴리 백작에게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준 것이다. 그들은 손쉽게 아라이마를 점령하고, 성벽만을 손상시킨 채 레몽에게 베르트랑이 빼앗은 지역을 모두 돌려주었다. 레몽은 1150년에 이 지역들을 성전 기사단에게 넘겨 방비를 강화했다.

8.1. 아사신에게 암살당하다

1150년, 풀크 왕의 장남이자 차대 예루살렘 왕인 보두앵 3세가 트리폴리를 통과하여 폐허가 된 에데사 백국의 잔해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는 동방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가 에데사 백국의 남은 영토를 구매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황제를 알현하러 직접 행차하는 중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은 심각한 내분에 휩쌓여 있었다. 멜리장드는 아들 보두앵 3세를 통제 하에 두고 싶어했지만, 이미 19살이 된 보두앵은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려고 고군분투중이었다. 멜리장드는 동생 호디에르나와 결혼한 레몽에게 보두앵의 행차를 돕지 말라고 압박을 넣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보두앵 왕도 자신과 함께 종군하여 세력 성장에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레몽은 보두앵 왕의 손을 들어주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만나 투르베셀의 판매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렇게 새 왕의 지지를 받고 난 후인 1151년, 파티마 왕조의 대함대가 트리폴리 항구 앞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수십 척의 트리폴리 배를 불태우고 수백명의 사람들을 납치, 학살한 후 항구를 공격했다. 1152년에는 이 지역의 상황을 잘 모르는 유럽에서 온 일군의 십자군 기사들이 트리폴리 백국과 우호관계인 베카 시의 이슬람 토후를 공격했다. 이 공격 자체는 성공적이었지만, 이 때문에 누르 앗 딘이 군사를 움직여 트리폴리의 토르토사를 공격했다. 이들은 5월경 토르토사를 함략시키고 방위군까지 남겨놓은 채 돌아갔다. 그의 우방 보두앵 3세는 자기 휘하의 남작과 백작들을 집합시킨 기동대를 소집해 토르토사를 재탈환했다. 하지만 누르 앗 딘의 군대는 이곳의 요새를 파괴해 언제든 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두고 탈출했다. 이 요새를 재건할수도 없었고, 주둔군을 남길수도 없었던 레몽은 토착 그리스 정교회 주교에게 이 땅을 팔아버렸고, 이 주교는 다시 성전 기사단에게 토르토사를 매각했다. 옛날부터 토르토사를 눈독들이고 있던 성전 기사단원들은 이곳을 기사 수도회의 본당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대내외의 악재는 그를 힘들게 만들었고, 그는 자신의 아내 호디에르나와의 갈등이 잦아졌다. 멜리장드는 동생과 레몽을 재결합시키기 위해 트리폴리 땅에서 3자회담을 주최했지만, 이들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았다. 결국 싸움이 거세지자, 멜리장드는 동생을 달래며 친정인 예루살렘으로 데리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레몽도 이를 수락하며 터덜 터덜 트리폴리 성을 향해 자신의 가신들을 데리고 떠났다. 하지만 이 때, 그의 이동경로를 예의주시하던 암살단이 그와 수하들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그대로 암살당했다. 그는 당시까지 암살단이 암살한 가장 높은 십자군 인물이었다.

9. 레몽 3세의 치세

아버지가 암살단에게 죽임을 당한 당시 레몽 3세와 그의 동생 멜리장드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 때문에 호디에르나가 트리폴리 백국의 섭정이 되었고, 보두앵 3세는 레몽 3세를 예루살렘의 왕궁으로 데려와 직접 기사도를 가르쳤다. 1155년, 그는 성인이 되었고, 트리폴리로 복귀해 직접 백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가 티베리아스를 중심으로 웅거했으므로, 별명으로 부를 겸, 우르트메르에 난립하는 레몽들과 구별할 겸 '티베리아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16]

9.1. 동로마 제국을 해적질하다

그는 성전 기사단원들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백국의 방위를 다졌다. 그가 모은 군대가 성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때는 1157년으로, 요르단 강에 위치한 성 야코부스 항구를 지나던 수백명의 십자군 기사들과 보두앵 3세가 누르 앗 딘에 의해 기습당했을 당시 백작의 군대와 르노 드 샤티용의 안티오키아 공국군이 연합하여 누르 앗 딘을 격파하면서부터이다. 그 뿐만 아니라 1157년 8월에 강진이 우르트메르를 휩쓸자 트리폴리 백작은 이 재난을 이용하여, 아직 지진의 여파로 요새를 복구하는 중이었던 북시리아의 여러 무슬림 영주들을 기습했다. 여기 더해 플란더스의 대백작 테오데릭의 군대가 트리폴리에 상륙해 그를 지원하기로 하고, 르노 드 샤티용까지 합세했다. 그들은 카스텔 루지 성과 샤이자르를 공성하고 하랭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르노가 샤이자르가 점령되기도 전에 자신의 종주권을 주장했고, 결국 앞의 두 성 포위전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

1160년, 로마 제국의 마누일 1세가 아내 베르타의 죽음 이후 새 신부를 찾고 있었다. 레몽은 자신의 여동생인 멜리장드[17]를 황제에게 시집보내 위신을 높일 계획을 꾸몄다. 보두앵 3세 [18] 와의 서신을 통해 마누일 황제에게 시집갈 우르트메르의 공주 명단에서 두 명이 최종후보로 뽑혔다. 한 명은 전임 안티오키아 공작의 딸인 마리아와, 레몽의 여동생이자 예루살렘 왕의 외사촌이었던 멜리장드였다. 멜리장드의 이모인 멜리장드와 어머니 호디에르나는 거금을 들여 황후에 맞는 격식으로 예물을 차렸고, 레몽도 소함대를 꾸려 그녀를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마누일은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배권을 확립할 겸, 제국 내 라틴 귀족들과 친해질 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신부로 낙점했고, 트리폴리 백국은 실망의 도가니에 빠졌다.

