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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3:38:35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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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3DDFF><colcolor=#000>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
Richard of York, 3rd Duke of York
파일:Richard of York, 3rd Duke of York.jpg
이름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출생 1411년 9월 21일
사망 1460년 12월 30일 (향년 49세)
요크셔 샌들 마그나
배우자 세실리 네빌[1] (1429년 결혼)
자녀 앤, 에드워드 4세, 에드먼드, 엘리자베스, 마거릿, 조지, 리처드 3세
아버지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2]
어머니 앤 모티머[3]
형제 이사벨, 헨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혈통과 어린 시절2.2. 백년전쟁 시기2.3. 헨리 6세 측근들과의 갈등2.4. 앙주의 마거릿과의 갈등2.5. 장미 전쟁 발발2.6. 패배와 죽음
3. 가족관계
3.1. 자녀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왕족. 플랜태저넷 왕조의 분가인 요크 가문의 수장으로, 동시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영지 및 부를 보유한 대귀족이기도 했다. 랭커스터 왕조 헨리 6세에게 맞서 장미 전쟁을 일으켰지만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랭커스터군에 패하고 사망하였다. 에드워드 4세, 조지 플랜태저넷, 리처드 3세의 아버지이며 헨리 8세의 증조부이다. 헨리 8세 이후의 모든 잉글랜드와 연합왕국의 왕은 리처드의 후손이다.

2. 생애

2.1. 혈통과 어린 시절

1411년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앤 모티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앤 모티머는 리처드를 낳은 다음 날 산고로 사망했다. 아버지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의 살아남은 아들 중 4남인 제1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차남이었다. 앤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증손녀였으니[4] 요크의 리처드는 부모 양쪽으로 모두 에드워드 3세의 피를 이어받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후손이었다.

케임브리지 백작 리처드는 1415년 여름 헨리 5세에 대한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 백작의 형인 제2대 요크 공작 에드워드는 오히려 1415년 가을 아쟁쿠르 전투에서 헨리 5세 휘하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헨리 5세는 4살밖에 안 된 리처드가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관대하게 인정해 주었고, 리처드는 아버지의 작위에 더해 후손 없이 사망한 백부 노리치의 에드워드의 요크 공작위까지 물려받을 수 있었다. 리처드는 왕가로부터 직접 보호받으며 성장했고 곧 왕가에 적극적으로 로비를 펼친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종자가 되었다. 이 때부터 나중에 처가가 되는 네빌 가문과 연을 맺었다.[5]

이후 어머니 앤 모티머의 남동생인 제5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가 1425년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에드먼드의 외조카인 리처드가 외삼촌의 뒤를 이어 웨일스 변경을 중심으로 한 모티머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모계 혈통으로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후계자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하고 그의 갓난 아들 헨리 6세가 즉위했다. 리처드는 헨리 6세가 어느 정도 성장한 뒤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리처드는 1426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432년 완전한 성인으로서 영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2.2. 백년전쟁 시기

갓 성인이 된 요크 공작 리처드는 백년전쟁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헨리 5세의 정복 성과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고, 프랑스와 협상하여 영토 일부를 양보할 것인지, 아니면 프랑스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로 섭정 정부 요인들의 의견이 갈렸다. 리처드는 헨리 5세의 동생 베드포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이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주둔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그는 본국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사재를 털어야 했으며, 프랑스군에게 전선이 서서히 밀려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헨리 6세의 측근인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2.3. 헨리 6세 측근들과의 갈등

대귀족이자 헨리 6세의 후계자이기까지 했던 요크 공작 리처드의 존재는 헨리 6세의 측근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리처드는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지체 높은 귀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책을 맡지 못했고, 대신 아일랜드 총독(Lieutenant of Ireland)직을 맡았다. 리처드가 에드먼드 모티머로부터 물려받은 작위 중 하나가 얼스터 백작이었기에 이는 어울리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총독 임기 10년 동안 리처드에게 다른 중책을 맡기지 않을 핑계가 되기도 했다.

