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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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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 사면 요구 3. 1998년 "이런놈의 나라" 발언 논란4. 엘리트주의 발언 논란5. 총풍 사건6.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법살인 관여 논란7.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판결 관여 논란

1. 개요

전 국무총리 이회창의 논란을 담은 문서.

2.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 사면 요구

1997년 대선 전, 이회창은 자신이 직접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단 입장을 밝히면서 문민정부 집권 기간동안 TK홀대론으로 흔들리던 TK 민심을 잡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당내 주류파였던 김영삼계 PK를 견제하고 TK 중심의 민정계와 이회창 본인의 충청, 수도권을 중심으로 당내 권력을 안정적으로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15대 대선은 모든 후보가 전노의 사면을 내밀 수밖에 없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나버렸다. 결론적으로는 대국민 화합의 차원에서 당선인 신분의 김대중이 현직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에게 요청하는 형식으로 사면이 이뤄졌다. 낙선한 이회창후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김대중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독재자들을 사면하지 않았다는 책임은 덜고 동시에 화해와 용서라는 이미지를 취한 것이었고, 김영삼은 후임 대통령의 부담은 덜어주는 동시에 TK홀대론을 달래주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1] 당시 이회창이 전두환 사면을 공약으로 내세우자 감옥에 있는 전두환이 이회창에게 "고맙다"며 "우리 때문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니냐"고 화답할 만큼 매우 기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옥중 전 씨 사면 건의 이회창 대표에 고맙다, 구두 메시지 그에 대해 이회창 후보도 전두환의 화답에 "고생 많으시다. 추석 때 나오시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다"고 전두환 측에게 화답한 것으로 밝혀졌다. 李(이) 대표-全(전) 씨 비밀메시지 오갔다 사면파동 후 변호사 통해 동아일보 1997.9.24 당시 한겨레에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추석 전 전두환 노태우 두 분의 석방을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 아쉽게 됐다"고 전두환 측근들에게 화답하였다고 보도했다. 사면 노력해줘 고맙다” 전 씨, 이회창 대표에 인사말 1997.9.24 한겨레 당시 이회창 후보는 추석 전 전두환 사면건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국민공감대 측면엔 소홀 시인 1997.10.11 한겨레

한나라당이 야당이 된 이후인 2002년 1월 8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자택을 방문해서 새해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가 나아져 다행이지만 정치가 잘 풀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정치보복은 근절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회창 총재는 공감을 표시하면서 국민 대통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현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2] 같은해인 2002년 11월 6일, 한나라당 이회창 당시 대통령후보(왼쪽)가 6일 오후 서울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을 방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친상때 이회창후보가 조문을 했던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3] 2005년 10월 25일, 오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모친의 빈소를 찾아 이회창 전총재를 위로했다.[4]

3. 1998년 "이런놈의 나라" 발언 논란

1998년 이회창은 김대중 정권을 비판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도 야당 빼가고 정치 사정해서 국회의원 잡아갈 생각이나 하고, "이런 놈의 나라"가 이런 놈의 정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이라 발언하며 김대중 정권과 국가를 맹비난했다.[5][6] 그러자 당시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당시 대변인은 "이회창 총재가 국가를 위해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을 이런놈의 나라라고 비난할 자격은 없다. 정치지도자로써 해서는 안될 망언"이라며 강력 비판했다.[7][8][9][10]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은 또다시 김대중 정권을 비난하며 "이런놈의 나라"라는 표현을 써 논란을 빚었다.[11][12]

4. 엘리트주의 발언 논란

이회창 비판자들에게는 엘리트주의에 극도로 찌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에 따르면 고려대 출신 기자에게 "요즘은 고려대 나오고도 기자를 할 수 있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

그러나 이회창이 영입한 인사들 중에서는 연세대 출신인 최경환 경제부총리나 고려대 출신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 비 서울대 출신 인사들이 많고, 이회창의 분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측근인 이흥주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은 명지대, 오랜 세월 이회창을 보좌한 이채관 총재 정무특별보좌관은 경남대를 나왔다는 사실로 볼 때, 공적으로는 유능한 사람을 두루 뽑은 편이었다.

결국, 이 발언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다. 마음 속 깊이 묻혀 있던 엘리트주의가 술자리를 빌어서 표출되었다는 해석, 아래의 '빠순이' 발언처럼 그냥 농담으로 한 말이 그냥 세상으로 퍼져버렸다는 해석, 진짜로 자신과 안면이 있는 기자들이 전부 서울대 출신이라 고려대 출신 기자가 신기해서 물어봤다는 해석 등이 있다.

