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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6:11:34

이토 미도리

이토 미도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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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ffffff)"
{{{#!wiki style="margin-top:-8px;margin-bottom:-8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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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c3b6e,#141425> 하계 올림픽
1908 1908 런던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엘사 렌슈미트 1920 1920 안트베르펀 파일:스웨덴 국기.svg 스비아 노렌
동계 올림픽
1회 1924 샤모니 파일:미국 국기.svg 비아트릭스 로프렌 <colbgcolor=#3c3b6e,#141425> 2회 1928 생모리츠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프릿지 버거
3회 1932 레이크플래시드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프릿지 버거 4회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파일:영국 국기.svg 세실리아 콜레지
5회 1948 생모리츠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에바 파릭 6회 1952 오슬로 파일:미국 국기.svg 텐리 올브라이트
7회 1956 코르티나담페초 파일:미국 국기.svg 캐럴 하이스 8회 1960 스쿼밸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샤우켜 데이크스트라
9회 1964 인스브루크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레진 하이저 10회 1968 그르노블 파일:동독 국기.svg 가브리엘 세이페르트
11회 1972 삿포로 파일:캐나다 국기.svg 카렌 마그누센 12회 1976 인스브루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디아네 드 리우
13회 1980 레이크플래시드 파일:미국 국기.svg 린다 프래티아니 14회 1984 사라예보 파일:미국 국기.svg 로잘린 섬너스
15회 1988 캘거리 파일:캐나다 국기.svg 엘리자베스 맨리 16회 1992 알베르빌 파일:일본 국기.svg 이토 미도리
17회 1994 릴레함메르 파일:미국 국기.svg 낸시 케리건 18회 1998 나가노 파일:미국 국기.svg 미셸 콴
19회 2002 솔트레이크시티 파일:러시아 국기.svg 이리나 슬루츠카야 20회 2006 토리노 파일:미국 국기.svg 사샤 코헨
21회 2010 밴쿠버 파일:일본 국기.svg 아사다 마오 22회 2014 소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연아
23회 2018 평창 파일:오륜기.svg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24회 2022 베이징 파일:러시아 올림픽 위원회 기.svg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25회 2026 밀라노·
코르티나담페초
파일:국기.svg ? 26회 ? 파일:국기.svg ?
  • 1912년 올림픽에는 종목으로 추가되어있지 않았고, 1916년 올림픽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됨.
  • 1994년 릴레함메르 올림픽부터 동하계 올림픽 개최 주기가 2년마다 번갈아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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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1회(1906년) ~ 50회(1945년)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11회 1906 다보스 파일:영국 국기.svg 마지 시어스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12회 1907 빈 파일:영국 국기.svg 마지 시어스
13회 1908 트로파우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릴리 크론베르거 14회 1909 부다페스트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릴리 크론베르거
15회 1910 베를린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릴리 크론베르거 16회 1911 빈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릴리 크론베르거
17회 1912 다보스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피가 본 메러이 호르바트 18회 1913 스톡홀름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피가 본 메러이 호르바트
19회 1914 생모리츠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피가 본 메러이 호르바트 20회 1915 취소 WWI
21회 1916 취소 WWI 22회 1917 취소 WWI
23회 1918 취소 WWI 24회 1919 취소 WWI
25회 1920 취소 WWI 26회 1921 취소 WWI
27회 1922 스톡홀름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헤르마 스자보 28회 1923 빈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헤르마 스자보
29회 1924 맨체스터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헤르마 스자보 30회 1925 빈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헤르마 스자보
31회 1926 스톡홀름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헤르마 스자보 32회 1927 오슬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3회 1928 런던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4회 1929 부다페스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5회 1930 뉴욕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6회 1931 베를린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7회 1932 몬트리올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8회 1933 스톡홀름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39회 1934 오슬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40회 1935 빈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41회 1936 파리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소냐 헤니 42회 1937 런던 파일:영국 국기.svg 세실리아 콜레지
