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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21:11:03

코다 쇼세이 이라크 피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희생자 코다 쇼세이
2.1. 사건 이전의 생애
3. 사건의 경위
3.1. 피랍3.2. 피랍 이후3.3. 사후
4. 다른 나라의 사건들과의 비교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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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イラク[ruby(日本人人質事件,ruby=にほんじんひとじちじけん)]
イラク[ruby(日本人青年殺害事件,ruby=にほんじんせいねんさつがいじけん)]

2004년 10월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일본인 여행객인 코다 쇼세이가 납치된 후 피살된 사건.

2. 희생자 코다 쇼세이

<colbgcolor=#000><colcolor=#fff> '''코다 쇼세이
香田 証生 |Shosei Koda'''
파일:캡처_2022_12_05_16_20_38_788.png
출생 1979년 11월 29일
일본 후쿠오카현 노가타시
사망 2004년 10월 29일 (향년 24세)
이라크 바그다드
가족 父 코다 마스미, 母 코다 세츠코, 兄 코다 마키
종교 기독교[1] ( 개신교, 일본기독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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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과 성전이라는 테러 조직에게 붙잡혀 참살당한 최초의 일본인 희생자. 미국의 닉 버그의 참살, 한국의 김선일 참살 이후 피살 당한 일본인 피해자였지만 오히려 일본 사회의 여론에서는 반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1. 사건 이전의 생애

파일:qeqeqe.png
파일:ntv_04-10-30as.jpg
코다 쇼세이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과 그의 생전 당시 사진
파일:shosei koda.jpg
그의 학창 시절 사진
일본의 평범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2] 규슈 북단 노가타시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재학 중 취업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한 신분이었다. 이후 유학 및 취업을 목적으로 해외인 뉴질랜드로 떠나서 이적했는데 당시 그를 기억하던 한국인 유학생들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안 가 비슷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에 정착했다.[3] 학창 시절의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 생활에 부적응적인 경향을 보이거나 공부를 지지리 못하는 등의 흔적들은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범한 학생 정도로만 기억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름인 쇼세이의 유래는 생명의 증거를 뜻하는 일본어 단어라고 한다. 또한 코다의 어머니는 직업이 간호사였으며 아들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간호사가 되고 싶어하는 장래를 희망했다고 한다.

그는 자국인 일본을 떠나서 워킹 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해서 뉴질랜드에도 정착했고 어학 연수를 받으며 학원 교실 구석 의자에 앉아 조용히 영어 공부를 하던 학생으로 기억했다고 한다.[4] 해외의 여러 국가들을 마음대로 여행하면서 관광도 해볼 겸 견문도 쌓아나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으로 여행 비용을 모아두며 생업을 유지해 왔다. 실제로 가족들조차 코다의 한심하고 무계획적인 생활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당시 국제 정세는 다음과 같은데 2003년에 이라크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후세인의 잔당과 알카에다 같은 테러리스트가 이라크 내부에서 말썽을 부리면서 혼란에 계속된 상태였다. 이에 고이즈미 총리는 이라크 특조법을 정하여 자위대를 파견하는 등 이라크 부흥 지원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얼마 뒤 이라크에서 일본인 외교관 피살 사건[5]이라는 통수를 맞으면서 일본 국민들도 당연히 충격에 빠지면서 중동에 대한 경계심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일본인 남녀 3명이 이라크 무장 단체한테 피랍당했다가 풀려나는 등 테러 단체의 인질극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일전에 유일신과 성전에 의해 미국인 닉 버그에다 한국인 김선일, 불가리아인 게오르기 라조프, 이바일로 케포프, 또 다른 미국인들인 로버트 제이콥 폴 존슨,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 미국인 엔지니어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도 모두 이라크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잘못하면 외국인 희생자들이 더 추가될지도 모르는 판국이기도 했다.

