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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8:59:58

조영건(교수)

조영건
파일:조영건 구속노동자후원회.jpg
<colbgcolor=#d6001c><colcolor=#ffffff> 출생 1940년
경상남도 영산현(現 창녕군 도천)
사망 2024년 7월 9일 (향년 84세)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1]
학력 경남중학교 ( 중퇴)
마산중학교 ( 졸업)
경남고등학교 (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 법학 58 / 학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 역사학 / 석사)
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사학 / 박사)
경력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
진보당 고문
민중당 고문
통합진보당 고문
민주노동당 고문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6.15 남측위원회 학술본부 상임위원장
6.15 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의장
새세상연구소 이사장
임노동학회 회장
상해 푸단대학 연구교수
사월혁명연구소장
런던대학교 연구교수
하바로프스크 사범대 강의교수
상하이 푸단대 초빙교수
경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최종 당적


1. 개요2. 생애3. 약력4. 저서5. 여담6.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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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교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2. 생애

1940년 경상남도 영산현(現 창녕군 도천)의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했다. 여말선초의 인물 조민수 조식의 후손이며 부친은 교육공무원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부친과 죽마고우였다고 한다.

일본 유학 때부터 진보적 의식을 가졌던 아버지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마산은 당시 노동조합, 노동야학과 상인조합의 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정치의식이 높았다.

1945년 해방 후 마산으로 이사했고, 마산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경남중학교에 진학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가족들은 가덕도로 피난한 후 유사시 일본으로 건너가고자 하였다. 또한 이때 보도연맹 등 좌익 혐의로 가족이 학살당한 친구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1952년 발췌 개헌 당시 야당 국회의원들이 납치되는 것과 같은 해 일어난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같은 해 제2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의 유세장을 따라다녔다.[2]

이후 경남중학교를 중퇴하고 마산중학교로 전학했으나 1956년 경남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다시 부산 마산을 기차로 오가며 통학하게 된다. 당시 부산 하야리아에 있던 주한미군 부대에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 북진 멸공통일'을 외치며 관제데모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진보당을 결성하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조봉암의 유세를 따라다니고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함석헌의 말과 글을 접하며 정치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58학번)에 진학했으나 학과 분위기가 고시 학원 같다는 생각에 정치학과 수업을 더 많이 들었다고 한다.

1960년 3월 15일, 방학을 맞아 마산 집에 내려갔던 그는 마산에서 일어난 3.15 부정선거를 직접 목격하게 된다.[3] 이후 3.15 의거에 직접 참여하였고 이날 시위에서 눈에 최루탄을 맞아 사망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면서 일어난 2차 마산의거에도 참여했다. 이후 개학을 맞아 서울로 상경한 그는 마산에서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서울에서도 시위에 나섰다.

4월 19일 오후 2시경, 경무대 앞 시위에 참여한 그는 경찰의 발포를 피해 경무대 정문 옆집 담장을 넘어 이인 법무장관의 집을 지나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 중학생을 발견하고 다른 시위자들과 함께 ‘환자 위급’, ‘환자 후송’이라고 외치며 그를 부축해 경찰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이 장면은 한 미국 기자의 카메라에 잡혀 전 세계로 타전되며 4.19 혁명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가 되었고, 이후 대한뉴스에 삽입돼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됐다.[4]

파일:4.19 사진.jpg

왼쪽에서 세 번째, 안경을 쓰고 있는 인물이다.

1964년 한국노총에서 집필한 <한국노동운동사> 편찬위원을 맡았다.[5] 해방 이전 노동운동사는 건국대학교 강동진 교수가 썼고, 그는 해방 이후 노동운동사를 집필했다. 이때 ‘대학원에 들어와 더 공부하라’는 강동진 교수의 조언에 건국대 대학원에 진학했고 역사학 석사, 경제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년 건국대학교 시간강사, 1975년 청주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나 운동권 학생들과 교류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두 차례 연행됐다. 이때 강연과 기고문을 통해 농민운동을 지원하고 강의 도중 시국 관련 발언을 했다는 등의 이유로 해직되기도 하였다.

1979년 3월 경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같은 해 10월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에 참여했다. 1980년 5월 5.17 내란으로 전두환이 집권한 직후 해직당했으나 같은 해 9월 복직되었다.

이후 학계에서 노동문제에 실천적 의지를 갖고 연구하는 교수들과 함께 ‘노동경제학회’를 창설했고, 노동시장이론과 노사협조주의를 반대하는 학자들의 모임 ‘임노동학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2년에는 경남대학교에 노동복지연구소를 설립했는데, 고려대학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생긴 노동문제연구소였다. 이후 경남대 상경대학 학장을 지냈다.