하지만 이건 이회창 전 총재가 과거에 대학생이던 시절을 감안해야 한다. 전국적으로도 4년제 종합대학이 손에 꼽을 정도인 시절인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당시에는 고려대 연세대 전문학교에서 승격한지 10년 정도 된 상황이었다, 경북대학교는 그나마 서울대와 비슷하게 기존에 있던 전문학교들을 모아 통합하여 종합대학교로 출발하였으나 대구에 있었고, 부산대학교는 출발이 종합대학이긴 했지만 부산에 있었다. 따라서 경성제국대학의 적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서울대학교의 위상은 원톱 그 자체였다.

1957년 실시된 해방 이후 최초의 민간 통신사인 '합동통신사' 공채에 합격한 언론인 리영희는 선발된 4인 중 꼴찌가 자신이었고, 나머지 3명은 전부 서울대 졸업자 또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인재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쟁률은 무려 1:50이었고, 심사에서 탈락한 고려대 졸업생은 외교부로 발탁되어 갔다고 한다.

5. 총풍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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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사법살인 관여 논란

5.16 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 1심 재판관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사법살인행위 중 하나로 꼽히는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형선고에 참여한 바 있다. 참고자료 이 사건에 대해 이회창 본인은 초임 판사 시절에 혁명재판소 재판관으로 강제로 차출된 것이며 자신으로서는 해당 판결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13]

법률의 위헌적 소급적용에 의한 정치탄압 및 사법살인극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도 부정하지 못한 이회창의 대표적인 흑역사이다. 좋게 바라봐준다하면 민주항쟁 진압에 동원된 경찰이나 군인같은 입장이라 볼 수 있수도 있으나, 정계 입문을 전후하여 본인이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대쪽 판사'로 명성을 높인만큼 대쪽이란 이미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법살인 관여는 이회창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7. 8차 화성 연쇄살인 사건 판결 관여 논란

이회창 대법관의 화성연쇄 8차 판결…20년 옥살이 무기수 만든 '오판'?

진범 이춘재의 등장으로 논란이 된 화성 연쇄 살인 8차 사건 대법원 유죄 확정판결의 주심이 이회창 당시 대법관으로 알려졌다. 아직 본격적으로 재심이 진행되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변호인과 검찰/법원과의 치열한 싸움에[14] 당시 주심으로 유죄 판결을 확정지었던 이회창이 가장 주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2020년 2월 6일, 재심 사건 재판부가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감당해야했던 윤씨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검찰 역시 이춘재의 진범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는 걸 재판 중 인정했기 때문에 재심에서 판결이 뒤집어지는 건 거의 확정된 상황이다. # 윤씨는 당시 재판을 맡았던 판사들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데 재심 끝 무죄 판결이 확정될 경우 상기했다시피 3심의 주심이었던 이회창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주목받고 있다.

결국 2020년 12월 17일, 수원지법에서 재심 끝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의 무죄가 선고되었다. # 검찰 역시 항소를 포기하면서 무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사실이 드러난지 2년이 다되어 가도록 이회창은 당시 본인의 판결에 대하여 별다른 반응을 내놓고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재판에 대해 억울한 부분도 있는게, 당시 윤성여씨의 국선변호사가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는 등 피고인의 변호에 큰 문제가 있었다. 이로 인해 재판 자체가 검사의 주장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박준영 변호사도 판사보다는 국선변호사의 문제가 더 크다고 지적하였다. # 다만 본인이 따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은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1] 당시 전노사면은 원론적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상황이었고, 그 상황에서 9월 1일, 신한국당 이회창 전 대표가 먼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조기석방을 요구하여 언론에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비화되었던 것이다.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 추석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조기석방 요구 mbc 1997 [2] 이회창 총재, 전두환 전 대통령 방문 kbs 20020108 [3] 동아일보 2002 [4] 이회창 모친 빈소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 2005 뉴시스 [5] 사정 강경기류에 여야 긴장, 상호 비난 1998 mbc뉴스데스크 [6] 경향신문 1998.9.7 [7] 이 총재, 이런놈의 나라 대변인끼리 설전 한겨레신문 1998 [8] 경향신문 1998.9.7 [9] 이회창 죽을 각오로 싸운다 한나라당 대응 1998.9 경향신문 [10] 한나라 의총 반격 1998.9 동아일보 [11] 이회창후보 말-말-말 2002.6. 세계일보 [12] 엄숙한건 나도 싫어' / 이후보 `원고없는 연설'.거리시민에 친근감 유도 [13] "막 군법무관에 임관된 상태에서 혁명재판소로부터 인원 차출 지시가 왔는데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해 나이 어린 순으로 차출되다보니 세명의 재판관 중 한명으로 참여하게 됐다. 나는 이런 재판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용수의 용모는 준수했으며 심문에도 똑똑히 대답해 사형을 내리기엔 아까운 젊은이였다." 원희복 <사후 37년만에 진상규명위원회 발족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신동아 1999년 2월 483쪽 [14] 경찰은 벌써 백기를 들었지만 검찰과 법원은 아무 입장을 밝히지 않아 자신들의 무오류성을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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