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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7 23:05:38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사건

1. 개요2.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
2.1. 조사
3. 스피드웨이 폭탄 테러
3.1. 조사
4.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에 대한 무죄5. 스피드 웨이 폭탄 테러 재판에 대한 유죄6. 사건 이후

1. 개요

1978년 7월 29일, 미국 인디애나주 매리언 카운티 웨인 타운십에 위치한 마을인 스피드웨이(Speedway)에 위치한 주택에서 당시 65세의 여성 줄리아 사이퍼스(Julia Scyphers)가 총에 맞아 살해당한 사건. 유력 용의자가 있었으나 무죄로 풀려났으며, 사건은 후술할 스피드웨이 연쇄 폭탄테러 사건과 인디애나 버거 셰프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2.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

1978년 7월 29일 오후, 한 남자가 줄리아와 68세 남편 프레드(Fred Scyphers)의 집 현관에 서서 부부가 몇 주 전에 가라지 세일에서 팔려고 했던 품목에 대해 물었다. 줄리아는 그 남자를 차고로 들여보내 물건을 살펴보게 했고 프레드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 프레드는 쾅 하는 소리를 듣고 나왔고, 흰색 사각형 모양의 1977년 또는 1978년식 2도어 자동차를 타고 진입로에서 차 한 대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차고로 들어가보니 줄리아는 머리에 총을 맞은 상태로 쓰러져 있었으며 이후 사망했다. 살해 도구로 쓰인 총은 25구경 자동권총으로 밝혀졌다.

프레드가 목격한 남자는 백인이고 30세 정도였으며 키는 6피트(182cm), 몸무게는 180파운드(80kg)였으며 길고 검은 머리에 깔끔하게 다듬어진 콧수염과 턱수염이 있었다.

2.1. 조사

경찰은 최근 가족 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줄리아의 딸인 산드라 바튼(Sandra Barton)은 27세의 브렛 C.킴벌린(Brett C. Kimberlin)과 연인 사이였는데 킴벌린이 여러 번의 장기 해외 여행에 바튼의 10대 초반 딸과 동행했으며 이 기간동안 바튼의 딸에게 이상한 애정을 보인 적이 있었고 이로 인해 줄리아는 딸과 킴벌린 사이를 반대했다. 줄리아는 너무 걱정이 되어 두 손녀가 킴벌린과 떨어져 따로 살도록 준비했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킴벌린은 그런 줄리아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브렛 킴벌린은 20대 중반으로, 약간 체구가 작고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당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2년 전에는 카페를 운영했으며 산드라 바튼은 카페에서 일하다가 그를 처음 만났다. 킴벌린은 과거 음악가로 활동하던 당시 마약을 한 전적이 있고 지역 마약경찰은 이 식당이 마리화나 밀수를 위한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3. 스피드웨이 폭탄 테러

그러던 1978년 9월 1일부터 9월 6일까지 스피드웨이에서 발생한 8건의 무작위 폭탄 테러가 발생한다.

1978년 9월 1일 밤 9시 50분, 스피드웨이 쇼핑 센터의 매장 밖에서 쓰레기통이 폭발했고 같은 시점에 스피드웨이 모텔 뒤편 주차장에 있는 쓰레기통이 또 하나 폭발했다. 경찰들이 폭발을 조사하던 10시 45분에 위콤 애비뉴 1600(Whitcomb Avenue 1600) 블록에서 세 번째 폭탄이 폭발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폭발에서는 부상자가 없었고 세 번째 폭발에서는 날아다니는 유리에 베인 상처를 입은 피해자가 있었지만 경미했다. 이 세 장치는 질산암모늄과 질산메틸암모늄을 섞어 만든 물질인 Tovex 200을 탄산음료 캔으로 포장하여 제작되었고 타이밍 장치로 작동되는 간단한 수제 폭탄이었다.

스피드웨이 당국은 인디애나주 경찰, 매리언 카운티 보안관국, 인근 포트 벤자민 해리슨의 제64병기 소속 폭발물 전문가, 주류담배화기단속국(ATF) 소속 전문가들을 소집해 사건 해결을 위해 100명으로 구성된 태스크 포스를 구성했다.

다음날인 9월 2일 토요일, 11번가와 칼튼 웨이(Carlton Way) 사이 노포크 스트리트(Norfolk Street)의 옥수수밭 들판에서 두 번의 폭발이 보고되었는데 이 장소는 스피드웨이 경찰서(Speedway Police Station)와 0.5마일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었다.