43회 1938 스톡홀름 파일:영국 국기.svg 메건 테일러 44회 1939 프라하 파일:영국 국기.svg 메건 테일러
45회 1940 취소 WWII 46회 1941 취소 WWII
47회 1942 취소 WWII 48회 1943 취소 WWII
49회 1944 취소 WWII 50회 1945 취소 WWII }}}}}}}}}
51회(1946년) ~ 100회(1995년)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51회 1946 취소 WWII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52회 1947 스톡홀름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바버라 앤 스콧
53회 1948 다보스 파일:캐나다 자치령 국기(1921-1957).svg 바버라 앤 스콧 54회 1949 파리 파일:체코 국기.svg 알레나 브르자뇨바
55회 1950 웸블리 파일:체코 국기.svg 알레나 브르자뇨바 56회 1951 밀라노 파일:영국 국기.svg 지네트 알트웨그
57회 1952 파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자케린 두 비에프 58회 1953 다보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텐리 올브라이트
59회 1954 오슬로 파일:독일 국기.svg 건디 부쉬 60회 1955 빈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텐리 올브라이트
61회 195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캐럴 하이스 62회 1957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캐럴 하이스
63회 1958 파리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캐럴 하이스 64회 1959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캐럴 하이스
65회 1960 밴쿠버 파일:미국 국기(1959-1960).svg 캐럴 하이스 66회 1961 프라하 취소사베나 548 비행기 추락사건
67회 1962 프라하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샤우켜 데이크스트라 68회 1963 코르티나담페초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샤우켜 데이크스트라
69회 1964 도르트문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샤우켜 데이크스트라 70회 1965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일:캐나다 국기.svg 페트라 버카
71회 1966 다보스 파일:미국 국기.svg 페기 플레밍 72회 1967 빈 파일:미국 국기.svg 페기 플레밍
73회 1968 제네바 파일:미국 국기.svg 페기 플레밍 74회 1969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일:동독 국기.svg 가브리엘 세이페르트
75회 1970 류블랴나 파일:동독 국기.svg 가브리엘 세이페르트 76회 1971 리옹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비아트릭스 슈바
77회 1972 캘거리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비아트릭스 슈바 78회 1973 브라티슬라바 파일:캐나다 국기.svg 카렌 마그누센
79회 1974 뮌헨 파일:동독 국기.svg 크리스틴 에라스 80회 1975 콜로라도 스프링스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다이앤 더레이우
81회 1976 예테보리 파일:미국 국기.svg 도로시 해밀 82회 1977 도쿄 파일:미국 국기.svg 린다 프래티아니
83회 1978 오타와 파일:동독 국기.svg 아네트 푀치 84회 1979 빈 파일:미국 국기.svg 린다 프래티아니
85회 1980 도르트문트 파일:동독 국기.svg 아네트 푀치 86회 1981 하트퍼드 파일:스위스 국기.svg 데니스 비엘만
87회 1982 코펜하겐 파일:미국 국기.svg 일레인 자약 88회 1983 헬싱키 파일:미국 국기.svg 로잘린 섬너스
89회 1984 오타와 파일:동독 국기.svg 카타리나 비트 90회 1985 도쿄 파일:동독 국기.svg 카타리나 비트
91회 1986 제네바 파일:미국 국기.svg 데비 토머스 92회 1987 신시내티 파일:동독 국기.svg 카타리나 비트
93회 1988 부다페스트 파일:동독 국기.svg 카타리나 비트 94회 1989 파리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이토 미도리
95회 1990 핼리팩스 파일:미국 국기.svg 질 트레나리 96회 1991 뮌헨 파일:미국 국기.svg 크리스티 야마구치
97회 1992 오클랜드 파일:미국 국기.svg 크리스티 야마구치 98회 1993 프라하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옥사나 바이울
99회 1994 치바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사토 유카 100회 1995 버밍엄 파일:중국 국기.svg 천루 }}}}}}}}}
101회(1996년)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101회 1996 에드먼턴 파일:미국 국기.svg 미셸 콴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102회 1997 로잔 파일:미국 국기.svg 타라 리핀스키
103회 1998 미니애폴리스 파일:미국 국기.svg 미셸 콴 104회 1999 헬싱키 파일:러시아 국기.svg 마리아 부티르스카야
105회 2000 니스 파일:미국 국기.svg 미셸 콴 106회 2001 밴쿠버 파일:미국 국기.svg 미셸 콴
107회 2002 나가노 파일:러시아 국기.svg 이리나 슬루츠카야 108회 2003 워싱턴 D.C. 파일:미국 국기.svg 미셸 콴
109회 2004 도르트문트 파일:일본 국기.svg 아라카와 시즈카 110회 2005 모스크바 파일:러시아 국기.svg 이리나 슬루츠카야
111회 2006 캘거리 파일:미국 국기.svg 키미 마이즈너 112회 2007 도쿄 파일:일본 국기.svg 안도 미키
113회 2008 예테보리 파일:일본 국기.svg 아사다 마오 114회 2009 로스앤젤레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연아
115회 2010 토리노 파일:일본 국기.svg 아사다 마오 116회 2011 모스크바 파일:일본 국기.svg 안도 미키