혼담이 성사되지 못하고 낙담한 멜리장드가 수도원에서 어린 나이에 요절하자, 백국 신민들의 실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백국의 빈민, 부량자들은 앞다투어 레몽의 함대에 입대했고, 로마 제국에 혼수를 전달하려고 건설한 소함대는 그대로 전함으로 개조되어 동로마 제국으로 칼끝을 돌렸다. 1161년부터 레몽의 함대는 로마인들의 땅을 무제한 약탈하고 상선들을 해적질했다. 가장 부유한 제국 속주중 하나인 키프로스 해안에서 엄청난 수의 피해 신고가 들어왔다. 그 뿐만 아니라 트리폴리 함대는 정교회의 성지들과 수도원, 심지어는 그곳을 통해 우르트메르를 순례중인 순례자들까지 마구 살해했다.

9.2. 누르 앗 딘에게 잡히다


1164년, 누르 앗 딘은 구호기사단의 성채 크락 데 슈발리에를 공격하고 하랭크를 포위했다. 십자군 영주들은 집결하여 누르 앗 딘을 요격했지만, 하란 전투에서 대패하여 대부분 누르 앗 딘의 포로가 되었다.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 명목상 에데사 영주인 조슬랭 3세, 뤼지냥의 위그등이 포로가 되었고, 레몽 3세 역시 끌려가 당대 십자군 영주라면 한번쯤은 방문하는 명소, 알레포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구걸과 시종일로 힘들게 살아갔다. 신기한 점은 그가 이곳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라틴어 아라비아어를 읽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는 급히 누르 앗 딘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왕국의 토로스와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는 간단히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로마인들의 황제 마누일 1세가 엄청난 거금을 들고 누르 앗 딘에게 몸값을 지불하며, 이들을 내주지 않을 경우 군사적으로 압박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몽에게는 이런 빽이 있을리가 없었기에, 그는 다른 영주들이 풀려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아모리 왕은 트리폴리 백국의 가신들을 섭정하며 백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주었다.

아모리 왕은 혼자서 이 영지들을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성전 기사단들의 그랜드 마스터 베르트랑과 루이 7세의 군대가 동분서주하며 아모리와 함께 요새들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누르 앗 딘은 이미 성전 기사단들의 성 5개를 탈취한 상태였다. 반격은 성공적으로 끝나 두 군데의 도시를 탈환하긴 하였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프랑크 공국들이 수세에 몰린 것은 확연했다. 당시 이슬람 세계도 누르 앗 딘과 아이유브 왕조의 뿌리가 될 살라흐 앗 딘 가문의 다툼 속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1174년의 어느 시점에 레몽도 이 혼란을 틈타 출소할 수 있었다. 그는 대충 15만 디나르, 혹은 8만 히피르피온의 몸값을 내고 탈출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확실한 점은, 그가 구호기사단에게 돈을 빌려서 출소했다는 점과, 누르 앗 딘에게 겨우 2만 히피르피온만 내고 나머지를 삥땅쳤다는 것이다.