다음 날 오후 9시 50분경, 스피드웨이 레인즈 볼링장 밖에서 폭탄이 터졌으나 이번에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다음 날, 스티브 W.터너(Steve W. Turner) 순찰대원이 살았던 19번가와 컴벌랜드 로드(Cumberland Road)의 빅 이글 아파트(Big Eagle Apartments)에 주차되어 있었던 경찰 순양함 차 아래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터너는 며칠 동안 비번이었기 때문에 그의 순양함은 한동안 정차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이날 오전에 25번가에 있는 코카콜라 공장에서 허위 폭탄 위협이 있었다는 사실에 신고되자 이에 경찰이 그곳으로 몰렸던 사실이 있기 때문에 경찰은 터너의 차 밑에 폭발물을 설치하기 쉽도록 범인이 고의로 허위 신고를 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마지막 폭탄 테러는 9월 6일에 발생했다. 아들이 다니던 스피드웨이 고등학교의 신입생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학교에 찾아온 39세의 베트남 참전 용사 칼 드롱(Carl DeLong)은 주차장을 걷다가 바닥에 버려진 운동가방을 발견했고, 그 쪽으로 다가간 순간 폭발에 휩싸였다. 직후 스피드웨이 고등학교 주차장에 다른 운동가방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폭발 장치가 폭발했다. 폭발로 인해 칼 드롱은 오른쪽 다리가 절단 되었고 왼쪽 다리와 오른손에 심하게 부상을 입었으며 옆에 있던 아내 산드라 드롱(Sandra DeLong)의 다리 동맥도 절단되었다. 이외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이 더 부상을 입었다. 칼 드롱은 베트남의 육군 공수부대원 폭발물 전문가로서 폭발물에 대해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운동가방은 타이머가 달린 폭발물로 조작되어 칼 드롱이 만지기 전에 폭발했다.

고등학교 폭발과 거의 동시에 스피드웨이 영화관와 인근 골프 코스도 폭탄 위협을 받았고 한동안 18세 이하에게 10시 30분 통금 시간이 명령되었다. 이후 다른 폭발 사건은 없었지만 스피드웨이 주민들은 한동안 폭탄 테러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3.1. 조사

폭격에 대한 동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법 집행 기관은 사건이 왜 중단되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1978년 9월 20일 연방 요원은 미국 정부 자격 증명을 불법적으로 얻으려고 시도했던,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의 용의자인 브렛 킴벌린(Brett Kimberlin)을 체포했다. 킴벌린은 웨스트사이드의 한 인쇄소 국방부 보안복을 입은채로 찾아가 군 운전면허증을 자신의 사진으로 복제해 달라고 요구하는 위조 행동을 해줄것을 부탁했다. 인쇄소 주인이 이를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하고 경찰은 킴벌린이 문서를 가지러 인쇄소로 돌아왔을 때 그를 체포했다. 킴벌린은 미 국방부 특수 경찰 휘장과 대통령 인장 복제품을 불법적으로 소지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8일만에 지역 검사에 의해 위조 혐의는 기각되었다.

킴벌린의 집과 차량에 대한 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후 수사관들은 킴벌린 소유의 1970년식 쉐보레 임팔라에서 폭발 장치 및 기기 타이머에 사용된 것과 유사한 배선을 발견했다. 이후 그의 집을 수색한 결과 1,000파운드(450kg) 이상의 마리화나와 폭탄에 사용된 Tovex 200 두 케이스가 발견되었으며, 이 제품의 구매자는 로트 번호 추정으로 킴벌린임이 밝혀졌다. 기기 타이머를 판매한 지역 가전제품 매장은 단 하나뿐이었고 당시 매장 직원은 킴벌린을 타이머 구매자가 맞다고 증언했다. 또한 킴벌린이 9월 1일에 쓰레기통에 폭발물 소포를 버리는 것을 본 목격자가 나타났다.

경찰은 이러한 마약의 발견과 이전에 있던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과 폭탄 테러를 엮어 킴벌린이 자신의 마약 거래 사실을 알게 된 줄리아를 살해했고, 이후 줄리아 사건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연쇄 폭탄 테러를 저지른 것이라고 추측했다.

