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카를루스 안토니우 도베르트 지 카르발류 레이치 (Carlos Antônio Dobbert de Carvalho Leite) |
생년월일 | 1912년 5월 26일 |
사망년월일 | 2004년 7월 19일 (향년 92세) |
국적 | 브라질 |
출신지 | 히우지자네이루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1] |
소속팀 |
페트로폴리타누 (1927-1929) 보타포구 FR (1929-1942) |
감독 |
보타포구 FR (1941-1942) 보타포구 FR (1942-1943) 보타포구 FR (1950-1951) 보타포구 FR (1951-1952) |
국가대표 | 10경기 7골 ( 브라질 / 1930-1940) |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인. 초대 월드컵 최연소 출전 선수였다.2. 생애
2.1. 클럽
처음 카르발류 레이치가 커리어를 시작한 클럽은 페트로폴리타누였다. 여기에서 그는 어린 나이에 주 대표팀에 선발될 정도의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1929년. 17세의 나이에 브라질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보타포구 FR의 멤버가 되었다.1931년 4월과 5월에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2]의 챔피언이었던 SC 코린치안스와 두 차례 경기를 갖기도 했는데, 첫 번째 경기에서는 0대2로 패했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에서 심기일전하여 코린치안스를 무려 7대1로 대파하였는데 여기에서 닐루가 4골, 카르발류 레이치는 2골을 득점하였다. 그리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한 동안 이런 식의 챔피언들 간의 경기는 명맥이 끊겼다.
그 이후에 그는 잠시 휴가를 얻었고 그 시간에 팀 선배 닐루와 함께 CR 바스쿠 다 가마의 투어에 참가하였다. 바스쿠 다 가마의 선수들 외에도 페르난두 주디첼리 등의 선수들이 참가하였는데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를 돌며 바르셀로나, 포르투, 벤피카, 스포르팅 리스본 등과 12차례 시합을 가졌고, 그 중 8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에는 그의 기량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그 이면에는 라다니 니콜라슈라는 헝가리 출신 감독의 역할이 컸다. 그는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보타포구를 이끌었는데 팀 훈련에 심리분석을 도입한 선구자였다. 이 멘탈 케어가 성공을 거두면서 카르발류 레이치는 닐루와 함께 보타포구의 4연패를 이끌며 클럽 역사상 가장 유니크하면서도 성공적인 시기를 이끌어냈다.[3]
1936년에는 멕시코, 미국 등지에 투어를 다니면서 또 다른 화제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아스투리아스, 네칵사, 클루브 에스파냐 등과 시합을 가졌고 9번의 경기에서 6승 1무 2패를 기록하였다.
이 시기에 팀 성적은 조금 떨어졌지만 개인 기량은 물이 올라 레오니다스 다시우바와 함께[4] 득점왕 경쟁을 하였고 1938년의 결과는 16골로 공동 득점왕이었다.
하지만 1941년 5월, 계속 달려오던 스트라이커는 부상으로 쓰러졌다. 봉수쎄수와의 경기에서 입은 이 부상으로 인해 그는 이듬해, 결국 29살의 나이에 EC 바이아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그는 보타포구에서 325경기 출전, 275골이라는 훌륭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하였으며 이 기록은 이후 콰렌치냐가 310골 득점을 남기기 전까지 보타포구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은퇴 이후에는 물리치료사가 되어 보타포구에서 일하기도 했다.
2.2. 국가대표
카르발류 레이치는 초대 월드컵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첫 경기에서는 벤치를 지켰지만, 2번째 경기였던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데뷔할 수 있었다. 당시의 그의 나이는 18세 56일로 월드컵 최연소 출전 기록을 갖게 되었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4대0의 대승을 거두었지만 첫 경기에서의 패배를 만회하지 못하고 브라질은 탈락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같은 해 8월 10일, 홈에서 초대 월드컵 첫 경기의 상대이자 자신들에게 패배를 안겼던 유고슬라비아와 재대결을 갖게 되었는데 카르발류 레이치의 2골을 앞세워 4대1로 승리, 복수에 성공하였다.
카르발류 레이치는 초대 월드컵 참가 멤버 중 다음 월드컵에도 참가한 유일한 브라질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첫 경기인 스페인 전에서 뛰지 못했고, 브라질이 1대3으로 패배하면서 그렇게 월드컵 커리어를 마감하였다.
하지만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나름 아쉬움을 털어냈는데 1937년 대회에서 4경기에 출전, 3골을 득점하며 브라질이 준우승하는데 공을 세웠다.[5]
1940년 3월, 아르헨티나와의 2연전이 그의 마지막 A매치였고 여기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1대6, 1대5로 깨박살이 났다. 그는 총 11경기의 A매치에서 6골을 득점하였다.[6]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결정력이 좋은 스트라이커였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득점왕을 3회나 차지할 수 있었다.4. 뒷이야기
- 그가 가지고 있던 월드컵 본선 최연소 출전 기록은 28년 후 어떤 같은 국적의 후배가 가져갔다. 그리고 현재의 기록 보유자는 북아일랜드의 노먼 화이트사이드로 1982년 월드컵 당시 17세 41일이었다.
- 그는 초대 월드컵에 참가한 브라질 대표팀 멤버 중 최후의 생존자였다.
- 1931년, 상파울루 FC와의 경기에서 당시 영국 왕세자[7]가 카르발류 레이치의 플레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경기 후에 직접 내려가서 그를 만나보았다.
5. 수상
5.1. 클럽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5회: 1930, 1932, 1933, 1934, 1935( 보타포구 FR)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준우승 1회: 1942( 보타포구 FR)
5.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7
5.3. 개인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3회: 1936, 1938, 1939( 보타포구 FR)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상파울루 주 리그
[3]
보타포구의 또 다른 전성기로는
가린샤,
니우통 산투스,
마리우 자갈루 등이 활약하던 60년대 초반이 있다.
[4]
의외로 레오니다스와 카르발류의 나이 차이는 1살에 불과하다.
[5]
1935년 대회에는 브라질이 아예 출전하지 않았다.
[6]
비공식 경기의 8경기 7골까지 합치면 총 19경기 13골의 기록을 남겼다.
[7]
후의
에드워드 8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