10. 문둥이 왕의 섭정


아모리 1세는 출소한 레몽에게 갈릴레아 대공 윌터의 미망인 에시바(Echiva, Echive)를 소개시켜 주었다. 갈릴레아 지방의 방어를 그에게 담당시킬 목적이었다. 비록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정략결혼이었으나 둘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지만 아내를 사랑한 레몽은 에시바가 사별한 첫 남편 월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도 자신의 친자식처럼 대했다. 이 결혼으로 레몽은 예루살렘 왕국의 직속 봉신중 가장 큰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아모리 1세는 그해 7월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보두앵 4세는 어린데다가 문둥병 환자였기에, 섭정이 필요했다. 왕의 집사장 마일즈가 섭정을 도맡으려 하자, 레몽은 선왕이 트리폴리를 섭정했듯, 자신도 예루살렘을 섭정할 권한이 있다는 주장과, 어린 왕의 가장 큰 직속봉신이라는 명분을 들며 섭정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그들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일즈는 10월에 살해당했고, 왕국의 봉신들이 소집되었다. 예루살렘령 백작 험프리와 발리앙 디블랭 형제, 그리고 본토의 십자군 3세대 영주들은 대부분 레몽의 섭정에 대해 찬성했다. 레몽은 왕대비 아녜스 드 쿠르트네[19]와 권력을 분점하고, 그동안 왕위를 휘두르려 한 집사장직을 공석으로 둔 채, 왕의 자문으로 저명한 성직자이자 역사가인 기욤 드 티레를 세웠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파티마 왕조를 무너트린 아이유브 왕조 살라흐 앗 딘의 군세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다. 홈스, 샤이자르 등 주요 요새들을 살라흐 앗 딘에게 빼앗긴 누르 앗 딘은 소수의 병력만을 남긴 채 알레포의 장기 왕조 근거지로 후퇴했다. 십자군은 기회를 잡았다. 이들은 누르 앗 딘의 홈스 군대가 외성을 탈취당하고 내성의 요새에 모여 항거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고 두 군대 사이에 섰다. 누르 앗 딘의 군대는 레몽에게 지금까지 잡힌 모든 기독교도 군대를 무료로 방면해줄 테니 동맹을 맺고 살라흐 앗 딘과 싸우자고 주장했고, 그가 삥땅친 몸값도 탕감해주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살라흐 앗 딘도 자신이 홈스를 점령하게 도와준다면 누르 앗 딘과 똑같은 조건으로 그들을 풀어주겠다고 했다. 험프리 백작과 레몽의 격렬한 토론 끝에 십자군은 살라흐 앗 딘을 간접적으로 도와주기로 한다. 그들은 크락 데 슈발리에로 회군했고, 살라흐 앗 딘은 홈스를 점령했다. 1176년까지, 레몽은 살라흐 앗 딘을 만나 누르 앗 딘의 군세를 공격하는 데 방해하지 않는 대가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살라흐 앗 딘이 남시리아를 평정하고 모술과 알레포의 군대를 격파한 후 조약을 지켜 십자군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떠나자, 십자군도 해산하였다.

11. 망운이 드리운 왕국

보두앵 4세는 그해 15세가 되어 섭정위는 자동적으로 폐지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평화조약을 맺고 돌아갔지만, 레몽은 그가 언젠가는 십자군 왕국을 위협할 것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왕국의 변경은 안정되 보였지만, 주변 세력은 조금씩 아이유브 왕조의 통일 제국 하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레몽과 우르트메르의 귀족들은 새로 유입되는 십자군의 공격적인 행보가 아이유브를 자극할 것을 두려워하고, 내부에서 힘을 키워야 함을 알고 있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가 아크레에 상륙하자, 우르트메르 영주들은 이를 이용해 주변 정세를 정리할 생각을 했다. 이들은 하마를 공격해 병든 장기 왕조를 압박하고, 하랭크를 포위했다. 이에 고무된 유럽의 구호기사단 단장 로져는 100명의 구호기사와 2000명의 보병을 보내 이들을 지원했다. 두 성채는 함략당하지 않았지만 그만큼 우르트메르 영주들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십자군 영주들은 겨우 4일간만 이 둘을 공성했다. 사실상 영지 내의 방비를 위해 이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는 확실히 트리폴리 방위에 도움이 되었다. 투르크멘 군대가 트리폴리 지역을 공성하려다가 이들 연합군에 의해 궤멸되어 1178년 엄청난 몸값과 약탈품, 그리고 소규모 영지를 빼앗긴 것이다.

살라흐 앗 딘은 이 움직임을 위기로 보았다. 살라흐 앗 딘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예루살렘의 시돈을 공격했다. 문둥이 왕 보두앵 4세는 소집령을 내렸다. 티베리아스를 근거지로 군대를 모으던 레몽은 시돈의 살라흐 앗 딘 기병대를 왕과 함께 분쇄했지만, 이는 함정이었다. 살라흐 앗 딘이 대군을 이끌고 갈릴레아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던 것. 갈릴레아로 반전한 십자군은 그곳에서 살라흐 앗 딘과 격돌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레몽은 이 실패 이후에도 피사 공화국의 대상을 자신의 영지 내의 미망인 귀족들과 결혼시키는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보두앵의 병환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발리앙 디블랭,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레몽은 힘을 합쳐 그의 여동생 시빌라가 우르트메르 귀족들과 결혼할것을 권유했지만, 보두앵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결국 왕은 시빌라가 기 드 뤼지냥과 결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2. 멸망의 그 곳으로

12.1. 깊어지는 보두앵 4세의 병세

몇 주 뒤, 보두앵 4세는 그나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갈릴레아는 이미 살라흐 앗 딘의 군대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 왕은 기력을 모아 봉신들을 소집했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은 군대를 모아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 갈릴레아에서 보두앵 왕과 그의 소규모 기사들은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과의 2년 휴전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활한 살라흐 앗 딘은 이 조약에 레몽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명목으로 백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백작은 그와 평화조약을 맹세하고 거금을 바치는 대가를 치렀다. 백작은 이를 악물고 구호기사단과 봉신들을 모아 병력을 증강하는 것 외엔 2년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십자군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유럽에서 온 귀족들은 레몽이 보두앵 4세를 만나러 입조하는 것마져 막아버리려 했고, 갈릴레아 통치를 방해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케락의 영주인 르노 드 샤티용은 템플기사단을 이끌고 성지와 이집트 사이의 아우터요르단 지역에서 무제한 약탈을 벌이며 살라흐 앗 딘을 자극했다.