1450년대로 들어서자 잉글랜드는 내정에서의 실책과 북프랑스에서의 패배가 겹쳐서 여러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에 빠졌다. 리처드는 무능력한 정부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폭력적인 수단을 주저하지 않았다. 의회에서든 물리적으로든 서머셋 공작은 주된 공격 대상이 되었다. 리처드는 의회나 런던 민중들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요 귀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리처드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밀려나는 듯 했던 리처드의 세력은 1453년 헨리 6세가 첫 번째 광증을 나타내면서 전환을 맞았다. 왕비 앙주의 마거릿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처드는 국왕의 부재 동안 호국경으로 임명받는 데 성공했고 아내의 오빠인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을 재상으로 앉히는 등 정부를 장악했다. 비슷한 시기 리처드의 처가 네빌 가문은 노섬벌랜드 백작 퍼시 가문과 잉글랜드 북부의 주도권을 두고 거의 전쟁에 가까운 충돌을 시작했다. 헨리 6세가 퍼시 가문의 편으로 인식되면서 원래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왕조 양쪽에 연줄이 있었던 네빌 가문이 결정적으로 요크 가문의 편을 들기 시작했고, 리처드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귀족 지지 세력을 얻었다.

1455년 1월 헨리 6세는 2년에 가까운 발작에서 일어나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을 해임하고 서머셋 공작을 복귀시켰다. 이에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군대를 소집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헨리 6세와 서머셋 공작은 황급히 대항할 군대를 긁어모았지만 이미 무력 충돌을 철저히 대비한 상태였던 요크파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455년 제1차 세인트 알반스 전투는 사실 전투라기에는 사상자가 많지 않았지만, 서머셋 공작과 노섬벌랜드 백작 등 랭커스터파의 주요 인물들은 요크파에게 살해당했다. 두 번째 발작을 일으킨 헨리 6세 본인의 신병도 요크 공작 리처드에게 떨어졌다. 리처드는 이후 헨리 6세가 두 번째로 회복한 1456년 2월까지 정국을 주도했다.

2.4. 앙주의 마거릿과의 갈등

서머셋 공작의 사망 이후 헨리 6세 친위세력의 중심이 된 것은 왕비 앙주의 마거릿이었다. 마거릿은 1453년 헨리 6세의 적자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를 낳았는데, 요크 공작은 의회를 압박하여 헨리 6세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상태여서 갈등은 불가피했다. 결혼 후 7년이나 지났고 왕이 광증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첫 아들을 얻은 것으로 인해 사생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헨리 6세의 두 번째 회복 이후 마거릿과 랭커스터파는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했지만 요크파는 이미 귀족들의 지지를 상당한 수준으로 획득하여 더 이상 이들을 무시하고 정국을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헨리 6세는 1458년 3월 25일 '러브데이' 행사로 귀족들을 불러모아 연회를 열고 사면하는 등 랭커스터파와 요크파를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마거릿과 요크 공작은 파트너로서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의례적인 행사일 뿐이었고, 마거릿은 헨리 6세 주변을 더욱 강하게 장악하기 시작했고 요크 공작은 이에 반발하여 지지 세력을 결집했다.

2.5. 장미 전쟁 발발

1459년 6월 마거릿은 대의회를 소집했지만 리처드 등 요크파 인물들은 체포당할 것을 두려워해 이에 응하지 않았다. 곧 이들은 반역자로 선포되었다. 요크파 영지와 군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기에 많은 경우 각개격파되었다. 10월 요크파는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패했고 요크 공작 리처드는 아일랜드로, 요크 공작의 처남인 솔즈베리 백작[6]과 그 아들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그리고 요크 공작의 장남 마치의 에드워드는 잉글랜드령 칼레로 피신했다.