1979년 2월 16일 밤, 텍사스주에서 콜롬비아 마리화나를 실은 비행기가 짙은 안개로 인해 원래 가기로 예정되었던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근처 공항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공중에서 마리화나 더미를 버려야 함을 의미했다. 경찰은 마리화나 더미를 버리고 이를 수거하던 현장을 급습해 사막과 비행기 바닥에서 건초 더미로 위장한 1파운드가 넘는 마리화나를 발견했고 9명의 남자를 체포했다. 그 중 한 명은 브렛 킴벌린이었다. 경찰은 텍사스에서 체포된 남성들의 사진을 프레드 사이퍼스에게 보여주며 범인이 이 안에 있냐고 물었다. 프레드는 이미 킴벌린을 알고 있었지만 윌리엄 보우맨(William Bowman)이라는 오하이오 남자의 사진을 골랐다. 프레드의 증언을 바탕으로 보우맨은 체포되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경찰은 킴벌린이 배후에 있다고 확신했다.

4. 줄리아 사이퍼스 살인에 대한 무죄

보우맨이 체포된지 약 2주 후에 프레드가 말기으로 사망하면서, 유일한 증인이 사라져 버렸고 윌리엄 보우맨은 줄리아 사이퍼스의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지 않았으며 이는 킴벌린을 포함한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프레드는 그날 집을 찾아온 남자를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살아있었더라도 이들이 재판을 받았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보우맨의 변호사들은 살인 당일에 보우맨이 오하이오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증인을 확보한 상태였다.

줄리아 사이퍼스 사건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

5. 스피드 웨이 폭탄 테러 재판에 대한 유죄

1981년 6월, 1차 재판에서 킴벌린은 폭발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연방 교도소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81년 12월에는 등록되지 않은 폭발 장치 소지, 폭발 장치의 불법 제조, 폭발물을 통한 악의적인 피해를 입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폭발물에 의한 인명 피해에 대해 연방 교도소에서 50년 형을 선고 받으며 모든 범죄에 대해 총 51년 6개월 19일의 형량을 받았다.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검찰은 킴벌린의 집에서는 노란색 패드가 압수되었고 이 패드에는 사건의 주요 목격자와 검사 살해하고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해 또 다른 일련의 폭격을 가할 계획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검찰은 이 패드를 법정에 증거로 제출했다.

6. 사건 이후

1983년 2월 23일, 폭탄 테러의 마지막 희생자 칼 드롱은 PTSD 우울증에 시달리던 중 차고 문을 닫고 엔진이 작동 중인 밴에 앉아서 자살했다. 같은 해에 드롱의 가족은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배심원은 킴벌린에게 칼 드롱의 자살에 대해 킴벌린이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가족에게 1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아내이자 다른 피해자인 산드라 드롱에게 부상에 대해 미화 36만 달러를 추가로 지불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1993년 항소 법원은 칼 드롱의 자살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보았으나 산드라에게 지급하라고 명령된 손해 배상액은 유지했다. 1994년, 인디애나 대법원은 항소 법원 판결을 뒤집고 원래의 칼 드롱의 자살에도 책임이 있다는 1심 판결을 복원했다. 킴벌린은 13년을 복역한 후 1993년 11월에 가석방 되었으나 드롱 가족의 민사 소송에 따른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자 가석방이 취소되어 1997년에 감옥으로 돌려보내졌다. 그는 2001년에 다시 출소하였고 피해자 가족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8년 11월 17일에 스피드웨이 버거 셰프 매장에서 발생한 인디애나 버거 셰프 살인사건과의 연관성도 지적되었다. 당시 용의자들의 동기로 추정되었던 이론 중 하나가 살해된 피해자 제인 프리트(20)의 형제가 마약 거래 문제로 프리트에게 빚을 지고 있었고, 이를 갚지 않기 위해 위협하려 찾아갔다가 그날 근무할 예정이 아니었던 직원이 이를 제지하자 싸움을 벌이다 둘을 살해하고, 증인을 없애기 위해 나머지 둘도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건과 해당 사건의 연관성이 직접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지만 같은 시기 같은 동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라는 점에서 연쇄 범행의 일부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

5년 후인 1988년, 킴벌린은 감옥에 있는 동안 당시 인디애나주 상원의원이자 부통령 후보였던 댄 퀘일에게 마리화나를 팔았다고 주장했다. 퀘일은 혐의를 강력히 부인했고 킴벌린은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