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長坤(1474~?). 조선의 문신.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 시호는 정도(貞度)이다.성종대에 임용되어 연산군대를 거쳐 중종대까지 관직 생활을 하였다.
2. 생애
1492년 4월 1일 무재가 있는 장수를 뽑는 일을 논하던 중에 유자광이 19살 나이에 강궁(強弓)을 잘 당기고 용모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며 이장곤을 천거하여 성종 앞에서 직접 활을 당기고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1495년 생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504년 이극균에게 사사로운 일로 천거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의심을 받아 옥사를 겪고 고문을 당했다. 이장곤은 활쏘기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해서 천거를 받았다고 변명했지만 더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이후 남해로 유배되었지만 탈출하여 행적을 감추었는데 나중에 중종반정 때의 기록에 보면 연산군이 이장곤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해서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이장곤이 도망치자 연산군은 이장곤의 형인 이장길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잡아오도록 명령했다. 만약 잡아올 경우 남해 현감을 벌주고 이장곤의 흉악함을 비난하는 어제시를 내리며 이장곤을 잡아들이는 자는 죄인이라도 죄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1] 이장곤은 모습을 감추었지만 무용과 계략이 뛰어난 사람이라 잡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장곤이 무리를 모아 거병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는데 이런 소문이 중종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축출당하자 다시 나타나서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 내직으로는 예조좌랑, 동부승지, 병조참의, 이조참판, 예조참판,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 우참찬, 우찬성, 좌찬성, 판돈녕부사, 외직으로는 평안도 절도사, 평안도 관찰사,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예조참판 때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조광조 등의 사림과 가깝게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광조를 심문할 때 심문관으로 참석하였으나 이후 조광조를 사사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심문할 당시 조광조는 크게 배신감을 가졌는지 술에 취해서는 "희강(希剛, 이장곤의 자) 이 사람아!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못난 사람 같으니."라며 반말을 하며 대청에 오르려 한 통에 김전 등이 사람을 시켜 붙잡게 했다고 한다.[2]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락한 뒤인 1520년에 병을 핑계로 체직해 은퇴했다.
사망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중종실록 28년(1533년) 12월 15일에 이장곤이 반신 불수라는 언급이 나오고, 33년(1538년) 4월 12일 기사에 직첩을 환수당한 이후 사망한 사람들에게 직첩을 돌려주는 명단에 언급되어, 이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3. 대중매체에서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는 '이교리(李校理)'로 언급된다. 연산군에게 간언을 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자 함경도로 도망친다. 그 곳에서 백정 양주삼(현인 양주팔의 형)의 딸 봉단이와 결혼했으며 양반 신분을 숨기고 사느라 봉변을 엄청나게 당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벼슬을 얻게 되었지만 천한 봉단이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함께 살다가 늙어죽는다.
-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배우 박상규가 연기했다. 조광조의 친구로 나오는데 제38회에서 조광조를 잡아가지만 사실 이는 중종의 지엄한 어명에 의해서 한 것이다. 제39회에서는 조광조가 국문을 받을 때 이장곤은 존칭으로 대했다. 이후로 계속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려고 했으며 유배형에 처하게 하려는 신료들을 말렸다. 그러다가 조광조의 사사 명령이 내려졌을 때 좌의정 안당과 함께 파직되었다.
4. 기타
영조 때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일원으로 여겨져서 시호를 받았다. 경남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에 그의 묘지가 있고, 금박을 씌운 '이장곤 선생 교지', 비석인 '금헌 이장곤 묘도비', 이장곤의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금호재(琴湖齋)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청구야담에 따르면 이장곤은 연산군에게 도망쳤을 때에 유기장(柳器匠)[3]을 하는 양수척( 백정)의 무리 사이에 숨었다고 한다. 유기장의 딸과 만나[4] 그 집의 사위가 되었는데, 양반 노릇하던 사람이라 유기 만드는 법을 몰라 매일 낮잠만 자고 신분이 들통나 잡혀갈까봐 밖에도 잘 안 나가는 니트+ 히키코모리 노릇을 했다. #
당연히 사지 멀쩡한 사위가 니트질 하고 누워만 있으니 장인 장모는 화를 내며 밥을 반그릇만 줄 정도로 타박했다.
몇년간 이렇게 괄시받으며 지내던 이장곤은 연산군이 몰락하자 아는 사이인 현령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복귀했다. 다음날 현령이 백정들 집에 행차하자 장인 장모는 깜짝 놀랐고 이장곤은 벼슬을 얻어 복귀했다. 그리고 힘든 때를 함께 지낸 아내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백정의 딸이 단숨에 고위 양반의 처로 신분상승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선 그 여인의 친척 조카가 바로 임꺽정이었다고 서술한다. 임꺽정(소설) 항목 참조.
맹꽁이 서당에서는 위의 청구야담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덧붙여 발이 컸다고 묘사되어 있다.
한편 후대 인물인 교산 허균은 자신의 저서에서 권근, 김종직, 남효온 등을 비판하면서 이장곤도 기묘사화에 참여해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데에 일조하고 평생을 시류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라며 혹평한 적이 있다.
[1]
야사에서는 이장곤이 도주 중 지쳐서 잠이 들었고 마침 추격한 군사들이 이를 목격했으나 이장곤은 평소 힘이 세고 체구가 건장했으며 특히 발이 컸다. 이를 본 군졸들이
선비가 저렇게 발이 클 리가 없으니
도둑에 불과할 것이라 여겨 지나쳤고 이장곤은
구사일생했다는 얘기.
[2]
이 일로 김전은 문책도 당했으나 중종이 문제삼지 말라고 해서 넘어갔다.
[3]
버들고리를 엮어 도구를 만드는 사람. 다른 이여기에는 거골장,즉 소 돼지를 잡는 백정의 사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여기에 야담에 흔히 나오는 '물을 급하게 마실까봐 버들잎을 띄워줬다는' 류의 이야기가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