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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24:47

전준호(1969)/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전준호(1969)

1. 개요2. 롯데 자이언츠
2.1. 1991 시즌2.2. 1992 시즌2.3. 1993 시즌2.4. 1994 시즌2.5. 1995 시즌2.6. 1996 시즌2.7. 충격의 현금 트레이드
3. 현대 유니콘스4. 우리- 서울 히어로즈5. 쓸쓸한 은퇴6. 평가7.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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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준호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롯데 자이언츠

2.1. 1991 시즌

입단 첫 해인 1991년에 곧바로 1군 데뷔를 했고, 타율 0.263 2홈런 18도루라는 신인 선수 치고는 괜찮은 성적을 보여주며 앞으로를 기대하게 했다.[1]

2.2. 1992 시즌

이듬해 폭발을 했다. 1992년 롯데 자이언츠 마지막 우승 당시[2] 이종운, 박정태, 김민호, 김응국과 함께 남두오성으로 불리며 주로 톱타자로 활약하였으며, 골든글러브 후보에도 오르지만 안타깝게 선배 김응국이 받아가고 나머지 자리에 이순철, 이정훈이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받아갔다. 1번타자와 2번타자를 오가는 테이블 세터로 0.300의 타율과 안타 140개(3위), 90득점(5위), 33도루(3위)를 기록하며 일약 스타가 되었다.

2.3. 1993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3)
이종범, 양준혁, 구대성, 이상훈 등 전설들이 데뷔했던 1993시즌 시즌 KBO 최다 도루 기록을 경신했다. 이 시즌 기록한 75개의 도루는 역대 외야수 도루 기록 중 최고 기록으로 지금까지도 갱신되지 않고있다.[3] 두번째는 69개인데 이 기록도 95년도에 전준호 본인이 찍은 기록이다. 3위는 이대형의 66개.

2.4. 1994 시즌

방위 복무를 하면서 주로 홈경기에 전념하게 되었다.[4] 그럼에도 25도루를 기록하며 본인의 클래스를 보였다.

2.5. 1995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5)
파일:1995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전준호.jpg
1995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전준호, 뒷줄 오른쪽에서 2번째[5]

롯데에서의 커리어하이 시즌.[6] 0.308의 타율과 0.393의 출루율, 69개의 도루 등을 기록하며 두 번째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26타수 4안타라는 부진에, 결국 팀은 준우승을 했다.

2.6. 1996 시즌

1996년에는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95년 69개였던 도루 갯수가 1996년에는 23개로 급격하게 줄었다. 그리고 마침 전준호의 대체재로 대졸 신인 김대익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전준호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그래도 1997년 시범경기까지 롯데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그런데...

2.7. 충격의 현금 트레이드

1997년 정규시즌 개막전을 불과 4일 앞둔 4월 8일 난데없이 현대 유니콘스로의 트레이드가 결정된다. 롯데 구단은 전준호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현금 5억원을 받았다. 이 때문에 롯데맨으로서 전준호의 선수 생활은 허무하게 끝났다.

전준호의 현대행은 흔히 문동환과의 맞트레이드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롯데가 현금 5억원을 받고 전준호를 현대에 넘긴 현금 트레이드가 맞다. 현대 피닉스는 애초에 (명목이야 어쨌든)아마추어 팀이라 맞트레이드라는 공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아예 연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복잡한 금전 관계가 엮여 있다. 당시 문동환은 부산에서 자라나 '제2의 선동열'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국가대표 에이스 투수로 활약한 선수라 졸업 후 고향팀 롯데의 1차지명이 확실시되던 선수였다. 그러나 신인드래프트가 몇 달이나 남은 시점인 1994년 8월 30일 실업야구 현대 피닉스와 계약금 3억원과 현대 아파트 분양권까지 딸려오는 사상 유례없는 초특급 대우에 계약을 맺어 큰 충격을 안겼다. 물론 당시 해도 롯데가 특유의 짠돌이 경영 기조 때문에 신인은 물론 기존 선수들에 대해서도 후한 대우를 해주지 않은 것으로 악명이 높긴 했지만, 적어도 초특급 유망주에게 계약금은 후하게 챙겨주던 편이었기에, 만약 문동환이 정상적으로 롯데에 입단했다면 과거 박동희의 사례처럼 당시 프로야구 역대 최고 계약금을 갱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7] 하지만 현대가 제시한 조건은 그걸 아득히 뛰어넘는 당시로선 어나더 레벨 수준이었고 결국 문동환은 일찌감치 현대와 계약을 맺었다. 한편 롯데는 문동환이 이미 현대와 입단을 확정지은 상황임에도 1995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오로지 문동환의 보유권을 확보하고자 문동환에게 1차지명을 행사했다.

