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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동화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시절엔 육상 선수였다. 이후 야구로 방향을 틀었으나 "발이 빠르고 센스가 있지만 키가 작고 힘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주고등학교 시절에는 투수였으나 역시 하드웨어의 문제로 프로의 지명을 받지 못한다. 이후 대학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있었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워 연봉 1000만원에 쌍방울 레이더스의 신고선수로 계약했고, 실질적으로는 2000년 SK 와이번스로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이 인계되면서 SK로 입단하게 되었다.3. 프로 시절
3.1. 2000 ~ 2008 시즌
▲ 데뷔 시절 |
▲ 군 제대 후 주전으로 도약했던 2005년 |
입단 후 2년 동안 10경기에 대주자로만 간간이 나오며 1군에선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1] 2002년 말 바로 상무로 입대했다.
군에서 제대한 2005년에는 조범현감독의 관심을 받아 조원우와 조경환을 벤치멤버로 밀어내고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하며 출장 경기수가 늘어나 주로 2번 타자로 출전했다. 2006년에는 플래툰 때문에 자주 출전하지 못하다가 김성근 감독 부임 후 본격적으로 가을동화 스토리를 쓰기 시작한다. 2007년엔 0.272 25도루, 2008년엔 0.279 19도루를 했으니 나름대로 자기 밥값을 한 셈이다.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리오스를 상대로 조동화-김재현으로 이어진 백투백 홈런은 덤.
3.2. 2009 ~ 2010 시즌
하지만 2009년 시즌은 1할대의 심각한 타격부진으로 2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거의 박재홍의 대수비요원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마저도 9월 3일 경기에서 평범한 우익수 앞 안타를 잡지 못해 단타로 막을 타구를 적시 3루타로 둔갑시켜 버리고 말았으니 김성근 감독에게 어느 정도로 까였을지는 미지수.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선 이를 두고 '지구온난화가 선수생명 하나 끝장냈네'라고 평가했다. 2009년 조동화는 sWAR 통산 단일시즌 꼴찌를 기록 중이다...여담으로 2009년 SK의 외야진을 박재상- 김강민- 조동화로 짤 경우 연봉 합계는 딱 3억(9,500-1억-1억500)이 되고, 위 3명을 포함, 박재홍을 제외한 다른 외야수 전원의 연봉을 합치면 박재홍의 연봉(4억)이 나왔다.
2010년 5월 1일 21:3의 스코어로 대승을 거둔 문학 LG전에서 통산 3호,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하더니 다음날에는 9회말 2아웃에서 LG 마무리 오카모토를 상대로 데뷔 첫 끝내기 홈런을 치면서 데뷔 후 처음으로 2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조동화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2타수 1안타 1사구(死球) 타율&장타율 .500, 출루율 .667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연승으로 우승했다.
3.3. 2011 시즌
2011 시즌에는 솩갤의 까임 지분 1위를 차지하였다. 초반엔 김강민이, 후반에는 박재상이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면서 주전외야수로 자주 나오는데 답답한 타격은 물론 수비에서 실책성 플레이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2011년에는 9월 20일 사직 롯데전에서 수비하다가 잘못 넘어져 다리가 심하게 꺾이는 바람에 왼쪽 전방십자인대와 측부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실제 부상 장면을 보거나 사진을 본 사람들에겐 경약 그 자체. 2011 시즌 아웃은 확정이고 2012시즌에 복귀할 지도 미지수. 그나마 돌아와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문제다.
3.4. 2012 시즌
8월 23일 드디어 2군에서 조동화가 대타로 출전했다. 5회말 1사 2루에서 2루수 앞 땅볼을 기록. 김용희 2군 감독은 움직임이 괜찮았다고 평가. 그리고서 드디어 9월 추가 엔트리에 조동화가 올라왔고, 9번 대타로 올라와서 3타석에서 안타, 삼진, 볼넷을 기록.9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서 뛰기 시작. 간간이 쳐주는 안타와 쏠쏠한 작전 수행 능력으로 SK 타선의 소금으로 활약하였다.