117회 2012 니스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카롤리나 코스트너 118회 2013 런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연아
119회 2014 사이타마 파일:일본 국기.svg 아사다 마오 120회 2015 상하이 파일:러시아 국기.svg 옐리자베타 툭타미셰바
121회 2016 보스턴 파일:러시아 국기.svg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122회 2017 헬싱키 파일:러시아 국기.svg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123회 2018 밀라노 파일:캐나다 국기.svg 케이틀린 오스먼드 124회 2019 사이타마 파일:러시아 국기.svg 알리나 자기토바
125회 2020 몬트리올 취소 COVID-19 126회 2021 스톡홀름 파일:FSR.svg 안나 셰르바코바
127회 2022 몽펠리에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모토 카오리 128회 2023 사이타마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모토 카오리
129회 2024 몬트리올 파일:일본 국기.svg 사카모토 카오리 130회 2025 보스턴 파일:국기.svg ?
131회 2026 프라하 파일:국기.svg ? 132회 ? 파일:국기.svg ? }}}}}}}}}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35deg, #0885C2 20%, #FBB132 20%, #FBB132 40%, #000 40%, #000 60%, #1C8B3C 60%, #1C8B3C 80%, #ED334E 80%); font-size: 1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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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ffffff)"
{{{#!wiki style="margin-top:-8px;margin-bottom:-8px;"
<table bordercolor=#ffffff,#1f2023>
파일:일본 빙상연맹.svg
전일본선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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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6회(1934-35년) ~ 50회(1978-79년)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6회 1934-35 도쿄 이나다 이츠코
7회 1935-36 도쿄 토고 타마코 8회 1936-37 도쿄 이나다 이츠코
9회 1937-38 도쿄 이나다 이츠코 10회 1938-39 도쿄 이나다 이츠코
11회 1939-40 도쿄 이나다 이츠코 12회 1940-41 도쿄 이나다 이츠코
13회 1941-42 취소 WWII 14회 1942-43 취소 WWII
15회 1943-44 취소 WWII 16회 1944-45 취소 WWII
17회 1945-46 취소 WWII 18회 1946-47 하치노헤 츠키오카 요시코
19회 1947-48 모리오카 니와 요시코 20회 1948-49 스와 취소
21회 1949-50 토마코마이 ? 22회 1950-51 닛코 이나다 이츠코
23회 1951-52 도쿄 ? 24회 1952-53 도쿄 츠키오카 요시코
25회 1953-54 오사카 야마시타 츠야코 26회 1954-55 도쿄 야마시타 츠야코
27회 1955-56 쿄토 우에노 준코 28회 1956-57 도쿄 우에노 준코
29회 1957-58 도쿄 우에노 준코 30회 1958-59 오사카 우에노 준코
31회 1959-60 도쿄 후쿠하라 미와 32회 1960-61 도쿄 우에노 준코
33회 1961-62 오사카 후쿠하라 미와 34회 1962-63 도쿄 후쿠하라 미와
35회 1963-64 도쿄 후쿠하라 미와 36회 1964-65 오사카 후쿠하라 미와
37회 1965-66 토마코마이 후쿠하라 미와 38회 1966-67 도쿄 오카와 쿠미코
39회 1967-68 도쿄 오카와 쿠미코 40회 1968-69 도쿄 야마시타 카즈미
41회 1969-70 오사카 야마시타 카즈미 42회 1970-71 도쿄 야마시타 카즈미
43회 1971-72 삿포로 야마시타 카즈미 44회 1972-73 오사카 와타나베 에미
45회 1973-74 교토 와타나베 에미 46회 1974-75 히로시마 와타나베 에미
47회 1975-76 도쿄 와타나베 에미 48회 1976-77 도쿄 와타나베 에미
49회 1977-78 교토 와타나베 에미 50회 1978-79 도쿄 와타나베 에미 }}}}}}}}}
51회(1979-80년)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51회 1979-80 도쿄 와타나베 에미 <colbgcolor=#3c3b6e,#141425><colcolor=#ffffff> 52회 1980-81 도쿄 코바야시 레이코
53회 1981-82 도쿄 요시다 마리코 54회 1982-83 도쿄 오자와 주리
55회 1983-84 도쿄 카토 마사코 56회 1984-85 도쿄 이토 미도리
57회 1985-86 도쿄 이토 미도리 58회 1986-87 도쿄 이토 미도리
59회 1987-88 도쿄 이토 미도리 60회 1988-89 도쿄 이토 미도리
61회 1989-90 기타큐슈 이토 미도리 62회 1990-91 요코하마 이토 미도리
63회 1991-92 고베 이토 미도리 64회 1992-93 나고야 사토 유카
65회 1993-94 요코하마 사토 유카 66회 1994-95 고베 요코야 하나에
67회 1995-96 요코하마 이토 미도리 68회 1996-97 나가노 스구리 후미에
69회 1997-98 고베 아라카와 시즈카 70회 1998-99 요코하마 아라카와 시즈카
71회 1999-00 후쿠오카 시나 치사토 72회 2000-01 나가노 스구리 후미에
73회 2001-02 오사카 스구리 후미에 74회 2002-03 교토 스구리 후미에
75회 2003-04 나가노 안도 미키 76회 2004-05 요코하마 안도 미키
77회 2005-06 도쿄 스구리 후미에 78회 2006-07 나고야 아사다 마오
79회 2007-08 카도마 아사다 마오 80회 2008-09 나가노 아사다 마오
81회 2009-10 카도마 아사다 마오 82회 2010-11 나가노 안도 미키
83회 2011-12 카도마 아사다 마오 84회 2012-13 삿포로 아사다 마오
85회 2013-14 사이타마 스즈키 아키코 86회 2014-15 나가노 미야하라 사토코
87회 2015-16 삿포로 미야하라 사토코 88회 2016-17 오사카 미야하라 사토코
89회 2017-18 도쿄 미야하라 사토코 90회 2018-19 오사카 사카모토 카오리
91회 2019-20 도쿄 키히라 리카 92회 2020-21 나가노 키히라 리카
93회 2021-22 사이타마 사카모토 카오리 94회 2022-23 카도마 사카모토 카오리
95회 2023-24 나가노 사카모토 카오리 96회 2024-25 ? }}}}}}}}}
피겨 스케이팅 내셔널 역대 챔피언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3c3b6e; font-size: 1em;"
}}}}}}}}}