심지어 샤티용은 병력을 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살라흐 앗 딘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벌이기까지 했다. 레몽은 십자군 영지의 안보공백을 이유로 이를 반대했지만, 예루살렘 영지 내의 유럽파 귀족들은 대다수 찬동하고 나섰다. 결국 레몽은 어쩔수 없이 상당수의 예루살렘 왕국군의 사령관이 되어 아우터요르단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를 노린 투르크멘들은 반 레몽파 십자군 영주들을 등에 업고 그의 영지인 갈릴레아와 티베리아스를 약탈해 800명의 처녀들을 납치했다. 살라흐 앗 딘도 이 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이 티베리아스를 포위한 것이다. 레몽은 요르단강 동부에서 갈릴레아로 넘어오며 중병에 걸렸지만, 결국 보두앵 4세의 군대와 함께 살라흐 앗 딘의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 1182년, 이 기세를 몰아 레몽은 오히려 군사 요충지인 보르사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1183년, 결국 장기 왕조의 마지막 요충지 알레포를 점령한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을 궁지로 몰기 위해 남하했다. 레몽의 손도 바빠졌다. 그는 보두앵 왕과 함께 1000명이 넘는 기사와 15,000명의 보병을 끌고 북상하여 살라흐 앗 딘과 맞붙었고, 요르단 강을 건너는 살라흐 앗 딘 군대와 맞붙어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두앵의 병세는 심각한 수준으로 이르고, 결국 시빌라의 남편 기 드 뤼지냥이 섭정이 되게 되었다. 그러자 우르트메르의 십자군 영주들은 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는 결국 조카 보두앵 5세를 후계자로 두고 레몽을 새 섭정으로 임명했다.

12.2. 두 번째 섭정위

비공식 섭정이 된 레몽이 처음으로 벌인 일은 케락의 르노 드 샤티용이 싸놓은 똥을 치우는 일이었다. 계속된 약탈에 화가 난 살라흐 앗 딘의 공세로 케락은 포위되어있던 상태. 레몽의 대군은 살라흐 앗 딘의 군대를 공격했고, 살라흐 앗 딘은 케락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3일부터 4일까지 계속된 십자군과의 대치로 살라흐 앗 딘은 완전히 예루살렘의 권역에서 나와 자신의 수도로 돌아갔다. 이러는 와중에 기 드 뤼지냥은 1184년, 그가 예루살렘에서 공인받은 베두인 상인들을 가자 지역의 왕국 직할령에서 기습해서 약탈하고 처형했다. 아무리 병석이라 하더라도 영지 내의 상인을 함부로 처형한 기를 가만히 둘 수 없던 보두앵 4세는 직접 귀족들을 소집해 기를 공개 비난했다.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는 둘을 어떻게든 화해시키려고 했지만, 기 드 뤼지냥은 왕이 죽으면 왕위를 찬탈하려 할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보두앵은 발리앙 디블랭을 위시한 대귀족들에게 비공개적으로 레몽을 지지할 것을 부탁했다. 결국 보두앵 4세의 조카 보두앵 5세가 공식 계승자가 되었다. 1185년 5월 16일, 보두앵 4세는 24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이 때 레몽도 공식적으로 섭정이 되었다.

레몽은 이를 통해 베이루트를 할양받고, 명목상의 에데사 백국 백작 조슬랭 3세와 함께 왕 곁의 가장 강력한 권신이 되었다. 하지만 보두앵 5세는 어린 데다 건강이 좋지 못했으므로, 그가 만일 성인이 되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교황,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들, 영국 프랑스의 왕이 모여 그의 어머니 시빌라와 동생 이사벨라중 한 명을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기에, 십자군의 정치적 영향력은 조금씩 외국 왕들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에 더해 조슬랭 3세, 라틴 총대주교 헤라클리우스, 성전 기사단 단장 제랄드 리드포드는 기 드 뤼지냥과 연합해 트리폴리 백국을 흔들고 있었다.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그는 전왕이 죽기 전에 시작한 살라흐 앗 딘과의 협약을 끝마치고 4년간의 평화협정을 조인했다.

12.3. 기 드 뤼지냥에게 굴복하다

1186년 여름, 어린 왕은 아크레에서 급사했다. 티베리아스의 레몽은 조슬랭 3세와 성전 기사단의 계략으로 왕의 장례를 바로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왕의 장례에 모인 십자군 영주들을 데리고 기를 새 왕으로 모시려는 이들의 속셈이었다. 이를 알게된 레몽은 대부분의 영주들을 발리앙 디블랭 형제의 영지 나블루스로 모이게 했다. 이를 보고 기 드 뤼지냥의 지지자들은 우르트메르의 토착 영주들이 새 왕을 멋대로 뽑으려 한다고 레몽을 비난했다. 기의 지지자들은 예루살렘에 모였고, 앞서 말한 네 서방 국가들의 충고를 뒤로하고 헤라클리우스 총대주교의 집전 하에 보두앵 5세의 장례를 치르고 시빌라를 새 왕으로 선출했다. 사실상 기 드 뤼지냥이 새 왕이 된 것이었다. 시빌라는 그녀의 대관식에 나블루스의 우르트메르 영주들도 초청했지만, 이들은 그녀의 대관식에 비토를 놓았다. 결국 귀족들이 참가하지 않은 대관식에서 시빌라는 기에게 왕관을 넘겼다.