9월 8일 문학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17차전에서 7회말 6:6 무사 1, 3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와 1루쪽 기습 번트를 감행, 넥센 히어로즈의 1루수 박병호의 태그를 피하며 타자와 주자 모두 세이프가 되었다. 이 때 3루 주자 박정권이 홈으로 들어오며 타점을 기록, 이 경기의 결승타를 기록했다.
이후 8회말 9:6으로 SK가 리드하는 상황에서 1사 2, 3루에 타자로 나와 우익수 희생 플라이를 쳐 2타점째를 올려 가을버프 제대로 받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결승타와 이어진 희생 플라이 타점에 힘입어 MVP에 등극.
조동화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2, 3, 4차전에 선발 우익수 겸 9번타자로 출장하여 8타수 1안타 1볼넷, 타율 .125, 출루율 .222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조동화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은 선발 우익수 겸 9번타자, 4차전은 대주자, 6차전은 대타로 출장하여 4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조동화는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12타수 1안타 1볼넷, 타율&장타율 .083, 출루율 .154를 기록했다.
3.5. 2013 시즌
시즌 초반만 해도 이명기, 한동민, 김강민, 박재상 등 외야 경쟁자들과 비교하여 앞서는 것이 없던 처지라 외야 백업에 머물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고 실제로 4월 중순 넘어서 콜업이 됐다. 그러나 이명기, 한동민의 부상으로 인한 2군행, 박재상과 김상현의 타격 부진등으로 인해 6월 이후 사실상 외야 한 자리를 잡으며 괜찮은 모습으로 외야진에서 쏠쏠한 활약을 하였다. 여전한 번트실력은 덤.규정타석에 들어서지는 못했지만 7월 5일까지 48경기 152타수에서 타율 0.276, 출루율 0.351, 장타율 0.329의 성적과 13도루로 07~08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7월 3일 문학 KIA전에는 끝내기 안타도 기록.
8월까지 2할7푼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며 팀내 상위,하위타선의 첨병역할을 잘 수행했지만 9월이 되더니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2할이 겨우 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팀내에서도 뜬금없이 살아난 박재상에게 밀려 출장 기회가 줄어드는 중. 또한 본인의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타수[2]를 기록하며 볼넷과 삼진 모두 기록을 경신했다.(74삼진/46볼넷) 타수에 비해 볼넷수가 많아서 타율보다 출루율이 1할 높다.(타율 0.258, 출루율 0.360)
3.6. 2014 시즌
확실히 타율 면에서는 타고투저 광풍 속에서도 2할 6푼 수준으로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SK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톱타자 이명기의 뛰어난 출루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2번타자로써 제 몫을 다했다. 리그 최고의 번티스트라는 별명답게 번트로 희생번트는 물론 내야 안타도 곧잘 만들어내며 투수를 흔들었다. 도루 역시 커리어 최다인 37개로 팀의 기동력에 활력을 불어넣었다[3]. 이외에도 득점, 타점, 안타에서 커리어 하이를 찍었다. 안타는 개인 최초로 100안타를 넘겼고, 득점과 타점도 70-50점을 넘겼다. 단 타격 능력은 여전히 아쉬웠다. 전 시즌과 다를 바 없었던 타율이고 출루율은 오히려 더 낮아진 수준.(타율: 0.256-0.260, 출루율 0.357-0.327)
3.7. FA
시즌 후 FA 자격을 취득해 11월 26일 SK에 4년 22억(계약금 8억, 연봉 3억, 옵션 2억)에 잔류했다. 오버페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 및 좌, 중, 우익수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안정된 수비력, 그리고 고참으로서 보여준 팀에 대한 헌신까지 높게 평가되어 고액 계약을 이끌어 낸 것[4]. 신고선수(현 육성선수)로 입단해 2군선수 생활과 기나긴 1군 후보선수로서의 생활을 버티며 꾸준히 활약해 FA계약까지 해낸 인간승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팬들도 대부분은 그간 고생했던 보상이라며 대체로 축하해 주고 있는 중.3.8. 2015 시즌
2014년 주장이었던 내야수 박진만에 이어 2015년 SK의 주장을 맡게 되었다.
3월 31일 홈 개막전에 앞선 팀 창단 15주년 기념행사에서 김원형 코치와 함께 팀 15년 근속에 대한 감사패를 받았다.
