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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선수 경력/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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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2005 시즌3. 2006 시즌4. 2007 시즌5. 2008 시즌6. 2009 시즌7. 2010 시즌8. 2011 시즌9. 2012 시즌10. 2013 시즌11. 1차 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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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용규 KIA 타이거즈 시절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2005 시즌

이용규는 2004 시즌 종료 후 자신의 야구 인생을 전환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바로 KIA 타이거즈에 트레이드[1]된 것이다. 사실 이용규가 트레이드 카드로 들어갔던 이 트레이드의 중점은 당시만 해도 대박 FA 계약이었던 4년 18억원을 따낸 후 그야말로 먹튀가 되어 버린 홍현우를 고향 팀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었다.[2] LG는 홍현우를 보내는 대가로 활용할 만한 벤치 멤버를 받기를 원했고, KIA는 투수 소소경 이원식을 보내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선수층이 얇았던 외야수 요원의 추가를 LG에 요청하여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3]

트레이드 당시 LG 트윈스 이대형, 오태근, 이용규 중 1명을 제시했고 그 중 KIA 타이거즈 프런트에서 이용규를 선택해서 뽑혀간 것이다.[4] 이순철 감독은 당시에도 이용규 말 안듣는 문제아였고[5] 이대형은 탐탁지 못했었고 기회도 상당히 적게 준 편이다.

LG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까일만큼 당황스럽고, KIA 입장에서는 정말로 행운스럽게도, 프로 세계의 냉혹함을 몸으로 느낀 이용규는 광주에서 각성하게 된다.

2005 시즌 초 이용규는 부상, 부진에 허덕이던 심재학을 대신해 우익수 9번타자로 출장하면서 장타를 아예 포기하고 빠른 발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밀어치기와 컨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을 연마함으로써 시즌 후반에는 2번타자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다. 여러 모로 해태 시절까지 포함하여 구단 역사상 첫 꼴찌를 기록한 2005년에 윤석민과 함께 KIA의 유이한 수확이었다.

3. 2006 시즌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06)

방망이를 짧게 잡은 것이 효과를 보면서 최다 안타 1위를 수상하며 골든글러브도 탔고, 도하 아시안 게임을 통해 국가대표 A팀에 데뷔하게 되었다.

4. 2007 시즌

발목에 있던 뼛조각이 돌아다니는 등 몸 상태가 좋지않아 살짝 부진했다.

5. 2008 시즌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로 나서며 4할대 타율로 그야말로 맹활약, 금메달을 따서 병역 혜택도 받았다. 마지막 아웃 세레모니가 워낙 컸지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일본과의 준결승전 결승 득점의 주인공이다.

2008년에는 그야말로 KIA 타선의 모든 것이었다. 2번부터 9번까지 모두 무안타로 끝날때도 이용규 만큼은 안타를 쳤다. 소위 용규와 여덟난장이, 용큐 타이거즈 시절. 사실 이용규- 김원섭- 이종범/ 장성호로 구성된 테이블 세터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저 최희섭을 중심으로 한 클린업 트리오가... 이 시기에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이용규가 안타를 치고 김원섭이 번트를 대고 이종범 또는 장성호 볼넷을 골라내고 최희섭 병살타 치고 KIA 팬은 소주를 먹는다.