<colbgcolor=#b00000><colcolor=#ffffff> 이토 미도리
[ruby(伊藤, ruby=いとう)] みどり | Midori Ito
파일:Itomidori.jpg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은메달 획득 당시
출생 1969년 8월 13일 ([age(1969-08-13)]세)
아이치현 나고야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45cm
종목 피겨 스케이팅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1979-80 시즌2.2. 1980-81 시즌2.3. 1981-82 시즌2.4. 1982-83 시즌2.5. 1983-84 시즌2.6. 1984-85 시즌2.7. 1985-86 시즌2.8. 1986-87 시즌2.9. 1987-88 시즌2.10. 1988-89 시즌2.11. 1989-90 시즌2.12. 1990-91 시즌2.13. 1991-92 시즌2.14. 1995-96 시즌
3. 은퇴 이후4. 평가5. 기록6. 수상 기록7. 기타

[clearfix]

1. 개요

일본의 前 여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에서 메달을 획득했다.

2. 선수 경력

나고야시 출신으로 5세 때부터 스케이팅을 시작한 미도리는 만 8세에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켰다. 이 타고난 점프력의 천재 소녀를 발굴해낸 게 우리에겐 아사다 마오 前 코치로 유명한 야마다 마치코다.[1] 야마다는 이 어린 소녀의 재능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미도리는 겨우 10살에 부모의 이혼이라는 충격을 겪었고, 미도리의 친모는 밤 늦게까지 각종 잡일을 하면서 미도리가 피겨 스케이팅을 계속 하게 해주려 노력했으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2] 그러자 야마다는 즉시 미도리를 자신의 집에서 기거하게 했다.

2.1. 1979-80 시즌

1979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했다.

2.2. 1980-81 시즌

만 11세 나이로 출전한 1981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이례적으로 트리플 러츠-더블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켜 전 세계 빙상계를 들썩였다. 그런데 점프를 성공시키고도 컴펄서리[3]에서 20위를 받는 데 그쳐 쇼트 7위, 프리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종합 8위로 아쉬운 데뷔전을 치러야 했다. 1980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시니어로 첫 참가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

2.3. 1981-82 시즌

1982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쇼트와 프리에서 1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컴펄서리에서 19위를 하는 바람에 종합 6위에 그쳤다.

2.4. 1982-83 시즌

1982년 가을에 오른쪽 발목 골절 부상을 당하여 시즌을 결장했다.

2.5. 1983-84 시즌

1984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쇼트와 프리가 1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컴펄서리가 13위에 최종 동메달을 획득했다. 지금이야 주니어 여자 싱글에서도 트리플 5종(토, 살코, 룹, 플립, 러츠)[4]은 물론 주니어 시절 쿼드러플 점프도 뛴 선수[5]가 있다지만, 1980년대 초반엔 트리플 5종 점퍼를 모두 구사하는 여자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랬으니 여자 싱글, 그것도 주니어에서 발육 조건이 딱히 우세한 것도 아니고 120cm를 넘을랑말랑한[6] 소녀가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점프력은 이전까지 보지 못한 큰 충격이었다.