5월5일 어린이날 롯데전에서 시즌 첫 홈런를 비롯해 5타수 4안타 2득점 1홈런을 기록했으며 강민호의 팬스를 맞출뻔한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는 호수비도 주면서 이 날 경기의 수훈선수가 되었다. 도루도 3개를 기록한 것은 덤.
5월 7일 롯데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3회초에 올라와 시즌 두번째 홈런이자 시즌 첫 백투백홈런을 기록했다.
5월 15일 LG 트윈스와의 원정 3연전 경기에서 팀이 5:2로 리드하고 있는 9회 초에 1번 타자 이명기의 대타로 투입, 타석에서는 무난하게 삼진을 당했다. 하지만 9회 말, 마무리로 올라온 윤길현이 선두타자 한나한의 대주자로 올라온 김용의를 2루까지 살려 보내고, 후속타자 채은성과 유강남을 각각 삼진과 뜬공으로 돌려세운 2사 주자 2루의 상황. LG의 9번타자 오지환이 초구를 때려 우중간을 가르는 깊숙한 안타성 타구를 날린다. 이에 조동화는 외야의 정 중앙[5]에서부터 약 30미터 정도를 질주하여 넘어지면서 타구를 캐치. 펜스 바로 앞에 떨어지는 2루타성 타구를 순식간에 외야수 뜬공으로 둔갑시켰다. 잔디가 아닌 모래 부분에서 넘어지면서 뒤통수를 부딪혔지만, 큰 부상은 아닌듯 이튿날인 5월 16일 경기에도 출전했다.
6월 1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3연전 첫 경기에서 경기 시작 직전에 앤드류 브라운이 아내의 간병을 위해 빠지면 대신 자리에 들어가 졸지에 4번 타자로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4타수 1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4번의 역할을 해냈다! 팀도 승리하며 기분좋게 해프닝을 넘길수 있었다.
8월 10일, 급성복통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가 20일에 복귀했다.
8월 27일 지명타자 최정의 대주자로 출장한 조동화는 8회초에 박정권의 적시타로 득점했으며, 9회초에는 우익수로 포지션이 바뀌면서 지명타자가 소멸되었는데 그 다음타자가 투수 윤길현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타석에서는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 9회초를 끝내고, 이후 정우람이 세이브와 함께 팀은 6:3으로 승리했다.
3.9. 2016 시즌
방망이도, 수비도, 주루도, 송구도,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김강민이 부상으로 빠짐에 따라 임시 주장직을 맡았으나, 5월 27일 허리 통증으로 2군에 내려가버림으로써 주장 두 명이 동시에 2군에 있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오죽하면 2년 5.5억원에 FA 계약한 팀동료 박재상[6]과 계약서를 바꾸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이후 2군에서 4할대 타율을 기록하다가 7월 8일 이명기와 교대되어 1군에 복귀했다.
3.10. 2017 시즌
한동민, 김동엽, 조용호, 정진기 등 신흥 외야자원과 트레이드로 노수광까지 합류하면서 안 그래도 좁았던 그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2군 경기에도 출전하지 않고 있는데 직관을 다녀온 팬에 의해 1군과 동행하며 배팅볼을 던져주거나 훈련 보조를 해주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인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사실상 은퇴수순인듯. 그런데 2군 경기 기록이 사라졌다.
이대수의 퇴장 때에도 등장하여 기사에 논란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최근 사진을 보면 살이 찐 듯 하다.
시즌 막바지에 이른 9월초 기사에 따르면 연봉 보전을 조건으로 1군과 동행하고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최근 구단의 은퇴 권유를 거절한 것으로 드러났다.
3.11. 2018 시즌
FA 마지막 해. 그러나 시범경기든 뭐든 보이지 않고 있다. 아마 이대로 되면 FA 계약금 다 받는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거나 방출당할 듯.
