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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0:02:22

장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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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津郡 / Jangjin County
장진군
長津郡 / Jangjin County
국가 북한
광복 당시 면적 5,112㎢
광역시도 함경남도
광복 당시 행정구역 7면
인구 64,681명
시간대 UTC+9
파일:20190111_115920.jpg 함경남도 장진군 일대
[clearfix]
1. 개요2. 역사3. 기후4. 교통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6. 출신 인물

1. 개요

북한 함경남도의 군이다. 6.25 전쟁 당시의 장진호 전투로 유명하다.

2. 역사

옥저 일부였고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 진흥왕 신라가 차지한 최북단 지역으로, 장진군 남부의 황초령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워 지금도 남아있다. 이후 발해의 땅이었다.
고려시대에 여진족의 땅이었지만 점령하고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 갑산군)와 함흥부에 편제했다.
조선 초기에 갑주만호부가 갑산도호부로 개편되고 일부가 삼수군으로 분리되며 고려시대에 갑주만호부에 편입된 지역이 이에 속했다.

1665년(현종 6)에 함흥부 한후구비사(漢厚仇非社, 한덕구비사?)에 장진보수책(長津堡樹柵)을 설치하고 별장을 배치하면서 지금 지명인 장진이 처음 생겨났다.
장진(長津)은 황초령, 설한령, 한대령, 세 고개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 곳에서 합류해 압록강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1667년에 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이 보(堡)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장진책(長津柵)을 두고 순영(巡營)에서 별장을 파견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약 1리 떨어진 곳으로 보를 옮겼고, 1784년(정조 8)에 함경도감진사(咸鏡道監賑使) 이재학(李在學)이 건의로 보를 혁파하고 절제진(節制鎭)으로 삼았다. 이듬해(1785년) 7월에 진을 지금의 서하면 적수리 왕인봉(旺人峰) 아래로 옮겼다.

1787년(정조 11)에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읍으로 승격시킬 것을 청하자 이해 8월에 변지독진도호부(邊地獨鎭都護府)를 설치하였다.

1815년(순조 15) 다시 진을 영덕산(永德山) 밑으로 옮겨 별해진(別害鎭)으로 삼았다.

1843년(헌종 9)에 백성이 적어져 읍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여 첨사진(僉使鎭)으로 격하시켰다가 1859년(철종 10)에 개척민이 모여들자 관찰사 윤치수(尹致秀)의 청을 받아들여 다시 독진도호부로 복구시켰다.
1895년에 23부제 시행으로 강계부 장진군으로 개편되고, 1897년에 함흥부 북부와 삼수군 남부를 갈라 장진군을 설치하였다. # #

해방 전 면적이 5,112.67㎢로서 함경북도 무산군, 평안북도 강계군에 이어 한국에서 3번째로 넓은 군이었다. 1914년 이전에 신흥군(현 부전군)으로 동상면이 편입되기 전에는 5,947.08㎢이나 되었다.

1920년대에 함흥 일대의 전력 공급을 위해 압록강 지류인 장진강 상류를 막은 장진강발전소가 건설됐다. 이 발전소의 댐으로 인해 장진호가 만들어져 군청 소재지였던 군내면 읍상리가 수몰되어 군청이 신남면 경하리로 이전, 장진면으로 개칭하였고, 군내면도 동문면으로 개칭하였다.

아울러 6.25 전쟁 중에는 미 해병대에게 악몽 같은 겨울을 보여준 장진호 전투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이후 북한 정권에서 동문면 일대가 랑림군으로, 부전강 유역이 부전군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 그리 특출나지 않은 깡촌지역이지만 감자가 매우 많이 생산되고, 2010년대 중후반 들면서 새로운 판로를 보이고 있는지 크게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여 아예 마을에 집 몇 개만 있는 곳이 아니고 장진읍은 예로부터 군의 중심지이기는 하였기에 읍내에 해당하는 규모의 거주지가 조성되어 있다. 미군이 사용하던 비행장은 지금도 남아 있다.

3. 기후

개마고원 위에 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개마고원이 아닌 다른 모든 곳보다는 춥다. 한반도 추위의 금메달 동네인 삼지연은 물론 전통적으로 북한 삼지연과 혜산시를 포괄하여 진짜로 분단 직전까지 최강의 추위로 유명했던 삼수갑산 지역보다는 못하지만 강원도 산간지대보다는 확실히 춥다.

상당히 혹독한 기후를 가진 곳으로 이곳에서 벌어진 장진호 전투가 매우 유명하다. 이유는 너무 추워서 정상적인 전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혹한기 전투였다. 전투 당시 영하 28도까지 떨어졌고 미군과 중공군을 비롯한 모든 군대들이 정신나간 추위에 실컷 고생만 했다.

기상청 발간 < 북한기상연보 2016>에 따르면 그 해 장진의 최저기온은 영하 36.6도로 12월 28일에 찍었다. 최고기온은 31.1도로 8월 5일에 기록. 그나마 삼지연처럼 6월 초나 8월 말에 최저기온이 영하를 기록하진 않는다.[22년]

연 평균기온은 2.5℃로 냉대기후에 속한다. 장진군의 1월 평균기온은 -15.5℃로 매우 추운 곳이다. 이렇게 추운 곳인데도 위도는 겨우 북위 40°23'으로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정확히 같은 위도 상에 있다. 그런데 마드리드의 1월 평균기온은 6.3℃로 장진군보다 거의 22℃나 더 따뜻하다.
북위 64°50'에 있는 알래스카 놈(Nome)의 1월 평균기온이 이곳과 비슷하다. 장진호 전투에서 진정한 승자는 동장군이라고 한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만 여름은 비교적 서늘한 편인데 최난월인 7월의 평균기온은 17.5℃로 매우 서늘하다. 서울의 늦봄 날씨 정도다.
2018년 폭염 때는 세 차례에 걸쳐 최고기온이 33도(7월 23일, 7월 31일, 8월 3일)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그 다음 날 최저기온은 모두 20도 이하였다.

4. 교통

개마고원 지역들 가운데 함흥 등 아랫 동네에서 갈 때 가장 접근성이 좋은 편인데, 장진으로 통하는 고개인 황초령[2]이 해발 1,200m인데 비해 이웃 부전군 방면으로 통하는 고개인 부전령은 1,445m나 되기 때문이다.

5번 국도가 이곳을 지난다.

장진선 철도가 장진면을 거쳐 중남면 사수역까지 이어져 있다.

5.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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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진군.jpg

가장 넓은 도인 함경남도 중에서도 가장 넓은 군으로, 최대도 중 최대군(最大道中最大郡)[3]이라고도 했다.

6. 출신 인물


[22년] 기준 아직도 은메달 정도를 찍고 있다. # 최저 1월 20일 섭씨 영하 28.6도 최고 7월 8일 섭씨 영상 28.5도. [2] 신라가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장진군 지역을 정복하고 568년에 세운 진흥왕 황초령 순수비가 있다. 고구려는 잠시 점령을 축하하는 등 굴욕적 화의를 맺었으나, 다시 이 지역을 회복하였으며, 신라가 통일신라 때도 영역으로 넣지 못한 지역이다. 실물은 지금은 함흥시에 있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고 있고 남한에는 모조품과 탁본들이 여러 박물관에 있다. [3] 이와 대치되는 개념인 최소도 중 최소시(最小道中最小市)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이다. 이쪽은 예하 시가 2개뿐인데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면적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서 큰 의미는 없지만. [4] 북한에서는 '몌(袂)'와 '폐(廢)'를 각각 '메', '페'로 읽기로 하였다. 그래서 '폐지(廢止)'도 '페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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