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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7 12:35:48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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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 및 동기3. 음모
3.1. 주동자3.2. 공범3.3. 협력자3.4. 루킬라의 암살 계획
4. 사건5. 심문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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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182년, 로마 황제 콤모두스 콜로세움에서 열린 국가 행사에 참석할 당시 벌어진 암살미수 사건이다. 로마 황제의 여러 암살미수 중 유일하게 콜로세움에서 벌어졌다.

종종 182년의 음모로도 불린다. 마키아벨리의 평가로 오현제로 추앙받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100여 년의 통치기와 로마 제국의 팍스 로마나가 종식되는 서막으로 평가받는다.

황제의 맏누이였던 루킬라가 멀쩡하게 제국을 통치하던 동생 콤모두스와 그의 황후인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때문에 권력을 잃게 될 것이라며, 약 3~4년 동안 준비한 후에 벌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지극히 멀쩡했고, 평범해도 무난하게 통치를 하던 황제 콤모두스는 큰 충격 속에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고, 최악의 암군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2. 배경 및 동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장녀였던 루킬라는 부황과 모후의 건강이 나빠지는 가운데, 삼촌인 루키우스 베루스와 164년에 결혼했다. 루킬라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아우구스타의 지위를 수여받아, 어머니인 소 파우스티나와 대등한 아우구스타가 되었다. 이때 루킬라는 로마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면서 세를 확대했고, 은밀히 그 세력을 이용해 원로원 안팎에서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지지자들에게 존경받고, 영향력이 상당한 아우구스타로 평가받게 되었다.

루킬라는 삼촌이자 남편인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소(小) 루키우스 베루스를 비롯하여 아우렐리아 루킬라와 루킬라 플라우티아를 출산했다. 이중 막내 딸인 루킬라 플라우티아 외에는 169년 이전에 모두 요절했고, 남편인 루키우스 베루스마저 169년 게르만족과의 전쟁 이후 로마로 귀환하다가 쓰러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따라서 그녀의 지위는 루키우스 베루스가 169년에 요절하면서 흔들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막내 아들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를 잃었고(169. 9. 10), 후계자는 콤모두스만 남게 되었다. 이때 황제는 자신과 황후의 건강이 나쁜 것을 알아, 그를 도울 보호막의 필요성이 시급함을 느꼈다. 당시 황제는 20대 초반이었던 안토니누스 피우스[1]의 치세때부터 계속된 격무에 시달려, 건강이 즉위 이전부터 많이 악화된 상태였다. 이는 황후 소 파우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계속된 출산 및 공적 업무 수행 속에서 건강이 나빠졌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공동황제이자 동생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요절한 뒤, 홀로 된 장녀 루킬라를 재혼시켜, 그녀의 새 남편이 콤모두스를 보필하고, 또한 그에게 카이사르의 지위를 내려 후계 구도를 정비하려고 했다. 그래서 낙점된 인물이 30대 중반의 미혼으로, 시리아 속주의 주도인 안티오키아 출신의 그리스계 로마 장군 폼페이아누스였다.

당시 루킬라는 첫 남편과 사별한 이후, 아우구스타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어머니인 소 파우스티나의 이름을 내걸고 권세를 부렸다. 그래서 이 결혼을 격렬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원로원 의원 신분에 불과한 폼페이아누스와의 결혼은 자신의 모든 지위와 어울리지 않았고, 또한 권력을 놓게 된다는 선포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에게 이를 강조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결정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렇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가문과 제국의 미래를 위해 이를 황제의 명령으로 무효화하고, 169년 루킬라와 폼페이아누스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곧바로 사위가 된 폼페이아누스에게 루킬라의 남편 지위에 맞는 황족의 지위를 내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날 자녀에게 황족이자 제위 계승권자로서의 특권을 미리 하사했다. 아울러 원로원과 로마군 내에서 뛰어난 능력, 훌륭한 인품, 좋은 외모와 높은 교양 등으로 존경받고 있었던 폼페이아누스에게 카이사르(칭호)를 내리겠다고 하면서 폼페이아누스 카이사르로의 개명까지 명령했다. 그렇지만 이 조치에 대해 폼페이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지위와 개명만은 받지 않겠다고 간곡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장인인 황제의 명령을, 권력의 특성상 둘로 나눌 수 없다는 점에서 콤모두스의 미래가 완전히 담보되지 못한다는 현명한 판단하에 거절했다. 하여 마르쿠스 황제는 사위에게 콤모두스를 아들처럼 지켜달라고 부탁하면서, 장녀인 루킬라가 원한 결혼 전의 지위와 명예를 유지하는 조치를 내리는 선에서 이를 마무리했다.