레몽과 이벨린 형제는 시빌라의 어린 딸 이사벨라와 레바논의 토론 백작, 험프리 4세를 적법한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험프리는 내전을 원하지 않았기에, 다른 영주들을 설득하고, 예루살렘으로 가 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그의 설득에 기 드 뤼지냥을 섬길것을 맹세하였지만 티베리아스는 끝까지 왕위 계승의 파행을 논하며 충성을 거부했다. 결과는 내전이었다. 갈릴레아와 티베리아스, 트리폴리에 대한 전방위적인 예루살렘 왕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살라흐 앗 딘은 티베리아스에 사신을 보내 예루살렘 왕위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이는 양면전술이었다. 그의 군대는 이미 이집트에서부터 집결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숨통을 조일 준비를 마쳐있었다. 발리앙 디블랭과 성전 기사단, 구호기사단은 티베리아스에 화해의 서신을 보내고 기와 연합해 이를 막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레몽은 살라흐 앗 딘을 막기 위해 기에게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장 처음 한 행동은, 티베리아스 주변에 주둔해있던 아이유브 왕조 병력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레몽을 파문하려고까지 준비했던 기도 이러한 위기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트리폴리 주변의 성 야곱 항에 모여 충성 맹세를 하였다. 이미 두 군대는 집결한 상태였고, 이제는 예견된 파멸 뿐이었다.

12.4. 하틴의 뿔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은 갈릴레아와 티베리아스의 성들을 공성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그의 아내와 방어병력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레몽과 그의 트리폴리 백국, 갈릴레아 봉신들의 주력군은 예루살렘 근교에 이미 집결해있었기에 그곳으로 갈 수 없었다. 레몽의 정적 리드포드는 그대로 갈릴레아로 진격해 살라흐 앗 딘과 회전을 벌일 것을 주장했지만, 레몽은 그곳이 자신의 영지임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아를 포기하고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후퇴하여 적을 끌어들여 포위섬멸하자는 전략을 제시했다. 당시 십자군은 살라흐 앗 딘의 군대의 3분의 2 수준이었던 데다가, 북서부에서도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오고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방비를 포기하는 위험한 도박을 피하자는 심산이었다. 레몽은 누가 봐도 명백한 함정이었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를 포기한 것이었지만, 기 드 뤼지냥 르노 드 샤티용은 그를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그대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기로 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레몽은 그들을 티베리아스로 인도했다. 갈릴레아의 마스카나에서 십자군 후방의 성전 기사단원들이 살라흐 앗 딘의 소규모 공격을 받았다. 레몽은 이곳에 대군을 지탱할 수원이 없음을 상기시키며 다른 지역을 찾으라고 조언했지만 왕은 그대로 마스카나에 진지를 차렸다. [20] 결국 이곳에 진지를 차린 밤새, 살라흐 앗 딘의 군대는 그대로 이들을 포위했다. 물을 찾으러 나온 병력은 그대로 살해당했다. 다음날, 하틴의 뿔에 위치한 샘을 향해 십자군은 진격했지만, 살라흐 앗 딘은 그대로 간격을 유지한 채 이들을 포위하고 화살을 날려대었다. 결국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물과 피난처를 찾기 위해 각자도생하기 시작했다. 보병대는 그대로 갈릴레아 호수를 향해 행군했고, 레몽과 발리앙 디블랭이 이끄는 기사들은 이미 패배를 직감하고 포위망을 풀기 위해 살라흐 앗 딘의 우익을 향해 돌격했다. 그리고 기가 이끄는 군대는 그대로 하틴의 뿔로 향했다. 남아있던 기의 기사대와 갈릴레아 호수를 향하던 보병대는 그대로 그곳에서 전멸했다.이것이 그 유명한 하틴의 뿔 전투였다.

12.5. 남은 것을 지키다

십자군 영주 중 그 만큼 혜안이 있던 사람은 없었다. (기욤 드 티레, 레몽 3세를 평가하며)
다른 십자군 영주들은 명예를 찾아 이곳에 왔지만, 그는 이미 명예를 손에 쥐고 있었다. 오직 그만이 그것을 지켰다. (시인 피에르 비달)

레몽과 발리앙, 그리고 그를 따르던 십자군 기사들은 살라흐 앗 딘의 우익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살라흐 앗 딘의 우익 병력들이 격파당해 우왕좌왕하는 동안, 이들은 그대로 말을 달려 티레로 향했다. 그들이 티레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티베리아스와 갈릴레아, 베이루트가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살라흐 앗 딘의 손에 떨어졌고, 군대는 북상하여 예루살렘과 트리폴리로 향하고 있었다. 레몽과 발리앙은 각각 얼마 남지 않은 군대를 끌고 예루살렘과 트리폴리로 향해 방어전을 준비했다. 레몽은 군대가 모여있으면 티레가 살라흐 앗 딘에게 목표가 될 것을 직감하고 티레의 병력을 후퇴시켜 트리폴리의 방어를 굳건히 했다. 결국 살라흐 앗 딘의 군대는 티레와 트리폴리 두곳 모두를 공성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남은 땅을 향해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1187년 10월 17일, 수십일 간의 공성 끝에 결국 예루살렘이 함략되자, 발리앙 디블랭도 트리폴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하틴의 패배 이후 정신적 충격으로 앓기 시작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영지, 아내, 자존심. 진정 모든 것을 포기할 자신이 있었으나, 실상은 무능한 왕의 단 한번의 실책으로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다. 예루살렘이 함략된 지 보름 후. 그는 화병으로 인해 숨졌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3세의 아들이자 그의 대자인 레몽 4세가 백작위를 수령받았다.