그러다 1995년 가을 현대그룹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프로야구에 진출했고 우승을 향해 선수단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톱타자 갈증 해소가[8] 시급했다. 이때 롯데에서 계륵으로 전락한 전준호가 눈에 들어왔고 현대 구단 프런트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치열한 논의 끝에 등장한 묘책은 전준호를 현금 트레이드로 현대에 이적시키고 문동환의 롯데 입단을 허가하는 대신 문동환이 현대 피닉스 입단 당시 받았던 계약금+연봉+위약금을 현대그룹에 토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문동환 본인에게 오래 전에 챙긴 돈을 갑자기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롯데가 받은 트레이드 머니 5억원을 문동환의 프로 입단 계약금으로 지급하고 문동환은 이를 본인이 갖지 않고 현대에 지불하는 것으로 위약금 문제를 처리했다. 이로써 현대 유니콘스는 리그 최고의 톱타자 전준호를 손쉽게 얻게 됐고 현대 피닉스는 문동환에게 투자됐던 자금을 일부 회수했으며 롯데 자이언츠는 리드오프를 포기한 대신 국가대표 에이스 출신 투수 문동환을 데려올 수 있었다.[9][10]

하지만 이 트레이드는 롯데의 완패로 끝났다. 현대로 간 전준호는 트레이드 이후에도 꾸준히 활약해주며 현대의 네 차례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반면 문동환은 2년 정도 밥값하다 드러누웠고 프로 경력 중에서 롯데에서 뛰던 시절을 사실상 흑역사로 기억하고 있다. 아울러 롯데에서 전준호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던 김대익은 무언가 아쉬운 모습만 보여주다가 2004년 시즌 도중 삼성으로 이적했고 이후부터 고질적인 리드오프 공백에 시달렸다. 결국 롯데 입장에서는 전준호만 현대에 내주고 얻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03년 롯데는 리드오프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전준호를 포기하면서 얻은 문동환을 보상선수로 내주며 정수근을 거액에 데리고 왔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롯데 시절의 정수근은 신문의 스포츠면보다 사회면에서 더 자주 얼굴을 보는 선수로 전락했고 불명예스럽게 은퇴하고 말았다. 결국 2000년대 후반 김주찬의 포텐이 터지기 전까지 롯데는 리드오프의 부재를 해결하지 못했다. 김주찬이 로이스터 감독 시절 롯데의 톱타자로 맹활약하는가 싶었으나 그 김주찬마저 2013년 KIA로 가버리고 전준우까지 군 입대를 하게 되자 롯데는 고정 테이블 세터가 없어서[11] 고생을 사서 했다. 2018년에는 민병헌을 데려옴으로써 길고 길었던 리드오프 문제는 비로소 해결될 줄 알았더니 2020시즌에는 성적이 수직 급하락했고 급기야 2021시즌에는 뇌동맥류 질환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또다시 리드오프 문제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2022년 이후 황성빈, 안권수, 김민석 등이 새로운 리드오프로 나서고 있으나 전준호의 아우라를 이기지는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전준호가 떠난 후 롯데는 8년간 6번 8위, 현대는 8년간 4번 우승에 6회 포스트시즌 진출을 기록한다. 야구에 만약이란 말은 없지만 행여나 전준호가 롯데에 계속 남았더라면, 그래서 리드오프의 부재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면 롯데의 성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많은 롯데 골수팬들이 아쉬워한다.