3. 사건의 경위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에서 멀쩡히 머무르다가 돌발적으로 이라크로 향하겠다는 선언을 하였고[6][7] 결국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요르단을 거쳐 이라크로 향했다. 요르단 마을의 사람들도 그가 이라크로 가려는 것을 말렸으나 옹고집으로 인해 포기하였다고 한다.[8]

요르단에서 버스를 통해 바그다드로 도착한 그에게는 100달러(10만 원)밖에 없었다. 당시 테러리스트+외국인에 대해서 반감과 겁이 있던 이라크의 숙소들은 100달러밖에 안 들고 온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길거리에서 노숙을 단행하다가 납치당하고 말았는데 하필 납치범이 유일신과 성전이었다.[9]

3.1. 피랍

파일:sqsqx.png
" 고이즈미씨, 그들은 자위대 이라크에서 철수하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목을 베겠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10][11]
코다 쇼세이를 잡은 유일신과 성전은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협박 영상을[12][13] 인터넷 상에서 내보내며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요구 내용은 48시간 이내로 자위대를 철수시킬 것이었다. 일전에도 일본인 남녀 3명이 인질로 붙잡혔던 사건에도 이미 자위대를 철수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으며 이는 김선일 피랍 사건 당시 요구한 내용과도 상당히 비슷했다. 협박 영상에는 코다 쇼세이 본인이 요구 내용을 들어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도 있었는데 절규하던 김선일과는 달리 충격에 빠진 국민들과 총리에게 사과를 시작으로 담담한 말투로 요청하는 태도였다고 한다.[14] 이러한 배경은 후술할 내용을 참고할 것.

3.2. 피랍 이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정부의 대답은 단호하게 거절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본국 소환은 없다"는 말로 단언했으며 "협상은 없다"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렇게까지 일본 국민들의 대다수는 인질 구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어머니마저 아들의 구출을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적극적으로 나서 봐야 자위대의 피해만 커질 게 뻔했던 점도 있긴 하지만.

3.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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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 직전의 코다 쇼세이(열람주의)

결국 48시간이 만료되어 협상은 결렬되었고 유일신과 성전은 경고대로 코다 쇼세이를 참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였다.

2004년 10월 31일 새벽에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목 없는 시신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음 날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집행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에서 유일신과 성전은 알카에다 조직으로의 편입을 선포하고 이놈은 일본 정부의 미온한 태도로 죽은 것이니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정당화하였고 쇼세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본 정부의 미국 협조를 비난하며 미국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경고했다. 일본 정부의 몸값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고 성명을 모두 낭독한 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쇼세이를 성조기 위에 강제로 눕힌 뒤 단검으로 참수하였고[15][16] 참수한 목은 몸 위에 올려 놓았다. 특이하게도 다른 인질들과는 다르게 주황색 죄수복을 입지 않고 눈도 가려지지 않은 채 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참수되었는데 사후 부검 결과에서 머리에 총상이 발견되고 여러 고문 흔적이 있었는데 코다 쇼세이의 저항이 있었거나 인질을 겁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가한 고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미국인 인질이었던 폴 존슨은 심문 영상에서 안대를 씌운 상태로 말을 하지 못하게 입막음을 당했으며 또 다른 미국인 인질들인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는 피랍 영상에서 테러범들이 총을 머리 옆에 들이갖다 대면서 유언이나 말을 남길 수 있게끔 시켰다. 참수된 시신은 집행 당시 깔아놓은 성조기에 싸였으며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쿠웨이트를 넘어서 일본으로 송환되어 유가족에게 전달되었고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 기독교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당시 한국 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보도되었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인질 살해에 대해 "새삼스레 분노를 느낀다."고 발언했다.

한편 여론의 반응과 별도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죄로 분류하여 검찰에 송치했으며 현재 공소시효가 영구 중단 되었다. 그러나 김선일 피랍 사건과는 다르게 범인 중 한 명은 신원이 밝혀졌으며 이름은 후세인 파미 바드르[17]로 2006년 초에 체포되어 그는 코다 쇼세이를 살해한 죄목으로 그 해 11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형 판결 뉴스가 존재하므로 # (영어) 현재는 사형이 집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다 쇼세이를 참수한 살해범 이외의 다른 범인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런 조직에 몸담은 인물들이고 후신인 ISIS도 크게 박살난만큼 현재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

쇼세이를 참수한 범인이 김선일을 참수한 유일신과 성전 소속이고 체포 직후 심문에서 불교 신자를 포함해 무려 자신이 116명이나 참수했다고 자백한 바 있기 때문에 이 자가 김선일을 참수했던 자일 가능성도 존재하지만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 중에 김선일도 포함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4. 다른 나라의 사건들과의 비교

이 사건 당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와(和)'라고 하는 개인이 전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신문화, 즉 메이와쿠에서 기인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납치범들의 요구 내용과 결국 피살당했다는 점은 김선일과 판박이였지만 파헤쳐 보면 김선일 피랍 사건과 대조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질타가 심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정부의 태도를 불가피하다고 봤으며 피해자 비난 여론도 종종 있었으나 대체로는 동정하였다.