13. 안티오키아 공국의 봉신국이 되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상황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 제국은 라틴 혐오와 수 차례의 내전으로 더 이상 지중해의 십자군 봉신국인 안티오키아를 지원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데다가, 보에몽이 로마인들의 황가 규수였던 테오도라를 내치고 얻어온 신부 시빌라는 계속해서 아르메니아 왕국의 권력을 강화시켜 안티오키아를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트리폴리 백국은 안티오키아 공작령에 편입되었고, 앞으로 있을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으로 인해 풍파를 겪게 된다.

13.1. 3차 십자군

파일:멸망당한 십자군.png
하틴의 뿔 전투 이후의 십자군 국가 판도
레몽 4세가 백작이 되었지만, 보에몽 3세는 후계자인 그가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랬기에 봉신을 재편하여 트리폴리를 보에몽 4세에게 물려주었다. 이 시기쯤 시빌라와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든 십자군 잔당들이 터덜터덜 트리폴리로 향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트리폴리의 귀족들은 그들을 비난하며 그들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티레를 공성중인 몬페라토의 코라도를 지지하고 나섰다. 1188년, 살라흐 앗 딘의 군대는 트리폴리를 재차 공격했지만, 시칠리아 왕국의 선량왕 굴리엘모 2세와 십자군의 반격에 의해 저지당했다. 하지만 토르토사의 대부분과 자바라 등 트리폴리 백국의 대부분 영토가 살라흐 앗 딘에게 유린당했고 트리폴리 본토를 제외한 토르토사의 내성과 크락 데 슈발리에만이 수성에 성공했다.
이 때 살라흐 앗 딘은 포로가 된 십자군 영주들을 풀어주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기 드 뤼지냥도 포함되어있었다. 트리폴리에 망명했던 친 뤼지냥파 인사들은 자신들의 임금인 기를 찾아 아크레로 행군했고 다시금 트리폴리는 조용해졌다. 리처드 1세의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령 키프로스를 불태우고 아크레로 향하고 있던 틈을 타 트리폴리 백국과 십자군 잔당들은 토르토사, 비불루스 등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안티오키아와의 육로 통행로들은 라타키아 일대를 제외하고는 되찾지 못했다.

13.2. 아르메니아와 구호기사단의 준동

1201년 보에몽 3세가 사망하고, 공국은 두 명의 후계자를 남겨두었다. 보에몽 3세의 손자이자 레몽 4세와 아르메니아 공주의 아들인 어린 레몽 루펜과 트리폴리 백작 보에몽 4세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보에몽 4세는 십자군 영주들의 지지를 받아 공작위를 얻게 되었고, 보에몽은 살아남은 십자군 국가들중 가장 강력한 맹주가 되었다. 그러나 1205년, 레몽 루펜의 외가인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가 루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안티오키아를 침공했다. 그는 교황의 사절단과 구호기사단의 지지를 받아 안티오키아를 공격, 함략시킨다. 훗날 보에몽 4세는 레몽 루펜의 실정을 기회삼아 안티오키아를 되찾았지만, 구호기사단이 차지한 대부분의 영토는 돌려받지 못했다. 보에몽은 권토중래 하여 안티오키아로 복귀할 때, 안티오키아의 시민, 라틴 귀족들과 함께 트리폴리의 지지를 받았으므로 트리폴리와 구호기사단, 제노바의 사이는 최악으로 치닫을수밖에 없었다. 보에몽 4세는 구호기사단과 아르메니아인들의 로비활동으로 인해 결국 성전 기사단과 함께 파문을 받았고, 후속 십자군에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트리폴리와 안티오키아는 이렇게 서방 세계와 단절되게 되며, 남방의 티레, 아크레, 키프로스를 잇는 키프로스 왕국 계열과 단절되게 된다.

13.3. 거대한 이교도 군세의 말발굽 아래에서

보에몽 4세의 손자, 보에몽 6세의 시기에 와서는 결국, 중근동을 짓밟은 거대한 유목 군대. 몽골이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를 삼켰다. 다행히도 몽골은 십자군 잔당의 공적, 맘루크 왕조와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안티오키아-트리폴리를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의 바투는 기독교 국가 특히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술탄국들과 공조를 벌이던 니케아 제국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십자군 공국들에게 정교회를 강요하고, 안티오키아의 사도좌에도 정교회 총대주교를 착좌시킬것을 요구했다.[21] 보에몽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 정세를 알지 못한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감히 그리스 분리주의자 대주교를 서임한 안티오키아를 파문에 처했다. 보에몽에게는 다행히도 후임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은 우르트메르의 정세를 그나마 이해해준 우르바노 4세였다. 그나마도 파문을 취하해주지는 않고 연기시켜주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몽골이 계속 잘 나갔으면 다행이었다. 키트부카가 이끄는 몽골 분견군 [22]은 다마스쿠스를 함략시키고 이집트의 맘루크를 건드리며 일전을 부르짖고 있었다. 보에몽은 훌레구의 가신이 되어 원정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교황과 연락해 정교회를 탄압하는 행위를 중지하라며 경고를 들었다. 이교도 칸의 궁정에서 몰락해가는 동로마 제국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안티오키아의 귀족들은 바이바르스를 무너트릴 수 있다면 어떠한 수모도 참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훌레구의 군대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14. 트리폴리에 휘날리는 예언자의 깃발