루킬라는 두 번째 남편인 폼페이아누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신참자'(노부스 호모)라는 이유만으로 대놓고 무시하면서 갓 낳은 아들을 폼페이아누스에게 키우라고 명령한 후, 별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루킬라는 자신의 고종 사촌 오빠인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를 시작으로,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의 젊은 양자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를 사실혼 관계의 남편으로 삼고, 여러 미남을 남첩으로 두며 문란한 생활을 했다.

서기 175년을 전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건강은 크게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 틈바구니 속에서 루킬라는 마르코만니 전쟁으로 수도 로마를 비워야 했던 아버지, 건강이 나빠 공식석상을 장녀에게 위임하게 된 어머니 대신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래서 루킬라는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 동안, 재판과 행정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사 이동 역시 루킬라의 의중이 반영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이 사건으로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일의 오해를 차단할 목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 해 콤모두스와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그리고 소 파우스티나 황후를 급히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 전역은 루킬라와 그 세력이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다행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은 몇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때의 일은 로마를 떠나 동방 순행에 나선 황후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따라서 175년 루킬라와 콤모두스의 모후였던 소 파우스티나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로마군 동방 기지가 있었던 할랄라에서 사망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황후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는데, 콤모두스 역시 사춘기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어린 콤모두스의 심적인 안정을 위해, 콤모두스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나와 매부들에게 의지케 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서거해도 콤모두스를 친아들처럼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약조까지 받았다. 따라서 폼페이아누스,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장인의 유지를 지키겠다고 맹세했고, 루킬라,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황녀 역시 여린 성격의 콤모두스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약조했다. 이때 루킬라를 제외한 마르쿠스 황제의 사위와 딸들은 콤모두스에게 부모의 역할을 하면서 도움을 주었다. 특히, 파딜라,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부부, 폼페이아누스, 코르니피키아는 콤모두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헌신했다. 허나 루킬라는 콤모두스가 어리고, 자신의 보호를 받게 된 처지를 악용해, 이를 빌미로 세력을 두텁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쿠스 황제와 콤모두스 등의 황실 수행원들은 동방 순행을 마치고 176년 가을, 로마로 돌아왔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이어서 그는 콤모두스가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콤모두스의 혼처를 구해 곧바로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다뉴브, 다누비우스)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이었던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과 후계자 선정은 공교롭게도 장녀인 루킬라가 큰 질투심을 느끼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마르쿠스 황제의 공동황제인 콤모두스와 결혼한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의 등장은 루킬라와 그 세력의 권력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킬라는 179년 자신을 견제할 수 있는 남편 폼페이아누스, 여동생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파딜라의 남편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남동생 콤모두스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면담하기 위해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로 향한 사이부터, 콤모두스 부부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로마군 숙영기지였던 빈도보나에서 서거했다. 이때 콤모두스가 예정 그대로 단독 황제로서 제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18세의 젊은 콤모두스는 즉위 직후, 로마군에게 마르코만니 전쟁을 지속할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그렇지만 계속된 전시 체제하의 높은 세금과 그 피로도는 국고 상황을 압박했고, 로마 제국은 현실적인 이유로 전쟁 지속이 어려웠다. 전선의 로마군 내에서도 전쟁을 지속하자는 의견보다는 높은 피로도 속에서 휴전을 하자는 여론이 베테랑 장병들을 중심으로 높았다. 그렇지만 콤모두스를 보필하게 된, 즉 마르쿠스 황제가 지명한 섭정단 내의 고위급 고문들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고위급 고문으로 선정한 사람으로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2],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3], 티투스 푼다니우스 비트라시우스 폴리오가 있었고, 그 아래의 보좌 수석 고문으로는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4]와 장군들인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프라이토리아니의 근위대장이었던 푸블리우스 티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가 있었다.

즉위 이후, 콤모두스는 오랜 회의 끝에 당시 국고 상황의 심각성, 로마군 내 베테랑 장병들의 피로 호소, 교전 세력인 게르만족들의 상황 등을 종합 판단해, 전쟁을 평화교섭하에 끝내기로 결정지었다. 이 과정에서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로 대표되는 군부는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했지만, 콤모두스는 이들에게 전쟁을 계속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밝힌 다음 설득한 후, 길었던 마르코만니 전쟁을 마무리했다.