3. 현대 유니콘스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8)
파일:/pds/201102/08/35/a0028335_4d512f6f8903b.jpg
현대 유니콘스 선수로 뛸 당시의 전준호

현대는 창단 첫해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까지 달성하는 성과를 내긴 했지만, 태평양 시절부터 투수왕국으로 불리던 것에 비해 타자는 박재홍, 김경기, 이숭용, 박진만을 빼면 전체적으로 전력이 상위권이라고 하긴 힘들었다. 왼손타자도 당시 이숭용, 장정석을 제외하면 칠 사람도[12] 없었고, 주루에 있어서는 박재홍과 박진만/ 김인호가 있었으나 박진만은 유격수라서 도루를 계속하기엔 무리가 따랐고, 김인호는 도루는 할 수 있었어도 정작 출루를 잘 못하다보니 테이블 세터가 아닌 테이블 쉼터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 전준호마저 트레이드 파동 때문에 0.247의 타율을 기록하며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렇게나 허약한 타선 덕에 현대 유니콘스는 1997년 좋은 투수력에도 불구하고 6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13]

절치부심하여 겨울에 혹독한 훈련을 한 전준호는 정규시즌 현대의 첫 우승에 일조를 했다. 3할 타율에 복귀하고 자신의 최다 홈런 기록이던 5개와 또 다시 타이를 만들었다. 타율 2위,[14]도루 35개와 출루율 4위 최다안타 5위, 3루타 6위 등의 성적으로 본인의 3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골든글러브를 획득한다.
파일:2004년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전준호.jpg
2004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의 전준호
파일:최다경기 출장 달성 당시의 전준호.jpg
최다경기 출장 달성 당시의 전준호

이후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톱타자로 맹활약하며 현대 유니콘스 왕조시대를 이끌었다. 99년도~2000년도,[15] 그리고 2003년도~2005년도 까지는 성적이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팀에서 평균 성적이었다.[16] 2001년, 2002년 다시 3할 타율에 복귀. 2004년 최고령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로 홈스틸을 성공했다.

4. 우리- 서울 히어로즈

파일:external/img.seoul.co.kr/SSI_20091110181859_V.jpg
2009년 9월 25일, 통산 549호 도루를 달성했을 때[17]

2007년 시즌 후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단을 이어받아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되며 전준호도 자연스레 히어로즈 소속이 된다. 한편 구단의 재정적 이유로 고액 연봉 선수들의 연봉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선언했고, 2007년까지 2억 5천만원이던 연봉이 2008년에는 7천만원으로 무려 72%나 삭감되는 수모를 겪는다. 그렇게 시작한 새 시즌이지만 시즌 초기 팀의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타 팀들과 비교해서 제대로된 훈련을 못하고 스프링캠프 또한 해외로 나가지 못하고 제주도에서 하는 바람에 성적이 곤두박질 쳤다.

히스토리 24 '대도' 전준호의 '3루타 낭만시대'
그러나, 올림픽 직후 타율 .310을 기록하며 이택근과 함께 팀내 유일하게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가 되며 부활했다. 그 해 프로야구 사상 두번째 통산 2000안타, 10번째 통산 2500루타, 18년 연속 두 자릿수 도루, 통산 2000경기 출장, 통산 100호 3루타 등 수많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9년에는 시즌 초반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이탈했고, 시즌 막판이 되어서야 1군 올라왔는데 결국 21경기 출장에 그치고 시즌을 마쳤다. 커리어 마지막 도루.

시즌이 끝난 2009년 10월 16일, 히어로즈로부터 방출당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일단 팀이 애초에 돈이 없었던 게 원인이고, 2차 원인은 팀 내 억대 연봉 중에서 김동수/ 송지만/ 김수경 같은 노장들이 몸값이 높았기 때문에 정리된 것.

전준호의 방출 소식을 접한 많은 팬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이 방출은 전준호 본인에게 다른 팀에게 갈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일단 팀에서 풀어준 것이며, 팀을 못 찾았을 경우에는 미국에 코치 연수를 보내주고, 나중에라도 은퇴식을 치러줄 예정이었다고 한다.

한편 전준호가 히어로즈에서 방출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친정 팀 롯데 자이언츠 팬들 사이에서 전준호를 영입해 친정 팀에서 은퇴할 수 있게끔 하자는 여론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롯데는 이미 팀 내 좌타 외야수 자원이 많기 때문에 불혹이 넘은 전준호를 영입할 이유가 없다고 대놓고 보도자료를 올리며 전준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드러냈다.[18][19]

5. 쓸쓸한 은퇴

파일:/image/295/2009/11/29/55.jpg

결국 히어로즈에서 방출당한 뒤 다른 팀으로 가지 않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식은 28년 한국프로야구 역사는 물론 19세기 말 야구가 들어온 이래 팬들이 직접 은퇴식을 열어 준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히어로즈에서 방출된 후 2009년 11월 29일, 서울 양천구 목동 KT 체임버 홀에서 열렸으며, 참석인원은 참석자의 짐작으로 300명 가량 된 듯하다. 장소가 참 의미심장하다...[20]

히어로즈 선수 전원[21], 성구회 회원 양준혁 송진우, 권시형 선수협회 사무총장도 참가했다.