우리의 싯누런 깃발이 너희의 붉은 깃발을 몰아낼 것이다. 종이 울리던 성당에서는 이제 알라는 위대하시다라는 유일한 외침만이 울려퍼질 것이다. 너희의 성벽과 교회에는 우리의 공성 병기가 들어설 것이고, 너희의 기사들의 집에는 우리의 검이 찾아갈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아바카 칸과 손을 잡은 응보이니라. -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 -

14.1. 어두운 밤을 쉬이 받아들이지 마시오

십자군의 방패가 되어주던 몽골군은 1260년,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격파당했고, 바이바르스는 몽골군과 손을 잡은 십자군 공국의 남은 세력을 살려두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는 더 이상의 평화 협정이 없음을 보에몽 6세에게 상기시키고 안티오키아를 철저히 파괴했다. 1268년, 안티오키아가 함략되자, 우르트메르 북부에 남은 십자군의 거점은 트리폴리 뿐이었다. 그 전까지 보에몽 6세는 어떻게든 바이바르스와 협정을 맺으려 했지만, 트리폴리만이 남게 되자 그에게 남은 것은 항전 뿐이었다.

바이바르스는 트리폴리 성 하나만을 남겨놓자, 생각을 바꾸어 그에게 항복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보에몽 6세는 더 이상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패배는 확실했지만 그의 자존심이 항복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다마스쿠스에서 출발한 수만의 맘루크 군단은 1271년 도착하여 트리폴리를 수 주간 공성했다. 그러나 맘루크는 트리폴리의 저항에 큰 피해를 입었고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와 키프로스의 십자군들이 이끄는 대군이 아크레에 북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협공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바이바르스는 트리폴리의 십자군에게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정중히 제안했고, 그제서야 보에몽 6세는 군대를 돌려 바이바르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

1277년이 되어서야 보에몽 6세의 아들 보에몽 7세는 겨우 구호기사단과 화평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세를 바꿀 수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보내준 병력은 맘루크 군대와 맞서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만 남아 트리폴리에 주둔했고, 심지어 프랑크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아바카 칸은 1282년 사망하고 말았다. 그를 이은 테쿠데르는 이슬람에게서 십자군 공국들을 지키는데 소극적이었다. 멸망은 빠르게 찾아오는 듯 보였다. 맘루크군은 평화조약을 갱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반트 지역의 토호들이 십자군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트리폴리 백국은 1284년까지 최소 세 곳에서 전방위적인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1284년, 테쿠데르는 암살당하고 아바카 칸의 아들인 아르곤이 일 칸국의 새 대칸이 되었다. 외할머니가 동로마 제국의 공주였던 그는 십자군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었고, 트리폴리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은 지원군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이는 맘루크의 상승세를 막아내기에는 벅찼다. 트리폴리 백국은 1285년에는 라타키아를, 1287년에는 마그레타를 잃었다. 심지어 백작 보에몽마저도 중병으로 앓아누워 일어날 가망이 없었다. 보에몽 가문은 동생 루시아와 어머니 시빌라를 사이에 두고 소유권으로 싸움을 벌였다.

1287년, 트리폴리의 기사들과 귀족들은 보에몽 가문이 계속해서 갈등을 벌이자 보에몽 가문에 비토를 놓고 자체적인 코뮌을 소집했다. 코뮌은 제노바 공화국에 지원을 요청하고 제노바의 부유한 상인이자 장군이였던 베네데토 자카리아의 지원으로 비르톨로메오 자카리아를 추대했다. 그러나 1288년에 성전기사단의 지원을 받은 루시아가 일부 영토를 점령하자 제노바 공화국은 지원을 줄여나갔고, 코뮌은 결국 루시아를 백작으로 추대했다. 이후 이집트와의 무역 상황이 좋아지지 않아 제노바는 맘루크 왕조를 향한 공격을 개시하자, 제노바의 영향을 받았던 트리폴리도 이 공격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고, 맘루크와 트리폴리의 평화조약은 이렇게 끝났다. 술탄 칼라운은 대군을 이끌고 트리폴리 공성에 나섰다.