피살 이후 한국에서도 응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을 동일한 선상으로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납치되기 전까지의 행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김선일은 그가 속한 가나무역 회사에서 해당 지역에 파견한 근로자였고 정상적인 업무를 행하고 정상적으로 복귀하던 중에 납치당했기 때문에 김선일이 이라크에 간 것이 선교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 추후에 알려지긴 했지만 대중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곳으로 발령받아 자신의 일을 하다 납치되어 살해당한 아주 불쌍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반면 코다 쇼세이는 그냥 자아 찾기 해볼 겸, 다른 나라들을 자기 마음대로 놀러 다니다가 이라크에 들어가서 피해를 끼친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것이 김선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유발한 원인으로 작용되었지만 김선일 그 자신이 그런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간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테러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론을 고수한 것도 대중들도 당연히 대체로 이해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 한 가지 있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공동체주의 개인주의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엄밀히 다른데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면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터치를 하지 않되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 되고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도 자신이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피살된 이 두 사람 말고도 미국인 민간인이었던 닉 버그 역시 본인이 간 거였고 본인의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니 본인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유가족 인터뷰에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내 아들이 선택한 길이니 존중한다."며 담담하게 인터뷰하여 한국과 일본과도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확연하게 보여주었다.[18] 왜냐하면 당시 한국의 정서 상으로는 유가족들은 이건 다 정부 탓이라며 정부를 비난하며 소송을 걸거나 피해자는 협상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며 빨리 군대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서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개인주의 정서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정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대응 과정에서 정부가 잘못한 점이 없고 납치 피해자 본인이 위험을 인지하고도 비필수적인 이유로 들어갔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온전히 다 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도 비슷한데 당시 한국 정치권과 중노년층은 '우리 민족이고 우리나라 사람인데 세금을 들여서라도 당연히 구해와야 한다.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같은 의견이 대다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지만 청장년층에서는 "선교하겠다고 자기들이 알아서 간 건데 굳이 구해와야 하냐?"거나 "설사 구한다고 하더라도 구출에 든 비용은 모두 교회 측이 지불해야 한다."와 같은 반응이 많았다. 때문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은 물론 샘물교회 신도들과 관련자들 모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이 구출된 뒤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한국 정부는 이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여행금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 사회도 이처럼 비슷하게 "그냥 멋대로 간 사람이 잘못한 것", "죽든 말든"이라는 반응으로 책임은 전적으로 피랍자에게 물어 버리며 구출은 대개 포기해 버린다. 이런 태도는 10년 뒤에 또 다시 일어난 유카와 하루나 이슬람 국가 피랍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반면 이 사건의 2차 피해자인 고토 겐지는 유카와 하루나와 달리 지인을 구출하려는 올바른 일을 하다가 같이 사건에 휘말려서 죽었기 때문에 본토인 일본에서도 자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받았다. 이는 기인하는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정당한 대의 없는 자신의 행위로써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는 이들을 매우 안 좋게 보는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인 면모다.

실제로 샘물교회 사건 때도 정부가 분명 테러 첩보 경고를 고지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은 그 경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피해자 유족들 중 일부는 출국을 막지 않은 정부가 잘못이라며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의 주장은 본인의 선택으로 갔음에도 행동의 결과를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한국 법원은 이것이 궤변이라고 여겨 패소 판결했고 이미 개인주의적 시각이 강해진 한국의 여론도 냉담했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거대 시민 단체들의 존재로 정치권에서 구조를 위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뿐이다.