이후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고[6], 1992년 경남대학교의 자매대학인 하바롭스크 사범대학 동방학부에 한국학 강의교수로 초청되어 한 학기를 강의했으며 199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국립대학에서 개설한 한국학대학 초빙교수로 근무했다. 2000년에는 상해 푸단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받았고, 같은 해 장춘 길림대학 조선문제연구소 초빙교수로 동북공정 문제를 연구하고 토론하기도 했다.

1988년 서울대 김진균, 부산대 하일민 교수 등 4.19 세대 교수들과 함께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를 결성하고 연구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96년 5대 연구소장을 맡았다. 1990년 6월항쟁기념사업회 공동대표, 1999년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7]

1997년 건설국민승리21 창당 이후 진보정당 창당 작업이 고양되자 창당준비위원, 창당발기인, 당명제정위원장으로 활동하며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기여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조직된 통일연대의 학술연구특별위원장을 맡았고 상임대표회의에도 학자로서 참여했다. 그 외에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공동대표, 6·15 공동선언 학술위원회 상임공동위원장, 6.15남측위원회 경남본부 상임대표의장 등을 맡으며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2006년 경남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한 후로는 진보정당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8]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의 당 기관지였던 <진보정치> 위원장을 지냈고,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소였던 진보정치연구원이 재단법인 새세상연구소로 재편된 뒤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또한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한국진보연대, 진보당 고문을 지냈다. 2013년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당시 당을 적극적으로 엄호, 지지하였고 내란선동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부터 2017년 3월 마지막 촛불집회까지 모두 참여하며 박근혜 정부 퇴진 운동에 개근했다.[9] 또한 사망 직전까지 구속노동자후원회 회장을 역임하며 구속된 노동자들의 법적 지원과 사회 복귀를 돕고 양심수 석방운동을 이끌기도 했다.[10]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후원회, 구속노동자후원회 등이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에 여는 목요집회에도 구속노동자후원회장으로서 참여했다.

2024년 7월 9일, 향년 84세로 사망했다.

3. 약력

4. 저서

5. 여담

후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해도 좋을 때가 되었다.

후배를 뒷바라지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진보정치가 요구하는 고문 그리고 통일운동이 청하는 고문 외에 나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자 한다.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한 구국의 영웅 이순신과 같은 반열로 중국에서 추앙받던 명장 악비가 남긴 환아하산(還我河山)이라는 글귀가 점점 나에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식민과 분단의 고난을 넘어 역사는 한 세기 자주통일 평화번영의 새 시대로 접어든다.

이제 돌이켜보면 시대를 굴절없이 산 4.19 우리 세대 벗들과 형극도 보람도 같이했지만 해방 국면에서 깨어 앞선 동료들은 다 죽고 다 폐인이 되었는데 한평생을 살아가려면 교수자리를 걸쳐 대학에라도 몸 붙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은사 교수의 권고로 학위도 하고 교수도 하고 살았으니 나는 고생한 동세대 동지들과 벗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가 부모에게의 효도에 앞서, 처자식에의 의무에 앞서, 내 일신의 타산에 앞서 내 나름대로의 가진 모든 것, 의지도 정열도 지식도 돈도 시간도 모두를 민족과 민중에게 바치고자 나를 재촉했다.

나는 옆도 뒤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달려와 일흔에 이른 것이다.}}}

6. 참고 자료



[1] 민주화운동가나 사회, 노동운동가가 많이 안장되는 묘지로 유명하다. [2] 집안이 조봉암과 같은 창녕 조씨라 문중 간에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3] 당시 집이 3.15 부정선거가 벌어졌던 마산시청 바로 옆이었다. 마산시청과 무학초등학교 간 500m 간선도로의 길갓집이었다고. [4] 이문열의 소설 변경 3권에 이 장면이 등장한다. [5] 이후 한국노총이 신설한 기획실에서 일하며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가 협찬한 아시아문제연구소 학술세미나에서 발제하기도 했다. [6] 이 때문에 1987년에 일어난 6월 항쟁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7] 마산은 조영건 교수, 부산 송기인 신부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때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과도 교류했다. [8] 2006년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와의 인터뷰에서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이유에 대해 “50년대 조봉암 선생이 어떻게 ‘법살’됐는지, 어떻게 이 땅에서 진보정당의 꿈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9년에는 “ 진보당 강령을 읽어보면 지금과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고민이 담겨있다. 진보정당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며 “민주노동당이 진보당을 계승하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9] 이에 대해 “나는 사월혁명회원으로, 구속노동자후원회장으로, 6·15 남측본부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이들 단체가 모두 민중총궐기 때부터 촛불시위에 참여했기 때문에 자연히 촛불시위 개근을 했다.”, “나는 촛불민중이 보여준 청년의 힘에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다. 감사하고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10] 2019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평생 대학교수로 살아온 나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제 중늙은이가 되어 구속노동자후원회 일을 하며 그 빚을 갚고 있다”고 말했다. [A] 사망 직전까지 역임. [A] 사망 직전까지 역임. [A] 사망 직전까지 역임. [A] 사망 직전까지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