박동희 기자의 은퇴식 관련 기사

은퇴식 중 전준호의 인삿말 영상

6. 평가

1991 시즌부터 2009 시즌까지 모두 19시즌이나 뛰었으며, 통산 타율 0.291, 2,018안타, 42홈런, 577타점, 549도루, OPS 0.745를 기록.

KBO 리그 통산 도루 1위이며,[22] 3루타 통산 100개로 이 부문도 1위 기록도 가지고 있다. 2위는 정수빈으로 84개[23]인데 2023년 시즌 부터 정수빈의 3루타가 평균 대비 꽤 많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기록이 경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롯데 시절 활약이 워낙 인상에 깊어서 그렇지 결과적으로는 현대에서 가장 오래 뛰었고, 현대를 거쳐간 선수들 타자 중에서는 이숭용에 이어 현대 재적기간 2위에 랭크되어있다. 참고로 투수까지 포함하면 1994년에 입단한 이숭용과 공동 2위인 전준호[24]에 이은 4위. 이 부문 1위는 김민범인데 무려 1992년에 입단해 우리 히어로즈까지 선수생활을 했던 가늘고 길게 뛴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였다. 그러나 워낙 가늘게 선수생활을 한 터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게 현실. 당장 이 문단만 해도 이숭용과 투준호가 현대 재적기간 1위라고 했으니...[25]

그리고 KBO 역사상 양준혁에 이어 2,000안타를 2번째로 달성한 선수이자, 2,000경기 출전 & 2,000안타를 최초로 달성하였으며, 단일 시즌 최다 도루 2위[26], 그리고 3차례의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27]. 통산 득점도 1,171점으로 양준혁, 이승엽에 이어 3위에 랭크되어있다. 이쯤되면 양준혁, 송진우 등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릴만하다.

특히 투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매서운 눈빛과 빠른 발, 탁월한 주루 센스를 갖춘 덕에 대도, 그라운드의 독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도루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선수였다. 특히 "도루는 발이 아니라 눈과 센스로 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이른바 '발야구'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선수였다.

하지만 이런 평가도 세이버매트릭스가 알려지며 다시 보게 됐는데, 도루 개수 자체는 1위지만 성공률이 71.7%라 도루의 손익분기점인 72~73%에 약간 못 미치기 때문이다. 아주 약간의 차이이므로 이 차이를 없다고 치더라도 결국 하나 안 하나 똑같은, 커리어 내내 도루를 아예 시도하지 않은 선수와 비교했을 때 다음 루를 얻어낸다는 의미로는 다를 게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물론 전준호가 1루에 있는 것으로 투수가 압박을 받는 등 단순히 계산할 수 없는 요소들로도 꽤 많은 이득을 봤겠지만, 많은 도루 개수만 보고 도루로 큰 이득을 봤다고 평가할 수 없다.