6. 2009 시즌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에서 일본에 패한 후, 수상식에서 혼자만 메달(은메달)을 걸고 있지 않은 모습이 매스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유인 즉, ' 일본이 웃고 기뻐하는 모습이 불쾌했다'고. 유독 한일전에서 헬멧이 깨지는 등 수난을 겪은 본인으로서는 분하기도 했을 것이고, 상대가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이해한다거나 멋지다는 의견과, 반대로 한 국가의 대표이자 프로선수로서의 자세는 성숙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양분되었다. 여담으로 그 은메달은 가방 속에 처박아 둔 듯. 다만 당시 야구의 인기가 치솟고 있는 상태였고 그만의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 계속된 국가대표무대에서의 파이팅 있는 모습, 콧수염이 특징인 잘생긴 외모 덕분에 많은 어린팬과 여성팬을 보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4월 7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SK와의 경기 도중 4회 초 1사 1루 상황에서 정근우의 큼직한 타구를 잡으려 펜스 앞에서 몸을 날렸다가 오른 발목이 펜스에 부딪혔고, 이후 검사에서 오른쪽 복사뼈 골절로 판정받았다.[6] 핀 고정술을 받은 탓에 재활까지 3개월이 걸려 전반기는 거의 출장하지 못했다.[7] 7월 중순에서야 2군 복귀 기사가 겨우 떴었고, 이후 7월 18일 한화전에서야 겨우 대타로 1군 복귀를 했다. 마침 빈자리를 메꾸고 있던 김원섭이 만성간염으로 병원 입원을 해 있었는데다 도중에 모친상이 겹치면서 피로가 누적돼 지속적인 치료와 기술훈련이 필요했던 차에 바통터치를 절묘한 타이밍에 하기는 했었다.

이후 7~8월 동안은 3할대의 타율을 유지하며 도루도 7개를 하는 등 좋았던 모습을 계속 찾아가는가 싶었지만, 부상의 여파가 있긴 했는지 9월 들어 타격 싸이클이 계속 안좋아지며 KIA 시절 중 커리어로우로 시즌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잉여라고 '잉용규', 허세만 부린다고 '허세용규' 등의 별명이 생겼다. 그래도 팀은 극적으로 정규시즌 1위를 해내며 한국시리즈를 직행했고,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는 4차전까지는 2할의 타율로 부진했으나 고효준에게서 두 번이나 볼넷을 얻어내는 등 출루율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5차전에서 마치 김재박 그것을 연상시키는 개구리 번트를 성공시켜 선취점을 얻어내고 안타도 치는 등 활약을 했다. 이날 이용규도 번트를 성공시킨 후의 발의 위치가 거의 오른손타자 타석까지 침범할 정도로 움직임이 커 야구 규칙상 타자가 한발이라도 배터스박스를 벗어나면 부정 타격이 되기 때문에 부정 타격 논란이 일었다. 지난 96년 박재홍(당시 현대)이 배터스박스를 자꾸 벗어나는 타격으로 신인왕을 차지한 뒤 생긴 규정이다.

그러나 잠실구장에 나와있던 조종규 KBO 심판위원장은 "양발이 공중에 뜬 채 번트가 이뤄졌지만 그건 본래 관계 없다. 만약 처음부터 이용규가 한 발로 홈플레이트 근처를 밟은 뒤 번트를 댔다면 그건 아웃시킬 수도 있다. 이번 이용규의 번트는 전혀 문제 없다"고 밝혔다. 또한 실제로 메이저리그와 한국프로야구 모두 타자들이 희생번트를 댈 때 한쪽 발이 배터스박스를 벗어나는 경우는 다반사다. 100% 원칙을 적용하면 모두 룰 위반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게임의 흐름'에 문제가 없을 경우 그대로 진행시키는 게 관례라고 조 위원장은 설명했다. 이용규의 사례는 그런 관례적인 문제를 적용시킬 필요도 없는 번트였다는 게 최종 결론이 났으며 그 김성근 감독도 이용규의 번트에 대해서 항의하지 않았다. #

여담으로 이날 김성근 감독은 김상현의 슬라이딩에 대해 항의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선수단을 철수시켜 퇴장, 한국시리즈 감독 퇴장 1호가 되었다. 야신 김성근 '퇴장도 불사한' 보이콧, 왜? 정작 그 경기 9회에서 박정권은 더한 슬라이딩을 했으나 안치홍은 무리 없이 송구해 병살 플레이를 만들어냈다.