여기에 각 개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서양과 각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일본의 인식의 차이가 더 해져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에 폐를 끼친 코다 쇼세이를 그렇게 키우고 코다 쇼세이를 말리지 않은 그의 가족들을 비난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의 피해자들인 닉 버그의 유족들은 1차적으로 닉 버그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개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많은 동정을 받았다.[19] 영국에서 일어난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도 역시 닉 버그와 마찬 가지로 영국 내에서의 여론은 비글리를 비난하는 여론이 없고 동정하는 여론이 대다수였고 케네스의 유족들과 영국 시민들이 비글리가 무사 생환하기를 바랬으며 심지어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을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깨고 테러리스트들이랑 협상을 해서 이라크인 여성 포로들을 석방해 비글리를 구출해내야 할 정도였다.[20] 하지만 코다 쇼세이의 가족들은 오히려 아들의 기행이 낳아 버린 무모한 결과에 대해 아들 대신 사죄하면서 일본 사회의 비난을 그대로 들어야만 했다.[21] 결론적으로 다른 국가들의 인질들이 희생당할 때는 보통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매우 크게 오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코다의 유가족들은 오열보단 일본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가 되었다.[22][23]

5. 여담


[1] 같은 시기에 피살당했던 희생자인 김선일과도 종교가 같다. [2] 일본은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7~80년대에 비해 많이 낮은 편이라 기독교 집안이기만 해도 특별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일본기독교단 정식 교인이었다. [3] 이스라엘에 간 이유도 정확히는 불명확하며 농장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짐에 따라 비자를 잘 대줄 수 있다는 점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개인적인 낭설과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4] 테러범들이 촬영한 협박 영상에서도 영어로도 발언을 했던 모습을 보면 실제로 영어 공부를 꽤 잘했던 걸로 추측된다. 코다의 어머니는 아들이 1년 동안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첫 해외 여행을 뉴질랜드로 갔는데 가족들은 그 때 중동으로도 여행을 갔는지 전혀 몰랐었다고 한다. [5] 이라크로 파견된 일본인 외교관 2명이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현지인 운전자 1명과 함께 총격으로 사살된 사건이다. 이라크 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일본인 피살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후세인 잔당 주동설이나 미군 오발설 등이 돌지만 진상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듯하다. [6] 연락한 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이라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시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때문에 갔다고 했다지만 이외에는 정말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다. [7] 일설로는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간 거라는 설도 있다. 텔레비전에는 나오지 않는 이라크의 현실을 자신이 직접 스스로 가서 파헤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라크에 가기 전에 배낭에 들어 있던 공책에는 미군의 폭격에 의해 상처를 입은 이라크 아이들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8] 당시 이라크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요르단을 거치는 것이었다. 안전 문제였는지 이스라엘에서 이라크로 직행하는 교통수단은 없었고 이스라엘과 육로로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요르단이었기 때문이다. [9] 위에 있는 피랍당했을 때의 사진을 보면 길거리에서 오랫동안 노숙을 해 왔다는 흔적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데 옷도 더러워지고 더벅머리로 바뀐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10] 협박 영상에서 처음에는 영어로 말했으며, 이후에는 당황에 빠지지 않고 일본어로 굉장히 침착하고 정중한 어조로 말하였다. [11]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They asked me why the Japanese government broke the law and sent troops to Iraq. They wan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Koizumi Prime Minister to withdraw Japanese troops from Iraq, or cut my head. [12] 성명문 내용: "우리는 일본 정부에게 이라크에서 자위대를 철수시킬 48시간의 시한을 준다. 