옥에 티라면 고질적 어깨부상으로 인한 약한 어깨. 이 때문에 타격과 주루에 비하면 수비 능력은 아쉬운 편이었다. 데뷔 초창기까지만 해도 중견수 수비가 가능했으나, 현대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는 좌익수로 고정되면서 사실상 수비를 볼 수 있는 포지션은 좌익수 하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현대의 외야는 꽤 탄탄했기 때문에 지명타자로 출장한 경기도 꽤 많았다.[28] 물론 전준호가 트레이드로 넘어왔을 당시 현대에는 전준호보다 더 젊고 외야 수비 능력이 뛰어났던 박재홍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박재홍보다 수비 능력이 떨어지는 전준호를 중견수로 쓸 필요가 없기도 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성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1 롯데 122 372 .263 98 13 6 2 48 66 18 60 .347 .360
1992 120 466 .300 140
(3위)
17 9
(3위)
5 49 90
(5위)
33
(3위)
58 .408 .376
1993 120 393 .282 111 3 7
(3위)
1 31 63
(5위)
75
(1위)
52 .333 .363
1994 79 281 .288 81 5 3 2 25 47 25 33 .349 .361
1995 124 458 .308
(5위)
141
(3위)
13 12
(1위)
1 42 93
(1위)
69
(1위)
68 .395 .39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6 롯데 103 324 .272 88 12 9
(1위)
2 22 49 22 38 .383 .346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현대 110 369 .247 91 14 7
(3위)
2 18 48 23 46 .339 .330
1998 126 446 .321
(2위)
143
(5위)
16 7
(3위)
5 43 78 35
(4위)
59 .422 .398
(4위)
1999 129 470 .291 137 7 2 4 43 80 38
(3위)
71 .340 .380
2000 87 263 .316 83 12 2 1 18 53 18 57 .388 .436
2001 125 400 .325 130 18 6
(2위)
4 35 85 27
(5위)
75 .430 .426
(5위)
2002 126 420 .300 126 15 8
(1위)
3 28 83 26
(4위)
66 .395 .394
2003 129 442 .269 119 16 6
(1위)
3 38 79 20 68 .353 .365
2004 132 487 .292 142 10 7
(1위)
4 48 88 53
(1위)
68 .366 .377
2005 94 278 .266 74 8 2 0 22 34 18 29 .309 .332
2006 109 303 .287 87 10 1 1 26 37 20 27 .337 .345
2007 121 371 .296 110 8 1 1 13 52 11 49 .332 .377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8 우리 114 352 .310 109 16 5
(3위)
1 24 44 16 36 .392 .372
2009 히어로즈 24 33 .242 8 1 0 0 4 2 2 4 .273 .324
KBO 통산
(19시즌)
2091 6928 .291 2018
214 100
(1위)
42 577 1171
(4위)
549
(1위)
962 .369 .375