6차전에서는 안타 치고 도루도 했으나 타석에 득점권 타율 5할인 최희섭을 두고 3루 도루를 시도하다 횡사당해 댓글 지분을 차지했으며 카툰에서도 다시 한 번 까였다. 7차전에서는 조동화의 첫 타석의 타구를 잠실구장을 한참 달려 잡아내는 호수비를 보여주었으며 박재상의 타구도 정확히 홈으로 송구해 정상호를 잡아냈으나 임채섭 주심의 오심으로 한 점을 내주며 이 어시스트는 빛이 바랬다.

그러나 정작 공격에서는 정말 중요한 고비마다 폭삼과 플라이, 땅볼 등으로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날 이용규는 5회말 2사 만루에서 이승호에게 삼구삼진, 7회말 무사 1,3루에서 정우람 상대로 유격수 땅볼, 8회말 2사 1,2루에서 고효준을 상대로 1루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다행히 KIA가 우승했지만 졌다면 영구까임권을 얻었을 듯.

7. 2010 시즌

황병일 코치의 지도 하에 타격 폼을 수정했다. 그런데 그 타격폼이 맞지 않았는지 밀어쳐야 할 공을 어퍼스윙하는 등 4월 한 달 동안 1할대를 넘나드는 처참한 타격을 보여주다가 원래 타격 폼으로 복귀, 그 이후 타격이 확실히 나아졌다.

7월 한달 동안 그동안 못 친걸 분풀이라도 하듯 무려 4할 5푼이 넘는 고타율을 기록하며 확실히 밥상은 잘 차렸다. 7월 15일에는 친정인 LG를 상대로 홈스틸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안영명 조인성에게 역전 쓰리런 홈런을 맞으며 묻혔다.

7월 29일 사직 롯데전에서는 4년 만에 홈런을 때렸는데, 그것도 3점 홈런과 만루 홈런을 한 회에서 쳤다! 덧붙여 이 3회초에 채종범이 2점 홈런, 최희섭이 솔로 홈런을 쏘아올리면서 1이닝 팀 사이클링 홈런이란 엄청난 기록이 나와버렸다. 참고로 개인 1이닝 7타점은 KBO 신기록. 이걸 경신하려면 한만두가 나와야 한다.

8월 1일 문학 SK전에서는 이종범의 솔로 홈런 이후 백투백 홈런을 치며 시즌 3호 홈런을 작렬시켰다.

8월 29일 기준으로 타율 .308 3홈런 48타점 25도루 BB/K 1.39를 기록하며 매우 준수한 톱 타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최다안타 4위와 BB/K 2위를 달리고 있으며 타점은 이로써 개인 커리어 하이. 이대로만 간다면 타율 역시 개인 커리어하이를 찍을 가능성이 높다. 시즌 초반 타율 1할대에서 허덕이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몰아치기.

8월 29일 넥센전에서 박준수와 20구[8] 까지 가는 대접전을 펼쳤다. 플라이 아웃으로 끝났지만 볼-스트라이크-볼-파울-파울-파울-파울...-파울(14구)-볼-파울-파울-...파울-우익수 앞 뜬공(20구). 굉장한 명승부였다. 이 경기 이후 20큐라는 별명도 얻었다. 여담으로 이때 영상을 보면 이용규를 20구째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한 박준수는 얼마나 기가 빨렸는지 "팔 빠져..."라고 말하며 씩 웃는다. 결국 송신영과 바로 교체.

팬들도 흥분했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훈련기간에 불미스러운 루머[9]가 있었으나 함께 연루된 선수들에 비해 이전의 사건으로 나빠진 이미지로 팬들은 덤덤.

8.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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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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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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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KBO 리그 득점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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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2012)

4월 한 달간의 성적은 타율 0.210 13안타 7타점 7도루 13볼넷. 이용규답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2011년에 많은 공을 보면서 하던 소위 용큐놀이도 되지 않았고 출루도 적어진 탓에 톱타자로서의 역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KIA 타선이 저조한 마당에 톱타자의 부진까지 겹쳐져서 극도의 빈타의 원흉이 돼버렸다. 체력 부진으로 저조해졌던 2011 시즌 후반기의 여파가 미친 게 아닌가라는 분석도 있었다.