요크 공작은 아일랜드 총독직을 오래 역임하여 아일랜드를 기반으로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칼레의 정예병 또한 주둔군 사령관 워릭 백작을 지지했고, 영국 해협 또한 요크파 해군이 장악했다. 워릭 백작은 심지어 칼레에서 아일랜드까지 배로 이동해 요크 공작을 만나러 갔다오기까지 했다. 칼레와 가까운 런던 및 잉글랜드 남부에서도 요크파 지지 여론이 커졌다.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 마치의 에드워드는 1860년 6월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샌드위치에 상륙해 7월에는 런던에 무혈입성하고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파 군대를 상대로 승리했다. 요크파는 잉글랜드 중앙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요크 공작을 불러왔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호국경이나 헨리 6세의 후계자로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처럼 행동했다.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깃발을 내걸고 느긋하게 10월에 런던에 입성한 요크 공작은 왕좌에 손을 대고 권리를 주장했지만 귀족들의 반응은 싸늘한 침묵이었다. 잉글랜드 남부에서 요크파가 내세운 명분은 무능하고 부패한 헨리 6세의 조언자들을 갈아치우고 정부를 개혁한다는 것이었는데, 요크 공작 스스로가 이를 부정하고 자신이 반역자라는 랭커스터파의 공격을 스스로가 정당화시켜버린 것이었다. 당황한 솔즈베리 백작과 워릭 백작 등이 귀족들과 물밑으로 협상하여 요크 공작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대신 헨리 6세의 후계자로 다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요크파의 인망 저하는 피할 수 없었다.

2.6. 패배와 죽음

마거릿 왕비는 북부 잉글랜드에서 퍼시 가문, 서머셋 가문 등 대규모 랭커스터파 병력을 소집했고, 스코틀랜드 제임스 3세의 지원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랭커스터파 주요 귀족들은 그 가족들이 세인트 알반스에서 요크파에게 죽은 경우가 많았기에 요크파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잉글랜드 북부의 주요 도시인 요크 또한 헨리 6세 충성파가 장악했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자신의 처남인 솔즈베리 백작과 둘째 아들인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12월 그들은 요크셔의 요크파 주요 거점인 샌달 성에 도착했지만 전황은 불리했다. 12월 30일 요크 공작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대부분의 전력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오는 판단을 했다. 이어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파는 대패했고 요크 공작과 솔즈베리 백작, 러틀랜드 백작은 모두 사망했다. 요크 공작의 최후는 전사였다는 설과 붙잡혀 처형되었다는 설이 갈린다. 세 사람의 목은 요크 성문 위에 효수되었다.

웨일스에 있던 마치의 에드워드는 아버지 요크 공작의 왕위 주장을 이어받았고, 결국 내전에서 승리해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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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ecily Neville.jpg
세실리 네빌(Cecily Neville)
아내 세실리 네빌( 1415년 5월 3일 ~ 1495년 5월 31일)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그의 두번째 아내 조앤 보퍼트[7]의 막내딸로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 곤트의 존의 외손녀다. 남편인 리처드와는 에드워드 3세를 공통 조상으로 둔 육촌이다. 왕조의 후손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오만한 시스(Proud Cis)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미 전쟁이 일어나자 당연히 남편의 요크 왕조를 지지했으며[8] 랭커스터 왕조와 요크 왕조간의 대립이 극심해지던 중 1459년 러드퍼드 다리 전투에서 남편 리처드가 패배하고 도주하자, 형부 버킹엄 공작 험프리 스태퍼드[9]에게 붙잡혀 감금당하거나[10] 1460년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남편 리처드와 차남 에드먼드가 패배하여 처형당하자 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부르고뉴 공국으로 망명을 가기도 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굉장히 장수한 80세까지 살며 차녀 엘리자베스[11]와 삼녀 마거릿[12]을 제외한 모든 자식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걸 보았으며[13], 장손 에드워드 5세의 즉위와 실종에 이어 막내아들 리처드 3세가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하여 요크 왕조가 몰락하고 헨리 7세 튜더 왕조가 들어서는 것까지 보았다.