그 후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 180년 10월 22일에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자신이 총애한 시종인 사오테루스를 황제 전용 마차에 태우고, 개선행렬이 거행될 동안 수시로 사오테루스에게 키스를 하는 애정행각을 공개적으로 벌여 행동이 참 경박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부황을 충실히 섬겼던 대신들과 가족 및 친지들의 도움을 받으며 국정을 큰 무리없이 이끌었다. 그러나 2년 후, 콤모두스가 누구보다 신뢰하고 의지했던 맏누이 루킬라가 오랫동안 꾸며온 암살 계획을 단행했다.

3. 음모

3.1. 주동자

3.2. 공범

3.3. 협력자

이 외의 이름 미상의 원로원 의원, 기사 계급(에퀴테스) 관료, 해방노예 등도 있었다고, 루킬라 일당과 페렌니스가 주장했다.

3.4. 루킬라의 암살 계획

콤모두스 황제의 첫 재위 2년은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꾸려준 고문단의 도움 아래에서, 내치와 외치 모두 무난하고 성공적이었다.

콤모두스가 재위 2년간 가장 힘을 썼고, 본인이 관심 있어 하면서 벌인 조치는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군자금, 전시체제 명목으로 데나리우스 평가절하 조치를 내린 것을 수정해, 안정적으로 국고가 돌아가게 한 것이었다. 이 조치로 잠시 데나리우스 은 순도는 79%에서 76%로 낮아지긴 했다. 그러나 단계적 검토 후 상향 및 유지 조치를 명한 콤모두스 아래 로마 국고는 평시체제 아래에서 안정됐고, 평균 은 순도 조정 아래 귀금속 소비량을 절약하면서, 영리하게 물가를 빠르게 정상화시켰다.[6] 콤모두스는 내정 관리에서도 원로원 고문들에게 의견을 들어 이를 반영하고, 자문회의 기능의 내각화를 추진해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로마인 모두는 이렇게 평가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날 때부터 보랏빛 천을 감고 태어난 콤모두스가 좋은 조상과 훌륭한 지위에 어울리게 온화하고 쾌활하며 성실히 국정을 수행한다."

허나 루킬라는 동생 콤모두스가 첫 2년 동안 칭찬을 받을수록 증오심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들이었던 파딜라, 코르니피키아,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가 콤모두스의 편을 드는 것을 증오했고, 재혼으로 맞이했던 남편인 폼페이아누스가 마르코만니 전쟁 중단으로 불만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지에 따라 콤모두스를 돕고, 그의 아버지이자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혐오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보다 루킬라를 열받게 한 것은, 콤모두스 황제의 치세 아래에서 연착륙에 성공한 새로운 아우구스타 크리스피나가 누린 지위와 영예, 그리고 대중들의 칭찬이었다.

루킬라는 콤모두스와 크리스피나 부부 때문에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고 여기며 증오심을 표출했다. 어릴 때부터 모두의 존경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운명이라고 믿은 루킬라는, 조용한 귀부인이자 황제의 보호자가 된 자신이 힘없는 아우구스타로 전락했다며 신세를 한탄했다. 그래서 그녀는 딸인 루킬라 플라우티아와 함께 반(反) 콤모두스 여론 몰이를 시작했다. 이들 모녀는 콤모두스가 우유부단하며, 변덕스러운 결함을 숨기고 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면서 콤모두스 부부의 지위와 재산을 내주겠다는 미끼로 야심가들을 포섭했다. 여기에는 루킬라의 연인으로 수년째 불륜 및 사실혼 관계였던 마르쿠스 움미디우스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부자가 함께 했다.

루킬라 일당은 콜로세움에서 열릴 국가 축제를 기점으로 콤모두스 황제를 먼저 죽이고, 그 다음 황궁에 있는 크리스피나 황후를 살해하자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면서 이들은 폼페이아누스의 조카로, 야심이 많고 용감하며 완력이 좋고, 체격에서 콤모두스와 비슷했던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를 포섭했다.

4. 사건

서기 182년, 콜로세움에서 국가 행사가 열렸다. 로마 황제가 주최하는 만큼, 콤모두스는 수석 고문단 및 보좌 고문단과 함께 콜로세움으로 향했다.

콤모두스가 콜로세움 입구로 입장할 때, 암살을 직접 하기로 한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가 단검을 들고 콤모두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이때 콤모두스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
"여기 원로원이 보낸 정의의 칼을 받아라!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
하지만 다행히도 콤모두스는 무사했다. 황제를 둘러싼 경호원들은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를 현행범으로 붙잡았고, 황제를 지키고자 수석 고문단과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 주변을 둘러 쌌다. 콤모두스는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의 얼굴을 알고 있었고, 원로원과 협치하면서 칭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큰 충격을 받고 실신했다.