결국 5월 5일 넥센전에서는 7번 타순으로 내려가는 굴욕까지 겪였지만 이 날도 4타수 무안타로 부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7번 타순 강등 이후로 슬슬 살아나기 시작. 이후 네 경기에서 타율 5할에 6개의 도루를 기록했고 1할까지 떨어졌던 타율도 2할대로 다시 진입했다. 5월 11일까지 12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1위를 기록.

5월 27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6차전에서 팀이 3:6으로 이기고 있던 8회말, 이상열의 공에 맞고 1루로 출루한 후 이어서 견제구가 폭투로 1루수의 글러브를 빠져나가자 홈으로 질주, 1득점을 추가하며 재치있는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KIA 팬들은 몸에 맞는 홈런이 나왔다며 즐거워했다.

6월 24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9차전에서 팀이 1:0으로 지고 있던 8회말, 1사 2루 2볼 상황에서 이재영의 몸쪽 공에 발등을 맞았다. 다행히 다시 일어나긴 했으나, 가뜩이나 팀이 부상으로 시달리는 상황이라 많은 KIA 팬들이 걱정하였다. 이후 여전히 양 팀에서 추가 점수는 나지 않았고, 9회말 1사 만루 상황에서 윤완주의 동점타로 1점을 얻은 이후 타석에 들어섰다. 이후 유격수 쪽 땅볼을 치면서 허무하게 찬스를 날리나 싶었으나...[10] 최윤석이 실책을 저지르며 1점을 내주며 팀에 기묘한 승리를 안겨 주었다. 이후 끝내기 세레모니에서 까칠한 표정과 함께 물세례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며 논란이 되기도 하였으나, 타구 질이 좋지 않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겼다고 무작정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7월 4일 무등 야구장 두산 베어스전에서 8회말 결승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팀은 1:0으로 승리했다. 이 날 인터뷰에서 "이번 경기는 무조건 이겨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밝혔다.

7월 18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더스틴 니퍼트를 상대로 1회말 선두타자 홈런을 때려냈다. 팀은 4:7로 강우콜드 승리.

7월 26일경 왼쪽 넷째 손가락을 다쳤음에도 계속 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부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셈. 부상투혼에 박수를 보내는 이들도 있지만, FA를 앞두고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니냐며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9월 21일 맹장 충수염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본인은 다음날 바로 경기에 임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11] 선동열 감독의 지시로 당분간은 휴식을 취했다. #

2012 시즌 최다득점(86득점) 최다도루(44도루) 타이틀을 획득했다. 성적은 약간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얘기가 있었지만 타이틀에 힘입었는지,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0. 2013 시즌

시즌 초 몇 경기동안 타율이 상당히 낮았다. 출루는 볼넷으로 어찌저찌 나가고는 있는데 안타가 없다. 그래도 김주찬 효과가 있는지 나가면 어찌저찌 홈으로는 들어오고 있다.

4월 4일 안타 세개, 4월 5일 하나를 기록하며 페이스가 조금씩 올라오는 듯 보인다. 4월 5일 롯데전에서 개인 통산 1,000안타 달성. 약간 부진한 클린업트리오를 대신해서 김선빈-이용규- 신종길을 클린업세터로 부르는 이들도 생겨났다.

4월 30일 잠실야구장 두산 베어스전에서 2회초 원바운드 공을 건드려 아웃되거나 9회말 손시헌의 타구를 놓치는 등 온갖 삽질을 하며 욕을 먹었다.