15. 멸망

1289년 3월, 칼라운의 군대가 도착하자, 트리폴리의 루시아는 모든 지원을 긁어모았다. 코뮌의 기사들과 병사, 농민, 상인들은 스스로를 무장시켰고, 오랜 우방 성전 기사단도 부리나케 트리폴리로 달려왔다. 제노바, 베네치아가 각각 네 척의 배에 수백명의 병력을 보내왔고, 주변을 항해하던 피사의 배들도 트리폴리가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달음에 항구에 정박해 수비군에 가세했다. 갈릴레아 공 장의 기사들과 예루살렘 왕국 왕 앙리의 동생 왕자 아모리도 수백의 기사들을 끌고 티레에서 달려왔고 트리폴리와 항상 적대관계였던 구호기사단도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멸망의 그림자는 이미 모두에게 다가와 있었다. 코뮌에 참가하지 않은 많은 외국 상인들과 순례자, 시민들은 그들이 가져온 배를 타고 오히려 키프로스를 향해 도망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의 지원군이 도착하던 시점엔 이미 투석기가 트리폴리의 성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투석기는 결국 4월 말경에 트리폴리의 망루 두 지점을 붕괴시켰다. 성벽은 무너진 망루에 눌려 함께 무너졌다. 시민들은 항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지만 방어군은 무너진 성벽을 끼고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무너진 성벽에서의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자 아모리와, 성전 기사단의 단장 마테오, 바르톨로메오 엠브리코 등의 지도자들이 전사했다. 결국 26일 낮에 저항을 뿌리친 맘루크군은 구 시가지로 밀려들어왔다. 남아있던 대부분은 시민들은 학살당했지만, 키프로스로 향한 대다수의 시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남아있던 1200명의 시민들이 트리폴리 주변의 성 토마스 섬에서 저항했지만 사흘 뒤인 4월 29일경 그곳도 함략당해 모든 생존자들이 노예로 팔려나갔다. 트리폴리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 폐허를 남겨두고, 칼라운은 순례자의 산 주변에 신 트리폴리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비블루스와 네페 등의 성들은 본토인 트리폴리가 멸망하고 나서도 길버트 남작의 지휘 하에 10년을 더 항전했다. 그러나 이들의 항전도 명예롭게 항복하고 연공을 내는 조건으로 끝나고 말았다.

16.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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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성 우선 장자 상속제 [2] 라틴어로 '신께서 원하신다' 라는 뜻. [3] 라틴어가 공용어 였지만 대부분 미사나 공문서에서만 사용되었고 주류 프랑크인이 쓰는 통상적인 언어는 중세 프랑스어이며, 그 외에도 수많은 순례자가 모여들어서 유럽 전역의 언어와 다양한 토착 언어를 사용했다. [4] 이슬람 제국 통화 [5] 동로마 제국 통화 [6] 4월 27일에 함락 [7] 리비아의 수도가 아니라 레바논의 도시이다. [8] 레몽 1세의 첫째 부인의 소생이었는데, 교황청에서 그녀가 레몽 1세와 사촌 관계라는 이유로 무효화시켰다. 따라서 일반적인 서자와 달리 적법한 계승자를 주장할 소지가 있었다. [9] 알퐁스 주르당는 레몽 1세가 순례자의 산에 성을 쌓고 있는 와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너무 어려 백작의 후계자였지만 그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10] 이는 사실 보두앵 왕이 안티오키아 공국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방책이었다. 십자군과 이슬람을 가리지 않고 약탈하던 안티오키아가 트리폴리까지 먹는다면, 예루살렘 왕보다 권력이 강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 [11] 당시 지중해 세계를 여행한 무슬림 역사가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트리폴리 등 모든 곳에서 '로마인' 즉 동로마의 상인들이 융성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전했을 정도로 큰 세력을 떨쳤다. [12] 당시의 역사가들은 백국이 이미 바즈왈에 의해 대패한 이후에 자신의 병력을 모아 반격을 개시했다는 것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아마 그들과 연대를 맺은 제노바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의 할아버지인 베르트랑은 서출에 가까운 출신이라 프랑스 영지를 얻지 못하였다. [14] 이 덕에 다마스쿠스의 영주 무인 앗 딘은 레몽을 호의적으로 생각했다. [15] 다마스쿠스 영주들은 대대로 십자군과 동맹관계였던 편이였다. [16]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티베리아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티베리아스는 원래 레몽 3세 본인의 영지는 아니고, 그의 아내인 갈릴레아 공작부인 에시바의 영지였다. [17] 당시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녀를 둔 서사시가 생겼을 정도. (존 줄리어스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18] 그는 내심 멜리장드를 밀고 있었다. 마리아가 로마 제국과 혼인을 맺으면 안티오키아가 제국의 봉신령인것이 확정되기 때문.. [19] 아녜스는 원래 아모리 1세의 왕비로서 시빌라 보두앵 두 자녀를 낳았으나, 자식들이 어릴 때 두 사람의 혼인이 무효화되었고 또 이후 두 사람이 각각 재혼을 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아녜스의 공식적인 지위는 대비가 아니라 마지막 남편의 작위를 따른 시돈 백작부인이었다. 그러나 아모리 1세의 두 번째 왕비로서 이 시점에서 법적인 왕대비였던 마리아 콤니니가 남편 사후 본인에게 할당된 나블루스 백작령으로 물러나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아녜스가 어린 왕의 친모로서 사실상 대비 행세를 하고 있었다. [20] 출처 : Libellus de expugnatione Terrae Sanctae per Saladinum [21] 훌레구는 동로마 황가와 혼인하고 싶어했었고, 후임인 아바카 칸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했을 정도로 친 로마적이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는 초대 교회의 5대관구로써 기독교 세계에서 가톨릭이나 정교회 모두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가령 유대교의 한 분파로만 여겨졌던 초대 교회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 처음 불려진 곳도 안티오키아에서부터 였다. [22] 분견군이라 해도 수만 규모의 거대 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