프라하 스케이트에서 우승하고 챌린지 컵에서 은메달을 땄다. 1983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 1983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2.6. 1984-85 시즌

1984 NHK 트로피에서는 트리플 악셀을 시도해 실패했지만 우승하였다. 갈라에서는 트리플 악셀을 성공했다. 당시 15살밖에 안 된 소녀가 남자 선수도 하기 힘든 걸 해낸 거다. 데이비드 젠킨스가 트리플 악셀 점프를 수행하는 동영상이 있긴 했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1978년에 등장했다. 또한 브라이언 오서가 현역 시절에 '미스터 트리플 악셀'로 불리기 시작한 때가 1985년이다. 이 때 쿼드러플 점프 연습을 하다가 발목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데, 커트 브라우닝이 처음으로 쿼드러플 토룹을 성공시킨 게 1988 세계선수권인 걸 고려하면 말 그대로 남자보다 앞서가는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어진 1984 스케이트 캐나다와 1984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우승하였다. 1984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해 1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매번 나가는 대회마다 그놈의 컴펄서리 때문에 주니어 시절 내내 국제 대회에서 포디움을 밟아보질 못했다. 하지만 차츰 피겨 스케이팅 호사가들 사이에서 ' 일본의 작은 소녀 선수가 점프력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라' 란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여자 싱글 3-3 컴비네이션 점프는 주니어와 시니어를 막론하고 이토 미도리가 최초로 시도해서 최초로 성공시켰다. 이때 당시 붙은 별명이 벼룩처럼 잘 뛴다고 해서 'Jumping Flea'였다.[7]

2.7. 1985-86 시즌

1985년 쿼드러플 점프를 연습하다가 발목 부상을 당했다. 구채점제 시절 안도 미키도 주니어 때 쿼드러플 점프를 뛰었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토 미도리가 얼마나 파워풀한 점퍼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5 NHK 트로피와 1985 전일본선수권에서는 모두 우승했다. 1986 세계선수권에서는 11위를 기록했다.

2.8. 1986-87 시즌

1986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을, 1986 전일본선수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7 세계선수권에서는 8위에 올랐다.

2.9. 1987-88 시즌

1987 NHK 트로피에서 은메달, 1987 Bofrost Cup on Ice에서 우승했다. 1987 전일본선수권에서도 우승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서 여자 싱글의 카르멘 전쟁(Battle of the Carmens), 남자 싱글의 브라이언 전쟁(Battle of the Brians), 페어의 G&G로 요약 가능한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그 자체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이지만 이토 미도리에게도 화려한 올림픽 데뷔전이었다.[8] 컴펄서리에서 10위를 받아서 이미 메달은 저 멀리 물 건너 갔다. 하지만 작은 체구의 동양인 소녀에게서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높이가 여타 다른 여자들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남자 싱글 수준의 체공 높이, 프리 로테이션[9]이 걸릴래야 걸릴 수가 없는 회전 스피드에, 안 그래도 카르멘 전쟁과 브라이언 전쟁으로 피겨 스케이팅에 전 세계인의 관심이 모아져 있는 와중에 미도리는 고유의 점프력, 회전 스피드를 전 세계 매스컴이 보는 앞에서 뽐냈다.[10] 미도리는 프리에서 3위, 종합 5위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1988 세계선수권에서는 6위에 올랐다.

2.10. 1988-89 시즌

1988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 1988 NHK 트로피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11] 1988 전일본선수권에서도 우승했다. 1989 세계선수권에서는 여자 싱글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우승했다. 프리 프로그램 초반에 트리플 악셀, 후반에 3-3 콤비네이션 (트리플 토룹 - 트리플 토룹)을 구사했다. 이 어마무시한 난이도로 9명의 심판중 무려 5명에게서 기술점수 6.0점을 받은 기념비적인 프로그램이다. 동영상을 보면,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하는 동안에 기술점수 6.0점이 5번 나온다.

2.11. 1989-90 시즌

1989 NHK 트로피와 1989 전일본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1990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해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 4위이자 일명 '컴펄서리의 여왕' 질 트레너리가 우승하고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그런데 후술할 논란 때문에 가는 길이 썩 개운치는 못했다. 논란의 핵심은 '심사위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질 트레나리의 컴펄서리가 모든 요소가 완벽했던 미도리에 비해 그리 뛰어났냐'였다. 미도리가 컴펄서리에서 10위를 하고 나머지 부문은 모조리 1위를 했는데[12] '질 트레나리는 중계도 안 하는 재미 없는 컴펄서리에서만 이토 미도리를 이겼을 뿐 모든 경기에서 이토 미도리에게 완패했다'에서부터 '우승 자격이 없다'라는 반응이 터져나왔다. 질 트레너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토 미도리는 단지 점퍼(Jumper)에 불과하다', '컴펄서리 10위한테 우승을 줄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반응이었고 이 논란이 점점 커져 결국 ISU에서 싱글 피겨 스케이팅에서의 컴펄서리의 존폐를 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질 트레너리가 이토 미도리의 금메달을 강탈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2.12. 1990-91 시즌