이후 친손녀 요크의 엘리자베스 헨리 7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고 엘리자베스의 자녀들로 증손주들인 아서, 마거릿, 헨리의 탄생까지 지켜보면서 종교에 헌신하다가 1495년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에드워드 4세 이후의 요크 왕조 헨리 8세 이후의 잉글랜드 군주들은 모두 요크의 리처드와 세실리 네빌의 후손이다.

3.1.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엑서터 공작부인 앤
(Anne, Duchess of Exeter)
1439년 8월 10일 1476년 1월 14일 제3대 엑서터 공작 헨리 홀랜드
슬하 1녀
토마스 세인트 레거 경
슬하 1녀
1남 에드워드 4세
(Edward IV)
1442년 4월 28일 1483년 4월 9일 엘리자베스 우드빌
슬하 2남 5녀[14]
2남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
(Edmund, Earl of Rutland)
1443년 5월 17일 1460년 12월 30일
2녀 서퍽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Elizabeth, Duchess of Suffolk)
1444년 4월 22일 1503년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
슬하 6남 3녀
3녀 부르고뉴 공작부인 마르그리트
(Margaret, Duchess of Burgundy)
1446년 5월 3일 1503년 11월 23일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
3남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
(George Plantagenet, Duke of Clarence)
1449년 10월 21일 1478년 2월 18일 이사벨 네빌[15]
슬하 1남 1녀[16]
4남 리처드 3세
(Richard III)
1452년 10월 2일 1485년 8월 22일 앤 네빌
슬하 1남[17]

[1]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고명딸 조앤 보퍼트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막내딸이다. 즉, 곤트의 존의 외손녀. 남편인 요크 공작 리처드와는 육촌 관계다. [2] 에드워드 3세의 4남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차남이다. [3]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친손녀이자 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Roger Mortimer, 4th Earl of March)의 딸. [4]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의 친손녀다. [5] 아내 세실리 네빌이 랄프 네빌의 막내딸이었다. [6] 아내 세실리 네빌의 오빠. [7]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이자 세번째 아내인 캐서린 스윈포드의 고명딸로 서머셋 백작 존 보퍼트,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의 여동생이다. [8] 세실리의 친정인 네빌 가문에서도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하느냐, 요크 왕조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편이 갈려 내분이 일어났다. 세실리의 아버지 랄프 네빌의 첫번째 부인 마거릿 스태퍼드 소생의 자식들은 주로 랭커스터 왕조를 지지했고 두번째 아내이자 세실리의 친어머니인 조앤 보퍼트 소생의 자식들은 대부분 요크 왕조를 지지했다. [9] 친언니 앤 네빌의 남편. 어머니 조앤 보퍼트와 험프리의 어머니 글로스터의 앤이 친사촌이기 때문에 외가쪽으로 육촌이기도 했다. [10] 연대기에 따르면 험프리는 처제이자 친척이기도 한 세실리를 가혹하게 대했다고 한다. [11] 서퍽 공작부인. 윌리엄 드 라 폴의 아들 존 드 라 폴과 결혼했다. [12] 부르고뉴 공작부인.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와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고 대신 의붓딸 마리 드 부르고뉴를 친딸처럼 아끼며 그녀와 함께 부르고뉴 공국을 프랑스의 야욕에서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13] 앞서 말했듯이 차남 에드먼드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사로잡혀 남편 리처드와 함께 처형당했고 3남 클래런스 공작 조지는 반역죄로 장남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처형당했으며, 에드워드 4세도 폭식과 폭음으로 병에 걸려 골골대다가 4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막내아들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외에도 장녀 앤은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던 중 산후병으로 죽었다. [14] 잉글랜드의 왕비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5세, 하워드 부인 앤 [15]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의 장녀이자 아래에 나오는 앤 네빌의 언니. [16] 솔즈베리 여백작 마거릿 폴 [17] 웨일스 공 미들햄의 에드워드. 그 외에 사생아 존, 캐서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