[1] 당시 롯데의 지명은 전준호외에 박정태, 김태석 이렇게 단 3명만 입단하고 나머지는 패스, 즉 포기를 했다. 그런데 이 셋이 초대박을 터뜨려준 덕에 롯데의 지명은 대성공이 되었다... [2] 2023년 현재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우승이다. [3] 물론 한 시즌 최다 도루 1위는 도루 84개를 기록한 이종범이 가지고 있지만, 이 당시에 이종범은 내야수로 분류되는 유격수였다. KIA 시절에 외야로 전업했는데 외야수로 뛰는 동안 가장 많은 도루를 기록한게 50도루였다. [4] 94년까지는 방위 복무 선수들이 휴가를 받아 일부 원정경기에도 뛰었다. 방위병의 원정경기 출전이 아예 금지된 것은 95년부터. 단, 이 금지 규정은 정규리그에만 적용되며 포스트시즌은 예외였다. [5] 수상자는 뒷줄 이상훈(투수) 김동수(포수) 장종훈(1루) 이명수(2루) 전준호(외야) 홍현우(3루), 앞줄 김상호(외야) 김형석(지명타자) 김민호(유격, 대리수상) 김광림(외야) 이명수(2루)였다. [6] 게임 마구마구에서는 엘리트 카드가 없지만, 모바일 게임에서는 당해년도 엘리트 카드를 받았다. 아마 추후 엘리트 카드에 나올지도 모른다. [7] 당시 역대 최고 계약금은 심재학과 김재걸이 받은 2억 1천만원이었다. [8] 이 당시 현대의 톱타자는 김인호였다. 원래는 대졸 신인 박재홍을 붙박이 톱타자로 키우려 했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1번보다 3번에 어울리는 선수여서 박재홍을 3번에 배치하고 어쩔 수 없이 김인호를 1번에 배치했다.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그만큼 당시 현대 선수단 내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인호 대신 톱타자로 내세울 만한 선수라고는 극악의 타격 능력을 자랑했던 염경엽이 유일했다. [9] 롯데는 희대의 뻘짓을 한 셈인데 애초 현대 피닉스는 프로구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지명된 선수들은 1996년 창단한 현대 유니콘스에 흡수될 수 없었다. 지명권은 롯데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짜로 데려올수 있던 선수를 전준호를 주면서 데려온 셈이다. [10] 앞의 각주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건데, 현대 피닉스는 분명 프로리그 구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선수들이 그대로 유니콘스에 흡수될 수는 없었지만, 실업야구에서 활동하는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은 엄연히 지명권을 소지한 원 구단과의 계약을 거부하고 현대전자와 입단계약을 맺은 당사자임을 간과한 말이다. 입단계약을 맺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그러면 당연히, 선수와 현대전자 상호간에 계약을 해지하지 않으면 그 선수들은 현대 유니콘스를 포함한 다른 그 어떤 팀으로든지 갈 수가 없다. 피닉스가 안 놓아주면 선수들은 그냥 피닉스에 묶인 상태로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 피닉스가 유니콘스에 흡수되지 못한다고 해서 지명권을 가진 팀이 그 선수를 자동으로 데려갈 수 있었던 게 아니다. [11] 손아섭이 있기는 했으나 플레이 스타일을 꼼꼼히 따지면 리드오프보다는 중심타선에 더 어울리는 선수가 맞다. [12] 시즌 중반에 현대는 또 한번의 머리를 굴리며 쌍방울에서 김광림을 낚아채 영입했다. [13] 7위는 조용했던 한화, 8위는 친정팀 롯데였다. 심지어 롯데는 이듬해 또 꼴찌를 했다. 그것도 2번 연속을 또... [14] 1위는 양준혁 [15] 이 때는 선수협 반대파였던 김경기와의 갈등으로 인한 폭행을 당해 출장을 많이 하지 못했다. [16] 그나마 2005년은 덜 뛰었음에도 0.266을 쳤다. [17] 달성 당시에는 통산 550호 도루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전산화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도루가 1개 취소되었고, 549호 도루로 정정되었다. [18] 전준호 본인에 의하면 2008년에 친정 팀 롯데로 갈 뻔했다고 한다. 실제로 제리 로이스터 감독도 롯데에 전준호가 꼭 필요하다며 영입을 희망했고 롯데 수석코치였던 박영태를 통해 히어로즈와 트레이드 논의가 오갔지만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고. 전준호 본인도 이를 꽤나 아쉬워했다는 후문. [19] 이후 12년 뒤인 2021년 11월, 롯데 코치로 복귀한다. [20] KT 역시 2007년 현대를 인수하려고 했으나 백지화가 되어 인수 실패가 되었다. 그러나 2014년 결국 kt wiz를 창단했다! [21] 당시 이택근과 김시진 감독은 불참했는데 이택근은 이때 LG로 이적한 상태였던지라 불참할 수 밖에 없었고 김시진은 전준호 말고도 선수에서 동명이인이던 베테랑 투수 전준호, 이상열 등이 대거 방출되는 것과 팀이 돈이 없어서 FA로 LG에 떠나보낸 정성훈과 간판 투수들 및 타자 주전 멤버 4명을 대거 트레이드로 보내지는 등 선수들의 이탈 사태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은퇴식에 나오지 못했다. [22] 통산 2위는 510개인 이종범. 3위는 505개 이대형. 이종범의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 때문에 가끔 이종범을 1위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이종범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4년을 뛰었기 때문에 NPB시절 기록도 합산하면 커리어 통산 도루 1위는 이종범(563개)이 맞긴 하다. [23] 2023.04.11 기준 [24] 동명이인이다. 참고로 포지션은 투수. [25] 태평양이 아닌 현대 재적기간만 따지면 동률이고, 군 복무 기간까지 빼면 이숭용이 1위가 맞다. [26] 1993년 75개, 1위는 1994년도 84개를 기록한 이종범 [27] 1993년, 1995년, 2004년 [28] 현대 초기에는 박재홍이 주전 중견수로 고정되어 있었고 박재홍이 KIA로 트레이드 된 이후에는 이택근이 중견수를 봤다. 우익수 자리 역시 심재학, 심정수, 송지만 등 강견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거쳐갔고, 클리프 브룸바, 래리 서튼 등 이름값 있던 외국인 타자들도 좌익수 포지션에서 활동했다. 그 외에 김인호, 윤덕규, 김광림 등 외야 수비에 일가견이 있는 선수들도 많았다. 여기에 김경기의 SK 이적 이전까지 1루수와 외야수를 겸업하던 이숭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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