1990 NHK 트로피에서 금메달, 1990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은메달을 따고 1990 전일본선수권에서 우승했다.

이 시즌부터 싱글 부문에 컴펄서리가 삭제되자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여자 싱글은 이토 미도리의 독주 체제가 유지될 거라 예상했다. 근데 이번엔 예술성 문제가 발목을 붙잡았다. 정상급의 점프력과 10위권 안에도 못 끼는 컴펄서리 사이의 괴리감이 심해서 그렇지 연기력이나 다소 어색한 의상 선정[13],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단 평은 쭉 있어 왔다. 그런데 컴펄서리가 삭제된 이후 미국 기계체조 발레 유망주들이 싱글 스케이터로 전향하고, 어린 나이에 컴펄서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꿈을 접었던 빙상 꿈나무들[14], 여기에 싱글보다 컴펄서리가 비교적 먼저 폐지된 페어 스케이팅 꿈나무들도 뛰어들었다. 페어와 싱글을 병행하다가 싱글만 집중한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크리스티 야마구치다. 경기중 큰 실수도 있었고[15] 위의 이유로 1991 세계선수권에서는 미국 선수들에게 밀려 4위에 머물렀다.[16]

2.13. 1991-92 시즌

1991 NHK 트로피, 1991 트로피 랄리크, 1991 전일본선수권에서 모두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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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카르멘 전쟁 이후 다소 침체되나 했던 피겨 스케이팅 계에 일본인 vs 일본계 미국인[17]이란 라이벌 구도는 되려 일본에서 김연아 vs 아사다 마오 시절보다 훨씬 초월하는 규모로 피겨 스케이팅 붐을 일으켰다.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는 쇼트 경기 직전 워밍업을 하던 도중 충돌 여파의 탓인지 4위로 부진했다. 하지만, 프리에서 트리플 악셀 점프를 성공시키며, 최종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는 출전하지 않고 은퇴 후 바로 프로 선수로 전향했다.

2.14. 1995-96 시즌

이 시즌 복귀하여 1995 전일본선수권에서 우승하고 1996 세계선수권에서 7위에 오른 후 완전히 은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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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복귀 후 프리 스케이팅 경기[18]

3. 은퇴 이후

프로 스케이터로 활동하며 World Professionals 등에 참가했다. 말이 프로 스케이터지 현역 때와 다를 게 없었다.[19] 1995 NHK 트로피 갈라에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하였고, 오페라 투란도트 OST인 네순도르마를 선보였다. 갈라에서 3Lz, 3A, 3T-3T라는 비범한 구성,[20] 여자 선수 중에는 3A+3T를 수행한 기록이 영상으로 남아 있는 선수이며[21],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참가했으면 우승하고도 남았을 텐데 참가하지 않은 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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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성화 점화
모국에서 개최된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최종 주자로 성화를 점화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40대이던 2010년대에 더블 악셀이 가능했다. 2023년 2024년에는 독일에서 개최된 성인 취미 피겨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했다.[22]

4. 평가

파일:미도리트리플악셀.gif
파일:midoriito3Lz.gif
3A 3Lz
그런데 사실 한국과 일본이 전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아주 예전(1980년대)부터 남자 싱글에선 쿼드러플까진 몰라도 트리플 악셀조차 없는 선수들은 탑싱 취급을 못 받을 정도로 트리플 악셀이 정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세계선수권 영상을 보면 탑싱은 물론이고 중위권 선수들만 되어도 다들 트악은 당연하게 시도한다. 그러나 남자 싱글과 여자 싱글에서 트리플 악셀의 위상은 당연히 다르다. 이토 미도리 이후 여자 싱글에서도 트리플 악셀러들이 드물게 등장했으나 그 20년 동안 제대로 된 트리플 악셀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이토 미도리가 유일하다. 위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 리그베다 위키 피겨 스케이팅 항목 中
토냐 하딩부터 나카노 유카리, 류드밀라 넬리디나, 아사다 마오, 키히라 리카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점프력은 지금도 없다. 비교하기도 그런 게 일단 체공 높이 자체가 다르다.

남녀를 불문하고 세계 피겨 무대에서 정상권에 올랐던 최초의 아시아인으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사이 아시아 선수들이 세계 피겨 스케이팅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데 기초를 닦았다. 북미에서는 '우아함'과 '교감'을 강조했고, 유럽에서는 많은 운동량과 스피드를 내세웠고, 팬들이 일본의 경우 '어딘지 모르게 2% 부족한 포스트 이토 미도리'로 보였다. 실제로 이토 미도리 이후 사토 유카, 스구리 후미에, 온다 요시에, 안도 미키, 아사다 마오 등 수많은 여자 싱글 스케이터들이 나타났지만 아라카와 시즈카[23] 스즈키 아키코[24]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예술성 부족 논란에 시달렸다. 이를 두고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 팬들과 스포츠 언론들이 그녀를 평할 때마다 일본 피겨 스케이팅의 빛[25]이자 그림자[26]라고 불렀다.