5월 이후로도 썩 못미더운 플레이로 욕을 먹었다. 급기야 1번 타자로 나와서 맨날 아웃카운트만 올리고 들어간다며 "원아웃"이라는 별명까지 돌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팬들이 먼저 붙여준 게 아니라, 선수들이 먼저 부르던 별명이 팬들에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실상 이용규-김주찬 테이블세터면 천하를 휘저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둘이 함께 붙어다닌 게 얼마 되지 않는 데다가 이용규 자신도 썩 좋지가 못한 상황이다. 본래 슬로우스타터라서 날이 풀리면 잘할거다라는 말과는 달리 6월이 넘도록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FA를 맞게 되었는데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KIA 구단이나 이용규나 FA 협상이 매우 골치아플 듯. KIA가 50억으로 김주찬을 베팅해 데려온 이상 이용규도 그 정도나 그 이상은 줘야 잔류한다는 결론인데, 지금의 성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50억 이상을 배팅한다면 여론이 달가워하지는 않을 듯하다. 물론 타격폼 수정했다가 폭망해서 원래 타격폼으로 회귀해서 회복된 2010년 시즌의 경험도 있는만큼 아직은 두고볼일이지만.

6월 13일 330일만에 2점 홈런을 기록하였다. 팀이 7연승을 달리면서 조금씩 살아나는 모양새.

6월 19일 한화전에선 6타수 4안타를 몰아치며 AGAIN 2010이 되어감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타석도 안타성 타구를 때려냈지만 김경언이 잡아내며 5안타는 실패.

6월 30일 무릎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대신 이준호가 1군에 등록되었다.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에 복귀 예정이었지만, 몸상태가 빨리 올라왔는지 7월 12일 1군으로 콜업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수비를 할 몸 상태가 아니라 지명타자로 출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지완이 외야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9월 초, 결국 어깨 회전근을 수술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술 시 재활 기간은 최소 6~8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고.

결국 올 시즌 최종 성적은 100경기 390타수 115안타 2홈런 22타점 74득점 21도루 타율 0.295.

11. 1차 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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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용규+ 홍현우 이원식+ 소소경 [2] 이용규 본인은 고향 서울을 떠나 아버지 고향 팀으로 오게 되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부친은 광주가 아닌 군산 출신이지만 군산도 KIA 연고지에 속하긴 하니 부친 고향팀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긴 하다. [3] 그런데 이 트레이드를 추진한 이유가 아주 가관인데 바로 "2군에 던질 투수가 없어서"였다. 말그대로 최악의 트레이드. [4] 박동희에 이순철과의 인터뷰 참고 [5] 이 당시 타구를 강하게 보내는 타격폼을 추구하며 LG 코칭스태프들과 마찰이 있었다는게 뒤늦게 알려졌다. 정확히는 LG 코칭스태프가 공을 멀리 보내는 것을 주문했다면 이용규는 공을 빠르게 보내는 것을 추구했다고 했다. [6] 이용규가 스톡킹에서 밝히길 그 전 두산과의 개막 2연전에서 농군패션 한다 그래가지고 바로 쥐가 나는 바람에 타구를 놓쳐 역전패한 것이 걸려서 무리하게 타구를 잡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파이크가 펜스에 박히는 바람에 발목이 돌아가버려 골절이 된 것이라고 한다. [7] 부상당한지 한 달 뒤에 간신히 깁스는 풀었으나 이후 재활까지 2개월이 소요됐었다. [8] 2008년 장원삼 정원석을 상대로 던진 17구가 종전의 기록. [9] 부산에서의 국가대표 평가전 후에 봉중근, 류현진, 이용규가 여성들과 어울려 술마시고 숙소까지 데려갔다는 주장이 KBO 게시판에 올라왔다. 실명제인 KBO 게시판에 올라와서 신빙성있다는 측과 증거가 없고, 기사화되지 않았기에 신빙성이 없는 루머라고 하는 측이 엇갈린다. [10] 그러나 타구질로 봤을 때 병살이 될 타구는 아니었다. 실책이 없었더라도 2사 만루 상황이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11] 무엇보다도 도루 2위 서건창이 1위 이용규를 바짝 쫓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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