만약 이를 응하지 않는다면 이 이교도 인질은 다른 이교도 인질인 닉 버그와 케네스 비글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13] 영상에서 코다 쇼세이는 무릎을 꿇고 영상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부동자세로 있으며 테러범 중 한 명이 쇼세이의 머리채를 잡아 얼굴을 들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14] 김선일과 마찬가지로 주위의 테러범들이 모두 물러간 채 혼자서 발언했는데 무릎을 꿇고 마치 죄인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15] 위의 협박 영상과 비슷하게 끝까지 담담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고 몸을 조금 떨긴 했으나 카메라를 보지도 않은 채 칼에 목이 찔렸을 때 잠깐 신음을 내다가 그 후로는 잠잠해졌다. [16] 다른 국가들의 인질들의 참살 영상과는 다르게 큰 비명이나 발버둥을 치지 않고 외마디의 신음 소리만을 낸 채 참수당하였다. 이미 영상을 찍던 시점부터 사실상 지친 것으로 보이는데 코다 쇼세이를 중앙에 미리 무릎을 꿇어 놓은 채로 두고 약 몇 시간이 지난 후에 테러범 3명이 갑자기 영상 속에 나타났다. 같은 시기에 미국인 인질이었던 폴 존슨과 잭 헨슬리도 비명을 지르지 못하고 참살당하였다. [17] 참수를 집행한 인물로, 위의 참수 직전 사진에서 맨 왼쪽의 인물이다. [18] 사실 닉 버그와 김선일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미국인 인질들과 영국인 인질이었던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 케네스 비글리도 이라크에서의 건설 계약직을 택해서 그 곳의 업무상으로 인해 갔으나 그들도 자택을 감시하던 경비원이 이곳을 빨리 떠나라는 권고를 받았을 때 본인들이 알아서 고국으로 귀환 했더라면 피랍당할 일이 없었고 엄연히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업무를 미루고 중간에 귀국하면 보수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라크에 끝까지 남았다가 피랍을 당한 것이다. 케네스 비글리 피살 사건도 당시 미국이나 영국 내에서 비난하는 여론은 없었으며 닉 버그와 김선일처럼 동정 여론들이 대다수였으나 경비원이 떠나라는 권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고 이라크에 끝까지 머물러있기로 결심을 한 그들에게도 잘못과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19] 다만 이는 좌우가 갈리는 사안인데 미국의 좌파 진영에서는 대체로 닉 버그에 대해 옹호적이고 닉 버그의 아버지의 비판을 옹호했으나 우파에서는 닉 버그의 행동을 비판하고 닉 버그의 아버지의 의견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이는 닉 버그의 아버지의 의견에 대한 비판이지 닉 버그의 아버지와 닉 버그를 묶어서 비판하지는 않았다. [20] 다만 비글리 본인도 위험한 지역인 이라크에 간 것은 명백히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며, 그가 유언을 호소하는 영상에서 제가 이라크에 오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발언을 하긴 했다. 애초에 그는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 미국인 동료 2명과 함께 이라크를 재건하려는 목적으로 온 것이니. [21] 비록 코다 쇼세이가 상당히 어이없는 이유로 이라크에 방문했고 이로 인해 목숨까지 잃게 되었으나 현지에서 이라크인들을 자극하는 무례한 행동이나 미군 협력 활동도 일절 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아무런 죄가 없는 극악한 테러 범죄의 민간인 희생자였기 때문에 그에게만 비난을 퍼붓던 일본의 풍조에 회의감을 드러낸 일부 일본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2007년 코다 쇼세이가 머물렀던 요르단 암만의 호텔에 직접 방문해서 살아 있었을 때 엄지를 세우는 코다의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걸어놓고 밥상에 반찬들을 올려놓으면서 그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 언론들이 코다 쇼세이가 일본에서 살았던 자택에 직접 방문해서 주변 거리 모습을 사진으로 찍기도 했다. [22] 그러나 코다의 유족들이 아들이 저지른 잘못된 기행에 대해서 대국민 사과만 한 것은 아니며 코다의 어머니가 기자 회견에서 아들의 석방을 호소할 때 "폐를 끼쳐서 죄송하지만 내 아들이 돌아온다면 이라크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남자가 될 테니 부디 무사히 살려서 보내주세요." 라면서 테러리스트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이 생전에 마음씨가 매우 상냥했다고 하며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보살핌을 해주지 못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간병 해준 것도 바로 아들인 코다였다고. [23] 코다의 형 마키도 자신의 동생의 죽음이 마음이 아팠다고 호소했지만 기자 회견에서 "내 동생은 정치적인 목적이 있던 것도 아니고, 자위대와 관련 된 것도 아니고, 어떤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며, 이라크인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돕고자 하는 목적으로 여행을 떠난 것이며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평화를 위해 미력으로나마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라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라고 발언 했다. [24] 코다의 아버지는 방송에서만 모습을 드러냈으며 기자회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25] "왜 이라크로 가려고 하는 아들을 말리려고 하지 않았나요?"라는 질문에 모친이 "아들이 이라크에 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자식을 잘못 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들이 이라크의 상황을 지켜보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려 했을 것입니다. 꼭 살아서 해방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사죄하면서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