5. 기록

6. 수상 기록

올림픽
은메달 1992 알베르빌 여자 싱글
세계선수권
금메달 1989 파리 여자 싱글
은메달 1990 핼리팩스 여자 싱글
주니어 세계선수권
동메달 1984 삿포로 여자 싱글

7. 기타


[1] 안타깝게도 야마다 코치의 제자들은 플러츠를 뛰는 선수들이 많다. [2] 피겨 스케이팅은 돈이 매우 많이 든다. 링크 대관료, 코치비, 의상 제작과 메이크업 비용, 만약 코치가 외국인이면 통역사까지 써야 한다. 문제는 피겨 스케이팅은 상금이 적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연아도 주니어 시절 때는 국내에서 제대로 된 훈련을 할 만한 아이스링크가 없어 일본에서 연습과 스케이팅 수리까지 했어야 했고, 대회에서 얻은 상금의 대부분을 코치의 월급과 다음 시즌의 프로그램 준비 비용으로 사용했다. [3] 피겨 스케이팅 중 도형 그리기 종목이며, 전체 성적의 30%(팩터 0.6)을 이루고 1984년 당시는 3개 과제에 각 4.0 만점으로 총 12점 만점으로 이루어졌다. 문제는 관중들이 보면 뭐가 뭔지를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방송사에서도 그냥 중계를 안 했다. 컴펄서리 심사 후 쇼트 프로그램이 전체의 20%(팩터 0.4), 프리 종목이 전체의 50%(팩터 1.0)이며 최종 순위는 각 부문별 상대 순위와 팩터의 곱을 합한 숫자가 적은 사람부터 1, 2, 3위를 결정했던 게 컴펄서리가 있던 시절 채점제다. TV 송출이 시작됐을 적만 해도 당시 한국 방송계는 피겨 스케이팅 자체에 아예 문외한이었던지라, 주로 쇼트고 프리고 싸잡아서 피겨 스케이팅 규정 종목이라고 번역하였다. [4] 우리나라에서도 김해진이 시니어 데뷔 전에 트리플 5종 점프를 모두 소화해낸 바가 있다. [5] 안도 미키,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카밀라 발리예바, 알리사 리우. [6] 성장기였던 점을 감안해야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토 미도리의 최종 프로필상의 키는 145cm라는 게 함정이었다. [7] 1991 트로피 랄리크,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연습에서는 트리플 악셀-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켰다. [8] 앞서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도 출전 자격이 있었지만, 1983 전일본선수권에서 컴펄서리를 망해 컴펄서리 10위로 출발해서 쇼트마저 점프를 넘어져 5위, 프리 1위로 2위를 해서 출전하지 못했다. [9] 몸이나 발을 틀어서 반 바퀴 이상 회전을 넣고 점프하는 것이며, 이토 미도리 이전의 여자 선수들에겐 그것이 정석이었다. [10] 당시 프리 스케이팅 점프 구성에는 더블 악셀+오일러+트리플 살코, 트리플 토룹+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 점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때 3-3 컴비네이션은 남자 선수들도 상위권 선수만 구상하는 고난이도 점프였다. 게다가 오리지날 프로그램(쇼트 프로그램)에서는 무려 더블 룹 + 트리플 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올림픽에서 연결 트리플 룹 점프를 성공한 최초의 여자 선수가 되었다. [11] 사실 국제 대회에서의 트리플 악셀은 이때 처음 랜딩에 성공했으나, 당시의 NHK 트로피는 일반 국제 대회여서 공인 대회로 분류되지 않아 공식으로는 기록되지 않았다. [12] 특히나 기술성과 관련된 부분에 있어선 더욱 중요하다. [13] 안도 미키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비도 아닌 레인코트 비스무리한 걸 입었는데, "태풍에 휘날리는 비닐 우산을 보는 거 같다"는 혹평을 받았다. [14] 정말 아주 쉽게 간단히 설명해 주자면, 심사위원들이 주제를 주고 그 주제에 맞게 빙상 위에다 도형이나 선을 그리면 된다. [15] 웜업 때는 다른 선수와 동선이 겹친 탓에 크게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고, 쇼트 경기에서 트리플 러츠- 더블 토룹을 뛰다 펜스와 점프 비거리를 제대로 계산하지 못해 카메라 촬영을 위해 펜스가 아주 낮게 설치된 쪽으로 돌진해버려 그대로 펜스를 넘어버렸다. [16] 만약 1990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했다면 미국의 출전권이 2장으로 줄어 본 대회에서 3위를 했을 것이다. [17] 일본에서는 일본계 미국인 크리스티 야마구치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으나, 크리스티는 "나는 미국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07년 무렵 일본계 미국인인 14세 소녀 미라이 나가수가 주니어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자, 일본은 야마구치에게 했던 것처럼 미라이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다. 