5. 심문

현행범으로 붙잡힌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는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포섭한 인사들을 줄줄이 불었다. 따라서 퀸티아누스의 심문 이후 모든 추악한 진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의 대응은 보복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무자비했다. 암살범이 본인 앞에서 원로원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에, 범인 심문 이후 로마 제국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까지 암살미수 사건 조사에 연루된 이들은 모두 기소된 다음, 조사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붙잡힌 콰드라투스 안니아누스 부자의 물귀신 작전으로 크리스피나 황후의 아버지 등이 언급되면서 조사가 확대되었다. 이런 가운데, 콤모두스 황제의 오랜 친구이자 최측근이었던 사오테루스가 별개의 사건으로 살해되었다. 이와 동시에,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의 배후에 루킬라와 루킬라 플라우티아 모녀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6. 결과

콤모두스 황제가 1주일 정도 끙끙 앓다가 보고서를 받았을 때 피바람이 불게 되었다. 콤모두스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모든 사건들의 지휘를 맡게 된 페렌니스는 황제 암살미수 사건과 사오테루스 살해 사건이 연관되었다는 전제하에서 추가 조사를 지휘했다. 그래서 근위대장이었던 푸블리우스 티루테니우스 파테르누스 등이 마치 강도의 습격을 받아 암살되는 일련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게 되었다.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반역죄 혐의로 조사받다가 혹은 증거조사 중 약간의 의심이나 증거만 발견되어도 즉시 재판에 넘겨진 뒤 처형되었다.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이때 콤모두스는 누나인 루킬라와 그녀의 딸이었던 루킬라 플라우티아가 단순 가담자가 아닌, 즉 자신을 별 이유 없이 죽이려했던 암살 주동자인 것을 알고 큰 배신감을 받아, 심한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이때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티기 힘들어했고, 사이가 좋았던 황후와의 관계 역시 파탄이 나고 말았다. 콤모두스는 우울함을 호소했고, 환청과 환각 증세도 호소하더니, 결국에는 사람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 무모한 암살미수 사건을 일으킨 루킬라와 루킬라 플라우티아 모녀는 체포된 직후, 다른 가담자들과는 달리 황족 특권의 보호 아래 사형을 선고받고, 과거 티베리우스 황제가 은둔했던 카프리 섬으로 유형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루킬라와 그녀의 딸인 루킬라 플라우티아가 유배됨과 동시에, 남편이 확실히 개입은 했지만 증거가 불충분했던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7] 황녀 역시 푸닉(북아프리카)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이어 코르니피키아 황녀의 남편 역시 콤모두스의 신임을 잃었고, 그는 190년 혹은 192년 초 콤모두스 암살을 아들, 동생, 누나와 함께 기획했다는 이유로 몰살당했다. 그렇지만 콤모두스는 이번 사건과 무관했던 폼페이아누스, 파딜라 부부, 코르니피키아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이 사건 이후, 단독 근위대장이 된 페렌니스는 권력을 쥐고 콤모두스 황제를 조종하고자, 추가로 일련의 정치공작을 통해 이 사건의 파생 사건이라는 명분으로 공안통치를 개시했다. 그 결과, 살비우스와 파테르누스가 처형되었고,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총독으로 있었던 수석 고문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해임당한 후 로마로 송환되어, 가난한 주민들에게 콤모두스의 이름으로 시혜를 펼쳤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반역 재판에 회부되는 치욕을 겪었다. 아울러 페르티낙스는 브리타니아로 강제 전출 조치되었고, 폼페이아누스는 페렌니스의 감시 아래 시골로 내려가 은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콤모두스 시대는 간신 페렌니스 아래에서 망가지게 되었다. 이 모두가 한 여인의 그릇된 권력욕과 질투심에서 비롯된 참담한 비극의 결말이었다.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고모부이자 장인이었으며, 양아버지이기도 했다. [2] 콤모두스 황제의 맏누이인 루킬라 황녀의 두 번째 남편 [3] 콤모두스 황제의 장인 [4] 콤모두스 황제의 두 번째 누이인 파딜라의 남편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법적인 외손자였다. [5]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생전에 그의 양손자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이들 부부의 조카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입양하게 되면서, 마르쿠스 황제와 형제가 되었다. [6] 이런 방법은 이전의 안토니누스 피우스, 이후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콘스탄티누스 1세 등이 활용한 형태와 똑같다. [7] 콤모두스 황제 바로 아래의 여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