최근에는 강화 SK 퓨처스 파크에서 퓨처스 선수들과 동행하며 수비 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 연천 미라클과의 교류전에 출전한 모습 |
한편 선수 본인은 현역 연장 의지를 드러내며 5월 31일 저니맨 외인구단과의 교류전인 3군 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나 7월 16일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구단에서는 2018년 인천 홈경기 중 하루를 골라 조동화에 대한 은퇴식을 치러줄 계획이라고 한다.[7] SK 왕조 시절 외야 라인의 한 축이었던 박재상의 은퇴식 수준에 준하는 행사가 될 전망이다. 참고로 조동화는 2000년 SK 와이번스 창단 원년 멤버 중 처음으로 2000년에 입단해 한 팀에서만 뛴 후 은퇴식을 치르는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됐다.[8]
이후로는 SK 퓨처스 파크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있다. 그리고 9월 8일 두산 베어스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을 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9] 또한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그를 기억하기 위해 유니폼에 가을동화 10을 입고 경기에 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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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식에서 헹가레 받는 모습 |
비록 팀은 에이스 김광현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3:0으로 패했지만 조동화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18년동안 오직 SK 와이번스에서만 보냈던 현역 시절을 훈훈하게 마감한다. 은퇴식에서 마지막 타격 세레모니를 했는데 마지막 타격 역시 번트를 댔다.[10]
[1]
2000년에 2군에서 33도루, 2군 통산(2008년 기준) 80도루로 3위다. 그리고 2군 통산 341안타(2008년 기준)로 12위에 올라있었다. 그 윗순위 선수들 대부분이 은퇴하였고, 유일한 현역인
최형우가 2008년부터 주전으로 성장했으니 현역에선 순위권이라 봐도 될 듯.
[2]
경기수는 07년의 121경기인데, 9월 29일 기준 101경기에 출장했다. SK가 5경기가 남은 상황이라 경신이 불가능할 듯.
[3]
실제로 조동화가 출전한 경기에서, 일단 조동화가 어떤 방법으로든 타석을 벗어나는 순간 포수의 시선이 조동화에게 반쯤 못박히는 것을 볼 수 있다. 타석에 서면 번트, 출루하면 도루. 그야말로 배터리의 악몽같은 선수.
[4]
사실 가장 절친한 팀동료
박재상과 역시 긴 시간을 함께 한 후배
나주환이 당시 협상 제시 내용을 거부했던 게 치명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들과 반대로 무조건 SK하고만 계약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조동화에게 더 큰 돈을 계약하고, 그들을 본보기로 내친 것. 실제 두 사람은 타팀과의 계약 시도가 모두 실패했고 조동화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SK와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조동화는 보장금액만 4년 20억이라 1년당 평균 5억인데, 나주환과 박재상은 1+1년 에 5억5천이며 보장금액은 이보다도 적어 실질적으로는 연평균 금액이 조동화의 절반도 안 되는 셈이다.(이후 나주환의 경우는 협상 초기에 이 조동화의 계약금액 정도(4년 20억 근처)를 제시받았으나 거부했다는게 알려졌다.) 사실 당시까지 그들과 조동화의 선수생활 기록을 비교하면 두사람이 훨씬 앞서기에 합리적인 계약은 아니었다. 3년 후배인 나주환의 경우에는 시간이 많이 지나 조동화가 1군에 전혀 못 나가고 2군 활동도 거의 안하기 시작했던 나이에도, 최소한 1군에서 후보선수로는 활동하고 있을 정도이니 선수로서의 실력차이는 많이 난다.
[5]
중앙 전광판의 정 중앙부분이었다!
[6]
이쪽은 최소 2할 7,8푼은 친다.
[7]
일각에서는 동생
조동찬이 있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은퇴식이 거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하게 되었다.
[8]
박재상은 구단 창단 2년차였던 2001년에 입단했다. 현재 SK에 남아 있는 창단 원년 멤버는 조동화와
이대수가 유일하며, 그 이대수도 여러 이적을 통해 다른 구단들에 몸을 담다 돌아왔고,
쌍방울 레이더스 최후의 신인이자 또다른 SK 창단 멤버인
이진영 역시 다른 팀들에서 몸 담았기 때문에 창단 원년 멤버가
원 클럽 플레이어로 남은 경우는 조동화가 유일하다.
[9]
여담으로 절친인
박성광이 은퇴식 사회를 맡았았는데
전지적 참견 시점 박성광 파트에서 소개되었다.(10월 7일, 14일 방송)
[10]
SK 와이번스 역대 통산 번트 1위가 조동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