양친 모두 일본인( 미국 영주권자)이고 출생지는 미국이라 복수국적(미국, 일본)이었던 미라이는 크리스티처럼 선을 딱 긋지는 않고 일본에도 친근한 듯 보였지만, 일본의 국적법에 의해 1가지 국적만을 택해야 하는 만 22세가 되자 2가지 국적 중에서 미국 국적을 선택했다. [18] 이 의상은 나중에 아사다 마오가 물려 입었다. [19] 오히려 더 기량이 증가한 것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로 경기에서 여자 선수가 3A, 3Lz, 3T-3T로 구성을 넣는 것은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20] 굳이 설명을 덧붙이자면, 여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에서 모든 점프를 트리플로 구성한 것은 옐리자베타 툭타미셰바가 최초였다. 그런데 정식 경기도 아니고 20년도 더 전에 갈라에서 이런 구성을 보인다는 건 그냥 불가사의나 마찬가지이다. 이토 미도리는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도 3T-3T를 선보인 적이 있고, 1989 세계선수권에서는 즉석에서 3A를 선보일 것을 요청 받기도 했다. [21] 원래는 유일했지만 2017-18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키히라 리카가 3A+3T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최초로 공인 기록으로 인정 받았다. [22] 영상에 적힌 댓글을 보면 비록 현역시절 처럼 날렵하거나 기술이 화려하진 않지만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며 호평 일색이다. 또한 피겨 스케이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이 들어서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며 응원하는 댓글도 상당수다. [23] 이쪽은 김연아 아사다 마오 같은 스타성보단 말 그대로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30살 노장의 뒤늦은 투혼 같은 느낌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24] 은퇴 후 안무가로 활동할 정도로 피겨 스케이팅 곡 해석 능력이나 스텝 능력, 음악을 타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스텝 시퀀스 규정이 개정되기 이전 레벨 4를 받아본 몇 안 되는 선수였다. 외국 해설진들에게도 일본 여자 싱글에서 예외적으로 음악과 잘 어울리는 스케이팅을 한다는 평을 들었다. 당장 일본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아사다 마오와 비교해봐도 안무를 비롯한 전체적인 스케이팅이 세련되고 깔끔하다. 과거 점프만 강조했던 일본 피겨 스케이팅에서 예술적으로 스케이팅을 하는 정말 레어한 선수였다. [25]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한 여자 싱글 선수다. [26] 이후 일본 모든 여자 싱글이 되지도 않는 트리플 악셀을 해야만 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실제로 나카노 유카리, 아사다 마오, 안도 미키(쿼드러플 살코), 키히라 리카가 기술 하나에 프로그램 전체를 잡아먹혔다. 그러나 키히라 리카는 그나마 나은 수준의 점프를 보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27] 지금도 프리로테이션을 하지 않고 공중에서 회전을 다 채워 착지하는 선수는 없다. [28] 주니어 시절 그녀를 담당했던 재활의학과 의사의 말로는, 성인 남자도 진통제를 링거째 투여해도 고통에 몸부림 칠 염좌, 골절, 멍이 온몸에 있었다고. "이 지경이 됐는데도 왜 병원에 안 왔냐"고 하자, '몸이 크는 중이라 그래서 살이 쪘겠구나 했다'고. 그리고 나서 댄 2번째 이유가 "연습할 시간이 아까워서"라고 하였다. [29] 다리를 X자로 가깝게 꼬면서 회전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30] 원래는 3Lz-3T로 계획했으나 실전에서는 변경하였다. [31] 사실 안도 미키의 4회전 살코가 다운 그레이드 수준의 회전 수를 보였기에 제대로 채점한다면 트리플 살코로 보는 것이 맞다. 결국 점수가 나오고 "아 역시나 4회전 살코를 뛰었네요."라고 발언한 것을 보면, 4회전 살코인 줄 알았으나 뭔가 부족한 걸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프로토콜에는 4S< 다운그레이드 판정을 받았다. [32] 유투브에 보면 "이토 미도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동영상이 있는데, 본인의 심정을 억지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해석하면 카타리나 비트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에서 2종 트리플만을 뛰었는데, 본인은 5종 7트리플을 뛰었는데 5위로 그쳐서 트리플 악셀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토 미도리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면서 억지로 한 말이라는 의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